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10장 24절부터 33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고난을 받게 될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말고 복음 전파를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본문의 강해와 주석과 해설을 요약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4절-33절,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
24절, 강해 주석 해설
제자가 그 선생보다
이 어구는 그당시 유행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의미는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분명하다. 사실 제자가 선생 이상의 지식을 얻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제자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사제지간(師弟之間)의 도리는 불변하며 제자들은 항상 그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선생인 자신이 온갖 욕설과 핍박을 받는다면 적어도 너희는 더 큰 핍박을 각오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냐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본문의 이 격언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자는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전혀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종이 그 상전보다
이 말은 앞의 문구와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서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격언의 말씀을 통해서 윗사람이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면 그 아랫 사람은 두말할나위 없다는 점을 강조하심으로써 자신이 당한 고난을 제자들도 똑같이 당했으면 당했지 결코 더 나은 대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25절, 강해 주석 해설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본문의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서 이 부분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난이라는 차원에서 당신과 동일한 운명에 처해 있음을 역설하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선생이 받는 박해와 고난 보다는 제자나 종이 받는 고통이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을 것이므로, 따라서 선생의 고통만큼만 되어도 만족할 것이었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부은 적이 있다(12:24). 예수는 이들의 빈정거리는 어투을 역이용(逆利用)하셔서 자신을 집 주인으로 또 제자들을 그 집 사람으로 비유하시면서, 집 주인을 ‘바알세불’로 비난한 그들이 제자들은 더욱 더럽고 악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 사탄에 해당되는 명칭인데(12:24-27, 막 3:22-26, 눅 11:18, 19) 다른 곳에는 바알세붑(왕하 1:2, 3, 6)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 말의 어원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흔히 이방 에그론의 신인(왕하 1:16) ‘파리대왕’이란 뜻을 가진 구약의 ‘바알세붑’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똥의 왕’ 또는 ‘교만의 왕’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혹자는(E.C.B. McLaurin) 이말이 ‘집의 왕’(head of the house)을 뜻하는 헬라어 ‘오이코데스포테스’을 직역한 것으로도 본다. 여하튼 예수를 ‘바알세불’이라고 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주관하는 집 주인을 고의적으로 마귀 집안의 우두머리로 전락(fall)시킨 것으로서 이는 참으로 괘씸한 신성 모독의 범죄였던 것이다. 선생이 이 정도의 모욕을 받았다면 하물며 그 제자는 과연 어떤 욕을 당하게 될 것인가?
26절, 강해 주석 해설
그런즉
이 접속사는 앞의 내용에 대한 결과절을 유도(guiding out)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승이 핍박받는다면 제자들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므로 두려워 말라는 뜻으로 다음의 어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접속사는 앞 어구와는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문장을 도입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다음 어구의 이유, 즉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숨은 것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저희를
이것은 접속사 ‘그런즉’이란 말의 의미와 관계없이 핍박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제자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말씀으로서 세번씩이나(26, 28, 31절) 강조되어 있다. 이는 완전한 보호와 위로에의 약속인 동시에 제자들의 험난한 핍박이 필연(必然)적인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예수께서 이러한 분부를 하신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즉 박해자들이 설령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죽일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 하여도 그들은 결코 제자들의 영혼까지는 좌우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고 또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어떠한 핍박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불신의 세계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가서 그들을 정복해야 한다. 한편 두려움이란 것은 사탄이 신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준비해 둔 무기들 중의 하나로서 사탄은 언제나 신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한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먼저 ‘드러나다’란 뜻의 헬라어 ‘아포칼류토’은 원래 ‘벌거 벗기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깊이 숨겨둔 인간의 가장 수치스런 죄악까지도 낱낱이 파헤치실 것을 암시한다. 한편 본문의 이 어구는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흔히 통용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막 4:22, 눅 8:17, 12:2). 