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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6장 1절-12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 - 매일성경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전도서 6장 1절부터 12절을 통하여 전도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녀나 장수 그리고 재산이 우리의 행복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에 대해 묵상하고 새벽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전도서 6장 1절-12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


전도서 6장 1절-12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



1절, 주석과 해설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중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원형 ‘라브’은 ‘풍성한’, ‘충분하’, ‘증가하는’ 등의 뜻이나 본 절에서는 ‘(사람에게) 무겁게 압박하는’, ‘무겁게 임하는’이라는 뜻으로 유추되어 사용되었다(Moffat, Eaton). 영역본들도 이런 식으로 번역한다(weighs heavily, NIV, lies heavy, RSV). 그런가 하면 혹자는 이를 ‘일반적인’(common, KJV)의 뜻으로 보기도 한다(Luther).



2절, 주석과 해설


어떤 사람은 … 악한 병이로다

5장 말미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자들을 언급한바 있거니와(5:18-20), 여기서는 온갖 부귀를 지니고서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폐단을 소개한다. 왜 그러한 폐단에 빠지는가에 대해서는 본 절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갑작스런 재앙, 싫증, 혹은 과욕 등이 그 원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본 절의 ‘누리게 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칼’은 ‘먹다’, ‘소비하다’의 뜻이다(eat, KJV, NASB). 그러나 일부 영역본중에서는 이를 의역하여 ‘즐기다’(enjoy, VIV, RSV)는 뜻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일부 주석가들도 이를 지지한다(사 3:10, 렘 15:16 참조, G.A. Baton, E.A. Eaton).



3절, 주석과 해설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 낫다 하나니

구약에서는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다(창 24:60, 29:31-35, 30:1,2, 욥 27:14, 시 127:3-5). 그리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오래 살며 장수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다(출 20:12, 신 11:9,21, 31:20, 시 34:12, 49:9, 잠 10: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면’ 불행하다는 것은 외적 조건이나 환경보다 마음의 실제 상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준다. 또한 매장되지 못하는 것을 큰 불행으로 여기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사람이 죽을 경우 가나안 땅에 매장되어 하나님의 기업의 축복권 안에 계속 남아 있기를 바라던 열망에 비추어보면 훨씬 쉽게 이해된다(창 23:1-20, 25:8,9, 47:29,30, 50:12,13,25). 그리고 이스라엘인에게 있어서 매장되지 못하는 사실 자체는 매우 불행한 사태로 여겨졌으며(사 14:19,20, 렘 16:4,5 참조), 반면 열조의 무덤에 안치되는 것은 큰 영예로 여겨졌다(왕상 13:22, 사 14:18-20).



4절, 주석과 해설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 덮이니

‘헛되이 왔다가’란 어머니의 태 속에서 불행한 죽음을 당함으로 이 세상에 짧은 순간이나마 목적없이, 아무런 유익한 결과없이 존재한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어두운 중에 가매’란 ‘어두움 속으로 가매’(departs in darkness, NIV, goes into darkness, RSV, goes into ovscurity, NASB)의 뜻으로서 죽음의 영역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나’란 말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어떤 사람에 대한 단순한 호칭이 아니고 그 사람에 대한 인격 그 자체를 내포하고 있는 바, 낙태된 자가 어두움 속에 사라져 가버림으로 그의 존재 자체가 망가되어져 버림을 뜻한다.



5절, 주석과 해설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 평안함이라

낙태된 생명도 불운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살면서 온작 불행과 고통을 맛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뜻이다. ‘평안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하트’은 ‘안식’, ‘조용함’, ‘평온함’등의 뜻을 지닌다. 한편 본 절에서 전도자가 낙태된 자의 행복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서 그가 낙태나 죽음을 옹호하는 비관론자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전도자는 4:2,3등에서도 암시한 바와 같이 비관론적으로 언급한 것은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하는 인간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서 느낀 허무함을 염두에 두고 상대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4,5 참조).



