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큐티의 본문인 마태복음 3장 13절부터 4장 11절까지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과 말씀으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매일성경 큐티와 새벽설교 준비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3장 13절-4장 11절, 요단의 세례, 광야의 시험
13절, 주석과 해설
이 때에(토테)
세례 요한의 등장(1절)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재 접속사를 사용하여 전절과 적접 연결된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해 있을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 강에 이르러
이 장면의 평행 구절인 막 1:9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본서 2:23의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라는 말과 연결시켜 볼 때 예수께서 애굽에서 귀국하신 이래 계속해서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고 계셨음을 알 수있다. 한편 요단 강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톤’이 제시된 것은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지로 잘 알려진 요단 강의 바로 그 지점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행위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으며(눅 2:49), 요한이 메시아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듯이(11절)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서 무관하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가 이다. 이는 예수께서 개인적인 죄 의식을 느끼셨기 때문이(Bauer, Strauss) 아니고, 요한의 세례를 보증하기 위한 것도(Kuinoel, Kern) 아니고, 그가 율법에 복종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Hoffmann, Krabbe, Osiander)도 아니다. 예수의 수세(受洗)의 참 뜻은 말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요(15절, 신 6:25), 그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사 53:4-6) 위함이다.
14절, 주석과 해설
말려(디에코뤼엔)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저 한번 ‘말려보는’(코뤼오)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만류했음을 암시한다. 요한은 예수의 종교적, 윤리적인 우월성과 순결한 자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비천함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세례 요한은 30년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일(눅 1:39-45) 그리고 예수가 자기의 출생 사건보다 더 놀라운 출생 사건을 통해 태어났으며, 어린아이로서는 경이로운 성경 지식을 가졌었다는 사실(눅 2:41-52)을 알고 있었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직.간접의 지식보다 자신 앞에 서신 예수를 직접 대면하고나서 그의 탁월한 성결성과 영적 심화력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한은 성령의 하강(descent)하시는 신적 표적이 있기전까지는 아직 예수의 메시아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요 1:31-32의 평행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 받는 것을 만류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요한은 예수가 메시아이신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성령과 불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이 견해는 마태복음의 주제가 성령이 아니고 의(義)란 점에서 동감하기 어렵다. 예수의 답변을 보더라도(15절) ‘의’가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마태는 예수가 누구에게나 성령과 불의 세례를 주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춰 기록하고 있는것이다. 사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행 2장) 이후였기 때문에 마태는 성령의 세례가 주어진 것은 그가 기록하려는 시대보다 뒤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11:2-12에서는 세례 준 후에도 요한이 예수를 완전히 ‘알지’ 못하였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2)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라, 죄의 고백과 회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겸손한 인물로서 예수가자기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는 알고 있었으나 예수에게는 회개해야 할 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예수가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마태는 요한이 언제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의 무죄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세례 요한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요한이 흠(欠)이 있는 자신으로서는 순결 무흠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었다.
15절, 주석과 해설
이제 허락하라
본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초의 말씀이다. 여기서 ‘이제’(알티)라는 말은 특별한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요한의 반대(14절)가 원칙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제’(지금), 즉 구속사 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가 종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여야 했고, 그분이 스스로 벡성들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수세(受洗) 전부터 자신의 메시아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여하튼 메시아이신 주님만이 이러한 명령을 세례 요한에게 할 수있었다. 실로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킨 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예수께서 ‘나’라는 1인칭 단수 명사를 쓰시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 형태를 취하신 것은 예수와 요한, 곧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모든 의를 이루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이어지는 ‘이와 같이 하여’란 말은 단순히 세례와 같은 어떤 절차를 강조하는 말이라기 보다 모든 의를 이루기위한 순종의 자세, 또는 순종의 마음을 강조한 말이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의 세례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피 없으신 예수가 세례를 필요로 했는가?
마태복음 3:1-14에서 세례 요한을 소개한 마태는 드디어 세례 요한과 예수와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께 세례를 베풀고 자신에게 위탁된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역사에서 사라져 간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후부터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과연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있으셨을까? 요한의 세례는 죄인들이 받아야하는 회개의 세례였다.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시니 회개의 세례도 필요가 없으셨다. 그런데 왜 세례를 받으셨는가?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네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구속적 의미이다.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이 고백한 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다. 그분은 죄가 없었지만 우리의 죄를 지고 세례를 받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전혀 죄가 없는 분이었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셨고, 이제는 죄인이 회개하고 받는 세례까지 받으심으로 자신을 죄인과 완전히 동일시하는데 까지 낮추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심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루셨다. 예수의 세례는 그 모든 의를 이루시는 한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는 우리의 온전한 모본이 되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죄인과 같이 되셔서 우리가 밟을 계단을 밟으시고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을 행하셔야 했다. 그의 세례 그리고 그 후의 고난의 생애와 오래 참으심도 우리의 모본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죄인이 거듭나는 의식인 세례까지도 받아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 되셨다는 것이다.
