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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1장 1절-7절, 주께서 넘기셨다 - 주석과 해설 정리

오늘의 매일성경큐티 본문은 다니엘 1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략해서 왕을 비롯하여 일부 사람들을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다니엘의 서론에서는 주께서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다니엘 1장 1절-7절, 주께서 넘기셨다



다니엘 1장 1절-7절, 주께서 넘기셨다



1절, 주석과 해설


유다 왕 여호야김

여호야김 왕은 유다의 18대 왕이었다. 여호야김은 아버지 요시야 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요시야는 기원전 609년 므깃도에서 전사했다. 요시야가 죽은 후, 여호야김의 형제 여호아하스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나 애굽 왕 느고에 의해 폐위되었고, 느고는 야호야김을 유다 왕으로 임명하였다. 여호야김의 본래 이름은 엘리아김이었는데 느고가 그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다(왕하 23:29-34).

여호야김은 기원전 609년부터 598년까지 11 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간 다스리니라”(왕하 23:36)

“여호야김 치세의 초기는 다가오는 파멸에 대한 경고로 가득 찼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여호와의 말씀이 막 성취되려고 하였다. 북방에서 오랫동안 최상권을 가졌던 앗수르인의 권세가 더 이상 열국을 통치하지 못하였다. 유다 왕이 그 세력을 헛되이 의지하고 있던 남방 애굽도 얼마 후에 결정적인 저지를 받았다.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세력 곧 바벨론 제국이 동부에서 일어나 신속히 다른 모든 민족들을 뒤덮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안으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을 회개하지 않는 유다에게 내리는 당신의 분노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었다.” (선지자와 왕, 422)

“여호야김이 예레미야의 권고를 듣고 느부갓네살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어 큰 슬픔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만일 젊은 왕이 바벨론의 통치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약속에 변함없이 충실하였다면 그는 이방인의 존경을 받았을 것이며 이 일은 영혼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귀중한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에게 약속된 귀한 특권을 조소하면서 유다 왕은 고집스럽게도 자신이 택한 길을 따라 갔다.” (선지자와 왕, 437-438)


삼 년이 되는 해

이 때는 느부갓네살 왕이 왕으로 즉위한 원년이며 기원전 606년 가을부터 605년 가을까지의 1 년의 기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똑 같은 해를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의 넷째 해라고 말한다. 성경의 오류인가?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의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렘 25:1)

이 문제는 고대의 치세 계산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임이 현대 고고학의 발견 성과로 확인되었다. 즉 고대 세계에서 왕의 재위년을 계산할 때, 즉위년 방식과 비즉위년 방식이 혼용되었다는 것이다. 즉위년 방식은 왕위에 즉위한 해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제1년으로 하는 방식이고, 비즉위년 방식은 왕위에 즉위한 해부터 제1년으로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바벨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즉위년 방식을 사용했으므로 다니엘서에서는 즉위년 방식이 사용되고 예레미야서에서는 비즉위년 방식이 사용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2절, 주석과 해설


주께서

유대 왕국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당신의 백성을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는 주께서 실수로, 혹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또는 우연히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당하는 일은 없다. 고난은, 특히 주의 백성의 고난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어쩔 수 없는 방법이다(욥 23:10, 시 66:10, 벧전 1:7, 4:12-13).

고난이 없이 구원은 없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이 없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은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게 되면 슬퍼할 것이 아니라,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고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 완전히 희망이 없을 때는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멸망시키신다. 노아 홍수의 멸망,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가속(家屬) 등의 멸망은 그런 종류의 것이다(히 12:6-9).

