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4장 12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힌 이후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일하는 어부들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라고 부르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강해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 12절-25절, 나를 따르라
12절, 강해 주석과 해설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요한의 잡힘’에 대한 상세한 내력은 14:1-12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결심했을 때를 가리키는 대략적 시점을 표시하기 위해 침례 요한의 체포 사실만이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들으시고’(아쿠사스)는 ‘들었기 때문에’라기 보다는 ‘들었을 때’를 의미한다. 전후 문맥으로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히기 전 얼마동안 유대 지방에 머무시면서 침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회개에의 메시지를 전파하고(17절, 막 1:15), 침례를 베풀었다(요 3:22). 그러나 침례 요한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예수의 사역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되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마태는 요한이 투옥된 때부터 예수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 같다.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물러가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코레인’은 종종 위험에 직면했을 때의 두려움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에서는 어떤 위기의식에 따른 장소적 이동과 한적한 곳에서의 ‘은거’(隱居)를 동시에 의미한다. 그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는 분봉왕 헤롯 안디바스가 다스렸던 곳으로, 예수의 고향 동네이자 멸시받고 소외된 지역이었기에 선교지로, 또한 은신처로 적합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유대의 중심지인 예루살롑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의 갈릴리’(15절)에서 시작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갈릴리
팔레스타인의 가장 북쪽에 있는 지방으로 히브리어로는 ‘고리’, ‘주변’을 의미한다. 가나안 정복후 갈릴리 지방은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에 분배되었다.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에게 성전 건축 자재들을 공급한 대가로 갈릴리의 성읍 20을 준(왕상 9:11) 이후로 이 지방은 앗수르(왕하 15:29), 바벨론, 바사(Persia), 마게도냐, 애굽, 수리아에 의해 차례로 정복되고 포로와 이민족의 이주가 되풀이 되어 혼혈 인종, 혼합 문화를 형성하였다. 또한 지중해 연안 지방에 널리 유행하고 있던 혼합 종교들과 제사가 갈릴리 지방에 유포(流布)되어 유대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웠으며, 따라서 갈릴리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지 못할 것이라고(요 7:41, 52) 여겨져 왔다.
13절, 강해 주석과 해설
나사렛을 떠나 …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본 절에는 이 일에 대한 동기가 분명치 않으나 누가복음에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배척한 때문인 것으로 되어 있고(눅 4:29-31)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갈릴리 정착에 대한 이유로 갈릴리 사람들의 영접(요 4:45)을 들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가버나움에로의 이거(移居)는 예수의 사역 목적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가버나움이 갈릴리 해변의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며, 동방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무역 통로에 위치하여 예수의 사역에 용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은 바로 참빛을 절대 필요로 하는 흑암의지대로서 예수 선교에 있어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의 갈릴리 선택은 유대인들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일로 비쳐졌으며 그들의 눈에는 메시아 사역의 최적지(最適地)가 유대 땅 특히 예루살렘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가 가버나움으로 이거함로써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옛 지경(地境)과 관련된 예언이 성취되었으며(15, 16절), 예수의 이중 사역, 즉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아적 사역(눅 4:18, 19)에 갈릴리 지방이 더 적합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가버나움
신약에만 나오는 곳으로서 ‘나훔의 동리’라는 뜻이나 구약의 선지자 나훔과 관련이 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이 성읍의 소재(所在)에 대해서 전에는 ‘칸 민예’(Khan Minyeh)라고 생각되어 왔으나(Stanley, Carr) 1931년의 유적 발굴 결과 아랍인이 지은 우마야드(Umayyad) 궁전의 폐허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가버나움은 칸 민예에서 4 km 정도 동북쪽에 위치한 ‘텔 훔’(Tell Hum)으로 인정되고 있다(Thomson, Robinson). 이곳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 해안에 위치하여 어업이 번창하였고, 동서 상업로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이곳에 세관이 있었고(막 2:14)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마 8:5-8). 또한 가버나움은 예수의 제자 중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이었고(8:14, 막 1:29), 본서의 저자인 마태도 이곳이 고향인 듯하다.
