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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묵상] 요한복음 10장 22절-42절, 목자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습니까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하는 찬송 새 찬송가 452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새 찬송가 397장, 주 사랑 안에 살면 서론: 누구의 말을 듣고 계십니까? 우리는 삶 속에서 경험을 통하여 “ 좋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의 말을 듣는다 ”라는 말 속에서 지혜를 배웁니다. 아무리 달콤하고 유익한 정보라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그것은 사기가 됩니다. 그러나, 투박하고 거친 조언이라도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 전하면 그것은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인간관계의 핵심은 '메시지의 화려함'이 아니라 ' 메신저와의 관계 '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인 수전절, 즉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에워싸고 묻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밝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은 지금 ‘좋은 말(메시아 선언)’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단호합니다. “ 내가 이미 말하였으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인정하지 않는 관계의 결핍에 있었습니다. 본론 : 목자의 음성, 그리고 안전한 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주의 전을 찾았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공하는 법’이라는 좋은 정보를 얻으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들으러 오셨습니까? 분주한 출근길 지하철 소음, 어제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몸, 그리고 오늘 처리해야 할 수많은 일과 속에서 우리 영혼이 진정으로 반응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오늘 이 새벽, 나를 가장 잘 아시는 그 ‘좋은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믿음은 목자와의 관계에서 들려오는 음성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표적'과 '명확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를 지적 수준이나 증거의 유무에서 찾지 않으십니다. ...

[3월 4일 묵상] 요한복음 10장 1절-21절, 안심하라, 나는 너의 이름을 아는 선한 목자다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하는 찬송 새 찬송가 569장,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새 찬송가 297장, 양 아흔아홉 마리는 서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의 무게 여러분, 학창 시절 교실의 풍경을 잠시 떠올려 보십시오. 1교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 선생님께서 두툼한 출석부를 펼치실 때의 그 묘한 긴장감을 기억하시나요? 어떤 선생님은 무심하게 번호를 부르기도 합니다. “1번, 2번, 15번...” 그때 우리는 그저 60여 명의 반 속에 포함된 한 조각, 하나의 번호가 된 기분을 느낍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항상 출석부에서 눈을 떼어 우리 한 명 한 명의 눈을 맞추며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OO야, 오늘 컨디션은 어떠니? OO야, 어제 감기 기운이 있다더니 좀 괜찮니?” 따뜻하게 이름이 불린다는 것,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이며,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내 삶의 형편과 아픔, 그리고 기쁨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실적과 점수, 그리고 재산이나 영향력으로 분류하며, 큰 힘이 없어 보이면 단순히 ‘숫자’로만 평가하곤 합니다. 혹은, 내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처럼 우리를 대하곤 합니다. 본론 : 목자의 음성, 생명의 문 그리고 희생의 사랑 하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선언을 하십니다. “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3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새벽,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단순히 종교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소음 속에서 나를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시는 그 따뜻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인생의 문을 열어주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목자는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보다 앞서 행하십니다. 본문 3절과 4절은 목자와 양의 관계...

[3월 3일 묵상] 요한복음 9장 24절-41절, 내가 아는 한 가지, "맹인이었으나 이제는 보나이다"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하는 찬송 새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새 찬송가 524장,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서론: 계급의 사다리와 영적 소경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계급의 사다리'로 촘촘히 엮여 있습니다. 연봉의 액수, 아파트의 브랜드, 자녀의 성적, 그리고 직장에서의 직급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서열을 나눕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더 넓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기를 갈망합니다. 왜냐하면,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더 많이 알고, 더 정확히 보며, 더 정답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충격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당신이 보고 있다고 믿는 그 높은 곳의 시선이, 혹시 가장 중요한 진리를 가리는 안대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본론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당시 사회의 최상위 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지식의 정점에 서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반면,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는 사회적 계급의 가장 밑바닥, 즉 구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철저한 소외 계층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흔히 높은 직함과 화려한 배경을 가진 이들의 말을 진리로 여기지만, 정작 삶의 밑바닥에서 주님을 대면한 이의 투박한 고백이 진짜 인생의 답일 때가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지위라는 안경으로 예수를 정죄하려 하지만, 맹인이었던 자는 오직 빛으로 오신 예수만을 증언합니다. 오늘 이 새벽, 우리가 붙들고 있는 '세상의 안경'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참된 빛 앞에 서기를 소망합니다. 1. 경험된 복음은 세상의 권위를 압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금 맹인이었던 자를 불러 심문합니다. 그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절)며 지식적 권위로 예수를 낙인찍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흔들리지 않고 답합니다. 25절을 우리 함께...

