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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33절-48절, 온전한 사랑 - 매일성경 강해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 큐티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33절부터 48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은 더 진실하고 사랑이 풍성해야 한다는 산상 수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강해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 33절-48절, 온전한 사랑 - 매일성경 강해 주석과 해설 정리



마태복음 5장 33절-48절, 온전한 사랑



33절, 강해 주석과 해설


헛 맹세를 하지 말고 … 너희가 들었으나

마태는 이제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에 포함된 것은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출 20:7, 레 19:12, 민 30:2, 신 5:11, 6:3, 22:21-23 등의 내용을 정확하게 축약한 요약문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거짓 맹세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서약을 깨뜨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일단 여호와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債務)가 되는 것이다. 마태는 23:16-22에 나오듯이 논쟁을 위한 배경 속에서 다시 이 주제를 다루는데, 거기에서 훌륭한 예(例)들을 많이 들고 있다. 여기에서의 배경은 분명히 논쟁을 위한 것은 아니고 다만 예수가 천국과 그 나라의 의를 어떻게 구약과 관련시키는가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34절, 강해 주석과 해설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부정사의 문형으로서 이를 정확히 해석하면 ‘절대 맹세하지 말라’는 강한 명령문이 된다.

맹세는 고대 세계에서 보편적이었고 맹세를 깨뜨리는 것은 심각한 범죄였다. 모세의 율법에서도 그렇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20:7)는 셋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다.

후에는 그 적용 범위가 넓어져서 하나님의 이름을 경박하게 사용하는 모든 행위가 다 포함되었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이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 까지 금지했다.

그러나 맹세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구약은 하나님께 대한 서약이나 서원을 허락하고 있으며(민 30:2, 신 23:21) 맹세도 인정하고 있다. 아브라함도 그 종 엘리에셀에게 이삭의 아내를 자기 고향에서 데려올 것을 맹세하게 하고 있으며(창 24:3) 심지어는 정직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게 하고 있다(출 22:11).

예수께서도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마 5:33)다고 말씀하셨다. 중요한 것은 거짓 맹세였다. 거짓 맹세는 결국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은 맹세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마 5:33-37, 약 5:12). 산상수훈에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오직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할 것이지 그에서 지나는 것은 악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인간이 하는 맹세가 얼마나 거짓되기 쉬운가를 간파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 처음에는 거짓말을 할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거짓말이 되어버리고 마는 일도 있다. 따라서 그런 맹세가 많으면 많을수록 본인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결국은 죄를 짓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맹세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욕을 들리게 된다. 그렇다면 거짓 맹세가 아닌 참된 맹세는 허락되는가? 신약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것이 차라리 죄를 범치 않는 안전한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언행이 일치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맹세가 필요하지 않도록 정직하고 올바른 원칙에 서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맹세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삶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증거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의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 원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예수께서는 법정에선 맹세하셨다(26:63, 64). 그리고 사도 바울도 맹세와 유사한 말을 하였다(고후 1:23, 갈 1:20). 그러므로 맹세를 하지 않으면 심각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법정 등에서와 같은 특별한 경우까지 적용시켜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늘로도 말라

예수는 사람이 무엇으로 맹세하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모든 맹세가 묵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는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 심지어는 머리카락 조차도 하나님의 통치와 소유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의 ‘하늘’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이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곧 그 창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이는 사 66:1을 암시하는 표현으로써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하늘의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해 주고 있다(행 7:48). 실로 그 초월한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의 보좌와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경솔하고 습관적이며 또 위선적인 맹세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같은 맹세는 철저히 삼가해야만 한다.



35절, 강해 주석과 해설


땅으로 …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하늘을 당신의 보좌 삼으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당신의 발등상으로 삼으시고 그곳을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땅’ 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 큰 임금의 성임이요

시 48:2, 99:2 의 내용을 암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마태는 본문을 ‘ … 으로 맹세하다’(옴뉘나이 엔)는 앞의 두묘사(하늘로, 땅으로)와는 다른 히브리적인 표현법인 ‘ … 을 향하여 맹세하다’(옴뉘나이 에이스)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에로의 지향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적 변형(變形)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대인들에게는 궁극적 본향(本鄕)이요, 지향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도와 맹세 등 각종 종교적 행위를 함에 있어서 항상 예루살렘에로의 눈길을 돌리곤 하였다. 한편 ‘큰 임금’이라는 말 앞에는 관사가 붙어있다. 이것은 곧, 그 임금이 너무도 잘 알려진 탁월한 존재임을 강조한다고 본다. 따라서 ‘큰임금’은 모든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탁월한 왕,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25:34).