15절, 강해 주석과 해설
스불론 땅과 … 갈릴리여
여기서 영토의 범위를 표시하는 5개의 고유 명사들은 ‘백성’(호 라오스)과 동격으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들은 과거에 혹독한 압제와 재난을 당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적, 사회적인 속박에서 해방되어 큰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 중에, ‘스불론’과 ‘납달리’는 그곳 각각의 지명을 강조한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상(上) 갈릴리’ ‘하(下) 갈릴리’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해변길’(호돈 달라쎄스)이란 70인역(LXX)의 사 9:1 에 언급된 표현으로서 히브리어 ‘데레크 얌’ 곧 ‘바다쪽으로’란 말을 축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다로 가는 길’이라기 보다 ‘바다 옆’ 곧 갈릴리 해안 지대로 보는 것이 좋다(Turner). 그리고 ‘요단 저편’이란 갈릴리 동쪽 해안 지대로서 앗수르 침공시 납달리가 곤혹을 치뤘던 곳이다(왕하 15:29).
16절, 강해 주석과 해설
흑암에 앉은 백성
‘백성’(호 라오스)이란 말은 ‘나라’, ‘이방인’을 의미하는 ‘타 에드네’과 구별되어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15절에 언급된 지방에 ‘앉은’(히브리어적 의미로는 ‘행하던’으로 볼 수 있다) 백성들, 즉 멸시받고, 영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갈릴리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스라엘의 영토 중 ‘흑암의 지경에 행하던’ 땅, 곧 종교적, 정치적 이점(利點)이 없는 가장 어두운 지역이 이제는 참 빛이신(요 1:9)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흑암’이라는 말은 ‘빛’, 즉 ‘하나님의 진리’의 부재(不在)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것은 참 복음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그들이 놓여 있던, ‘사망의 땅과 그늘’이 드리운, 곧 죽음과 절대 절망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소망이 무너진 상태에 ‘앉아’(카데메노스. ‘계속적으로 거주하며 살다’는 뜻) 절망 속에 헤매었으나 자신들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그러한 흑암 속에서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말 4:2) 그들에게 빛을 비추었던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비취다’(아네테일렌)는 ‘특별한 예언에 따라 특정한 지역에서 제일 먼저 찬란히 빛났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참빛이 다른 지역에서가 아닌 ‘이방의 갈릴리’에서 제일 먼저 눈부시고아름답게 ‘발’(發)했다는 뜻이다. 유대인의 형식주의와 율법적인 의의 빛이 폐기되어 버리고 본래의 참 빛(요 1:9)이 높이 솟아 가장 어두운 곳을 가장 먼저 가장 찬란하게 비추고 있는 것이다.
17절, 강해 주석과 해설
이때부터(아포 토테)
본서에 세 번 발견되는(16:21, 26:16) 이 용어는(눅 16:16) ‘특별한 시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예수 생애의 주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전에 유대에서 활동하셨지만) 갈릴리에서 본격적이고도 지속적인 그의 공적사역을 이제 드디어 시작하신 것이다.
전파하여(케륏세인)
이 용어는 본래 전령자, 또는 선구자(케류스)의 역할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전파하다’, ‘선언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지식에 대한 설득, 토론이나 또한 어떤 유(類)의 논쟁이나 공격을 허용하는 이론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도래하는 천국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이며,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명하시는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지체없이 전하는 것이다. 한편, 말씀(로고스)과 진리(알레데이아, 요 14:6)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전령자’(케류스)가 되셔서 전파하심으로 침례 요한의 그것(3:1)과는 달리 그 가르치시는 것이 더욱 권세를 지니게 되었다(17:29).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요한의 선포(3:2)와 동일하다. 그러나 요한의 선포 내용이 구약적 맥락과 관련하여(사 40:3) 자신이 메시아와 그의 왕국에 대한 선구자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임에(3:2-12) 비하여 예수의 선포는 자신이 바로 메시아로서 이방의 갈릴리에 큰 빛을 비출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사 9:1,2)의 성취라는 사실과 연결되고 있다(Schweizer)는 점에서 그 내용상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부언하자면, 요한의 ‘가까이 온’ 천국은 아직도 미래적인 것에 그친 반면에 예수의 천국은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깃들어 있고(Auto Basileia, Origen), 그의 인격이 곧 실현된 왕국(C. H. Dodd)이며, 그의 메시지와 행동이 곧 생동하는 신국의 표징(M. Dibelius)이라는 측면에서 ‘가까이 왔고’(엥기켄), 또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인류에게 진정한 구원과 천국 기쁨을 허락하사 당신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이 이제 곧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요한은 모세가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그는 천국의 실체를 단순히 소개하고 전파하는 역할만을 수행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계승하여 그 백성들을 축복의 땅으로 인도한 것처럼 갈릴리 전지역으로 자신의 사역을 확대하여 천국의 실체를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의 천국 선포를 인계하여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편만(遍滿)해 있던 사탄의 왕국을 친히 물리치시고(11절), 또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각종 이적을 행하시는 가운데 사탄의 세력을 정복해 가심으로써(눅 10”17-20) 이 땅에 천국이 현재적으로 도래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물론 이러한 현재적 천국은 죽음(사탄)의 권세를 꺾고 이 땅에 생명의 축복을 부여하신 십자가, 부활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막 1장 강해, ‘하나님의 나라 개념’ 참조).
