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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11장 1절-19절, 두 왕의 대결 - 매일성경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다니엘 11장 1절부터 19절의 말씀은, 다니엘 시대 이후에 나타날 나라들의 흥망성쇠에 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바사 제국 시대부터 북방 왕의 시대까지 변화무쌍한 강대국들의 권력에 대한 본문의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다니엘 11장 1절-19절, 두 왕의 대결



다니엘 11장 1절-19절, 두 왕의 대결



1절, 주석과 해설


개요

다니엘 11장은 10장의 연속이며 12장도 11장의 연속이기 때문에 모두를 한 단원(單元)으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11장이 기록된 연대도 10장처럼 바사왕 고레스 3년 즉 기원전 535년경이다. 11:1에서 메대 왕 다리오가 나오는 것은 그 때의 일을 회상하는 내용에서이다. 다리오 원년은 기원전 538년으로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던 6장의 사건 때이다.

다리오가 그토록 다니엘에게 깊은 호의를 표명한 것이나 사자굴에서 구원함을 받은 것은 모두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 천사들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11장의 개관

  • 11:2 바사 시대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지상 성소가 겪을 역사.
  • 11:3-13 헬라 통치 시대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지상 성소가 당할 역사.
  • 11:14-30 로마제국 통치 시대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지상 성소가 당할 일들.
  • 11:31-45 교황권이 확립된 중세기로부터 마지막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과 하늘 성소가 겪을 역사.

역사란 쉽게 구획을 지어 자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설킨 실과 같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어 시대와 내용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11장의 역사와 예언도 구속사의 관점에서 서술되어 있으면서 종교적 배경이 정치적 국면과 얽혀 있어 문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같은 사실이라도 중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대 구분이나 해석의 견해 차이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그렇지만 11장의 내용을 계시의 정도를 떠나 엉뚱하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이미 주어진 7장과 8장 9장의 예언을 반복하면서 구체화되고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2절, 주석과 해설


세 왕들이 일어날 것이요

11장은 이 때(고레스 3년) 이미 망한 바벨론은 언급되지 않았으며 즉위 3년째인 고레스를 이어서 세 왕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고레스 다음의 세 왕은 다음과 같다.

  •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530-522 B.C.) - 부친인 고레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예루살렘 중건에 호의적이어서 캄비세스의 통치 기간 동안 성전 재건 사업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 바르디야(Bardiya) 혹은 거짓 스메르디스(False Smeris, 522 B.C.) - 캄비세스는 이집트로 원정하기 전 자기 형제 스메르디스(Smerdis)를 암살했다. 그런데 캄비세스가 이집트에 있는 동안, 본국에서 바르디야가 자기가 스메르디스(Smerdis)라고 사칭(詐稱)하고 왕위에 올랐다. 캄비세스는 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집트에서 돌아오던 도중에 죽었다. 그러나 7 개월 만에 다리오가 주동이 된 세력에 의해 쫓겨났다.
  • 다리우스 1세(Darius I Hystaspes, 522-486 B.C.) - 거짓 스메르디스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그의 재위 2년에 제2차 성전 중건령을 내렸다(라 6:1-12). 헬라를 정복하려다가 마라돈 전쟁에서 패하였다.


넷째는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며

부요한 네 번째 왕은 크세르크세스(Xerxes, 486-465 B.C.)이다. 그는 다리우스 1세의 아들로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수에로(더 2:16-17)이다. 부왕이 실패한 헬라 정복에 나서 25만의 군대로 헬라를 침공했으나, 살라미스(Salamis) 해전에서 패하였다(480 B.C.). 이 왕은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는 자기 부를 자랑할 정도로 부요한 왕이었다(더 1:4).

특히 그는 헬라와의 전쟁을 위하여 여러 나라의 용병을 사용하였다. 전쟁을 돈으로 한 것이다. 헬라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아하수에로에게 군대를 보낸 민족이 40 개 민족이었다고 한다. 아하수에로의 아들인 아닥사스다 왕 때에 제3차 중건령이 내려(라 7:7), 바사를 통한 하나님의 마지막 섭리를 성취시켰다.그 후 바사의 국운은 쇠하기 시작하여 몇 명의 왕이 더 계속된 후에 마침내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에게 정복당하였다.



