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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3장 19절-30절,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 - 주석과 해설 정리

다니엘 3장 19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은, 느부갓네살이 자기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칠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진 내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매일성경큐티를 위한 본문의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다니엘 3장 19절-30절,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



다니엘 3장 19절-30절,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



19절, 주석과 해설


분이 가득하여

단 3:13에서 시작된 느부갓네살 왕의 분노가 극에 달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칠 배

성경에서 “칠(7)”이라는 수는 충분한 것, 완전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칠 배”나 뜨겁게 하라는 것은 정확히 온도를 일곱 배 더 뜨겁게 하라는 의미보다는 더 이상 뜨거워질 수 없을 만큼 뜨겁게 하라는 의미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잠 24:16, 26:16). 요한계시록에는 일곱이라는 수가 매우 많이 나온다.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재앙 등. 또 성경에서 “칠”은 심판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레 26:18, 21).

풀무 안의 열을 높이는 일은 왕겨와 원유(原油)를 공급함으로써 이루어졌을 것이다. 원유는 예로부터 풍부하게 공급되었던 메소포타미아의 노천 유정(油井)에서 가져다 썼을 것이다. 그 지역에 있는 현대의 벽돌 가마들도 그것으로 불을 때고 있다. 어떤 학자는 풀무의 온도가 900∼1000 ℃까지 올라갔을 것이라고 한다.

느부갓네살의 주체할 수 없는 분노는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였다. 이 분노는 아마도 자기의 보위(寶位)에 대한 불안에서 기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안위가 위협을 받는다고 느낄 때 침착성을 잃게 되며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왕은 여기서 중대한 실수를 하는데, 그것은 풀무의 온도를 높인 것이다. 그래서 세 히브리인들을 붙들어 풀무에 던진 군대의 용사 몇 사람이 죽게 된다. 아무 잘못이 없는 군대의 용사들이 죽은 것이다(단 3:22). 더구나 세 히브리인들이 더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며 죽는 것을 원했다면, 온도를 높일 것이 아니라 낮추어야 했다. 높은 온도는 고통을 빨리 끝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20절, 군대 중 용사 몇 사람


특출한 힘을 갖춘 군인들을 선택한 것은 신들이 간섭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용사 몇 사람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2절, 주석과 해설


왕의 명령이 엄하고

그곳의 분위기가 얼마나 엄하고 살벌했으면 히브리인들을 붙들어 던지는 사람들이 불에 타서 죽을 정도로 자신들을 불길에서 보호하지 못했을까 생각하여 보라. 사탄은 자주 이런 살벌하고 무섭고 끔찍한 분위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였다. 그러나 세 히브리 청년들의 믿음은 요동하지 않았다.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시리아 성경은(The Syrian Bible)은 불꽃에 타서 죽은 사람들이 세 청년을 중상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는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본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구약 성경의 헬라어역(LXX, 70인역)은 히브리인들이 불 속에서 기도하며 노래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람어 원문은 그들이 풀무불 속에서 자유롭게 걸어 다녔다고 말한다(단 3:25).

불에 타서 죽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상관없이 다음의 사상은 옳은 것이다. 다니엘 6장에서 굶주린 사자들은 다니엘의 대적들을 삼켰고(단 6:24), 에스더서에서 하만은 모르드개를 달기 위해 준비한 나무에 자기가 달렸다(더 7:10). 여기서는 히브리 청년들을 붙들어 풀무불에 넣은 사람들이 불에 타 죽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이다(마 7:12). 남을 죽이는 자는 자기도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주는 성경의 법칙(law)이다(출 21:23-25).



25절, 주석과 해설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

불은 세 히브리인을 태우지 못하였다. 단지 그들을 결박했던 줄만 태웠다. 불은 때때로 시련과 시험, 고난을 상징한다(욥 23:10, 벧전 1:7, 벧전 4:12-13). 이런 고난의 불은 우리를 세상에 묶어 꼼짝 못하게 하는, 결박한 줄을 태워버리는 역할을 한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은 더 이상에 이 세상의 줄에 묶여 끌려다니지 않는다.