셋째로, 세례가 죄인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분기점과 표가 되는 것처럼 예수의 세례도 이제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결정적인 표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사업을 인정한다는 공식적인 표였다. 그분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으며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 표라는 것이다. 예수의 세례는 이러한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한 절차였다.
넷째로, 예수의 세례는 상징적으로 그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물 속에 잠그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미리 체험하신 사건이라는 견해이다.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분이 감당할 구속사업을 몸소 체험하고 선언하셨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의"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의이다. 죄인이 받는 세례를 받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의 모본은 그 의를 이루는 한 부분이었다. 그의 세례는 우리가 따라야할 모본이기도 하였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엄숙한 선언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세례는 이제 그 의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선언임과 동시에 하늘의 공식적인 인정이기도 하였다.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무흠한 신성(神性)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분 곧 메시아에게 합당한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의 선상에 서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데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즉 공생애에 앞서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직의 자격과 능력이 구비되었으나 인간적 수준에서 또 인간들의 이해를 위해서도 교회의 선한 전승(inheritance)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수의 자세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16절의 성령 강림과 17절의 천성(天聲)을 통해 예수가 모든 의를 갖추신 자임을 공표(公表)하셨다. (2) 이를 통해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도래했음과 메시아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했다(요 1:31-34). (3) 회개, 세례가 필요없었던 예수는 수세를 통해 죄로 타락된 인간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켰고 우리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후 5:21). (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보이신 수세의 모범이었다.
16절, 주석과 해설
예수께서 … 곧 … 올라오실세
‘곧’(유뒤스)은 ‘올라오실세’(아네베)에 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세례받은 후 곧바로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 뿐 아니라 성령의 증거도 역시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그런 점에서 이 말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그가 물 속에 있지 않고 강둑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물에서 올라 오실세’란 말을 근거로 예수의 세례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례를 준다’는 뜻의 ‘배티조’란 단어는 원래 ‘잠그다’의 의미뿐 아니라 ‘물로 무엇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도 지닌다(막 7:4, 딛 3:5). 그리고 관용적으로 어떤 것에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접근을 통해 예수의 수세를 세례 또는 세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을 외면한 채 세례냐 세례냐의 어떤 외적 의식만을 절대적 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례의 참의미를 무시하는 형식주의적 독선이 될 수 있다. 한편 ‘올라 오실새’는 비둘기같이 ‘내려’(에르코메논)란 말과 연결되어 마치 땅과 하늘이 화답하는 것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하늘이 열리고(아네와데산 아우토)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환상들(사 64:1, 겔 1:1, 행 7:56, 계 4:1, 19:11)을 연상시킨다. 고대 신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표현은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비상(非常)하신 역사 개입이지 예수의 한낱 환상이 아니다. 한편 어떤 사본들(에브라임, 베자)에는 이 부분이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로 표현되어 하늘이 예수에게만 국한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그 누구도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때 예수의 선지자였던 요한은 하늘의 열림을 직접 목격했었을 것이다(Olshausen). 그리고 대중들도 하늘의 열림과 동시에 하늘로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창 3:24) 극히 부분적으로만 열렸던 하늘이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열려 하나의 새릅고 신비한 교제(交際)가 가능케 된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다.
비둘기같이(호세이 페리스테란)
여기 사용된 직유법은 성령과 비둘기를 명백히 관련시킨다. 즉 이 말은 성령 강림의 방식이 비둘기 같다는 뜻도 되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뜻일수도 있다. 누가복음에는 후자의 견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형체로’(소마티코 에이데이)가 첨가되어 있다. 한편 성령에 관하여 이와 같은 유추적 표현이 나오는 구약성경은 창 1:2 뿐이다. 탈무드(Talmud)에는 창1:2이 ‘하나님의 신은 비둘기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해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어느 합리주의자는 비둘기 한마리가 예수의 머리 위에 날개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것이 환상적 장면이든 아니든 분명 성령이 신인(God-Man)이신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 위에 임하신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의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후원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는 ‘예수의 참 인간으로써 합당한 은사인 성령을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디디셨다. 주관적으로 볼 때 신인을 연합시킨 성령이 육화(肉化)하신 말씀(예수) 위에 임하셨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비둘기는 성령의 교통하는 힘의 온유(11:29)와 순결(1:16)과 생명의 충만(창 1:2, 요 7:37-39)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은 예수의 품성과 사역의 특질과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
자기 위에 임하심
예수께 성령이 임하심은 시 45:7에 예언된 관유(灌油, 기름부음)의 성취였다. 실로 율법에 있어서도 흠 잡을 것이 없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한 나이 30세(민 4:3) 때에 공개적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심으로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서 취임하셨던 것이다(Luther). 여기에서 물과 불과 성령의 삼각 세례가 완성되었다(Alford).
