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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3장 1절-18절, 믿음의 저항 - 매일성경큐티를 위한 주석과 해설 정리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꿈에 나온 신상이 돌에 의해 산산히 부서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은 어리석게도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들에게 절하라고 강요합니다. 매일성경큐티를 위한 다니엘 3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주석을 정리했습니다.


다니엘 3장 1절-18절, 믿음의 저항



다니엘 3장 1절-18절, 믿음의 저항



1절, 주석과 해설


3장의 배경

3장의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2장의 사건이 있기 전에 3장의 사건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음 성경절을 보면 2장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인 것은 확실하다.

  • 다니엘 3:12,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세운 것은 2장에 나오기 때문이다.

  • 다니엘 2:49, 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

1956년에 번역 출판된 바벨론의 한 점토판 문서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왕의 재위 10년인 B.C. 594년 12월에 군대 안에서 심각한 폭동 사건이 발생하였다. 느부갓네살이 신속하게 이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점토판 문서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악갓 왕이 자신의 땅에 있은 지 10년에, 기슬레월과 테벳월 사이에 악갓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 무력으로 그는 많은 자기 군인들을 죽였다. 자기 손으로 친히 대적을 사로잡았다.

(위의 문서 내용에서 악갓 왕은 바벨론 왕을 가리키고 기슬레월은 태양력으로 11-12월, 테벳월은 12-1월을 가리킨다.)

반역과 반란은 느부갓네살의 통치 초기에는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때때로 이런 음모에는 왕의 군대 고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의 신변을 위협하는 이러한 심각한 사건 후에 느부갓네살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금신상을 만들고 봉헌식에 주요 관리들(총독, 수령, 행정관, 모사, 재무관, 재판관, 법률사, 지방의 모든 관원(단 2:3))을 소집시킨 결정은 관리들로 하여금 왕에게 충성을 다짐하게 하여 또 다른 반역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성경에도 위와 같은 배경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있다.

  • 예레미야 51:59, 유다의 시드기야 왕 제사년에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스라야가 그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갈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씀을 명령하니 스라야는 병참감이더라

시드기야 왕 제4년은 B.C. 594/593년이며,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다녀온 유다의 유일한 왕이었다. 시드기야는 다니엘 3장에 묘사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바벨론에 갔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시드기야가 이때 바벨론에 갔다면, 그는 아마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신상에게 절을 했을 것이다.

왜 다니엘이 이 이야기에 나오지 않았는가? 다음은 사람들의 추측을 나열한 것이다.

  1. 왕이 다니엘 2장의 기별을 고의로 거역하고 있기 때문에 다니엘을 볼 면목이 없어 다니엘을 왕의 어떤 임무를 수행하도록 멀리 보냈다.
  2. 다른 모든 관원들이 두라 평지에 있는 동안 다니엘은 왕궁에서 왕궁의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3. 병이 들어서 거동할 수 없었다.
  4. 왕이 다니엘의 충성은 이미 확인했기 때문에 이 경배에서 그를 제외시켰다.

위의 목록은 그야말로 추측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만약 다니엘이 거기에 있었다면 그도 자기 세 친구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충성했을 것이다.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금으로 된 신상을 만든 이유는 아마도 다니엘 2장의 꿈에서 본 신상과 관련이 있음이 거의 분명하다. 왕은 2장에서 금으로 상징된 자신의 나라가 영원하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온통 금으로 된 신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 신상이 마르둑 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는지 또는 왕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는지는 본문에 언급되지 않았으나, 이 신상은 마르둑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왕이 자신을 경배하게 할 목적이었다면, 자신이 행사에 참석해서 자신에게 직접 절하라고 하면 된다. 굳이 자신을 상징하는 신상을 만들 필요가 없다.
  2. 황제 경배의 사상이 다니엘서에 나오지 않는다.
  3. 애굽의 바로들은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 왕은 신들의 특별한 종으로 여겨졌다. 신으로 주장한 왕들은 극소수였는데,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 중에 포함되지 않았다. 바벨론 신학에 의하면, 왕이 자신을 신으로 주장하는 것은 죄였으며 그러한 왕은 신들에 의해 징계를 받을 것이었다.
  4. 단 3:12, 3:14, 3:28에서 신상에 절을 하지 않은 것을 언급하면서 신들을 섬기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금 신상은 바벨론의 신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비록 신상이 마르둑 신을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왕은 틀림없이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바벨론의 신에게 절하고 경배한다면, 그것은 또한 그 신과 그의 지상 대리자인 왕을 신실하게 섬기겠다는 충성의 맹세가 되기도 한다. 이 신상은 그 당시의 우상을 만드는 일반적 방법대로, 구운 벽돌에 금을 입히거나, 나무나 돌로 만든 후에 금으로 입히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신상의 높이는 60 규빗(약 30m), 너비는 6 규빗(약 3m)으로써 거대한 크기였다. 이 치수는 바벨론에서 널리 사용된 60진법과 일치한다. 이 계산법에서는 6과 60이 기본수이다. 숫자 6은 바벨론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숫자였다. 60은 바벨론 최고의 신들의 숫자였다. 60초, 60분, 360도 등은 모두 이에 근거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66도 바벨론의 수인 것이 분명하다(계 13:18). 이 666은 (60 × 10) + 60 + 6 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바벨론의 수인 6과 60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상의 높이와 너비의 비율은 10:1이다. 이 비율은 일반적인 사람의 비율인 5:1과는 너무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신상의 모양이 너무 길쭉하고 날씬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 신상을 받치는 받침대까지 포함할 경우에 알맞은 비율이 될 수 있다.
  2. 고대인들은 신들을 이런 식으로 만들었다. 주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출토된 바알 신상들은 팔과 다리와 몸통이 길고 가늘어 성냥개비 같은 신상이라고 불리곤 하였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이 이런 모양의 신상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너무 높은 신상의 높이를 문제 삼아, 이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시대의 다른 지역에는 그보다 큰 신상도 있었다. 로데 섬에 서 있던 신상은 높이가 35 m였고, 애굽의 테베에 있는 멤논의 거상들 중의 하나는 높이가 32 m였다. 또한 바벨론 도성에는 거대한 신전 고탑 즉 지구랏이 있었는데 그것의 높이는 약 100 m였다. 그러므로 높이가 30 m에 불과했던 금 신상은 그 크기 때문에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


