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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4장 1절-18절, 진정한 통치자 - 주석과 해설 정리

다니엘 4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바벨론의 통치자인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조서를 내리면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권능을 설명합니다. 본문의 매일성경큐티와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다니엘 4장 1절-18절, 진정한 통치자



다니엘 4장 1절-18절, 진정한 통치자



1절, 주석과 해설


4장의 개요

다니엘 4장은 성경에서 특이한 장(章)이다. 그 내용이 선지자나 이스라엘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방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의 자전적 조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벨론 제국에서 공적으로 읽혀지도록 의도된 공개 조서였다. 내용은 왕의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긴 고백과 하나님께 대한 찬미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부분(4:2-18)은 “나”라는 1인칭으로, 중간 부분(4:19-27)은 “왕”이라는 3인칭으로, 마지막 부분(4:28-37)은 다시 1인칭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때, 이 조서는 다니엘이 왕의 명령으로 썼거나 왕의 조서를 다니엘이 인용하면서 자신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천하에 거주하는

일차적으로 느부갓네살이 통치하는 모든 나라와 백성들을 가리킨다. 아울러 느부갓네살은 할 수만 있으면 온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 기별을 선포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예수께서도 내 지역의 범위를 벗어나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하셨다(마 28:18-20).


너희에게 큰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은 원어로 ‘쉘람’인데, “평안, 평화(peace)”를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고대 근동에서 왕의 선포 가운데 나오는 공식적인 인사 표현이다. 이 표현은 단 6장에도 나온다(단 6:25).

바벨론의 왕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께서도 그분의 백성들에게 평강이 있기를 원하신다(요 14:27). 사도들은 그들의 편지서에서 인사말로 자주 은혜와 평강을 언급하였다. 평강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결과로 얻게 되는 영적인 축복이다(고전 1:3, 요이 1:3, 계 1:5). 다음의 성경절에서 인사말에 은혜와 평강을 사용하였다.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딛 1:4, 몬 1:3, 벧전 1:2, 벧후 1:2.



2절, 주석과 해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최고로 높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는 신은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 우주의 만물을 만드셨기 때문이다(대상 16:25-28, 렘 10:10-12).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

왕은 여기서 하나님을 최고의 하나님으로 높이는 이유로써 그에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언급한다. 그것은 왕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특별한 이적과 사건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함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사실 우주의 존재와 우리의 존재 자체가 가장 놀라운 이적 중의 이적이다.

우리는 4장에서 왕이 경험한 이적과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 보게 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말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내게”이다. 왕은 지금까지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간접적인 신앙은 견실하지 않은 신앙, 위기의 때에 흔들리는 신앙이 되기 쉽다. 반면 체험적인 신앙은 안정적이다.



3절,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왕은 여기서 하나님의 이적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그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적은 그에게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의 최고의 이적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놀라운 구속의 계획과 그것의 실행을 깨닫는 모든 사람은 감탄할 수 밖에 없다(롬 11:33).



4절, 나 느부갓네살


이 장에서 1인칭 대명사 “나”를 사용하여 이야기에 권위를 더해준다. 이것은 다니엘 4장이 느부갓네살 왕 자신의 저작(著作)임을 확인시켜 준다. 물론 왕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다니엘이나 다른 사람을 시켜 기록하게 하였을 것이다. 4장의 마지막 절에도 같은 표현을 써서 전체 이야기를 마무리한 것은 자신의 의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더욱 강력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 다니엘 4: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평강할 때에. 여기의 “평강”은 4:1의 “평강”과는 다른 말이다. 원어로 4:1의 “평강”은 “평안, 평화(peace)”를 뜻하는 ‘쉘람’이지만, 여기의 평강은 “번성하다, 번영하다(flourish, prosperous)”를 뜻하는 ‘라아난’이다.

  •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서 편히 쉬며 내 궁에서 번영을 누릴 때에,”(단 4:4, 바른성경)“
  • I, Nebuchadnezzar, was at home in my palace, contented and prosperous.”(Dn 4:4, NIV)

즉 느부갓네살의 왕국이 가장 번영하고 편안할 때에 왕이 특별한 꿈을 꾼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재위 기간(605-562 B.C. ) 대부분을 이국의 전쟁터에서 보냈으며 본국에 돌아와서는 건축 현장에서 살았다. 그는 왕이 되던 해 숙적 앗시리아를 정복했고, 재위 19년에 골치 덩어리인 유다를 멸망시켰고, 아라비아도 정복했고, 해변의 상업도시 두로를 13 년간의 포위 끝에 B.C. 573년에 함락시켰다. 그리고 이집트도 B.C. 568년 정복하여 이제는 평화롭고 안전한 만년(晩年)을 맞게 되었다.



