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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묵상] 요한복음 11장 17절-27절, 죽음을 깨우는 선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하는 찬송 새 찬송가 171장, 하나님의 독생자 새 찬송가 164장, 예수 부활 했으니 서론: 현대인이 외면한 죽음, 그 차가운 진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 죽음 '은 철저히 격리되고 소외된 단어입니다. 과거에는 집 마당에서 가족들의 손을 잡고 마지막을 맞이했다면, 이제 죽음은 병원의 하얀 벽과 기계 소리 가득한 중환자실, 그리고 차가운 장례식장 지하실로 숨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통계'처럼 취급하거나, 의학의 발달로 언제든 미룰 수 있는 '정복 대상'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우리 삶에서 보이지 않게 될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 기괴한 방식으로 우리를 짓누릅니다. 누군가는 죽음을 '완전한 소멸'로 보며 허무주의에 빠지고, 누군가는 죽음 이후의 불확실성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쾌락에만 매몰됩니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뒤 마주하는 ' 슬픔과 고통 '의 시간 중에 우리는 가장 깊은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조금만 더 일찍 병원에 갔더라면",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는 현대인의 마음속에 거대한 상처와 구멍을 내기도 합니다. 본론: 절망의 자리에 임한 생명의 주 오늘 본문의 마르다 역시 이 현대적인 절망과 맞닿아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 유대인들의 관점으로 보면 영혼마저 몸을 완전히 떠나버린 '절대적 끝'의 시점입니다. 현대 의학이 사망 선고를 내리고 장례 절차가 끝난 것과 다름없는 이 절망의 현장에서, 우리는 "이미 늦었다"는 체념과 마주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도 이미 ' 마감 기한 '이 지나버려 악취가 나기 시작한 꿈이나 관계, 혹은 영적인 생명력이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주님은 그 차가운 무덤가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1. "만약에"라는 과거의 감...

[3월 6일 묵상] 요한복음 11장 1절-16절,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나의 하나님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하는 찬송 새 찬송가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새 찬송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서론: 기다림이 사라진 시대, 하나님의 '읽씹'? 현대인의 인스탄트식 사랑은 모든 것을 '즉시'와 '속도'로 평가하곤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상대가 원하는 것을 바로 들어주고, 메시지를 보내면 1분 안에 답장이 와야 하며, 배달 음식조차 도착 예정 시간을 넘기면 사랑의 온도가 식었다고 오해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인스탄트 공식'을 대입합니다. "주님, 내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사랑을 고백하는데, 왜 내 삶의 문제는 '배송 지연' 상태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가족이었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급보를 보냈을 때, 그들은 당연히 주님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오실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절박할 때 느껴지는 하나님의 침묵은 마치 우리의 기도를 '읽고 무시하는(읽씹)' 냉담함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여러분, 혹시 오늘 새벽 "새벽 배송보다 늦은 하나님의 응답" 때문에 상처받은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계시지는 않습니까? "남들은 다 잘 풀리는 것 같은데, 왜 내 인생의 골든타임만 속절없이 흘러가는가"라는 박탈감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알려줍니다. 주님은 사랑하지 않아서 늦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기다림'이라는 선물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론: 위기를 영광으로 바꾸는 세 가지 하늘 원리 1.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리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5절과 6절에는, 어쩌면 답답하게 느껴지는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ㄱ절과 6절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11:5-6, ...

[3월 5일 묵상] 요한복음 10장 22절-42절, 목자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습니까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하는 찬송 새 찬송가 452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새 찬송가 397장, 주 사랑 안에 살면 서론: 누구의 말을 듣고 계십니까? 우리는 삶 속에서 경험을 통하여 “ 좋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의 말을 듣는다 ”라는 말 속에서 지혜를 배웁니다. 아무리 달콤하고 유익한 정보라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그것은 사기가 됩니다. 그러나, 투박하고 거친 조언이라도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 전하면 그것은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인간관계의 핵심은 '메시지의 화려함'이 아니라 ' 메신저와의 관계 '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인 수전절, 즉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에워싸고 묻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밝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은 지금 ‘좋은 말(메시아 선언)’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단호합니다. “ 내가 이미 말하였으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인정하지 않는 관계의 결핍에 있었습니다. 본론 : 목자의 음성, 그리고 안전한 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주의 전을 찾았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공하는 법’이라는 좋은 정보를 얻으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들으러 오셨습니까? 분주한 출근길 지하철 소음, 어제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몸, 그리고 오늘 처리해야 할 수많은 일과 속에서 우리 영혼이 진정으로 반응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오늘 이 새벽, 나를 가장 잘 아시는 그 ‘좋은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믿음은 목자와의 관계에서 들려오는 음성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표적'과 '명확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를 지적 수준이나 증거의 유무에서 찾지 않으십니다. ...

[3월 4일 묵상] 요한복음 10장 1절-21절, 안심하라, 나는 너의 이름을 아는 선한 목자다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하는 찬송 새 찬송가 569장,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새 찬송가 297장, 양 아흔아홉 마리는 서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의 무게 여러분, 학창 시절 교실의 풍경을 잠시 떠올려 보십시오. 1교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 선생님께서 두툼한 출석부를 펼치실 때의 그 묘한 긴장감을 기억하시나요? 어떤 선생님은 무심하게 번호를 부르기도 합니다. “1번, 2번, 15번...” 그때 우리는 그저 60여 명의 반 속에 포함된 한 조각, 하나의 번호가 된 기분을 느낍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항상 출석부에서 눈을 떼어 우리 한 명 한 명의 눈을 맞추며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OO야, 오늘 컨디션은 어떠니? OO야, 어제 감기 기운이 있다더니 좀 괜찮니?” 따뜻하게 이름이 불린다는 것,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이며,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내 삶의 형편과 아픔, 그리고 기쁨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실적과 점수, 그리고 재산이나 영향력으로 분류하며, 큰 힘이 없어 보이면 단순히 ‘숫자’로만 평가하곤 합니다. 혹은, 내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처럼 우리를 대하곤 합니다. 본론 : 목자의 음성, 생명의 문 그리고 희생의 사랑 하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선언을 하십니다. “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3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새벽,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단순히 종교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소음 속에서 나를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시는 그 따뜻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인생의 문을 열어주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목자는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보다 앞서 행하십니다. 본문 3절과 4절은 목자와 양의 관계...