18절, 강해 주석과 해설
갈릴리 해변
구약 성경에서는 ‘수금’이란 뜻의 ‘긴네렛’ 바다(민 34:11, 수 13:27)로 불리웠는데(수 12:3에는 ‘긴네롯 바다’) 그것은 아마 이 호수의 모양이 수금(竪琴)과 비슷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성읍(신 3:17, 수 11:2, 19:35, 왕상 15:20)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 ‘게네사렛 호수’(참조, 14:34, 막 6:53, 눅 5:1)로 불리웠으며, 신약 시대에는 ‘갈릴리 바다’ 또는 헤롯이 남서쪽 해안에 건설한 도시 이름(요 6:1, 21:1)을 따라 ‘디베랴 바다’로 불리웠다. 히브리어에서의 ‘바다’(얌)라는 말과 헬라어에서의 ‘바다’(달라싸)가 독일어(See)와 같이 ‘호수’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곳은 다른 바다보다 염분 정도가 5배(25%)가 되는 남쪽의 사해와는 달리 담수호로서 남북이 14마일(20 km), 동서가 가장 폭이 넓은 곳이 9마일(12 km)이며 해수면보다 보통 212m나 낮아 헤르몬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태풍이 풍랑을 자주 일으킨다(마 8:24, 14:24, 막 4:37, 6:48, 눅 8:23, 요 6:18). 또한 이곳은 어족(魚族)이 풍부하여 어업이 번창하였고 그 해안에는 예수의 전도활동이 주요한 배경이 된 성읍들(마 4:13, 11:20, 요 6:23)이 위치해 있었다.
베드로라 하는 시몬
‘베드로’라는 헬라어 이름은 ‘반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님의 역사적 예견의 방법에 의해서 주어진 이름이다(10:2, 16:18, 막 3:16, 눅 6:14). 이에 대한 아람어 동의어인 게바(반석)가 당시에 이미 널리 사용되던 이름이지만(Best, Wilson) 예수께서 시몬에게 붙여 주심으로 그의 신분과 미래의 가능성을 통찰하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케 한다. 시몬은 히브리어 이름으로 ‘들음’을 의미하며 베드로의 본명(本名)이다.