두라 평지

“두라”는 “성벽”이라는 의미를 가진 바벨론 말이다. 그러므로 “두라 평지”는 “성벽의 평지”라는 의미가 된다. 이 평지의 정확한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본문에 바벨론 지방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이 평지는 바벨론 도성의 외성벽과 내성벽 사이에 위치한 큰 광장을 가리킬 수 있다.


세웠더라

이 동사의 주어는 느부갓네살이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영원히 존재하기를 희망하며 금 신상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영원한 왕국을 세울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지 못하였다.



2절, 주석과 해설


총독과 … 모든 관원

바벨론 계급 제도의 일부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 이 일곱 계급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어떤 학자는, 그 계급들이 지방의 총독으로부터 시작하여 각 지방의 모든 관원이라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끝나기 때문에 계급 순으로 나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낙성식

“낙성”을 뜻하는 아람어는 ‘하누카’이다. 이 말은 “봉헌, 헌납”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성소 제단과 예루살렘 성전의 봉헌에 사용되었다.

  • 민수기 7:10, 제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 지휘관들이 제단의 봉헌을 위하여 헌물을 가져다가 그 헌물을 제단 앞에 드리니라
  • 열왕기 상 8:63,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드렸으니 곧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성전의 봉헌식을 행하였는데

그러므로 “낙성식”이라는 말보다 “봉헌식”이라는 말이 더 합당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신상 앞에 모였는지 알 수 없지만, 2절과 3절의 목록을 보면 모든 관원들을 포함하는 것 같다. 재림교회의 저명한 학자인 쉐이(William H. Shea)는 약 2,000 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5절, 주석과 해설


나팔 … 생황

여기에 나오는 악기는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 나팔: 짐승의 뿔이나 금속으로 만든 나팔.
  2. 피리: 속이 빈 대나무로 만든 플루트 비슷한 악기.
  3. 수금: 소리판이 달린 정사각형에 가까운 몸통에 여러 개의 줄이 매어져 있는 현악기.
  4. 삼현금: 소리판이 달린 삼각 몸통에 4 개의 줄이 매어져 있는 현악기.
  5. 양금: 현대의 하프를 닮았는데 줄은 11, 12 개로 된 악기.
  6. 생황: 희랍에서 시작된 악기로써 스코틀랜드의 풍적과 비슷한 악기.

어떤 사람은 생황을 앞에 언급한 모든 악기를 종합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로 보았고, 어떤 사람은 드럼의 일종인 것 같다고 제안하였다. 금 신상의 예배에는 왕권과 관권이 뒷받침된 모든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음악의 악용(惡用)이었다. 좋은 음악과 그것의 건전한 사용은 사람과 동식물에 놀라운 혜택을 주지만, 나쁜 음악과 그것의 악용은 저주와 재앙을 가져다준다.


엎드리어 … 금 신상에게 절하라

성경 시대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기도나 예배를 위한 기본 자세였다(출 20:4-5, 신 4:19, 8:19). 절하는 것과 경배하며 섬기는 것은 같은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우상에게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므로 금지된 것이었다.