즉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신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격언을 통해서 제자들을 격려하시면서 설령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물러서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제자들의 무죄함을 입증시켜주실 것이고 또 진실을 밝혀주실 것임을 설명하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전 12:14, 롬 2:6, 골 3:3, 4, 계 20:12, 13).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이 말 역시 앞 어구와 대구를 이루는 동일한 표현이다. 주님의 이 격언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언제인가는 이해될 것이고 또 그들이 당한 고난 역시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확신하에서 기꺼이 멸시 천대를 받았고 또 핍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27절, 강해 주석 해설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
이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주의 계시(revelation)의 발전 과정 중 그 시초에 해당하는 묘사이다. 한편 이것은 신비스러운 이상한 밀의(密意) 교리로 볼 수는 없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아무도 모르게 깨닫게 된 그리스도의 진리, 즉 주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에 우선하여 제자들에게만 비유와 같은 숨겨진 말로 가르치신 비밀스러운 교훈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은 제자들이 이를 전파하기까지는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광명한 데서 말하며
예수로부터 사적인 교육이나 은거(隱居)된 언어로 전해받은 것을 아무런 두려움없이 공개적으로 온 세상에 충만하게 선포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귓속으로 듣는 것을
유대 율법 학자들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할 때 가운데 통역자를 두어 그를 통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통역자의 귀에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속삭이듯이 전달했으며, 이 통역자는 히브리어로 율법에 대해 들은 설명을 대중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큰 소리로 외쳤는데, 우리 주 예수께서도 이미 관례화되어 있던 이러한 방법을 따라 은밀한 방법으로 전달된 진리를 제자들로 하여금 전 세계에 전파하고자 하셨던 것이 분명하다(Lightfoot, ‘Hor. Hebr.’ 4:23, Talmud. Bab., ‘Berach’., 22a).
집 위에서 전파하라
유대의 집 지붕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평평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바람을 쏘이거나 기도 또는 묵상 등을 하는데 이용했다(행 10:9). 이사야는 모압에 대한 심판의 에언을 하면서 모압 사람들이 지붕위에서 통곡하리라고 하였으며(사 15:3), 예레미야는 유다와 이스라엘 자손이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였음을 지적하였다(렘 32:29). 그리고 회당의 관리는 안식일 전날 밤에는 안식일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신호로서 대단히 높은 집의 지붕 위에서 나팔을 여섯번 불었는데, 예수께서는 아마도 이 같은 안식일 준비 나팔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이 명령을 하셨던 것같다(Lightfoot). 여기서 잠시, 안식일 준비를 알리는 6번의 나팔 중에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나팔은 밭일을 중단하라는 신호이며, 두 번째 나팔은 성(城) 중에서의 작업을 멈추라는 것이고, 그리고 세 번째 나팔은 안식일 촛불을 켜라는 신호였다. 여하튼 본문을 살필 때 제자들은 예수보다 더 광범위한 공중(公衆) 전도의 책임을 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예수는 제자들로부터 먼저 은밀히 개인적으로 가르쳐야만 했는데,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전까지만해도 그 가르침의 대부분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요 16:12-15). 그러나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마치 봇물이 터진 저수지처럼 강력한 음성과 몸짓으로 공개적인 선포 사역에 주력하게 되었다.
28절, 강해 주석 해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
상당수의 학자들이 인간에게는 육체(肉體)와 영혼(靈魂) 두 요소가 있는데, 핍박자들은 육체를 죽일 수는 있지만 불멸(不滅)하는 영혼만은 멸할 수 없다고 해석하고 있다. 과연 성경은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이 육체와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가 다 흙으로 돌아가며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전 9:5, 시 6:5, 104:29, 115:17, 욥 14:10-12, 겔 18:4). 시편은 “주께서 그들의 호흡(히, 루아흐)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9)라고 말한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는 말씀은 마치 죽은 후에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 같지만 여기서 ‘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 라는 말도 별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나라 “호흡” “바람”이라는 뜻이다.
‘루아흐’는 구약에 377번 나타나는데 대부분 ‘바람, 호흡, 영’ 등으로 번역된다. 시편 104:29의 “호흡”과 전도서 12:7의 “영”이란 말의 히브리어 원어가 똑같이 ‘루아흐’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그 호흡이 끊어져서 호흡을 주신 분인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따라서 영혼이라고 번역된 구약의 ‘루아흐’는 존재하는 인간 전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불멸하는 어떤 물질이 아니다. 에스겔 18:4에는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되어 있다.
신약에서 “영” 또는 “영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프쉬케’나 ‘프뉴마’인데 ‘프뉴마’ 역시 “바람” 또는 “호흡”이라는 뜻이 있다. 구약의 ‘루아흐’와 같은 의미이다. “영혼(호흡)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 2:26의 말씀도 같은 뜻이다.