17절, 주석과 해설
주석
헬라어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감탄사 ‘보라’(이두)가 문두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이두’는 어떤 사건의 중요성.급작성을 강조하거나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본문에서는 위의 두기능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하늘로서 소리
본문의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에 관해 어떤 학자들은 랍비 문학과 연관시켜 해석하려 한다. 즉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였던 영(靈)과 예언자가 잠잠해진 400년동안의 침묵기에 하나님의 영의 소리를 반영해 전달해 주는 수단을 통털어 히브리어로 ‘바트콜’이라 불렀는데, 번역하면 ‘소리의 딸’이란 의미이다. 물론 그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본문을 단순한 ‘바트 콜’, 즉 지금까지 있어 왔던 평범한 하늘의 계시정도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강력하다. 실로 이 ‘소리’(포네)는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침묵을 깨뜨리시고 다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계시이다. 결국 이것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요, 그것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였던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은 소위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 일컬어지는 사 42:1을 반영하고 있으며, ‘너는 내 아들이라’고 노래한 시 2:7의 변형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들려진 하늘의 소리는, 곧 그를 ‘고난받는 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는 내 아들이요’라는 말은 예수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도 하늘의 증거를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무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태의 주관심사가 아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내 아들’로 부르심으로 2:15을 확인하고 있고 다음 장에서 사탄에 의해 즉시 사용되게 된다(4:3, 6). 이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아들로 공적 인준(認准)을 받고 신격(神格)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 성령, 성삼위의 거룩한 해후(邂逅)가 이루어지며, 성부의 음성은 변화산상(17:5)에서와 수난기간(요 12:28)에 다시 들린다. 한편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 위와같은 하나님의 공적인 인준이 있기 전까지 육체에 속한 한 자연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예수가 하나님의 인준으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십자가 상에서 성부 하나님의 버리심을 고백(27:46)할 때에 그 신성이 다시 벗겨졌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요일 4:2,3). 그러나 이는 예수의 영원 현존성과 영원하신 신성을 간과한 이단적 견해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아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령을 반영한 용어인 ‘사랑하는’(아가페토스)이란 말은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일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기뻐하는’(유도케사)이 초시간적인 부정과거인 점으로 보아 이 ‘사랑하는’이란 용어는 심정적인 측면 뿐 아니라 ‘선택’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직역하면 ‘내가 그를 선택함으로 인해 기뻐하였던 자’이다. 이는 메시아를 시간이 있기 전, 곧 영원 전에 선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영원성을 강력히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요단 강에 성육신(Incarnation)하여 우뚝 서 계신 아들의 영원한 신적 선택의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정녕 아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아버지께서는 감추어진 방법으로 그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백성들의 대표자이며, 고난받는 종으로 동시에 나타내 보여 주셨다.
4장 1절, 주석과 해설
그 때에(토테)
문장의 서두를 이루는 말로서, 요한의 세례를 받고 성령이 예수에게 임한 후 즉시를 말한다(막 1:12, ‘곧’).
성령에게 이끌리어
예수를 잉태케 하신(1:20)성령은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거한(3:17) 후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도록 광야로 이끄신다(막 1:12, ‘몰아내신지라’). 이는 물론 외형상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예수께서 수동(passivity)적으로 인도당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것을 나타낸다. 즉 성자, 성령의 유기적 연합과 협력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류의 공동 대적(大敵)인 마귀에게 나아가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자, 성령께서 마귀에게 도전했다는 뜻이 아니다. 수세(受洗)와 관유(灌油)로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첫째 아담을 정복했던 사탄이 둘째 아담인 자신을 꺾어버리기 위해도 전해 온 것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이 도전을 극복함으로 비로소 예수는 하나님과 사탄의 공인(公認)을 받으며 참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마귀(디아볼로스)
이 단어는 엄격한 의미로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 ‘살인자’를 뜻한다. 70인역(LXX)에서 이 용어는 대적자, 저항자란 뜻의 히브리어 ‘사탄’(사탄)을 번역한 말이다. 따라서 마귀를 인종 차별이나 범죄의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Schweizer). 마귀 또는 사탄은 인간 타락의 원인이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대적하며, 땅 위에 어둠의 권세를 번식시키고 사람들의 파괴를 유도하는 타락한 영(靈)들의 왕이다. 그리하여 사탄을 일컬어 살인자(요 8:44)요, 악한 자(요일 5:19)요, 거짓말장이 (요 8:44)요,시험하는 자(살전 3:5)요, 참소하는 자(계 12:10), 미혹하는 자(계 20:10)요, 대적(벧전 5:8)이요, 이 세상 임금(요 12:31)이요,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 등으로 부른다(본문 강해참조).
시험을 받으러(페이라스데나이)
‘페이라조’(’유혹하다’)란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하는 사탄의 계략(고전 7:5, 살전 3:5)일 뿐아니라, 인간들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연단(창 22:1, 출 20:20, 요 6:6, 고후 13:5, 계 2:2)을 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은 전자의 어두운 면을 내포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생 결단(死生決斷)의 시험이었다. 실로 사탄은 인간을 악에 빠지도록 유혹(temptation)할 뿐 아니라(계 12:10-12),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악한 존재이다(창 3:1-5). 바로 그 파괴적 실체인 사탄이 예수께 한낱 대리자를 보내지 않고 자기의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 예수를 시험하였다.