3절, 주석과 해설


한 능력 있는 왕

알렉산더를 가리킨다. 알렉산더에 대하여는 단 7:6과 단 8:5의 주석을 참고하라.



4절, 주석과 해설


그가 강성할 때에

비슷한 표현이 단 8:8에도 나온다. “숫염소가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 가더니 강성할 때에 그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더라”(단 8:8)

알렉산더가 강성한 중에 갑자기 죽을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는 큰 권세로 인도의 인더스 강까지 정복하고 돌아와 세계의 대제국을 건설하고, 그의 권세의 절정에서 그 권세를 누리려고 할 때에 갑자기 열병에 걸려 열하루 만에 죽었다. 그 때 그는 33 세의 젊은 나이였고, 또 아라비아를 정벌하려고 준비하며 바벨론에 있던 때였다.


그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그의 나라는 후손에게 상속되지 않았다. 그는 얼마 후에 태어날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주라고 유언하지 않았다. 전설에 의하면 “강한 자가 차지할 것이다”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부하 장수들은 그 광대한 대제국을 차지하려고 12 년간이나 전쟁을 하다가 마침내 카산데르, 셀류쿠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쿠스가 나라를 나누어 취하였다.



5절, 주석과 해설


남방의 왕은 강할 것이나

대제국 헬라가 나뉘어 네 나라가 되었으나, 얼마 후에 리시마쿠스의 나라는 셀류쿠스 왕조에게 그 영토를 대부분 빼앗기고 또 북쪽에서 온 고울족의 침입을 받아 완전히 망하였다. 그리고 마게도니아 쪽에 겨우 명목만을 유지하는 카산데르의 나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힘을 쓰지 못하였으며, 오직 남방 왕으로 표현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북방 왕으로 표현된 셀류쿠스 왕조가 서로 다투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여기부터 시작해서 이 장의 많은 부분에 걸쳐 예언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과 가장 깊은 관계를 가졌던 알렉산더 제국에서 일어난 두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나라들은 셀류쿠스 왕조가 다스린 수리아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다스린 애굽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자는 북쪽에, 후자는 남쪽에 있었다. 실제로 헬라어 번역에는 “남방의 왕” 대신 “애굽의 왕”이라고 되어 있으며, 8절 역시 남방의 왕을 애굽으로 지적한다.

이 절에 언급된 역사적인 시점에서 볼 때, 남방의 왕(애굽의 왕)은 알렉산더의 고위 장군들 중의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 I세 소테르(Ptolemy I Soter, B.C. 305-283)였는데 그는 모든 헬라 문화권 군주국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 지속된 나라를 세웠다.


그 군주들 중 하나는 그보다 강하여 권세를 떨치리니

여기에 언급된 “그(남방의 왕)의 군주들 중 하나”는 알렉산더의 또 다른 장군인 셀류쿠스 I세 니카토르(Seleucus I Nicator)에 적용되며, 그는 스스로 그 제국의 아시아 지역 대부분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가 여기서 “그[프톨레마이오스]의 군주들[장군들] 중에 하나”로 불린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관계를 감안하여 이해해야 한다. B.C. 316년에 셀류쿠스는 그의 경쟁자 안티고누스에 의해 자기가 321년부터 자치했던 바벨론에서 쫓겨났다. 그 결과 셀류쿠스는 B.C. 312년에 가사(Gaza)에서 안티고누스의 아들 데메트리우스를 격퇴시킬 때 그가 조력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직후에 셀류쿠스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자기 영토를 다시 찾는 데 성공했다.

셀류쿠스는 한때 프톨레마이오스의 “군주들(장군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질 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애굽의 왕보다 더 강해졌다. 그의 영토는 헬레스폰트에서부터 인도 북부까지 미쳤다. 그 당시의 손꼽히는 고대 역사가 아리아누스(Arrian)는 진술하기를, 셀류쿠스는 “알렉산더를 이은 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왕이었으며 가장 왕다운 마음을 가졌고 알렉산더에 버금가는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Anabasis of Alexander vii. 22)고 하였다.