6절, 주석과 해설


저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 아니냐

여기서 ‘천 년의 갑절’이라는 기간은 인류 초기의 인간들의 삶의 년수와 비교해 보더라도 엄청난 기간이라 할 수 있다(창 5:1-32). 이처럼 오랫동안 장수를 누리더라도 마음으로 진정한 낙을 누리지 못하고 고통의 세월을 보낸다면 낙태된 자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본서 가자의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낙을 누리는 길은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데 있을 것이다(5:18). 본 절에서 ‘낙을 누리지’의 ‘토바라아’은 문자적으로 ‘선을 보다’(have seen good, KJV)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말의 뜻은 본서에서 ‘토브’이 이 세상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며 낙을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을 감안하면 보다 쉽게 이해될 것이다(2:13,24, 5:18 참조). 또한 ‘한 곳’이란 3:20과 같은 말로서 구약에서 모든 인간들이 죽을 때 가는 곳으로 여겨졌던 ‘음부’(창 37:35, 욥 14:13, 시 89:48)를 가리키는 듯하다(Lange, Delitzsch, G.A. Barton, M.A. Eaton).



7절, 주석과 해설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 차지 아니하느니라

전반절은 전도자가 앞에서 인생의 가장 좋은 것을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한 내용과 연관시켜 볼 수 있다(2:24, 3:12,13, 5:18). 그러나 전도자는 단순히 이 세상 것만을 인정하고 영생이나 초월적 세계를 믿지 않는 유물론주의자나 이 세상 쾌락만을 추구하는 자와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 삶의 모든 축복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이다(5:18, 19 참조). 한편 ‘식욕’에 해당하는 ‘네페쉬’은 원래 ‘영혼’(soul)이란 뜻이다. 혹자는 여기서 ‘영혼’이란 ‘입’과 대조를 이루는 말로서 ‘입’이 육체적, 일시적 기쁨을 위하는 것이라면 ‘영혼’은 영적이며 영원한 즐거움에 의해 채워지는 것으로서 서로 비교되고 있다(Zöckler). 그러나 이보다는 인간의 지, 정, 의의 인격을 형성하는 중심으로서 ‘영혼’의 기능중 본 절에서는 감정적인 측면, 특히 음식에 대한 욕구와 관련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식욕(영혼)은 차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 속에는 진정한 기쁨은 단순히 음식, 물질따위의 외형적인 여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주되시며 모든 기쁨과 만유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2:24, 4:8 참조).



8절, 주석과 해설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 유익한고

원문에 의하면 본 절 서두에 연결사 ‘키’이 있는데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를 원인을 나타내는 연결사로 보나(KJV, RSV, NASB), 혹자는 ‘역시’의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ange). 어느 경우든 본 절이 앞절과 연관됨을 나타낸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한편 본 절에서 ‘지혜자’와 ‘우매자’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대해 어떤 이는 낙태되어 이 세상의 고난과 괴로움을 모르는 자와 부요하고 오래 사나 그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하는 자에 관한 앞 내용(2-7절)과 연관되어진다고 보기도 한다(G.A. Barton). 그러나 그보다는 이 질문을 바로 앞절, 즉 7절 내용과 연결시키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Lange). 즉 인간은 그의 입을 위하여 수고하나 그의 식욕(영혼)이 차지 아니하는 바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탁월한 처세술을 발휘하여 부귀와 명예를 누리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 중간격이라 할 수 있는 자들, 곧 비록 가난하지만 생활의 지혜를 늘 찾으려 애쓰는 자들도 있다. 물론 본 절에서 ‘지혜자’나 ‘우매자’란 하나님의 관점에서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를 가리키기보다는 인간 세상의 관점에서, 인간적인 지혜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9절, 주석과 해설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 것이로다

바라는 바 적은 것이나마 낙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머리속에 근사한 공상만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결국 이 또한 인생의 참 행복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혹자는 이와 관련하여 본 절의 ‘눈’이란 인생을 즐기고 만족을 발견하는데 필요한 신체 부분 중 하나라고 보기도 하며(1:8, M.A. Eaton), 다른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이 … 나으나’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이 나으나’(better is the enjoyment of what one has)라는 뜻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G.A. Barton). 그리고 루터(M. Luther)는 이를 ‘다른 좋은 것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현재의 좋은 것을 즐기는 것이 더 낫다’라고 번역하였다. 한편 ‘공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 ‘할라크’은 ‘걷다’, ‘이리저리 다니다’는 뜻인데, 영역본 NASB는 이를 ‘심령’(영혼)이라는 말과 연관하여 ‘영혼이 원하는 것’(what the soul desires)으로 KJV, RSV등은 좀더 의역하여 ‘욕망의 방황’(the wandering of the desire)으로 번역하고 있다.