안드레
이 이름은 순수한 헬라 이름으로서 ‘남자다움’을 뜻한다. 그는 원래 침례 요한의 제자였으나(요 1:40) 예수께서 메시아이신 것을 확신하고 자기 형제인 베드로를 그리스도께 인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최초의 선교사란 칭호를 받았다. 또한 그는 이웃을 돕는데 신속하게(요 6:8, 9, 12:21, 22) 그리고 은밀하게 선(善)을 행하는 숨은 일꾼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후에 그는 아가야(Achaia)에서 X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물 던지는 것
‘그물’(암피블레스트론)이란 용어는 신약성경에는 단 한 번 밖에 안 나오는 단어로서 둥근 모양의 투망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물’의 보다 포괄적인 용어 ‘따튀아’(’그물들’, 4:20)와 ‘사게네’ (’그물’, 13:47) 등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본문에 제시된 ‘그물을 던지는 것’이란 ‘그물을 어깨 위로 돌리며 던진다’는 의미로 동작이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용어로 보는 것이 좋다. 이는 결국 주님께서는 그들이 생업에 바쁘게 전념하고 있을 때 제자로 택하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한편 본 기사는 눅 5:1-11의 내용과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즉 누가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는 것을 보신 것으로 묘사한(눅 5:2) 반면에 본 절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18절)과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다(21절). 이 같은 차이점이 두 기사가 각기 다른 전승(傳承)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차이점은 (1) 공관 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엄격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한 사건이 드러내고 있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그 사건을 시간적 순서를 무시하고 적재 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2) 또한 저자의 독특한 관점 내지는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동일 사건을 묘사하는데 세부 내용상 차이점이 생기는 것이다. 마태는 누가와 동일한 사건을 다루되 동일한 방법으로 기록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본문의 ‘다니시다가’라는 말에서 한층 명백해진다. 독자들은 본 사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현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면서 골방에나 기도원에 앉아만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일할 것을 찾아 적극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위대한 소명을 맡기실 것이다.
19절, 강해 주석과 해설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의 신적 권위에 입각한 절대적이며 강권적인 명령이다. 그런데 여기서 명령의 효력을 갖는 ‘따라 오너라’(듀테)라는 표현은(10:38, 눅 9:23, 14:27) 예수의 사역 수행 기간 동안 육체적으로 ‘좇아다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단순히 예수의 육체를 장소적 의미에서 좇으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그들이 처한 삶의 방법과 목적과 관심을 모두 청산(淸算)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하여 전환할 뿐만 아니라 그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라는 희생적 의미이다(10:38, 39).
사람을 낚는 어부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과 사명을 진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직업과 새로운 사명을 연결시켜 그들에게 주어질 직무가 사망의 땅과 그늘(16절)에 영원히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성령과 복음이라는 그물을 가지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 구절은 렘 16:16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포로로 삼기 위해 어부를 보냈듯이 이제 예수는 포로 시대가 끝나고 메시아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어부를 보내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영광스러운 직책에 대해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전(以前) 직업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렇듯 주변 환경과 밀접한 일상사를 문학적인 표현(비유)을 사용하여 하늘에 속한 신령한 진리를 교훈하시고 나타내실 때가 많다.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진실로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추종해야만 했다. 여기서 ‘사람’(안드로포이)이란 복수 용어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모든 인류를 말한다. 아무튼 이 명령은 28:18-20의 대선교 명령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모름지기 이웃의 영혼을 돌아보는 데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절, 강해 주석과 해설
곧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적어도 제자로 부름받는 두 사람이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요 1:35-51) 크나큰 영적 감화력(感化力)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을 받는 순간 그들이 내.외적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버려 두고(아펜테스)
이 용어는 ‘멀리 내던지다’, ‘포기하다’는 뜻으로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세상적인 욕망을 버린 제자들의 철저한 자세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이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떠났다거나, 그들의 생업을 영원히 버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고자했던 것은 예수를 따른 것이었고, 전에 이미 알고 있던(요 1:35이하) 제자로서의 소명을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즉 이때부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제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자신들의 생업을 버려야 한다는 해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하지만 그것은 단지 모든 것을 미워하고(눅 14:26), 그것들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10:37)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은 마땅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기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6:33).
21절, 강해 주석과 해설
세베대
‘여호와의 주심’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이자, 예수의 이모인 살로메의 남편(27:56, 막 15:40, 16:1)이다. 그의 집에서는 삯꾼을 부리고 있었으며(막 1:19,20), 예루살렘에도 그의 가옥을 가지고 있었던(요 19:27) 점으로 보아 사회적으로 상당히 유력한 가문출신인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선교 활동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아들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음으로 주의 사역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야고보
이스라엘의 조상의 이름과 같은 ‘발꿈치를 잡았다’란 뜻이다(창 25:26). 야고보와 그의 동생(17:1, 막 3:17)은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들로서 예수와 사촌 형제간(요 19:25)이 된다. 그는 요한과 함께 예수께서 가장 신뢰하던 제자 중 한 사람이다(17:1, 막 5:37, 9:2, 13:3, 눅 8:51, 9:28). 후에 그는 해롯 아그립바에 의해 피살되어 사도 중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행 12:2).