6절, 주석과 해설


몇 해 후에 그들이 서로 단합하리니

몇 해 후는 셀류쿠스 1세가 죽고 약 35년이 지난 때이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셀류쿠스 1세가 죽은 후에 후대에 가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수리아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성경의 예언대로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남방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Philadelphus, 285-246 B.C.)의 딸 베레니케(Berenice)가 북방 왕 안티오쿠스 2세(Theos, 261-246 B.C.)와 결혼한 것이다. 즉 “남방 왕의 딸이 북방 왕에게 가서 화친”한 것이다. 이 정략 결혼을 위하여 안티오쿠스 2세는 본처인 라오디케와 이혼하였다.


그러나 공주의 힘이 쇠하고

그러나 정략 결혼이라는 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 베레니케가 아들을 낳은 다음, 안티오쿠스는 전처 라오디케와 화해를 하였다. 그후 왕은 갑자기 죽었다. 사람들은 왕이 라오디케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베레니케와 그의 아들도 라오디케의 음모에 의하여 살해되어 예언된 대로 “공주의 힘이 쇠하고 왕도 서지 못하고 권세가 없어”졌다.

또한 베레니케가 살해될 때 그녀와 함께 왔던 시녀들도 다 살해되었다. 이때에 공주를 도와줄 자는 남편 안티오쿠스인데 그도 살해되었고, 이러한 사건을 국가적 차원에서 항의하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또 있다면 공주의 아버지인데 그는 안티오쿠스가 살해되던 해에 죽었으므로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 다 버림을 당하였다.



7절, 주석과 해설


그러나 … 쳐서 이기고

남방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 사후에 그의 아들이요, 베레니케의 오빠인 프톨레마이오스 3세(Euergetes, 246-221 B.C.)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한 후 곧 군사를 동원하여 육해 연합 작전으로 수리아(북방)를 침략하였다. 그리하여 안디옥과 실루기아를 점령하였다. 그후 바벨론을 침공하였는데, 애굽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회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돌아가면서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갔는데 8절의 내용은 그것을 예언하고 있다.

“왕(프톨레마이오스 3세)은 외국에 가서 전쟁을 함으로 페르샤 사람들이 본토에서 가져간 거룩한 조상들을 애굽으로 회송하여 원래 있던 신전으로 각기 돌려보냈다.” (J. P. Mahaffy, A History of Egypt under the Ptolemaic Dynasty)

어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북방 나라에서 4000 달란트의 금과 2500 개의 우상들을 가져갔다고 한다.



8절, 주석과 해설


몇 해 동안은 그가 북방 왕을 치지 아니하리라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북방을 침략했을 당시 북방 왕은 셀류쿠스 2세(Callinicus, 246-226 B.C.)였다. 그는 안티오쿠스 2세와 라오디케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그는 남방 왕에게 패전하였으나 기원전 242년에 그의 수도 안디옥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전열을 가다듬어 메소포타미아를 회복하였다. 전쟁에 승리한 프톨레마이오스는 그가 점령한 모든 지역 중에서 안디옥의 항구인 실루기아에만 머물러 있었고 더 이상 싸우러 나가지 않아 기원전 240년에 잠정적 평화가 찾아 왔다.



9절, 주석과 해설


쳐들어갈 것이나

9절의 말씀은 기원전 240년 이후에 셀류쿠스 2세가, 본국 애굽으로 돌아간 프톨레마이오스 3세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고 아무 소득 없이 자기 나라로 돌아간 것을 예언한 것이다.