유대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의 멸망은 결국 악한 왕들과 백성들의 배도의 결과였다. 북방 이스라엘 19왕은 모두 악했으며, 남방 유다도 20왕 중에서 8명만 부분적으로 선했다는 것은 이 결과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이 포로 생활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을 찾게 하고 회복시키시려고 고난을 허락하셨다. 다니엘서는 한 유대 청년 다니엘의 고난을 통하여 탄생하였고,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의 고난을 통하여 탄생하였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

느부갓네살은 분명히 자기 신 마르둑을 섬기는 데 쓰려고 성전 기구 중에 가장 가치 있고 좋은 것을 가져갔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보물을 바벨론 군대가 약탈한 것은 거의 1세기 전에 공표한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였다(사 39:6-7).

그렇다면 법궤는 어떻게 되었는가? 빨리 다가오고 있는 성전 멸망을 예상하고 예루살렘에 있던 몇몇 의인들은 거룩한 법궤를 침략하는 군대의 무자비한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숨기려는 결심을 했다. 다가오는 애굽 군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바벨론 군대가 잠시 마지막 포위 공격을 풀고 있는 당시의 막간은 이 경건한 사람들에게 법궤를 숨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의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십계명이 기록된 돌비가 들어 있는 법궤를 무자비한 자들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 갖다 두기로 결심하고 그 일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슬프고 비통한 마음으로 법궤를 굴속에 감추었다.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그것은 그들에게서 숨겨졌으며 다시 그들이 찾을 수 없었다. 그 법궤는 아직도 숨겨져 있다. 이것은 감춰진 이래 결코 침해를 당하지 아니하였다.” (선지자와 왕, 453)

다니엘서의 시작 부분에 언급된 하나님의 전 그릇들은 단 5장의 벨사살의 잔치의 이야기에 나오며 그 잔치는 바벨론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은 의미심장하다(단 5:1-3). 비록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당신의 백성들을 훈련시키는 채찍으로 사용하셨지만, 바벨론이 분수에 지난 행동을 하므로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게 된다(사 47:1-11).


시날 땅

구약 대부분의 참조문에서 시날은 단순히 바벨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시날”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아직 모호하다. 그러나 창 14:1, 9에서 시날은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한 지역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창 14:1). 그리고 창 11:2, 사 11:11, 슥 5:11과 같이 다니엘서에 언급된 시날은 분명히 바벨론이다. 또한 70인역(LXX,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은 시날 땅을 “바벨론”으로 번역하였다.


자기 신들

바벨론의 주신(主神)은 1,000년도 더 된 제1왕조 때부터 벨(Bel, 주(主))이라고 대중이 부르던 마르둑이었다. 바벨론 중심에 있던 주(主)신전은 에사길라(Esagila)라고 불렸으며, 그 뜰에는 에테메난키(Etemenanki)라는 큰 신전 고탑이 서 있었다.


보물 창고

바벨론 사람들의 설형문자 문서는 자주 마르둑의 큰 신전 에사길라의 보물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 신전 복합건물에 속한 많은 부속 건물들 가운데 이 보물이 소장되어 있던 건물이 어느 것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보물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 사람들의 야망은 세상의 보물을 차지하려는 것이지만 그들이 소유하려는 모든 것은 물론이요 그들의 생명 조차도 결국 사라지는 안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잠 21:6, 약 4:13-4).



3절, 주석과 해설


환관장

환관장은 히브리어로 ‘라브-사리스’이다. ‘라브’는 우두머리(chief, captain)를 가리키며, ‘사리스’라는 말은 거세된 사람 즉 환관(eunuch)을 가리킨다. 환관은 왕의 후궁을 책임 지고 있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성경의 다른 곳을 보면 이 말의 사용 범위가 왕이 신뢰하는 관리를 포함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

B.C. 723/722년 사마리아가 멸망한 이후 북방의 열 지파가 분리된 국가로 존재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유다 왕국은 야곱의 자손 또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대표자로 남았다. 따라서 유수 동안이나 유수 이후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종종 남방 왕국의 대표자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겔 14:1, 17:2, 라 3:1).