광야
성경 문학적으로 ‘광야’란 귀신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곳(사 13:21, 34:14, 마 12:43, 계 18:2)이다. 그런데 이곳의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 처소인 시내 산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Alford), 다볼산(외경, ‘히브리인의 복음’) 내지는 여리고 근처의 전설적인 시험의 장소로 보기도 한다(수 16:1, De Wette). 그중에서 시험받은 장소가 세례 받은 장소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 지역을 그리스도의 ‘40일 금식’ 지역(Quarantania)으로 명명(命名)하였다고 한다.
2절, 주석과 해설
십 일을 밤낮으로
‘40이란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징벌과 고통, 인내와 완성, 인간 한계의 최대치,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특히 이 숫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 예수의 40 주야에 걸친 금식은 이스라엘의 40년 방랑(신 8:2)과 연결되며, 또한 그 기간은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출 34:28, 왕상 19:8)과 관련되어진다. 소수 비평가들은 ‘40’일을 신성수(神性數)라 하여 무한한 기간으로 해석하나(Köster, Henneberg, Nender), ‘밤낮’이라는 어구의 추가로 보아 문자적인 ‘40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과 예수는 이 40일 기간 동안 모두 굶주림으로부터 신령한 교훈을 얻었고(신 8:3), 광야에서 대업(大業)을 준비하기 위한 시련을 겪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후,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각각 주어진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려고 시험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실패하였고 실패한 이스라엘을 구원키 위해 오신 예수는 완전한 승리로 40일을 마감하셨다. 한편 그 때에 사탄의 시험이 40일 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Lenski, Alford). 그러나 마태복음은 금식 후에 시험을 받으신 것으로 되어있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취하고 있다.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예수께서는 40일 밤낮동안 모든 음식을 전폐하고 육체적 소욕을 철저히 제어(control)하셨다. 아마 이 기간 동안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의 세계로 들어가셨을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금식하는 기간동안에 모세와 같이 영적 무아경(a spiritual ecstasy) 속에 지냈으며, 육체적 욕구는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Alford, Robertson, Lange 등). 어쨌든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음식의 결핍에서 오는 식욕의 고통과 그로 인한 육체적 쇠약을 철저히 감내해야만 하셨다. 실로 그리스도는 세상의 금식 정신과는 달리 금욕과 고행을 위해 주리실 필요가 없으셨다(M. Henry). 다만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키시고, 당신의 공생애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시려 이 육체적 극기 기간을 할애하셨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곧 그의 양식이었다(4절). 따라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제에 열중한 나머지 시장기를 잊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먹이신 것과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예수를 먹이셨던 것이다. 하지만 금식 기간이 끝난 후에는 심히 주리셨고 식욕의 고통으로 인해 그분의 육체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던 것 같다. 간교한 사탄은 바로 이와 같은 결정적인 유혹의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Godet).
3절, 주석과 해설
시험하는 자(호 페이라존)
사탄의 성격을 나타내는 별명이다. 이용어는 신약 가운데 여기서 처음으로 사탄이 죄짓도록 유혹하는 사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사탄이 예수에게 접근하여 시험한 방법에 대한 학설은 대단히 많다. (1) 예수를 시험하는 제사장들을 마귀로 본 것이다(V. der Hardt, Venturini, Moller, Rosenmüller, Kuinoel, Feilmoser). (2) 마귀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Origen, Cyprian, Theodorus, Olshausen, Heubner) . (3) 하나님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Famer). (4) 예수의 상상에 의해서 생긴 갈등(Eichhorn, Dereser, Weisse). (5) 마귀에 의해서 자극된 예수의 갈등(Krabbe). (6) 예수의 내적생활에서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Neander). (7) 예수 자신이 경험치 못한 것을 비유적인 이이야기로 꾸민 것(Schmidt, Schleiermacher, Usteri, Alex, Schweizer, Baumgarten, Grusius) (8) 순수한 신화(Strauss, De Wette, Gfrorer, Meyer)이다. (9) 자연 현상(Clericus, Paulus, Gratz)이다. 위의 많은 학설들은 보편주의적인 세계관과 잘못된 그리스도관에서 비롯된 것들로서 기독교의 순수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메시아에 대한 그릇된 세속적 기대를 이용한 사탄의 공격 중에서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사건이라 해야 하며, 이 시험은 마귀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 대항한 사탄은 사람이나, 천사 등의 모양을 하고 가시적(可視的)으로 출현했던 것으로 이해된다(대부분 보수 주석가들).