10절, 주석과 해설


그의 아들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셀류쿠스 2세가 말에서 떨어져 죽은 후에 그의 뒤를 이어 맏아들 셀류쿠스 3세(Ceraunos, 226-187 B.C.)가 즉위하였으나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애굽 정벌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소아시아의 아탈루스를 진압하려고 침략하였으나 그 기간 중에 죽었다. 이것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안티오쿠스 3세(Magnus, 223-187 B.C.)가 애굽을 정벌한 일의 전주곡이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군대를 정비하여 기원전 221년 레바논 골짜기로 진군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후 기원전 219년에 그는 드디어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빼앗겼던 실루기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남부 수리아와 팔레스타인과 요단 동편까지 장악하였다. 이 때 애굽 왕 프톨레마이오스 4세(Philopator, 221-203 B.C.)는 요단 동편까지 점령하고 있었으나 “물의 넘침 같이 나아”오는 안티오쿠스 3세의 군대를 당할 수 없었고 모두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북방 왕이 남방 왕의 “견고한 성까지 칠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11절, 주석과 해설


남방 왕은 크게 노하여

여기의 남방 왕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이다. 안티오쿠스 3세의 침입을 받은 애굽 왕(남방 왕)은 심히 노하여 반격을 개시하였다. 그는 보병 7만과 기병 5천과 전투용 코끼리 73 마리를 거느리고 애굽 국경 가까이 가사 근방에 있는 라피아(Raphia)에 왔다. 북방 왕은 이미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보병 6만2천, 기병 6천, 코끼리 102 마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기원전 217년 6월 22일의 대접전에서 안티오쿠스 3세는 보병 1만 명과 기병 300 명을 잃고 4천 명이 포로가 되는 비참한 패전을 당하고 물러갔다. 승리한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팔레스타인 전지역을 일주하며 개선 행진을 실시하였다.



12절, 주석과 해설


그의 마음이 스스로 높아져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승리에 도취되어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성전에 예물을 드린 후 지성소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이 때 유대인들은 결심하고 그를 성전에서 쫓아내었다.

이 일로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유대인들을 증오하고 되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 나라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알렉산드리아 경기장으로 모으고 코끼리를 동원하여 죽이게 했는데 코끼리들이 유대인들을 해하지 않고 피하였다고 한다. 이를 본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을 깨닫고 일단 놓아 보냈으나, 3년 후에 다시 유대인들을 향하여 분노하고 유대인 4만 명을 죽였다고 한다. “수만 명을 엎드러뜨릴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애굽의 국력에 도움이 된 것도 아니었고, 그는 북방 왕을 이긴 승리를 효과적으로 관리하지도 못하였다. 그는 방종하고 나태하여졌고, 후에 그와 왕후는 이상하게 죽었고 5세 된 아들이 기원전 203년에 즉위하였는데 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이다.



13절, 주석과 해설


북방 왕

북방 왕 안티오쿠스 3세는 라피아의 패전 후 그의 힘을 동쪽 지역 평정과 정복으로 돌리고 성공하여 인도 접경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그 공적으로 “대왕”의 칭호를 얻었는데 그 기간은 기원전 212-204년이다. 이 기간 동안은 애굽과 전쟁이 없었다.

그런데 애굽에서 5세 된 어린이가 왕으로 즉위하자 이때야말로 애굽 정벌의 기회라고 여겨 기원전 201년 애굽이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였다. 즉 그가 패전한 후 16년 만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온 것이다. 여기서 “많은 물건”은 군장비들을 가리키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이후로 유대 땅은 북방 왕의 지배를 받으며 고통 받는 세월로 접어들게 된다.



14절, 주석과 해설


개요

이 절(14절)부터 시작해서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에 따라 크게 다르다. 중요한 차이점을 3가지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한 부류의 주석자들은 14-45절이 셀류쿠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그 다음 역사를 계속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2) 많은 주석자들은 B.C. 175년부터 164/163년까지 통치한 안티오쿠스 IV세(에피파네스)와 그의 헬라화 정책이 유대인들에게 가져온 국가적인 위기에 대한 언급을 발견한다. 물론 안티오쿠스가 유대인들을 강요하여 그들의 국가적 종교와 문화를 버리고 그 대신 헬라의 종교와 문화와 언어를 받아들이도록 한 것은 유대인의 역사상 구약과 신약 사이의 전 기간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안티오쿠스는 그의 짧은 12년의 통치 기간에 유대인의 종교와 문화를 거의 말살했다. 그는 성전의 모든 보물을 탈취했으며, 예루살렘을 약탈했고, 그 도성과 성벽을 파괴했으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죽였고 다른 이들은 노예로 잡아갔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모든 종교 의식을 포기하고 이방인처럼 살아가라는 왕의 칙령이 내려졌다. 모든 유대의 마을에는 이교 제단을 세우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바치며, 모든 성경 필사본은 찢어 버리거나 불태우도록 강요되었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인 성전에 세운 이교 신상 앞에 돼지고기를 드렸다. 그가 유대인 제사를 중지시킨 일은(셀류쿠스 왕조 시대를 계산하는 두 방법에 따라 B.C. 168-165년이나 167-164년이 됨) 유대인 종교의 생존과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하였다.