왕족과 귀족

B.C. 605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탈취했을 때 그는 유다의 으뜸가는 가문들뿐 아니라 유다의 왕궁에서도 인질들을 잡아갔다. 정복한 대적의 충성을 보증하기 위하여 왕족을 인질로 잡아가는 일은 고대 정복자들의 관행이었다. 그러한 풍습이 애굽의 투트모세 III세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B.C. 15세기에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통치자들의 연합군을 므깃도 전쟁에서 패퇴시킨 후에, 패배한 왕들이 보좌를 유지하도록 허락했으나 각각의 패전국에서 왕자 한 명씩을 애굽으로 데려갔다. 애굽에서 그들은 애굽인들의 생활 방식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팔레스타인이나 수리아에 있는 위성국들의 왕이 죽으면 그 죽은 자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 곧 애굽에서 교육을 받아 바로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공석이 된 왕좌에 앉혔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졌을 때, 그들 가운데는 원칙에 대하여 반석처럼 견고한 젊은 남녀들과 주께서 그들을 그분의 백성이라고 부르기를 부끄럽게 할 노선을 따르지 아니한 남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방지할 수 없는 배교를 보면서 슬퍼하였다. 이 무죄한 자들은 잘못한 자들과 함께 고난을 겪어야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당시를 위하여 필요한 힘을 충분히 주셨다. 격려의 기별이 주어진 것은 바로 그들에게였다. 민족의 희망이 순결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이 젊은 남녀들에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포로 생활에서 이 순종 잘하는 이들은 우상 숭배하는 동료들에게 감화를 끼쳤다.” (원고 151, 1899)



4절, 주석과 해설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고대 동방인들은 신체적인 건전함과 잘생긴 외모가 고위 관리에게는 필수적이라고 간주하였으며, 현대 동방에서도 매우 바람직한 특질로 간주한다.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것이 모든 어머니의 끊임없는 노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자기 자녀들을 건강과 생명을 파괴하는 현대의 악으로부터 보전하기 위하여 주님과 더불어 조화되게 일할 수 있다. 어머니들은 저희 자신을 지체 없이 창조주와 올바른 관계 가운데 두도록 하라. 그리하여야 그들이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방탕과 부절제에 대하여 저희 자식들 주위를 둘러 방파제를 건설할 수 있다. 만일 어머니들이 그러한 노선을 따르기만 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자식들이 젊은 다니엘과 같이 사회에 축복이 되며 창조주께 영광이 되는 도덕적, 지적 높은 표준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식생활과 음식물에 관한 권면, 226)


소년

히브리어 ‘열라딤’. 이 말은 제임스왕역(KJV)에서 “children”(어린이들)으로 번역되었는데, 원어는 “어린이들”(children) 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나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곳에서는 이 말이 “청년”(youth), “젊은 남자들”(young men)을 가리킨다. 르호보암 왕과 함께 자라난 젊은 모사들을 ‘열라딤’이라고 부른다(왕상 12:8에서 개역개정판 성경은 ‘어린 사람’이라고 번역하였지만, NIV성경은 ‘young men’이라고 번역하였음). 그 단어는 거의 모든 영어 성경에서 “young men”(젊은이들)로 번역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단어가 어린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때 다니엘의 나이는 18 세였다(교회증언 4권, 570).


갈대아

이 용어는 한 아람 부족의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초기에 하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했으며, 나보포라살이 신(新)바벨론 왕국을 세웠을 때 메소포타미아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갈대아 땅과 바벨론이라는 지명은 성경에서 교환적으로 사용된다(렘 24:5, 25:12, 겔 1:3).