5절, 한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였으니


그가 평안할 때에 꿈을 꾸고 두려워한다. 그를 두렵게 한 것은 외적의 침입이나 어떤 기상천외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를 두렵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었다. 하나님은 가장 비참하고 불쌍하게 보이는 사람에게도 평안을 주실 수 있고, 가장 걱정 없이 살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불안과 두려움을 주실 수 있으시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미래의 자신의 운명이다.

예수님의 다음의 비유는 유사한 사상을 전달한다(눅 12:16-21).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살게 되고, 그렇게 인생을 마치지만, 모든 것이 좀 부족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평안하고 기쁜 삶을 산다.



7절, 그 꿈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나


다니엘 2장에서는 왕이 꿈과 해석을 알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때 박사들은 꿈을 알려주시면 해석해 드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꿈을 알려주었는데 해석을 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꿈의 내용을 듣고 어렴풋이 그 의미를 이해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해석은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은 미래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없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의 지혜가 얼마나 무력한 지혜인지를 알려준다.



8절, 주석과 해설


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왜 다른 박사들이 먼저 들어오고 그들이 꿈을 해석할 수 없었을 때 다니엘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가능한 제안은 다음과 같다.

  •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섬기는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먼저 기회를 주는 것이 자기 신을 공경하는 방식이자 의무라고 여겼다. 그리고 자기 신의 능력으로 꿈이 해석되기를 기대하였다.
  • 다니엘과 같이 다른 신을 섬기면서도 탁월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고, 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특히 자신이 다니엘의 하나님을 충실하게 섬기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수도 있다. 왕이 “내 신의 이름을 따라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라고 한 말에서 왕이 바벨론의 신을 잘 섬겨왔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서로 만났을 때, 아합이 길르앗 라못을 치러 가자고 여호사밧에게 협조를 구한다. 이때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자고 한다. 아합은 400 명의 선지자들을 소집하여 묻는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은 모두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이 있던 참 선지자 미가야는 부르지 않은 것이다. 이에 여호사밧이 다른 선지자가 있는지 묻는다(왕상 22:7-8). 이스라엘 왕이 미가야를 부르지 않은 것은 그가 흉한 일만 예언했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처럼, 느부갓네살 왕이 처음에 다니엘을 부르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 왕이 가지고 있던 비슷한 부담감 때문이었을 수 있다.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아람어로 “신들”은 ‘엘라힌’인데, 이 말은 거짓 신들에게 자주 사용되었으나(렘 10:11, 단 2:11, 47, 3:12, 5:4), 참 하나님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단 3:25, 5:11, 14). 엘렌 지 화잇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은 다니엘 3장에서도 신들의 아들을 참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다(단 3:25).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아는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을 가리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가리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9절, 주석과 해설


박수장

박수장은 단 2:48의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과 같은 의미이다. “박수장”에서 “장”과 2:48의 “어른”은 모두 아람어로 ‘라브’이다.


어떤 은밀한 일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왕은 다니엘의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므로 어떤 비밀이라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왕은 다니엘 2장에서 꿈의 해석뿐만 아니라 꿈의 내용까지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3장에서는 불 속에서도 그분의 신실한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다.

이런 능력의 하나님이 이번에는 왕이 꾼 꿈을 해석하지 못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전혀 없다. 그분은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이시다(창 17:1, 계 1:8). “전능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다이’, 헬라어로 ‘판토크라토르’인데, “전능(全能)한, 능력이 굉장한,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무엇이든 할 수 있는”(almighty, omnipotent)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샤다이는 구약에서 약 48 번 사용되었고, 판토크라토르는 10 번 정도 사용되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바벨론의 신을 섬기고 있었고 그 신을 우선(優先)하였다. 그리고 필요할 때만 하나님의 종을 찾았다. 이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실제 삶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12절,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이 나무 덕분에 땅과 하늘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과 사람들이 먹을 것을 얻고 거처를 얻는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찬양과 경배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피조물을 숭배하는 이유가 그 피조물이 자신의 필요를 공급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태양, 달, 산, 나무, 물 등등 온갖 것들을 숭배한다.