6절, 풀무불


풀무는 아마도 벽돌 굽는 가마 또는 노(爐, furnace)였을 것이다. 모든 건물을 벽돌로 건축했고 그중 많은 건물이 구운 벽돌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 근처에는 가마가 많았다. 고대의 가마들이 그 지역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현대의 가마들과 흡사했음이 발굴을 통해 드러났다. 그 가마들은 대개 벽돌로 지은 원추형 구조물이다. 벽의 한쪽에 낸 문(門)을 통해 연료를 넣었고, 꼭대기에 있는 문을 통해 연기가 빠져나갔다. 연료는 원유(原油)와 왕겨를 혼합한 것을 사용하였다. 이곳은 현대의 이라크 지역이므로 땅 위로 스며나오는 원유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불은 자주 사형집행과 정결케 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창 38:24, 레 20:14, 렘 29:22, 수 7:15).



8절, 주석과 해설


그 때에

“그 때에”라는 말은 아람어로 ‘콜-코벨 데나 베-짐나’인데, “그러므로 그 때에”를 의미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앞 절(7절)도 이와 똑같은 말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짧지도 않은 “그러므로 그 때에”라는 말을 두 번 똑 같이 서두(書頭)에 사용했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상황의 긴박감과 놀라움을 강조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절하기가 무섭게, 절을 하지 않은 유다 사람들이 고발을 당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갈대아 사람들

여기에서 유다 사람들을 참소한 갈대아 사람들은 단 2:5에도 나온다. 이 갈대아 사람들은 다니엘 2장에서 다니엘 덕분에 생명을 건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생명의 은혜를 갚을려고 하기는 커녕 참소하는 악을 자행한다. 이 얼마나 냉혹하고 무정한 세상의 인심인가! 그러나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이 그 악의 결과를 당하게 될 것이다(시 109:5-6, 잠 17:13, 시 1:4-6).


참소하니라

“참소하다”는 말은 아람어로 ‘와아칼루 카르체혼’인데, “그들이 그들의 살 조각을 먹었다”는 뜻이다. 남을 중상하고 고발하는 자들은 그들을 잡아먹는 것과 같다. 단 6:24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다니엘을 잡아먹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사자들에게 잡아먹히는 결과를 당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 황금률(Golden Rule)이다(마 7:12, 잠 11:25).



9절, 만수무강 하옵소서


단 2:4의 주석을 참고하라. 그들이 관례대로 왕에게 예의를 갖추어 문안드린다. 그들은 아주 신사적이고 고상한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또 다른 말은 다른 사람들을 참소하는(잡아먹는) 말이었다. 한 입에서 두 말이 나온 것이다. 겉으로는 신사이면서 또는 그리스도인이면서 속은 동물과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롬 1:21-23, 새번역성경)



12절, 주석과 해설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

단 2:49절과 관련 있는 말이다.

  • 다니엘 2:49, 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

갈대아 사람들이 이 말을 여기에서 언급한 것을 보면, 다니엘의 친구들이 지방 장관으로 세움을 받을 때에 그들의 질투가 얼마나 불붙듯 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꼴을 못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모세와 아론을 질투하다가 땅 속으로 사라진다(시 106:16-17).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 본성을 극복해야 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9-21)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이 말을 보면 금 신상에게 절하는 것은 바벨론의 신들을 섬기고 왕을 높이는 의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절, 노하고 분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였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매우 큰 강도(強度)의, 병적으로 흥분한 상태를 나타낸다.



15절, 주석과 해설


이제라도 … 절하면 좋거니와

왕이 세 히브리인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준 것은 아마도 그들을 신뢰하고 아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적으로 신망(信望)이 높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종교적인 문제와 국가의 법에 관계된 문제에 연루될 때 용서는 베풀어지지 않는다.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의 법에 배치되는 법령이 국가에 의해 공포(公布)되면, 하나님의 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국가나 사회에서 신망 받는 사람들이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그들을 용서해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직 국가의 법을 따를 경우에만 그들에게 사형(死刑)이 선고되지 않을 것이다.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단 1:2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 왕과 하나님의 전 그릇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겼다고 한다. 성경에서 “손”을 나타내는 아람어와 히브리어 ‘야드’는 자주 개인의 권세와 권위, 소유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었다(라 5:12). 유다 왕국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긴 분은 하나님이셨다. 다니엘 2장에서 느부갓네살은 세상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고 통치자들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느부갓네살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의 손, 즉 자신의 권세와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어리석고 불쌍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리 위대한 이 세상의 왕이라도 하나님과 대적하여 그분을 무력화시킬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롬 3:18).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후 7:1).