요한
이 헬라명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란 뜻을 가진다. 그는 예수의 최초의 제자가 되었고(요 1:35-37),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눅 22:8, 요 13:23, 19:26, 27), 장수하면서 성경의 마지막 계시를 기록한 자(계 1:1)이다. 또한 그의 성격은 내성적(요 20:1-10)이면서도 과격한 성격을 가져(눅 9:49,54) 주님으로부터 ‘우레의 아들’이란 뜻의 ‘보아너게’란 별명(막 3:17)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만큼 남자 제자로서는 유일하게 주님의 십자가 최후를 지켜보았으며(요 19:26), 전설에 의하면 그는 예수의 당부에 따라 마리아를 예루살렘에 있던 자기 집에 모셔다가 그녀가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극진히 봉양했다 한다(Irenaeus, Polycrates, Clement).
배(프로이온)
모든 배에 대한 일반적 용어로서 여기서는 서너명이 함께 타고 조업할 수 있을 만큼의 배였던 것 같다(막 1:20).
그물 깁는 것
야고보 형제는 그물을 깁고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다. ‘깁고’(카타르티조)라는 동사는 ‘준비하다’, ‘수선하다’ 또는 ‘원상태로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눅 5:1-11의 상황를 고려해 볼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은 후에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된다. 어부에게 있어서 ‘그물을 깁는 일’은 ‘고기를 잡는 일’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한편 이같은 상황을 영적으로 이해한다면 후자는 일선에서의 ‘복음 전파 활’을, 전자는 배후에서의 ‘도움’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부르시니
여타의 말씀을 생략하신 채 단지 예수께서 영적 주도권을 가지고 그들을 부르셨다. 여기서는 부름에 따른 어떤 특별한 의미가 담겼다기 보다는 22절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의 즉각적 순종에 그 초점이 맞춰진 묘사이다.
22절, 강해 주석과 해설
저희가 곧 … 버려두고 … 좇으니라
베드로나 안드레처럼(20절) 야고보 형제는 지체없는 순종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의 ‘버려 두고’란 말도 그들이 혈연 관계를 포기하거나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부로서의 직업에 충실하였지만 이후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명령만 좇아 제자로서의 소명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부친의 권한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삯꾼들을 부릴 정도로 부유했던 가정과(막 1:20) 인정많은 가족들을 ‘버림’으로써 그리스도를 ‘얻은’ 바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제자됨의 필수 요건이다.
23절, 강해 주석과 해설
온 갈릴리
예수의 사역 당시 갈릴리는 동쪽은 요단 강과 갈릴리 바다, 서쪽은 지중해, 남쪽온 사마리아, 북서쪽은 베니게로 둘러싸여 남북이 약 80 km, 동서가 약 45 km정도의 작은 지역이었다.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저술한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Life 235<45>, war, 41-43)에 의하면 갈릴리는 204개의 대소 성읍들과 촌락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갈릴리 비록 북부는 산지를 이루고 있지만 남부는 매우 비옥하여 농경과 목축에 적합하고 근처에는 호수가 위치했기 때문에, 그 당시 최소한 3백만이나 되는 많은 인구들이 집중되어 있었다(Josephus, De Bello Jud. iii, 3, 1). 그러므로 이곳을 예수께서 매일 2개의 마을씩 순회하며 모든 동리를 다 돌아보려고 하였다면 안식일도 쉬지 않고 강행한다 하더라도, 3개월 이상이 걸리는 엄청난 육체적인 힘이 소모(消耗)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은 예수께서 갈릴리 모든 동리를 샅샅이 돌아다녔음을 뜻하기 보다 갈릴리의 전구역을 이리저리 왕래하시며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암시한다(9:35).