나아와서(프로셀돈)
이 말은 거리상 가까이 접근한다는 뜻으로 사탄의 가시적 실재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첫 시험은 떡을 만드는데 부적당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고무(encouragement)하는 것(Morison)이 아니다. 그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어긋나는 방법으로 아들의 능력을 사용하게 하려는 유혹이었다. 사탄은 자신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의심했거나(Clarke) 또는 예수에게 의심하도록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는 ‘에이’으로 시작되는 본문의 조건절 형태가 그 절 안에 계시된 내용을 일단 사실이라고 규정한다는 묵시적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탄은 예수의 메시아성을 의심했다기 보다 그 다음의 시험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이 질문을 했던 것이다(Homer A. Kent, Jr). 즉 마치 십자가에 처참하게 매달려있는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고 조소한 것처럼 사탄의 목적은 예수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유혹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해 이 칭호가 말하는 의미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심각한 논쟁이 있어 왔던 문제이다. 가장 기본적인 이해는 성육신하신 주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눅 1:32, 요일 5:18). 그러나 이 칭호에는 그처럼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1. 하나님의 아들(들) :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자녀(들)는 세 형태의 인격체를 지칭한다.
(1) 하늘 존재들은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하늘 회의에서 여호와를 만난 하늘 존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렸고, 창조의 때에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다”(욥 38:7). (2)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들”이라고 불린다(신 14:1, 호 2:1, 사 45:11). 하나님의 백성은 창조와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출 4:22-23). (3)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다(예를 들어, 삼하 7:14). 하나님께서는 왕을 “나의 장자”로 지명했다(시 89:27, 참고 시 2:7). 왕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임명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런 사례로 보면 “아들”이라는 용어가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연 수정과 출생을 통해 자녀로 삼지 않는다.
2.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들 되심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바울은 이렇게 적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 그리스도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선재하신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히 1:2).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은 독특하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에게서 영적으로 태어났지만 아들은 하나님에게서 영적으로 태어났다고 결코 묘사되지 않는다.
그분은 아들이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직접 오셨다(요 16:28). 그분은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며 의지에서(요 14:31, 15:10), 품성에서(요 14:8-11), 목적에서(요 15:16, 16:15, 17:4-8), 본질에서(요 8:58) 아버지와 하나 되신다. 그러나 그분은 별개의 인격체이시다. 우리는 “아들”이라는 말을 은유적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3. 은유적 의미 : 우리 인류 사회에서, 아들의 형상은 몇몇 분명한 사상을 전달한다.
(1) 아들의 본질은 부모의 본질과 동일하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릴 때, 우리는 아버지와 같이 그분도 신적 존재라고 말한다(요 5:18).
(2) 자녀는 부모와 구별된다. 아들의 비유는 비록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본질이 동일하더라도, 그들은 별개의 인격이며 이것은 신성 내에서 복수의 인격이 함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3)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는 독특하다. 그들의 연합은 실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비유는 신성의 구성원들 안에 존재하는 깊은 연합(요 17:5)을 위한 훌륭한 상징이다.
(4) 사람의 아이는 자연 출생을 통해 부모에게서 온다. 그렇지만 신성의 경우에 아들은 신적 유출이나 자연 출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창조와 구속 사업을 행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기인된다(요 8:42, 16:28).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영원히 생성되었다는 성경적 근거는 전혀 없다.
(5) 지상의 아버지-아들 이미지는 신성 안에서의 하나님 아버지-아들 관계에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자연적 아이는 시작이 있다. 반면에 신성 내에서의 아들은 영원하시다. “아들”이라는 용어는 신성에 적용할 때 은유적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신성 내에서 인격들을 구분하고, 영원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본질이 동등하다는 사상을 전달한다.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
이 요구를 통해 마귀가 예수의 신성(神性)을 의심하는 듯한 질문을 하게 된 음흉한 저의(底意)가 드러났다. 즉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당신이 지닌 메시아적 권능을 메시아직의 수행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 당신이 당면한 개인적 문제(허기)를 해결하는대 먼저 사용하라는 유혹을 한 것이다. 이때 만에 하나라도(사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돌들로 떡을 만들어 잡수셨다거나 십자가에서 떠나버리셨다면 그분의 사명과 하나님의 뜻에 함축되어 있는 성육신을 통한 자기 비하(卑下)를 부인하는 것이된다. 이스라엘은 먹을 것을 요구하여 허기진 배를 채웠으나 대부분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는 먹을 것을 거부하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의(義)를 유지하였고 인류에가게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실 수 있었다. 한편 그 당시 사탄이 제시한 ‘돌’은 빵과 같은 모양의 화석(Farra), 또는 석회질의 덩이, 철광석(Page), 아니면 둥글고 매끄러운 돌(A.T. Robertson) 등으로 추측한다. 어떤 재질, 모앙을 하든 그것은 손으로 집어 들을 수 있는 크기의 것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떡’(아르토이)은 유대인들이 일상 음식으로 먹던 둥근 접시 크기 정도의 밀로 만든 구운 빵(loaves)을 가리키는것 같다(Thayer).