16절, 주석과 해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세 친구 중 한 명도 하나님께 충성하는데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만약 한 명이나 두 명이 이 대열에서 이탈하였다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 이것은 교회가 마지막 위기의 때에 견지해야 할 믿음의 연합의 본보기이다. 연합은 힘이다(전 4:12).


느부갓네살이여

이 말에는 “왕”이라는 칭호가 빠져있다.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이렇게 호칭한 것은 다니엘서의 다른 부분에는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다니엘의 친구들이 이렇게 호칭을 했는지, 아니면 기록자가 일부러 왕이라는 말을 뺐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친구들이 실제로 이렇게 호칭을 했거나, 기록자가 일부러 왕이라는 말을 빼고 기록하였다면, 그것은 느부갓네살 왕이 아무리 대단한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단지 죽을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히브리 청년들은 왕에게 구차하게 변명하여 생명을 구걸하거나, 하나님께만 절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것은 다니엘 2장에서 느부갓네살이 이미 충분하게 배웠기 때문이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협 앞에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라고 말한다(행 4:19).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것으로 여긴다(행 20:24). 이 세 히브리인은 조상들의 역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자신들이 이렇게 바벨론 땅에서 멸시를 받으며 포로의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이런 비극이 반복되게 할 수는 없었다.



17절, 주석과 해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말은 논란이 되는 어구이다. 문자적으로는 “If it be so”(만일 그렇게 된다면)이다. 문맥을 고려하고 히브리 청년들의 믿음을 생각할 때, 개역개정판에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으로 번역한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확신하지 못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마 4:6).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왕이시여, 만일 우리가 풀무불에 던져진다면, 우리가 섬기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맹렬히 불타는 풀무불에서 우리를 구해 내실 것이고 또 왕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히브리 청년들은 100여 년 전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1-2)



18절, 주석과 해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 말은 히브리 청년들이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을 확실히 믿지 못해서 한 말이 아니다. 매우 중요한 성경의 신앙 사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한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화형주에 달려 죽거나 사자의 밥이 되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화형주에 달려 죽고, 사자의 밥이 되어 죽은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소원이나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더 귀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은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 땅의 일시적인 삶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은 이 땅의 일시적인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영원한 삶의 관점에서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소원과 다르게 하나님께서 처분하셨다고 해서 오해를 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없다. 사는 것이 유익이 될 때가 있고, 죽는 것이 유익이 될 때가 있다. 결국은 하나님의 판단이 옳은 것이었고 나에게도 축복이 되었음이 판명될 것이다(빌 1:20-21).

이 땅에서는 모두가 죽기 마련인데, 그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얼마나 크고 축복된 죽음인가! 히브리 청년들은 자신들이 이 땅에서 좀더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지금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확실하게 몰랐을 뿐이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그리고 자신들의 신앙의 확실성을 의심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다니엘의 세 친구와 똑 같은 시험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도 그들처럼 목숨을 기꺼이 버릴 각오로 그들처럼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때 어떻게 대답할지 지금 예상해 볼 수는 없을까?

현재 우리는 그렇게 큰 시험에 직면해 있지는 않지만 매일 매일 작은 시험과 도전들에 직면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작은 것들에 대응하면서 사는 방식과 선택들을 보면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큰 시험에 어떻게 반응하고 선택할지를 예상할 수 있다. 지금 작은 선택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미래의 어느 날 큰 선택에서는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의 작은 선택들이 미래의 큰 선택들을 결정하는 기초가 된다(눅 16:10).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세 히브리인들이 이곳에서 끝까지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 이유는 분명하다. 십계명의 둘째 계명에 이에 대한 분명한 명령이 들어있다(출 20:4-6).

이 계명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계명이 그렇게 생명을 던져서라도 수호해야 할 만큼 중대한 것이라면,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에 나오는 다음의 기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19)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왕하 5:18-19)

나아만은 틀림없이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러나 그가 처한 형편 때문에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행동은 타협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과 선지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아만처럼 행동으로는 우상에게 절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마음만 하나님께 바치면 괜찮은 것이 아닌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결과를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의 원칙을 순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이와 같이 깨끗하고 결연(決然)한 순종이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에 선후(先后)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만일 그들이 내게 대하여 폭력을 쓰기를 원한다면, 또한 그렇게 할 가능성은 매우 많을지라도, 나는 그 문제를 주님의 손에 맡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의 출두를 명한 것은 내게서 교훈을 받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젊은이들을 타오르는 풀무불 속에서 지켜 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통치하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지 않을지라도, 나의 생명은 별반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복음이 악한 자들의 조롱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고, 복음을 위하여 우리의 피를 흘립시다. 겁을 내면 그들이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내가 사는 것이 좋으냐, 죽는 것이 좋으냐 하는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각 시대의 대쟁투,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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