만약 본문에 나오는 나무가 스스로 생겨나서 자신의 능력으로 이런 모든 필요를 공급하였다면 당연히 이 나무를 찬양하고 경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나무는 자기 스스로 생겨나지도 않았고, 스스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 나무가 생겨난 것과 그 모든 능력의 근원은 창조주이며, 창조주가 계속적으로 그 나무를 가꾸고 유지시키셨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창조주가 없었다면 그 나무가 있었겠는가? 다른 피조물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었겠는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말 경배를 받아야 할 존재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나무가 없었다고 해도 창조주만 존재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필요를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3)

위의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고, 만물을 유지시키는(붙드시는) 분이다. 그분이 안 계신다면 만물은 존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설혹 존재했다고 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피조물이 아무리 큰 일을 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할지라도 그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무를 숭배하든지, 산을 숭배하든지, 해 달 별이나 어떤 위대한 사람을 숭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진짜 경배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한다. 그리고 안식일은 그 경배의 중심에 있는 계명이다(출 20:8-11).



13절, 주석과 해설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

“순찰자”는 아람어로 ‘이르’이다. 이 말은 “깨어있다, 지켜보다”는 뜻을 가진 어근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순찰자”는 “깨어 지켜보는 자”라고 이해할 수 있다. 깨어서 지켜보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시 121:3-6). 때때로 천사들이 그 일을 대행(代行)하기도 한다.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라는 표현은 두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거룩한 순찰자”를 의미한다.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성경에서 자주 하나님께서 지상으로 내려오시는 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내려오셨고, 바벨탑 건설하는 곳에 내려오셨다(창 11:5).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형편을 보기 위하여 내려오셨다(창 18:20-21).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51). 하나님의 임재 또는 강림하심은 죄인에게는 사망의 기별이지만 의인에게는 생명의 떡의 소식이다.



15절, 쇠와 놋줄로 동이고


나무를 베고 남은 그루터기를 쇠와 놋줄로 동이는 것은 보호를 위한 것이다. 즉 그루터기가 터지고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나무는 베어졌지만, 그루터기는 보존하여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한 번에 모든 것을 끝내시는 무자비한 분이 아니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라면 아마도 이 지상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출 34:6, 사 42:3, 마 12:20, 사 6:13).

그래서 의인은 완전히(일곱 번) 넘어져서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다(잠 24:16). 쇠와 놋줄은 족쇄를 만드는 재료였으며, 족쇄는 동물을 결박하고 묶어두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느부갓네살이 짐승처럼 살게 될 것을 상징하고 있다.



16절, 주석과 해설


마음

여기에서 “마음”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나무가 마음을 가진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마음이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았다고 하였으므로, 본래는 사람의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나무는 올바른 정신(사람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순찰자의 명령에 따라 짐승(짐승의 마음)처럼 살게 될 것을 나타내고 있다(시 49:20).


일곱 때

“때”는 아람어로 ‘잇단’인데 “해, 년(年)”를 나타낸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칠 년”으로 번역하였고, 대부분의 주석자들이 이에 동의한다. 일곱 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25절의 주석을 참고하라.



17절, 주석과 해설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4:13에는 단수형을 사용하였고, 여기서는 복수형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수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4:13에서 단수로 묘사된 것은 한 하나님이 세 분 하나님을 대표하여 내려오셨다고 볼 수 있다.


지극히 높으신 이

순찰자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그분의 뜻대로 누구에게든지 주신다고 말한다. 이 사상은 이미 2장에서 강조된 사상이었고, 느부갓네살이 그 사상을 잊고 자신을 높이고자 하였을 때 또 다시 주어진바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므로 끊임없이 사람들을 깨우치고 경고하신다. 그런데도 멸망의 길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이다(마 12:31). 이 죄를 다음 성경절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표현하였다(요일 5:16). 그렇다면 사망에 이르는 죄인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어떤 죄인가?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마 12:31의 주석을 참고하라.



18절,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


여기서 느부갓네살은 올바른 정신으로 진리를 말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빌 4:13, 합 3:19). 내가 살아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다. 창조로, 구속(救贖)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전 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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