회당(쉬나고가이스)
이곳은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한 후 전국 곳곳에 세워진 종교 집회와 교육의 장소로서 신약 교회의 모형이 되었다. 그런데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신 31:11과 시 74:8을 인용하여 회당이 매우 일찍이 기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바벨론 포로 중에 기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느 8:1-8, Carolus Sigonius). 예수 당시에는 작은 마을에도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곳에는 어디에나 회당이 건립되어 있었고, 유대인 랍비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만 460개 내지는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Winer). 그런데 백성들은 안식일이나 주요 명절 때에 이곳 회당에 모여 기도와 율법을 배우는 일에 힘썼다. 특히 구약 율법서는 여러 지역의 언어로 번역하기도 했으며, 회당장의 허락에 의해 율법 교육에 합당하며 권위있는 자가 나서서 율법을 해석, 교육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회당을 전도 활동의 무대로 활용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나(막 9:5, 요 1:38) 백성들에게(막 10:51, 요 20:16) ‘랍비’라고 불리웠다. 이 회당이란 용어는 본서에서 ‘가르침’과 연결되어 나온다(9:35, 13:54). 더 자세한 내용은 눅 4:16-30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 교회’ 부분을 참조하라.
가르치시며 … 전파하시며 … 고치시니(디다스콘 … 케륏손 … 데라퓨온)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전도의 세 가지 특수한 양식(樣式)으로서 모두 천국(메시아 왕국)과 그리스도에 의한 통치를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가르치다’는 예수의모 든 활동이 근본적으로 ‘교훈’(디다스코)과 관계가 있으며, ‘전파하다’는 예수자신이 오심과 함께 천국의 도래가 가까왔다는 ‘복음’(유앙겔리온)과 관계가 있다. 끝으로 ‘고치다’는 예수께서 천국이 축복과 더불어 실제적으로 나타났다는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신적인 능력을 행하신 바 이는 흑암의 왕국(16절)이 파괴되고 천국이 ‘회복’(아포카타스타시스, 행 3:21)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편 이 세 가지 전도 방법(teaching, preaching, healing)은 초대 교회로부터 오늘날까지 선교 역사에 계승되었다.
천국 복음(토 유앙겔리온 테스바실레이아스)
이 용어는 본서 9:35과 24:14에 다시 나타나는데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어 메시아가 임하셨다는 내용을 함축한 말이다. 한편 ‘천국(의)’은 목적을 나타내는 속격(비교 눅 8:1 ‘하나님의 나라’)으로서 복음이 천국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즉 ‘천국’은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선포되었고(3:2, 4:17), 또한 그것은 산상수훈(5-7장)의 중심 주제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전파한 메시지의 핵심이 ‘천국 복음’일진대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모든 자들은 이것을 명심하여 그 핵심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병 … 약한 것
‘병’(노소스)은 일반적인 ‘질병’(sickness), 그중에서도 만성적이고 중한 질병을 의미하고, ‘약한 것’(말라키아)은 그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생활적 기능의 쇠약’을 의미한다. 실로 사랑이 많으신(9:36) 예수께서는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이 그의 사역의 최종 목표였으나 인생의 현세적 구원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찾아와’. ‘만난’, ‘모든’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 질병도 치유해 주셨다. 이것은 바로 천국이 임하신 사실에 대한 예보(豫報)이자 천국 왕의 신임장(credentials of the King)이다(Walvoord, 사 35:4-6, 마 11:2-6).
24절, 강해 주석과 해설
소문(아코에)
‘들음’이라는 뜻으로서 ‘평판’(report, Living Bible) 또는 ‘명성’(fame, KJV)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는 당시 예수의 전도 활동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환대(歡待)를 받았으며,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수리아
이곳의 지리적 범위는 불확실하나 예수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로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에 있는 갈릴리를 제외한 유대 북쪽의 팔레스타인 전체를 포함하는 큰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과거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서로 미워하였으나 이제 그곳에도 예수의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한편 그후 바울 당시에 이르러서는 그곳에 다메섹, 안디옥, 라오디게아 교회 등이 세워지는 등 초대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교 근거지가 되었다(행 15:41, 18:18, 21:3, 갈 1:21).