[3월 2일 묵상] 요한복음 9장 13절-23절, 안식일의 주인인가, 전통의 노예인가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하는 찬송 새 찬송가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새 찬송가 359장,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서론: ‘원래 그래왔다’는 전통의 감옥 우리 사회에는 ‘전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아래 대물림되는 부정적인 관습들이 참 많습니다. 대학가의 가혹한 신고식, 직장의 경직된 서열 문화, 혹은 "우리 때는 다 그랬어"라며 불합리함을 정당화하는 태도들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전통의 특징은 ‘사람’보다 ‘형식’을, ‘생명’보다 ‘질서’를 우선한다는 점입니다. "원래 그래왔다"는 한마디는 모든 합리적인 의심과 변화의 노력을 잠재워 버립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개개인의 고통은 무시되고, 살아있는 혁신은 숨을 죽입니다. 본론 이러한 현상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전통’이라는 견고한 매뉴얼에 갇혀 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가 눈을 떴다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경이로운 생명의 사건이 눈앞에 펼쳐졌음에도 그들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식일에 진흙을 이겼으니 그는 죄인이다"라며 정죄의 칼날을 휘두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 인간의 근본적인 연약함 '인 영적 맹목과 고집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만의 ‘ 영적 매뉴얼 ’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서 그 틀 밖에서 일하실 때 오히려 불편해하곤 합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 속에도 "내 신앙 경력으로는 이게 맞아", "우리 교회 방식은 이래야 해"라는 경직된 사고가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새벽, 우리를 가두고 있는 부정적인 전통의 담벼락을 허물고, 참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법(Rule)에 갇혀 생명(Life)을 잃어버린 종교적 소경 바리새인들은 눈을 뜬 사람을 데려다가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기적의 신비가 아니라 '안식일 규정 위반 ...

[3월 1일 묵상] 요한복음 9장 1절-12절, 불행의 원인을 묻는 인생에게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하는 찬송 새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새 찬송가 44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서론: '왜'라는 질문에 갇힌 현대인의 초상 현대인의 가장 큰 고민은 단연 ‘ 불확실성 ’과 그로 인한 ‘ 인과관계에 대한 집착 ’입니다. 우리는 공정한 세상에 산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고난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그 원인을 과거에서 찾으려 애를 씁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병에 걸렸을까?", "우리 아이가 방황하는 건 내가 기도가 부족해서일까?", 혹은 "직장에서의 이 갑작스러운 퇴사가 내 역량 부족 때문일까?"라는 자책 섞인 질문들이 우리를 밤잠 설치게 합니다. 특히 재테크 실패나 자녀 교육 문제, 혹은 갑작스러운 건강 검진 결과 앞에서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며 스스로를 정죄하거나 타인을 원망하는 감정의 굴레에 빠지곤 합니다. 본론: 어둠을 이기고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질문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그들은 "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라고 묻습니다. 고통을 오직 '심판'이나 '인과응보'의 틀로만 해석하려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우리의 이 낡은 질문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으십니다. 1. 과거의 '원인'이 아닌 미래의 '목적'을 선포하십시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3절입니다. 요한복음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주님은 지금 제자들의 시선을 '과거의 죄'에서 '미래의 영광'으로 옮겨놓고 계십니다. 세상은 불행을 보면 과거를 캐묻습니다. 원인을 규명해야...

[2월 28일 묵상] 요한복음 8장 42절-59절, 진리의 음성을 듣는 자가 누구인가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새 찬송가 80장, 천지에 있는 이름 중 서론: 떨기나무의 음성이 오늘의 새벽으로 약 3,500년 전, 미디안 광야의 한 모퉁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신비로운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80세의 노인 모세가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라고 답하셨습니다. 이 선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상징하는 선포였습니다. 하지만 그 거룩한 음성을 직접 들었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음성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비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라는 말을 듣거나 혹은 타인들에게 그러한 말을 하곤 합니다. 특히 부부 사이나 부모 자녀 관계에서 같은 한국말을 쓰는데도 도무지 소통이 안 되어 답답함에 가슴을 친 적이 있으실 겁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바로 곁에서 말씀하셔도 그것은 소음이나 비난으로 들릴 뿐입니다. 오늘 이 새벽,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음성을 제대로 '청종'하고 있는지, 아니면 유대인들처럼 내 생각의 틀에 갇혀 진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본론: 진리의 음성을 듣는 자의 정체성 1. 영적 소속은 '말씀을 듣는 귀'로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영적 혈통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지만, 실상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마귀의 특징은 진리에 서지 못하고 자기 것을 ...

[2월 27일 묵상] 요한복음 8장 31절-41절, 진리가 우리에게 주는 진짜 자유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270장,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새 찬송가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서론: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자유'가 강조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며, 내 생각과 취향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된 세상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대인들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무언가에 강하게 묶여 있습니다. 새벽의 정적을 깨고 이 자리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 어제 하루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스마트폰의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시간을 빼앗기는 '도파민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끝없이 치솟는 물가와 대출 이자 앞에서 '경제적 압박의 노예'가 되어 밤잠을 설칩니다. 뿐만 아닙니다. SNS 속 타인의 화려한 일상과 나를 비교하며 열등감에 시달리거나, 직장 상사의 눈치와 주변의 평판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 진정한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외치지만, 정작 내 마음의 평안 하나 내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 아닙니까? 본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화려한 혈통 뒤에 숨겨진 차가운 진실을 들추어내십니다. 그들이 사실은 '죄의 종'이며, 그 죄의 사슬이 그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새벽, 우리를 옥죄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사슬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자유하고 싶다"는 우리의 막연한 갈망이 어떻게 "진리 안에서의 참된 자유"로 바뀔 수 있는지,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1. 진정한 제자는 말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