36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네 머리로도 말라

머리가 인간 신체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만물이 하나님께 관련된 것 같이 우리의 머리도 하나님께 관련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것이다. 더구나 이 머리털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신 바 되었고, 또 그 머리카락의 색이 희고(노령) 검게(청년)하는것(그 연수를 정하시고 생(生)과 사(死)를 정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소관에 속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만드셨고 그것의 모든 원동력과 힘을 조성(造成)하셨다. 진정 인간은 자신의 머리털의 한 터럭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머리털의 원소유자는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인간 자신의 머리로 맹세할 수 없다.



37절, 강해 주석과 해설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 더 가깝게 해석하자면 ‘그러나 너희는 옳다, 옳다라고 말하든지 아니오, 아니오라고 말하든지 하라’고 재번역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말이 두 번씩 반복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났다. 어떤 랍비들의 의견에 의하면 ‘옳다’나’아니오’를 반복하여 쓸 경우에는 그것이 맹세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바로 예수가 비난하고 있는 비뚤어진 결의론적(決議論的) 사고라고 생각된다. 같은 말이 중복된 것은 NIV에서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설교자의 수사적 표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약 5:12). 이렇게 되면 이단락(33-37절)에서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 전후 관계로 볼 때 이 구절이 의도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지향하는 진정한 방향, 즉 진실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맹세가 핑계로 이용되지 않고 진실성이 위협을 받지 않는 곳이라면 그처럼 무분별하게 맹세를 폐기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둘째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언약을 세운다’(창 9:9-11, 시 16:10, 눅 1:68, 행 2:27-31). 그것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거짓말을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다(히 6:17). 우리가 또한 바울의 경우로 판단해 본다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맹세를 하였다(롬 1:9 고후 1:23, 빌 1:8, 살전 2:5). 그 이유는 앞에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예수 자신도 맹세를 하고 증언을 하였다(26:63-64). 또 우리는 예수의 설교가 대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5:27-30, 6:5-8). 여기에서는 예수가 정식으로 구약의 율법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즉 율법이 허용(許容)하거나 명령하고 있는 것(신 6:13)을 예수는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구약이 지향하는 바에 대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 권위가 있는 것이라면, 이제 그의 가르침으로 구약이 온전한 형태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D.A. Carson).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여기서 ‘악으로 좇아’(투 포네루)란 ‘악로부터’ 또는 ‘악한 자로부터’(거짓의 아비, 요 8:44)로 번역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하고도 책임감 있는 답변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것을 넘어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구구한 맹세를 하는 것은 분명 ‘악한 자로부터’ 생겨난 허위와 위선에 따른 결과임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흠을 확신할 수 있는 자는 ‘맹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그 옳고 그름을 진솔히, 그리고 단호하게 고백할 수 있다.



38절, 강해 주석과 해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출 21:24, 레 24:19-20, 신 19:21 등의 내용을 가리킨다. 이상과 같은 구약성경의 규정들은 복수를 조장(助長)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에서는 복수를 금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레 19:18). 구약성경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율법을 제정함으로써 복수행위가 결정적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은 아니나 미리 처벌 조항을 규정하여 하나님의 질서와 공의에 입각한 국가적 사법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때로는 보복 대신으로 금전이나 물건이 배상금으로 징수되기도 하였다(출 21:26, 27). 그리고 예수의 시대에는 법정에서 동해 복수법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율법 규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복을 제한하고 공정하게 처벌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 복수를 정당화(正當化)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가 단지 동해 복수범이 사법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만 반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라면 예수가 들고 있는 예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만일 누가 너희를 때리면 너도 같이 때리지 말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그를 때리게끔 하라는 식의 예로 나타났을 것이다. 예수의 주장은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Carson).