모든 앓는 자 … 중풍병자
‘모든 앓는 자’(투스 카코스 에콘타스)는 질병에 대한 보통 표현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고질적인 병에 걸린 자’란 뜻으로 의학적 처방으로는 치유 불가능한 질병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 ‘모든’이라는 수식어는 정신적 질환과 구분되는 육체의 모든 질환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이 육체적 질환에는 그 병증에 따라 가벼운 것(각색 병)과 무거운 것(고통에 걸린)으로 나누인다. 여기서 ‘각색병’(포이키라이스 노소이스)이란 ‘가지 각색’(various)의 병증이 크게 위급하지 않는 질병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고통에 걸린 자’(바사노이스 쉬네코메누스)란 병들어 거의 기진하다시피 고통당하는 중환자를 의미한다. 이상이 주로 질병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었다면, 뒤이어 나오는 세가지의 병명은 구체적인 분류이다.
귀신들린 자(다이모니조메노이)
더러운 병(17:18, 막 9:25)인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인 통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하여 마음이나 몸을 혼란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귀신들린 자는 육체적인 기능이 일부 또는 전체가 상실되기도 하고(9:32, 33, 막 9:18, 눅 11:14), 정신적인 장애 현상(17:15, 요 10:19-21)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12:28, 눅 10:17, 행 16:18)에게 귀신은 굴복당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귀신은 사탄과 함께 영원한 불못(계 20:14)에 던지움으로 영구적 운명에 처하게 된다(막 9:14-29 강해, ‘귀신들림과 축사’ 참조).
간질하는 자(셀레니아조메노이)
이 질병에 대한 혤라어의 본래 의미는 ‘졸도 증세’란 뜻이다. 이 병은 중추 신경 계통이 이상을 일으킴으로써 생기는데, 증세는 의식을 잃는 것과 발작성 경련, 또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의학의 시조라 불리우는 B.C. 4백년 경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간질을 어떤 귀신에 사로잡혀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는 본문에서와 같이 ‘간질’을 ‘귀신 들림’과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며, 그가 사용한 ‘셀레니아조메누스’란 용어는 고대 점성가들의 견해대로 간질이 ‘달’(셀레네)의 ‘영향을 받은’(조메누스)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당시의 민간 신앙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중풍병자(파랄뤼티코이)
이 용어는 신약에만 나타나는 용어로서 일반적인 마비 증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이 질병은 대뇌조직의 손상이나 척추신경의 파괴, 또한 중추신경 개통의 질환으로 인하여 야기된다. 한편, 이러한 질병들을 치유하시는 예수의 기적들은 그의 메시아로서의 성격을 뚜렷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타락된 흑암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불안(8:17 참조)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 질병의 근본 원인인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이라는 것이다(1:21).
25절, 강해 주석과 해설
데가볼리(데카폴레오스)
‘열 도시들’이란 뜻을 가진 이곳은 요단 강 동편과 갈릴리 바다 남쪽, 곧 북쪽의 다메섹에서 남쪽의 빌라델비아에 이르는 곳에 위치한 헬라인 도시들의 연맹체이다. 이 도시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B.C. 323) 그의 후계자들과 노장(老將)들이 전형적인 혤라인 도시를 건설한 데서 기원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헬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방인들의 거점(據點)들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는 배타적이었다. 예수 활동 당시 즉 A.D. 1세기에 이 도시들은 크게 번화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으며 이곳의 이방인들 조차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은 예수사역이 유대 국가와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요단 강 건너편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얍복강과 아르논강 사이’로 단정하는데, 여기서는 이곳이 베레아로 소개된 동부지역 전체를 잎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팔레스타인 경내에 인접한 지역까지 예수의 소문이 전파되고 있는 것이다.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갈릴리에서 빛을 비추기 시작하신 예수(15,16절)의 생명의 빛이 갈릴리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계시하는 마태의 웅장한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갈릴리로 모여 들어 예수를 ‘좆는’ ‘허다한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추종자’(Christ follower)였지,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순종하는 참 제자로서의 ‘그리스도인’(christan)은 아니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만 보았을 뿐, 예수의 영적, 신적 측면, 즉 우리의 왕되신 예수께서 구원자 하나님 되심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실로 우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이적과 축복만 탐하고 예수께서 베푸시는 진리와 사랑, 아니 예수 그 자체에 대해서는 둔감한 기복적이고 현실 지상주의적인 신앙을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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