[3월 3일 묵상] 요한복음 9장 24절-41절, 내가 아는 한 가지, "맹인이었으나 이제는 보나이다"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하는 찬송 새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새 찬송가 524장,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서론: 계급의 사다리와 영적 소경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계급의 사다리'로 촘촘히 엮여 있습니다. 연봉의 액수, 아파트의 브랜드, 자녀의 성적, 그리고 직장에서의 직급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서열을 나눕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더 넓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기를 갈망합니다. 왜냐하면,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더 많이 알고, 더 정확히 보며, 더 정답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충격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당신이 보고 있다고 믿는 그 높은 곳의 시선이, 혹시 가장 중요한 진리를 가리는 안대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본론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당시 사회의 최상위 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지식의 정점에 서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반면,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는 사회적 계급의 가장 밑바닥, 즉 구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철저한 소외 계층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흔히 높은 직함과 화려한 배경을 가진 이들의 말을 진리로 여기지만, 정작 삶의 밑바닥에서 주님을 대면한 이의 투박한 고백이 진짜 인생의 답일 때가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지위라는 안경으로 예수를 정죄하려 하지만, 맹인이었던 자는 오직 빛으로 오신 예수만을 증언합니다. 오늘 이 새벽, 우리가 붙들고 있는 '세상의 안경'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참된 빛 앞에 서기를 소망합니다. 1. 경험된 복음은 세상의 권위를 압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금 맹인이었던 자를 불러 심문합니다. 그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절)며 지식적 권위로 예수를 낙인찍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흔들리지 않고 답합니다. 25절을 우리 함께...

[3월 2일 묵상] 요한복음 9장 13절-23절, 안식일의 주인인가, 전통의 노예인가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하는 찬송 새 찬송가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새 찬송가 359장,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서론: ‘원래 그래왔다’는 전통의 감옥 우리 사회에는 ‘전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아래 대물림되는 부정적인 관습들이 참 많습니다. 대학가의 가혹한 신고식, 직장의 경직된 서열 문화, 혹은 "우리 때는 다 그랬어"라며 불합리함을 정당화하는 태도들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전통의 특징은 ‘사람’보다 ‘형식’을, ‘생명’보다 ‘질서’를 우선한다는 점입니다. "원래 그래왔다"는 한마디는 모든 합리적인 의심과 변화의 노력을 잠재워 버립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개개인의 고통은 무시되고, 살아있는 혁신은 숨을 죽입니다. 본론 이러한 현상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전통’이라는 견고한 매뉴얼에 갇혀 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가 눈을 떴다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경이로운 생명의 사건이 눈앞에 펼쳐졌음에도 그들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식일에 진흙을 이겼으니 그는 죄인이다"라며 정죄의 칼날을 휘두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 인간의 근본적인 연약함 '인 영적 맹목과 고집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만의 ‘ 영적 매뉴얼 ’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서 그 틀 밖에서 일하실 때 오히려 불편해하곤 합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 속에도 "내 신앙 경력으로는 이게 맞아", "우리 교회 방식은 이래야 해"라는 경직된 사고가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새벽, 우리를 가두고 있는 부정적인 전통의 담벼락을 허물고, 참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법(Rule)에 갇혀 생명(Life)을 잃어버린 종교적 소경 바리새인들은 눈을 뜬 사람을 데려다가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기적의 신비가 아니라 '안식일 규정 위반 ...

[3월 1일 묵상] 요한복음 9장 1절-12절, 불행의 원인을 묻는 인생에게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하는 찬송 새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새 찬송가 44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서론: '왜'라는 질문에 갇힌 현대인의 초상 현대인의 가장 큰 고민은 단연 ‘ 불확실성 ’과 그로 인한 ‘ 인과관계에 대한 집착 ’입니다. 우리는 공정한 세상에 산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고난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그 원인을 과거에서 찾으려 애를 씁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병에 걸렸을까?", "우리 아이가 방황하는 건 내가 기도가 부족해서일까?", 혹은 "직장에서의 이 갑작스러운 퇴사가 내 역량 부족 때문일까?"라는 자책 섞인 질문들이 우리를 밤잠 설치게 합니다. 특히 재테크 실패나 자녀 교육 문제, 혹은 갑작스러운 건강 검진 결과 앞에서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며 스스로를 정죄하거나 타인을 원망하는 감정의 굴레에 빠지곤 합니다. 본론: 어둠을 이기고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질문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그들은 "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라고 묻습니다. 고통을 오직 '심판'이나 '인과응보'의 틀로만 해석하려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우리의 이 낡은 질문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으십니다. 1. 과거의 '원인'이 아닌 미래의 '목적'을 선포하십시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3절입니다. 요한복음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주님은 지금 제자들의 시선을 '과거의 죄'에서 '미래의 영광'으로 옮겨놓고 계십니다. 세상은 불행을 보면 과거를 캐묻습니다. 원인을 규명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