4절, 주석과 해설
기록되었으되(게그라프타이)
원뜻은 ‘정확하게 새기다’며 완료수동직설법으로 사용된 본문은 ‘기록하여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성과 영원 효력성을 강조한 말로서 결국 본 절은 마귀의 궤계(craft)를 능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정확무오하게 기록되었으며(딤후 3:16, 벧후 1:20, 21),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히 4:12)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음을 시사해 준다(엡 6:17). 한편 예수의 답변은 모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다. 여기서 예수의 겸손과 성경에 정통하신 지혜가 뚜렷이 드러난다. 우리 신자들도 삶에 어려운 시험이나 곤경이 닥쳐올 때에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를 본받는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갖춰야 할 것이다.
사람이 …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8:3을 인용한 것으로서 본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던 내용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종, 인자, 그리고 오실 자(에르코메노스)에 적용되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씀’이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양식과 관련되면서 예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즉 예수는 ‘떡’만을 강조하는 사탄에게 땅의 양식과 하늘의 양식을 대조하여 ‘사람’(호 안드로포스)의 존재 양식(存在樣式), 즉 사람의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지탱할 수 없다는 진리를 들어 공박(攻駁)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떡으로 ‘만’(우크 모노)이라는 제한적 용법을 사용하심으로써 육체적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떡’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접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것보다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풍요한 땅 에덴에서 성공했던 사탄의 시험이 불모의 광야에서는 실패했다. 우리는 성경에서와 창조 후 인류 역사 속에서 일시적인 ‘떡’문제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수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다. 그러므로 성도된 자들은 응당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물질 생활의 헛점을 파고 드는 사탄의 교활한 시험을 처음부터 근절(根絶)시켜야 한다. 한편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out) 모든 말씀’은 성경 저자들의 귀에 들어가(in) 영감(inspiration)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단순히 문자화된 경전(經典)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원(元) 목적에 따라 인간의 삶을 주장하는 생명력 있고 창조적인 ‘하나님의 말씀’(레마 데우)그 자체인 것이다. 이말씀이야말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유지케 한다(Trench).
5절, 주석과 해설
데려가다(파라람바네이)
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마귀가 예수를 강압적으로 끌다시피하여 목적지로 나아간 것을 가리킨다.
거룩한 성 …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 ’이라 기록한 누가의 보고(눅 4:9)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확실하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가 어느 곳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뱅겔(Bengel)은 이곳이 지성소 꼭대기라 한다. 헤게시푸스(Hegesippus)를 인용한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소 꼭대기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가 뛰어내렸다고 전한다. 몇몇 학자들은 기드론 골짜기를 향한 면에 설치된 솔로몬 행각의 난간 또는 꼭대기를 가리킨다고 하며, 또 다른 많은 학자들은 ‘꼭대기’률 뜻하는 ‘프테뤼기온’이 ‘작은 날개’를 의리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곳을 ‘작은 날개’라 불리우는 헤롯 궁전의 남쪽 망대라고 한다(Meyer, Alford, Thayer, Vincent 등). 이곳은 성전 외곽 건물에 속한 것으로서 요세푸스(Josephus, 고대사, XX, 9, 7, XV, 11, 5)는 그 꼭대기가 골짜기의 바닥에서 보면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높이 솟아있었다고 전한다. 여하튼 그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으나, 해발 750m 고지에 형성된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에서 깊숙한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은(6절) 분명 마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할수 있다. 실로 본래의 악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는 마귀는 자신을 종교적인 모습으로위장하고 성전의 권위를 가진 자로 나타나서 예수를 극구 초대하여 그분의 메시아성에 오점(汚點)을 남기려 했던 것이다(Lange).
세우고(에스테센)
이 말은 앞의 ‘데려다가’란 말과 조화롤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주관할 수 있는 권세가 ‘시험하는 자’(3절)에게 주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욥처럼 사탄의 세력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시험에 끝까지 응해야했다. 한편 예수의 성전에로의 이동은 감각적이거나 상상이 아니라 신체상의 직접적 이동이었다.