5절, 주석과 해설


왕의 음식과 포도주

사람의 몸은 골격이나 근육이나 신경조직이나 할 것 없이 그가 먹는 음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는가 하는 것은 그가 어떠한 몸과 정신, 나아가서는 하늘에 적합한 품성을 가지게 될지를 결정해준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시 69:22)

“정신력과 체력은 물론이요 영적 능력이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의 영향으로 손해를 보게 된다. 양심은 마비되고 선한 감화에 대한 감수성은 감소된다.” (식생활과 음식물에 관한 권면, 230)

“다니엘은 오늘날의 청년들에게도 엄습할 수 있는 가장 흑독한 시련을 직면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어린 시절에 받은 신앙적 교훈에 충실하였다. 그는 원칙과 기호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이 넘어지기 쉬운 환경 가운데 있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흠 없는 품성의 소유자로 나타내었다. 다니엘은 감히 자신의 도덕적 능력을 신임하지 않았다. 기도는 그에게 필수요건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았으며 그의 생애의 모든 일을 행할 때에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하였다.” (성화된 생애, 20)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니엘은 너무 까다롭고 편협되고 완고하였다고 단정한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데 대해 그처럼 단호한 주장 즉 모든 세속적인 유익을 희생할 단호한 입장을 취한 데 대해서 그 결과는 너무나 미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추론하는 자들은 심판 날에 그들이 하나님께서 명시하신 요구에서 돌이켜 그들 자신의 의견을 옳고 그름의 표준으로써 내세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신성하게 준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교훈 중의 어떤 것은 행하기에 손쉽기 때문에 받아들여 준행하고, 반면 어떤 것은 그것을 준행하려면 희생을 치뤄야 하므로 거절하는 사람들은 의의 표준을 저하시키며 그들이 끼치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경시하도록 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니’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Fundamentals of Christian Education, 78)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이 말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왕궁의 일을 나타내는 기술적인 용어였다(왕상 10:8, 12:8). 이 말은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에 사용되기도 하였다(신 10:8, 대하 29:11). 우리가 세상의 왕 앞에 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무시하고 타협하게 되면 결국 하늘 왕 앞에는 서지 못하게 될 것이다.



6절, 그들 가운데는


이 말은 그 이름이 언급된 네 명 외에도 훈련을 위해 선발된 다른 청년들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네 명의 삶은 다른 청년들과 다르고 특별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으로 그들은 세상의 명예와 영적 축복에서 큰 상을 얻었다.



7절, 이름을 고쳐


히브리인들에게 이름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름은 자주 그 사람의 출생이나 생애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들을 기념하였다. 또한 이름은 아이의 부모로부터 하나님께 대한 소원이나 축약된 기도가 되기도 하였다. 즉 그들의 신앙이 들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사탄은 그들의 이름을 바꿔 자신의 목적이 성취되기를 희망하였다.

  • 다니엘: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시다. / 벨드사살: 벨(마르둑)이 그의 생명을 보호할 것이다.
  • 하나냐: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 사드락: 월신(月神)을 경배하는 자.
  • 미사엘: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 / 메삭: 포도주의 여신에게 몸 바친 자.
  • 아사랴: 여호와께서 도우셨다. / 아벳느고: 나부(主神 마르둑의 아들)의 종.

“다니엘과 그 동무들의 이름은 갈대아 신들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히브리 부모들이 저희 자녀들에게 주는 이름에는 큰 의미가 있었다. 때때로 이 이름들은 부모가 자기 아이에게서 계발되기를 바라는 성품의 특성을 나타내었다. 사로잡혀 온 청년을 돌보는 책임을 맡은 관원은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다. 왕은 히브리 청년들에게 저희 믿음을 포기하고 우상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지 아니하고 이 일이 서서히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들에게 우상숭배의 의미를 가진 이름을 지어 주고 날마다 우상숭배의 풍습을 가까이 접촉하게 함으로써 이교 예배의 유혹적인 의식의 감화를 받아 그들로 하여금 저희 민족의 신앙을 버리고 바벨론 사람의 예배에 연합케 하고자 했다.” (선지자와 왕, 480-481)

다니엘서에 다니엘이란 이름은 65번 정도 나오며, 벨드사살이란 이름은 10 번 정도 나온다. 벨드사살이란 이름으로 나온 것은 왕이 호칭한 경우와, 다른 경우에는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과 같은 모양으로 나온다. 다니엘은 자신을 다니엘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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