불 가운데

성경에서 불은 자주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이 있다(출 3:2, 19:18, 신 4:11-12). 불은 태우고 소멸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경우,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시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거기에 접촉하는 모든 것들은 소멸될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하심으로 아무 해를 입지 않는다(사 43:1-2).


하늘 존재와 동행하는 사람들

즉 충성된 사람들은 불로부터가 아니라 불 가운데서 건져냄을 받는다. 하나님은 불 속에 아예 들어가지 않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불 속에 들어갈지라도 불 속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강하게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이 시험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천사들과 거민을 위한 것이다(고전 4:9). 고전 4:9에서 “세계”는 헬라어로 ‘코스모스’인데, “우주, 세계”를 뜻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는다. 세상에서 벗어나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살지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다(요 17:15).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신들”은 아람어로 ‘엘라힌’인데, “신”을 뜻하는 ‘엘라’의 복수형이다. 이 신은 이방신을 가리킬 수도 있고, 하나님을 가리킬 수도 있다. 느부갓네살이 자기가 섬기는 바벨론의 신들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고, 2장에서 다니엘을 통하여 배우게 된 여호와 하나님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아들”은 아람어로 ‘바르’인데,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한 구성원”(member)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만약 바로 위에 언급한 “신들”이 느부갓네살이 섬기는 바벨론의 신들을 말한 것이라면 “아들”이라기 보다는 “신들의 한 구성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 것이라면 “아들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다고 볼 수 있을까? 여기서 “신들의 아들”이 다신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던 바벨론에서 느부갓네살이 섬기던 “신들의 한 구성원”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26절, 아귀


문자적으로 “문(門)”을 가리킨다. 이것은 풀무의 옆문인 것 같다. 왕이 그 문을 통하여 풀무 속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느부갓네살 왕은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높인다. 왕은 전에 단 2:47에서 하나님을 높였었다.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단 2:47)



28절, 주석과 해설


천사

다니엘의 친구들과 함께 풀무불에 있었던 분은 하나님 자신일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자주 “하나님의 천사”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기도 한다. “천사”는 히브리어 ‘말라크’인데, “천사(天使)” 또는 “사자(使者, messenger)”로 번역할 수 있으므로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자주 이 두 말을 혼용(混用)하였다(창 16:10-11, 22:15-17, 출 3:1-2). 호세아서에는 하나님과 천사를 동일시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 12:3-4)



29절,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왕은 이제 금 신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조서를 내린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조서는 금 신상을 경배하라는 조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명령이라 할지라도 강요와 강제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억지로 하나님을 믿게 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품성과 능력에 감동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믿는 것을 원하신다.



30절, 더욱 높이니라


만약 세 히브리인들을 중상한 사람들이 불에 타서 죽었다면,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들의 결말이 부각된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원수들은 멸망당할 것이고,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은 높임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다니엘 3장의 교훈 요약


1.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사람에 의하여 변경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왕국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금 신상을 만들었지만 그 금 신상은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금방 무용지물이 된다. 단 6장에서는 다리오 왕이 이 사상을 언급한다(단 6:26).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롬 4:21)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고후 7:1) 해야 한다.


2. 경배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

십계명의 첫째와 둘째 계명은 이 사상을 강력하게 제시한다(출 20:3-5). 히브리 세 청년은 이 말씀을 목숨을 바쳐 순종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들도 영광을 받는다. 이 사상은 마지막 때에 다시 한 번 부각되어 온 세상을 시험할 것이다(계 13:15).


3.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크시다.

하나님께서 이길 수 없는 원수는 없고, 극복할 수 없는 환경은 없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은 그분의 능력에 한이 없음을 알려준다(사 40:25-29, 엡 1:18-19).


4. 하나님의 능력이 아무리 크셔도 하나님의 백성이 협력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목숨을 바쳐 충성한 히브리 세 청년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스로 해 보고자 고군분투(孤軍奮鬪)할 때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제쳐두고 스스로 해보고자 시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잠을 주무실 수 밖에 없다(막 4:38). 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되도록 돕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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