6절, 주석과 해설
뛰어내리라
깊은 심연(深淵)의 낭떠러지로 ‘스스로 네 몸을 날려보라’는 의미이다. 이는 마귀의 음흉한 유혹으로서, 만약 예수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뛰어내린다면 그것이 곧 허영과 야심으로써 메시아를 고대(苦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확실한 표징이 되지 않겠느냐는 유혹이다. 이는 결국 예수의 메시아성을 익히 알고 있는 마귀가 예수께 희생의 길을 걷기보다 세상적 환대와 영광을 누리는 영웅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이제 사탄의 공격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그 아들이 신뢰하는 하나님의 보호, 이 두 사실에 집중되었다. 여기 마귀가 인용한 성경은 70인역(LXX)의 시 91:11, 12 부분으로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절대적인 보호를 노래한 시(詩)이다. 여하튼 마귀는 그 간교한 방법, 즉 예수의 대응에 대하여 선수를 칠 요량으로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의 손에서 성령의 검(엡 6:17)을 나꿔채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귀는 한 구절 빠진(’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하나님의 말씀’(시 90:11, 12)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 교활한 속임수를 사용했다. 한편 여기서 ‘손으로 받는다’는 표현은 적극적이고도 유효 적절한 도움을 제공한다는 뜻으로 마치 유모(乳母)가 아이를 돌보듯이 감싸 안는 듯한 상황을 예감케한다. 이같은 편안하고도 절대적인 안전을 약속한 이 인용 구절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특별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에게 적절하게 적용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표적(表蹟)에서 찾고 있었으므로(행 8:9 참조) 마귀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예수에게 허영적 명예심을 고무시키려 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마귀의 감추어진 음모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하신다는 신뢰를 증명하게 하여 마치 이스라엘이 물을 요구함으로써 ‘여호와를 시험하였던’(출 17:2-7)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저지르도록 유흑하는 것이었다.
7절, 주석과 해설
또 기록되었으되
마귀의 사기 행각(6절, ‘기록하였으되’)에 대한 예수의 정확한 답변이다. 그러나 이는 앞말을 부정하여 앞의 성구(그것이 비록 마귀가 인용한 것일지라도)를 예수께서 답변하신 뒤의 성구와 모순되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또’(팔린)라는 용어가 결코 반대의 의미를 갖지 않고 오히려 부가(附加)적 설명구에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로 예수의 인용은 마귀가 사용한 성경구절을 부인 또는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해석하는 원리를 보여주셨다(Bruce). 실로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고 또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통적인 성경 신학자들의 견해이다(Bengel, Calvin, Luther, Scriptura explicanda est). 신앙에 실패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성경을 모순투성이로 만들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벧후 3:16).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말라
예수는 보호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위한 것이지, 우리의 가정(假定,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인용한 70인역(LXX)에 의한 신 6:16은 출 17:1, 7의 므리바 물사건에 근거한다. 그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실로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증거로 그 약속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의심하여 그분께 기적적인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자세는 신뢰와 순종인 것이다(신 6:17).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여(창 3:1, ‘하나님이 참으로 … 말라 하시더냐’) 하와로 하여금 동시에 하나님을 시험하도록(창 3:3,’죽을까 하노라’)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8절, 주석과 해설
지극히 높은 산
누가복음에는 이같은 기록이 없다(눅 4:5). 어떤 학자들은 이 산을 헬몬산 내지 모세가 가나안 땅을 지켜보았던 느보산(신 34:1-3)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단지 육신의 눈으로 모든 나라를 보실 수 있는 산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천하 만국의 영광’은 가시적(可視的)인 것이 아니며, 누가복음에서는 이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심리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하겠다. 따라서 이곳은 천하 만국의 환상을 보기 위해서 설정된 장소 이상의 의미는 없는 듯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귀와 시험의 객관적 실재(實在)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
‘만국’을 유대 땅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Clarke). 사탄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이방 세계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De Wette, Meyer). 또한 이곳은 글자 그대로 유대와 이방을 통칭한 모든 세계로 여겨지기도 한다(Bruce). 그러나 ‘천하 만국’을 지도상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이곳은 초자연적 개념을 내포한 통치권에 관계된 모든 세계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보신 ‘천하 만국’이 상징적이거나 허구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자기가 넘겨 받았다고 주장하는(눅 4:6) 세상의 모든 쾌락과 통치권의 실체를 예수에게 실제(實際)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은 모든 세상의 영화(prosperity)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에 뿌리박고 있는 사실을 뒤로 감추고 그 ‘영광’만을 보여주고있다. 실상 예수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오신것이지 ‘영광’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전자(the former)를 버리고 후자(the latter)만을 취할 수 있다는 유혹이 온 것이다. 훗날 베드로가 이와 유사한 제안을 했을 때 예수께서 그처럼 단호하게 꾸짖을 수 있었던것도 바로 이 시험의 의미를 아시고 그것을 능히 극복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6:23).
9절, 주석과 해설
경배하면(프로스퀴네세스)
이 동사는 지체 높은 지배자들, 특히 종교적 숭배와 예배로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리는 동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탄은 세상의 최초 창조자도 아니고 종말론적 왕국의 최종 창조자도 분명 아니다. 더욱이 그가 잠시 행사하고 있는 악의 세력은 제한된 것이고 그는 곧 멸망할 존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경배’를 요구한 것은 자기 실체를 완전히 오해한 자가 당착(自家撞着)이다. 더욱이 그 같은 요구는 왕으로 만들어 준다는 미명아래 예수를 자기 수하로 삼아 예수에게 약속된 나라와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간계(奸計)였다. 쓴 잔 대신 단 한 번의 절(bow)이면 된다는 사탄의 거짓 제의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는 속담을 연상시킨다.