결국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안티오쿠스의 세력을 유대에서 몰아냈다. 안티오쿠스의 억압적인 손에서 다시 한 번 자유를 얻게 되자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새로운 제단을 세우고 다시 제사를 드렸다(마카베오1서 4:36-54). 몇 해 후에 로마와 동맹하면서(B.C. 161) B.C. 63년에 유대 지방이 로마의 한 행정 지역이 되기까지 유대인들은 거의 1세기 동안 로마의 보호 아래 상당한 독립과 번영을 누렸다.

(3) 어떤 주석가들은 14-15절까지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적용하고, 이후의 절부터 로마에 적용시킨다.

(4) 다른 이들은 14절부터 그 다음의 세계 대제국인 로마가 무대에 등장하고, 14-35절은 그 나라와 기독교의 노정을 묘사한다는 견해를 갖는다.


그 때에

“그 때”는 문맥상으로는 13절의 사건이 일어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북방 왕이 남방 왕을 칠 때를 가리킨다. 안티오쿠스 3세는 마케도니아 왕 빌립과 동맹하여 남방 왕 애굽을 쳤다. 또한 이 때 애굽에서는 어린 왕 프톨레미 5세를 섭정하는 아가도클레스가 백성을 심히 탄압하는 정치를 했다. 그래서 애굽의 속주들에서 애굽의 왕실에 대적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특히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아가도클레스와 그의 가족들을 진멸하였다. 이런 사건은 “여러 사람이 일어나서 남방 왕을 칠 것이요”라는 예언을 정확히 성취시킨다.

그렇지만, “네 백성 중에서도 포악한 자가 스스로 높아져서 환상을 이루려 할 것”이라는 말이 8:11의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라는 말씀의 병행절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 때”는 스스로 높아지는 자가 나타나서 남북 왕조의 전쟁에 개입하는 때라고 볼 수도 있다. 즉 2중적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11:14-16의 말씀은 8:9-12의 말씀과 같은 말을 사용하여 병행절을 이루고 있다.

“그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남쪽과 동쪽과 또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커지더니 (10)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들 중의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들을 짓밟고 (11)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없애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12)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매일 드리는 제사가 넘긴 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단 8:9-12)

“그 때에 여러 사람이 일어나서 남방 왕을 칠 것이요 네 백성 중에서도 포악한 자가 스스로 높아져서 환상을 이루려 할 것이나 그들이 도리어 걸려 넘어지리라 (15) 이에 북방 왕은 와서 토성을 쌓고 견고한 성읍을 점령할 것이요 남방 군대는 그를 당할 수 없으며 또 그가 택한 군대라도 그를 당할 힘이 없을 것이므로 (16) 오직 와서 치는 자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리니 그를 당할 사람이 없겠고 그는 영화로운 땅에 설 것이요 그의 손에는 멸망이 있으리라”(단 11:14-16)


네 백성 중에서도 포악한 자가 스스로 높아져서

“네 백성”은 일차적으로는 유대인이다. 이 구절은 “네 백성을 대적해 광포하게 행하는 자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말은 결국 유대인들의 독립을 박탈했으며(B.C. 63), 후일에는 성전과 예루살렘 도성을 파괴한(A.D. 70년과 135년) 로마인들을 가리키고 있다.

“네 백성”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 포악한 자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된다. 이것은 7, 8장의 작은 뿔의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교회 역사를 통하여 교회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의 계시를 이루려 한 것이다(살후 2:3-4).