‘프쉬케’는 신약에 40번 쓰였는데 “호흡”이나 “목숨” 혹은 “생명”의 뜻으로 쓰였으며(마 2:20, 6:25, 16:25). 단순히 사람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행 7:14, 26:37). 때로는 대명사로 쓰이며(마 12:18, 고후 12:15), 감정이나(막 14:34, 눅 2:35) 정신 혹은 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행 14:2, 빌 1:27). 신약 어디에도 ‘프뉴마’나 ‘프쉬케’를 육체와 독립하여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따라서 본 절에서의 영혼도 사람의 육체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어떤 영적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와 비교되는 지적이고 영적인 부분, 즉 정신적 부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라는 말은 핍박자들이 육체는 고통을 주고 죽일 수 있어도 마음과 정신까지 멸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존재 전체를 멸하시는 심판이다. 그 앞에서는 육체뿐만 아니라 어떤 마음이나 정신도 숨길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두려운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이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탈피하라’는 뜻으로 단 한 순간의 공포마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미를 품고 있다. 실로 사람 전체를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Bengel). 일찍이 베드로는 의를 위한 고난은 두려워하지 말고 진리를 전파함에 있어서는 두려움을 가질 것을 당부한 바가 있다(벧전 3:14, 15). 인간이란 고난이나 죽음을 앞두고 그것을 예견할 때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님 한 분만을 생각하고 그분 만을 두려워할 때, 또 영원한 생명과 의를 생각할 때, 이 같은 두려움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옥[헬, 게엔나]
지옥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영원한 지옥 불이 타고 있어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는 곳이 아니다. 신약에서 지옥은 ‘하데스’ 혹은 ‘게엔나’라고 하는데 구약의 ‘스올’과 마찬가지로 무덤을 의미한다. ‘게엔나’는 신약에 12번 나타나는데 마지막 때 불타오르는 심판의 장소를 말하고 있다(마 5:22, 29, 30, 10:28, 18:19, 23:33, 막 9:45-47).
두려워하라
이는 앞의 ‘두려움’과는 달리 습관적으로 항상 두려워하라는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을 언제나 두려워하는 자에게 세상은 더 이상의 두려움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정녕 여호와를 두려워(경외)하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예비하는 참지혜가 아니겠는가? (잠 9:10)
29절, 강해 주석 해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이는 단적으로 말해서 약간의 푼돈에 두 개의 생명이 팔릴만큼 가치가 없는 생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여기서 ‘앗사리온’이란 로마의 화폐 단위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의 1/16의 가치를 가진 적은 돈이다. 그리고 랍비들의 문헌에도 이 앗사리온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아이사르), 이때 이 금액의 가치는 네 개의 은(銀) 알맹이에 해당되며, 최저의 금액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Clarke).
참새(스트루디아)
새의 종류를 가리키기보다 일반적으로 매우 작은 새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하튼 이것은 아주 작고 또 매우 흔해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새로, 가난한 유대인들의 식량이 되기도 하였고 또 슬픔과 고독의 상징(symbol)이기도 하였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매매되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값싼 것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참새와 같은 몇몇 조류들이 예루살렘과 욥바 등지의 시장에서 빈번히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너희 아버지께서
이는 매우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표현이다. 즉 예수는 우주만물(宇宙萬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바로 ‘너희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6:26).
허락지 아니하시면(아뉴)
이는 적극적으로 참새를 죽지 않게 했다는 의미보다 하나님께서 참새의 생존과 죽음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깊숙히 관여하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인 참새가 붙잡히고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와 하나님의 허락하에 하나님이 지정하는 곳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즉 모든 문제는 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같은 사실은 시련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보살핌과 자비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것에 대해서도 창조주로서 그들을 지키시는 것이다.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이는 사냥군의 화살이나 돌팔매에 의해 땅바닥으로 추락(墜落)하는 돌발적인 죽음을 의미한다(F.R. Fay). 혹자는(Chrysostom, Origen) 이를 사냥군의 올무에 걸리는 상황으로 이해하나 적절한 해석이라 볼 수 없다. 한편 누가는 이 상황을 새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의 잊어버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하찮은 생명체에 대한 하나님의 집요하고도 자상한 배려를 더욱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눅 12:6).