39절, 강해 주석과 해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그러나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쪽 뺨까지 대주어야 하는가? 갚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꿔주어야 하는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이상인가?

이것은 예수께서 하늘 왕국 시민들의 생활양식을 모세의 율법과 비교해서 보여주는 일연의 강화 중 하나이다. “너희가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지금부터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윤리를 발표하신다.

구약 시대의 복수와 보복으로 살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마음 속에 불만이 가득 차 있으나 참고 대적하지는 말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좀 더 강한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단순히 참는 것에 그치지 말고 적극적인 선으로 악을 감화시키라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 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오른편 뺨을 때린 사람에게 기어이 왼편 뺨을 들이대며 더 때려달라고 하는 것은 본문의 취지에 맞지 않다. 그런 행동은 오히려 상대방을 격분시킬 것이다.

예수께서도 뺨을 맞으신 후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으셨으며(마 26:67) 오히려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요 18:23)고 하셨다. 속옷을 빼앗는 사람에게 구태여 겉옷까지도 꼭 벗어 주어야하는가? 그럴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의 상식과 감정에 맞지 않는다. 오리를 간 후에 다시 오리를 더 가겠다고 우겨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그 말씀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모세의 율법과 비교하여 하신 일련의 말씀들은 행위 자체보다는 그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신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와 같은 말씀이 그 대표적인 예다. 만일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면 눈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본 절에서 그 문자보다는 정신이 중요하다면, 악한 자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첫째로, 그것은 용서의 정신이다. 악을 용서하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 정신이다(눅 23:34). 용서의 정신이 없으면 왼쪽 뺨 이야기는 나올 수도 없다.

둘째는 참는 정신이다. 불의한 일을 당하고도 반격과 복수의 정신으로 마음이 끓어오르지 않고 조용히 참는 정신이다. 그것은 용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셋째로, 단지 눈앞에 닥친 것만 겨우 참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악이나 수모가 올지라도 참을 수 있다는 여유 있는 정신이다.

이것이 오른편 뺨을 손등으로 쳐서 나에게 모욕을 가한 사람이 다시 왼편 뺨까지 치려고 덤벼들 때 그것마저도 참을 수 있는 정신이다. 이것은 물론 어렵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사는 사람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며 이것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다.

결론적으로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일련의 말씀들은 꼭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까지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 정신의 문제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서와 인내 그리고 지금보다 더한 것도 견뎌 낼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40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너를 송사(訟査)하여 …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비록 모세의 율법에서는 겉옷이 양도 불가능한 소유였지만(출 22:26, 신 24:13), 예수의 제자들은 누가 그들의 속옷(보통 겉옷은 속옷보다 값어치가 더 나간다)을 요구한다면 자신의 만족을 찾지 말고 법적으로는 자신의 소유임이 인정되더라도 기쁘게 그것을 넘겨 주어야 한다. 눅 6:29에서는 송사에 대해 겉옷과 속옷의 순서로 이야기하여서 순서가 마태복음과는 반대이다. 이 때문에 혹자(Schweizer)는 누가복음에서는 겉옷을 빼앗아 가려는 강도가 전제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속옷을 원하는 소송 대상자가 전제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밤에 입는 의복이며 덮개인 겉옷은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압류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순서가 단순히 옷을 벗어주는 정상적인 순서를 생각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출 22:25, 26에서 이미 하나님 스스로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 법을 실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다른 사람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리를 재판에서 관철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벗은 채로 살아가라는 예수의 전례 없는 진술 배후에는 불행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들어 있다(Schweizer).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온갖 고난과 아픔을 무릎쓰는 적극적 이타주의의 실현에의 요구가 강조되어 있다.