환상을 이루려 할 것이나

하늘의 계시를 스스로 이루려는 태도를 설명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대조해보면 11:14의 “포악한 자”로 등장한 것이 8:9에 나타난 작은 뿔과 동일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 존재는 제국 로마와 교황 로마를 같은 세력으로 겹치어 예언한 것임을 8장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15절, 주석과 해설


북방 왕

북방 왕 안티오쿠스 3세의 두 번째 팔레스타인 전쟁을 언급하고 있다. 견고한 성읍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201년 상당 기간 동안 포위된 후 함락된 가자(Gaza)와 기원전 198년에 함락된 시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자와 시돈을 지키던 애굽군은 안티오쿠스 3세의 군대를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가 택한 군대라도 그를 당할 힘이 없을 것이므로

그가 택한 군대는 시돈이 포위되어 있을 때, 경험 많고 노련한 장군 스코파스(Scopas)를 지휘관으로 하여 응원군을 보냈으나, 그도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당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애굽은 안티오쿠스 왕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그런데 15절의 끝 부분을 “없을 것이므로”라고 번역하여 16절을 15절의 연속적 사건으로 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원문 문장은 이러한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마치는 문장으로 되어 있다. 즉 “그를 당할 힘이 없을 것이다”로 되어 있다. 물론 16절은 15절의 안티오쿠스 3세에 의하여 일어나는 연속적 사건도 아니다.



16절, 주석과 해설


오직 와서 치는 자가

“오직”이라는 말은 원문에 없다. 15절을 “없을 것이므로”로 번역하면서 문장의 연결을 위하여 들어간 말이다. 원어적으로는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해야 옳다.

“와서 치는 자”는 로마이다. 기원전 168년에 안티오쿠스 4세가 다시 애굽을 치려할 때에 애굽 왕 프톨레마이오스 7세(B.C. 170-117)는 로마의 응원을 요청하였고, 이 요청에 의하여 로마는 애굽의 응원자로 와서 애굽도 견제하고 수리아도 견제하여 마침내 영화로운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자기 마음대로 행하리니 그를 당할 사람이 없겠고

로마의 세력이 막강하게 뻗어나가고, 지중해 남쪽이나 동, 북쪽의 나라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을 때, 로마의 귀족들과 권력자들은 자기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을 로마의 영토로 병합해 나아갔다. 그래서 “와서 치는 자” 곧 로마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리니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로마의 원로원에 처음에는 영토 병합을 반대하였으나, 기원전 70년대부터는 이런 반대는 사라졌고, 이 무렵 권좌에 오른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B.C. 106-48)는 동방을 공략하여, 기원전 64년에 수리아를 공격하여 안티오쿠스 13세를 마지막으로 수리아는 망하고 로마의 영토가 되었고, 로마가 명실공히 북방 왕국의 자리에 섰으며, 폼페이우스는 계속해서 “영화로운 땅” 곧 유대로 내려왔다.

그 당시 유대의 마카비 왕조는 얀네우스(Janneus) 왕이 죽고(B.C. 76), 왕비인 알렉산드라(Alexandra)가 기원전 67년까지 통치하다가 죽은 후, 그의 두 아들 힐카누스(Hyrcanus)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2세 사이에 왕위쟁탈을 위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을 틈타서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유대에 정치적,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3개월간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고 마침내 시완월 곧 유대력 3월(양력으로 5, 6월에 해당됨) 23일에 유대인 12000 명의 죽이고 성전을 유린하였으며, 폼페이우스는 부하 장군을 거느리고 지성소까지 들어갔다. 그리하여 유대의 독립은 끝나고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그의 손에는 멸망이 있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17절, 주석과 해설


그가 결심하고

여기서 “그”는 한글 성경의 문장의 진행으로는 16절의 “와서 치는 자” 즉 로마의 폼페이우스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의 주인공은 로마 나라와 로마 나라의 권세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 무렵 로마는 정치 권력의 구조가 가변적인 상태에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원래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권력자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B.C. 138-78)에게 발탁되면서 정계에 뛰어들어 몇 번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스페인 정복과 동방 정복을 통하여 일약 권력의 정상에 서게 되었으나, 권력에 대한 야심이 큰 크라수스(Marcus L. Crassus, B.C. 114-53)와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44) 등의 책략으로 일차 삼두 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 후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으로 나가 있고, 크라수스가 수리아 총독으로 가서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여 기원전 53년에 전사하였고, 폼페이우스는 스페인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부관을 보내고, 자신은 로마에 있으면서 카이사르가 정치 핵심에 앉는 것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의 딸인 폼페이우스의 젊은 아내 율리아가 기원전 54년에 죽고 로마에 있는 카이사르의 정치 기반인 원로원의 카이사르파 의원들이 모두 추방당하게 되자 카이사르는 자기 관할 지역을 떠나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물밀 듯 쳐들어왔다.