네게 주리라
마귀는 마치 자기가 ‘천하 만국’의 정당한 소유자이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 통치권을 주신 것처럼 말한다(눅 4:6,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사실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요(요 12:31, 14:30, 16:11), 공중의 권세잡은(엡 2:2) 타락한 신(고후 4:4)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권세를 실현할 수 있는 흑암의 세력이며, 끝날에 형벌을 받게 될 불법적 치리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에게 무릎 꿇는 조건으로, 즉 고통을 감내(endurance)해야만 하는 십자가 형벌로서가 아닌 영광스럽고도 편안한 방법으로 세계의 지배권을 예수께 주겠다는 것이다. 한편 이 횡령자로부터 선물을 받은 자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롬 13:1) 하나님께 경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 마귀의 횡령에 대한 공범자인 것이다. 오늘날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여 하나님을 떠나서도 인본주의적(humanistic)인 유토피아(’천하 만국과 그 영광’)를 건설할 수 있을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으나 실상 그 대가는 유다에게 준 은 30에 불과하며 마침내는 자기에게 주어졌던 모든 소유와 권리들을 박탈당하고 그들을 사주(使嗾)한 사탄과 함께 영원히 멸망받을 것이다.
10절, 주석과 해설
사탄아 물러가라(휘파게 사타나)
시리아 사본(Syrian)이나 서방 사본(the Western)에는 16:23의 영향을 받아 ‘오피소 무’, 곧 ‘내 뒤로’라는 말을 첨가하여 예수의 단호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여하튼 이 말씀은 더 이상 사탄과의 교류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결연(決然)에 찬 예수의 명령이다. 예수께서는 이때까지 ‘기록된’ 말씀 외에 자신의 말씀은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으셨으나 사탄의 시험이 하나님의 권위에까지 침범해 오자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셨다. 특히 예수께서 마귀의 개인적 이름(personal name)인 ‘사탄’이라고 한 것은 그의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대적자’(12:26, 막 1:13, 3:23, 26, 4:15, 눅 22:3, 요 13:27 등)로서 그의 성격을 마지막 시험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제 점차 확장되는 메시아 왕국이 사탄이 구축했던 왕국을 점진적으로 파멸시킬 때가 다가 온 것이다(12:25-28, 눅 10:18). 물론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적(敵)인 사탄이 파멸되는 그 결정적인 날은 ‘곧’ 올 것이다(고전 15:25, 26).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 섬기라
마귀에 대한 마지막 치명타도 역시 ‘기록된 말씀’이었다. 예수는 사탄의 제안이 모든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한 제 1계명과 제 2계명을 거역함으로 하나님만이 경배(worship)의 대상임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예수가 인용한 신 6:13은 유일신(唯一神)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한편 여기서 ‘경배’(프로스퀴네세이스)란 상대방의 손등에 입술을 맞춤으로써 예(禮)를 갖추는 행위이다. 한편 70인역(LXX)이 번역한 히브리어 원문에는 경배란 의미보다 좀더 종교적이고 강조적인 ‘티라’, 곧 ‘경외’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섬김’(라트류세이스)이란 원래 고용된 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예배하다’(롬 9:4), ‘헌상하다’(히 9:9)는 뜻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경배’와 ‘섬김’, 이 두 단어는 상호 교호적(交互的)인 것으로 상대방을 경배한다는 것은 상대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을 포함한다. 실로 모든 사람들은 ‘다만’(모노) 하나님만을 섬겨야(shall serve) 되는데 그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시요, 그분만이 진리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11절, 주석과 해설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예수의 권위 앞에 마귀는 참패한채 그분에게서 패퇴(敗退)해 갔다. 여기서 ‘떠나고’(아피에신)는 현재 시제로서 누가복음의 ‘얼마 동안’(눅 4:13)과 같이 ‘적당한 시기까지’ 떠남을 의미한다(Hill). 그러나 마귀는 떠난 것이지 멸망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심혈을 기울인 공격에서 패주(敗走)한 마귀는 다시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의 성역 완수의 길을 단념시키려 했으며(26:36-46), 그의 추종자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예수를 죽게 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최후의 패배로 인하여 영원한 불못에 던지워질 때까지(계 20:10) 그리스도의 왕국을 붕괴(崩壞)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헬라어 원문에는 개역 성경이 번역치 않은 ‘카이 이두’이 문두에 제시되어 이어지는 상황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한편 마귀가 ‘떠났을 때’ 천사가 ‘나아온’ 것과 같이 우리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천사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서 ‘수종들다’의 ‘디에 코눈’은 미완료시제로서 음식을 공급하는 등의 게속적인 도움을 준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8:15, 25:44, 27:55, 왕상 19:6, 7). 따라서 이때 천사들은 아마 40일간의 금식 및 마귀와의 치열한 영적 전투를 치르고 기진(氣盡)한 예수의 피곤한 육신을 위해 위로하기도 하고 또한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에게 처럼(왕상 19:6, 7) 식물로서 수종(隨從)들었을 것이다(Bengel, Bruce, Alford, Lange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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