10절, 주석과 해설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문자적으로는 ‘그 이름이 불리워진 바 되었으며’(has already been named, NIV, RSV, NASB)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성격이나 특성이 이미 규정되어 있으므로(M.A. Eaton)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스스로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일정한 질서와 법칙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을 암시한다. 한편 주석가 위클리프(Wycliffe)는 본 절이 어떤 것을 변화시키려는 인간의 자의적 노력이 전혀 무용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보기도 한다.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만물의 생성 소멸과 존재 법칙 및 인생의 모든 길흉화복을 주권적인 섭리로써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피조물이 반박하거나 대항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사 45:9, 46:10, 롬 9:20 참조). 또한 이 말 속에는 참된 낙을 누리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주권에 철저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맥상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11절, 주석과 해설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 유익하랴

원문에 의하면 본 절 서두에는 연결사 ‘키’이 있어서 본 절이 앞절과 연관되어 있음음 암시한다. 여기서 ‘일’이란 문자적으로는 ‘데바림’으로서 대략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된다. (1) 개역 성경처럼 ‘일(사건)들’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Hengstenberg, Ginsburg). 영역본 KJV도 이를 지지한다. (2) ‘말들’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M.A. Eaton, G.A. Barton). 이를 지지하는 영역본들로는 NIV, RSV, NASB등이며, 70인역(LXX)또 ‘말들’(로고이)로 번역하고 있다. 이 경우 이 ‘말들’은 10절에서 암시되어지는 바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다투는 무익한 변론의 말들을 뜻한다 하겠다. 그러나 (2)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에는 후기 연대설에 근거하여 본서의 내용이 구약 시대 말기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및 엣세네파 등이 인생의 예정된 운명과 그로 인한 인간의 행동 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토론들(바리새인들은 인간의 행동중 일부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자 운명에 의해 또 다른 부분은 인간 자신의 의지에 의해 행해지는 것으로, 사두개인들은 인간의 모든 해동들이 하나님의 예정이나 작정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해지는 것으로, 그리고 엣세네파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반대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에 의한 것으로 본다, Josephus)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나(Delitzsch, G.A. Barton) 일반적으로 본서의 저작 연대가 솔로몬 시대라고 보는 바, 이와 같은 논리 비약적인 주장은 그 근거가 불분명하다. 아무튼 본 절의 의미는 앞절과 연관시켜 볼 때, 연약하고 무기력한 인생이 모든 일들을 작정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스스로 행하는 것들은 전혀 무익하고 오히려 더욱 헛되게 함을 암시한다.



12절, 주석과 해설


헛된 생명의 모든 날

전도자가 인생을 이와 같이 규정한 것은 인간이 아담의 범죄 이후 정죄되고 사망 가운데 거하여(롬 5:16-21) 일평생을 헛된 수고와 근심 가운데서 보내기 때문이다(1:3, 2:23).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 생활을 하나 하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고후 5:16,17, 빌 3:21, 벧전1:1, 2:11).


그림자 같이 보내는

‘그림자’란 실체의 허상으로서 머물지 않고 쉽게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생의 날이 빨리 사라져 지나가는 것을 암시하는 비유적 표현이다(대상 29:15, 욥 8:9, 14:2, 시 102:11, 144:4 참조).


그 후에

‘그 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하라’은 ‘뒤에’(후에)란 뜻인데, (1) 죽음 후를 말하는 것인지(Delitzsch) (2) 단순히 알지 못하는 미래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나뉜다. 그러나 문맥상 (1)이 더 타당한 듯 보인다. 아무튼 본 절은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이 무지하고 연약하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지적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거나 그분을 거약하고는 결코 헛된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하겠다. 한편 신약에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인간의 연약함과 무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안개에다 비유했다(약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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