폼페이우스는 자기 군사를 거느리고 발칸반도로 달아났다가 북쪽으로 진격하는 카이사르군을 추격하여, 발칸반도 파르살루스(Pharsalus)에서 접전하였으나 대패하고 애굽으로 달아나서,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에게 보호를 요청하였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전 병력을 이끌고 애굽에 이르렀다. 폼페이우스를 처치하면 그가 혼자 로마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전국의 힘을 다하여 이르렀”던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애굽인의 손에 죽고 카이사르는 애굽에 입성하였다. 그 때까지도 애굽은 로마의 영토로 병합되지 않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애굽을 병합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그(애굽)와 화친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과연 카이사르는 애굽과 화친하였다. “여자의 딸”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자의 딸”은 문자적으로 “여자들의 딸”을 말하는데 이 말은 “미녀(美女)”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의 표현법이다. 카이사르가 얻은 “여자들의 딸”은 세계의 전설적 미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 7세(B.C. 69-30)이다.


그의 나라를 망하게 하려 할 것이나 이루지 못하리니 그에게 무익하리라

애굽은 클레오파트라를 통하여 로마를 교란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카이사르도 그 여자로 인하여 얻은 유익이 없었다. 오히려 카이사르는 그 여자 때문에 분별력이 없어져서 결국 죽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절, 주석과 해설


그 후에 그가 그의 얼굴을 바닷가로 돌려 많이 점령할 것이나

“그 후에”는 애굽과 화친한 후이다. 카이사르는 남동생과 왕위 다툼을 하는 클레오파트라를 도와 그녀를 애굽의 왕위에 앉게 했다. 그가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애굽에서 지체하는 동안 그의 점령지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카이사르는 애굽을 떠나 다소에 상륙하여 소아시아의 킴메르족 보스포루스(Cimmerian Bosporus) 왕 파르나케스(Pharnaces)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프리카 누미디아 왕에게 피난한 폼페이우스의 남은 세력들을 해안 지방에서 섬멸하였다. 여기서 “바닷가”는 직역하면 “바다땅들”이다. 해안 지방을 뜻하는 말이다.


한 장군이 나타나 그의 정복을 그치게 하고 그 수치를 그에게로 돌릴 것이므로

이 문장에서 “정복”과 “수치”는 원어로 같은 말인 ‘헤르파’인데 “오만, 거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NIV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Then he will turn his attention to the coastlands and will take many of them, but a commander will put an end to his insolence and will turn his insolence back on him.”(Dn 11:18, NIV 2011)

이 문장은 “한 지휘관이 그(카이사르)의 오만을 끝내고, 그의 오만을 그 자신에게 돌릴 것이다”라는 뜻이다. 카이사르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서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왕이 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오만”이었다. 그러나 독재와 왕권을 극도로 싫어하는 공화파 사람들은 카이사르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그 중심 인물은 카이사르로부터 은혜를 입은 그 해의 법무관인 브루투스(Brutus, B.C. 84-43)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원로원을 소집하고 이태리 이외의 로마 속주에서는 카이사르의 칭호를 “왕”이라고 부르도록 결의하기로 하였다. 이 때에 공화파들은 원로원에서 카이사르를 죽이기로 작정하였고 브루투스가 주도하여 그를 죽였다. 그가 죽은 것은 그의 “오만” 때문이었다.



19절, 주석과 해설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라

이 절은 18절의 결과를 말하고 있다. 자기의 오만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므로 그는 다시 보이지 아니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때는 그가 “자기 땅 산성”에 왔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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