30절, 강해 주석 해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예수께서는 앞의 ‘참새’와 대조적으로 ‘너희’를 강조하심으로 그 보살핌의 강도(强度)를 더욱 깊게 하셨다. 한편 ‘세신 바 되었나니’(에리드 메메나이 에이신)란 분사형태의 완료 수동형을 취하고 있는 관계로 ‘이미 옛날부터 셈을 하신바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 관심의 시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으로 그 때부터 우리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머리털은 너무나 숫자가 많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루 평균 약 50개 정도의 머리카락이 빠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러한 일까지도 세밀히 관찰하시며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섭리(攝理)는 들에 피었다 지는 들꽃과 공중에 나는 보잘것없는 새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극히 사소한 문제와 보이지 않는 일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켜 보호하심을 극명(克明)하게 드러내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31절, 강해 주석 해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은 이곳에서 세 번째 언급되고 있다. 첫 번째는 모든 진리가 드러나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 또 두 번째는 박해자들이 아무리 성도를 괴롭힌다고 하여도 그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또 우리의 몸은 일시적이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로 언급된 이 말씀은 앞의 두개의 내용보다 더 고무(鼓舞)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긔까지 다 세시고 간섭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려움의 불필요성을 언급하신 것이다.
많은 참새보다
한 앗사리온에 둘씩 팔리는 참새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감찰하시거늘 어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시겠는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와 생명을 주고 구속하신 한 심령의 가치를 감히 어느 누가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고통이 오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멸망 중에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며 설령 핍박 중에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과 의(義)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사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죽음까지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32절, 강해 주석 해설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여기서 ‘나를 시인하면’ (호몰로게세이 엔 에모이)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시인하면’으로 예수와 연합된 상태에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시인하면’이란 말은 오히려(신앙을) ‘고백하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자신이 예수와 생명적 연합을(갈 2:20) 이룬 존재로서 예수 그분이 바로 자신의(主)이심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고백하는 것이란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시 66:16). 이는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단적인 표시이다. 다시 말해서 설사 마음으로 예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영(靈)을 받고 또 그의 교훈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생활로 표현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주(主)로 시인하는 올바른 마음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7:21) 사람 앞에서도 그와 같이 고백하는 담대한 용기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먼저 ‘하늘에 계시 내아버지’란 성부 하나님의 초월적 권위와 무궁한 사랑을 암시한 표현인 동시에 성자 예수와의 지극한 친밀감을 나타내준다. 그리고 ‘아버지앞’이란 모든 인간으 종말적 귀결(conclusion)지점, 곧 심판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자이심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셨으며(요 5:22), 바울은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 하였다(고후 5:10).
저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是認)하면 주께서는 심판날에 우리를 그와 똑같이 시인해 주실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시인하신다는 것은 그를 당신의 사람으로 인정하며, 그의 충성을 기쁘게 여기고(25:34-36, 40, 계 2:10), 또한 그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中保)의 간구를 아끼지 않으신다는 의미인 것이다(히 7:25).
33절, 강해 주석 해설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사람앞에서 주를 부인한다는 말씀은, 곧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솔직히 인정치 않고, 그분을 주(主)로 여기지 않으며,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 배척하는 것을 뜻한다. 그결과 하나님께 지켜야 할 약속과 의무보다 세속적인 관심과 이익을 더 중시하게 되며 하늘의 신령한 것보다는 지상의 일시적인 가치를 더 중히 여기고 하나님과의 영교(靈交)를 단절한 채 세속적 인간 관계를 더 좋아하게 된다. 한편 이것은 베드로와 같은 순간적인 부인(否認)이 아니라(26:69-75) 전생애와 전인격을 통해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이러한 차이를 명확히 판가름하실 것이다(Homer A. Kent, Jr.).
저를 부인하리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메시아로 인정치 않은 자들은 마지막 심판날, 심판장이시며 대속자이신 만유의 주로부터 부인당하고 버림받게 된다(7:23, 딤후 2:12). 왜냐하면 예수를 부인하는것은,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명과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들은 자신의 열매(입술과 행위)를 자신이 거둬들여야 하는 것이다. 실로 현세에서 예수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미래와 운명이 결정된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