41절, 강해 주석과 해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십리를 동행하고

세 번째 예화에서는 길 안내자나 또는 운반자로서 민간인들에게 동행할 것을 강요하는 로마 수비대의 권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즉 본문에서 ‘억지로 가게하다’(앙가류오)는 강제적 의미가 강한 ‘징발하다’는 뜻으로서 로마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징용하여 군수 물자를 규정된 거리(로마 도량형으로 1마일 곧 ‘5리’, 우리나라 치수로는 약 3리 정도, 이는 보통 성인의 약 1,000보(步)에 해당)를 운반하게 했다(W. Hatch, Essays in the Bibical Greek, pp.37-38). 한편 이 단어는 27:32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사용되었는데, 로마인들은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운반하도록 강요한다. 이 경우와 비슷하게 로마 군인들은 자주 한 개인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했는데, 법질서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이 봉사를 요구했다(Schweizer). 이처럼 강제로 징용(徵用)을 당하게 되면 무고히 소송을 당한 경우처럼 분노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42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네게 구하는 자에게 … 거절하지 말라

네 번째의 예화에서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출 22:25, 레 25:37, 신 23:19) 관대한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신 15:7-11, 시 37:26, 112:5). 이 구절에 대한 평행구절(눅 6:30)의 형태를 보면, 두 가지 요구가 아니라 한 가지 요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는 곧 비슷한 것을 반복함으로써 요점(要點)을 더 분명하고 강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두 예화를 보면 38-39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 이야기 전체는 이웃을 향해 열려진 마음의 자세, 즉 더 나은 의(義)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네 개의 미담은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율법의 규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본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돈을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한정으로 돈을 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잠 11:15, 17:18, 22:26). 구하는 자에게 준다면 살인자에게 칼도 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한다(Tholuck). 이렇듯이 이 예화들이 수없이 애매모호한 설명들로 인하여 그 의미가 약화되거나 왜곡 되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이 이러한 예화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에 대응하는 자세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랑과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것, 그리고 예수의 심장을 닮은 뜨거운 열정 뿐이다.



43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에 근거한 실천적 윤리를 강조하신 예수의 교훈중에 최절정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적하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율법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현존하는 랍비 문헌들 조차도 그처럼 대담하고 부정적인 결론으로 비약(飛躍)하는 것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이 유대인의 가치관을 비웃기 위해 기독교에서 후에 첨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가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쿰란 공동체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는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외부인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그것이 유대 사회 전체의 흐름이었을것이라 추측 된다. 사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자기들만이 신앙을 지키는, 소위 ‘남은 자들’(remnants)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그처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처럼 냉혹한 흑백 논리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매사를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예수 당시에 이같은 식의 사고 방식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Davies). 한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앞 부분의 원칙은 레 19:18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원칙의 범위는 이방인이 아니라 주로 선민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 내부인들로만 해석되었다. 물론 때로 이스라엘에서 정주(定住)하고 있는 이방인에게도 조건부로 적용되기도 했다(레 19:33, 34, 신 10:18, 19). 즉, 이것은 할례와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선민 공동체 속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에게만으로 제한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원칙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간혹 그들은 이같은 단서없이 원수 사랑을 인정하기도 했고(삼상 24:20), 가축이 관계된 문제에서나(출 23:4, 5) 또는 위급한 상태(잠 25:21, 22) 등과 같은 일상사(日常事)에서 이 원수애가 요구되기도 했다. 한편 본 절은 19:19, 22:39 과는 달리 구약을 인용하면서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특히 레 19:33, 34에서는 이방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랑을 베풀라고 명령하고 있는데도 본 인용구는 그런 명령까지도 무시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당시 일반 대중들은 하나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였다면, 반대로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정되며 나아가서는 공인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눅 10:25-37을 보면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며, 또 믿는 자들에게는 오직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45절, 강해 주석과 해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성품에 동참하는 자는 윤리적 관점에서 그분의 ‘아들’이 되는 것을 뜻한다(9, 16절 참조). 이 ‘아들’됨은 단순한 명예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신분과,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와같은 영예(榮譽)를 누릴 필수 요건이 바로 44절에 언급된 바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이다.


그 해를 …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예수의 사람들은 그 삶의 전형으로서 하나님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한편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없이 사랑하셔서 모두에게 똑같이 해를 비취게 하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의미하는 바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면에서든지 구별이 없고 따라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된다고 결론 지어서는 안된다. 예수는 분명 선인과 악인에게는, 특히 종말론적 측면에서 확실한 차등(差等)이 주어질 것이라고 가르치셨다(25:3-46).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그 공평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각 개개인에게 엄격한 도덕적 생활과 순종(順從)을 동시에 요구하신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요 15:9-11, 유 1:21). 그런데 칼뱅(Calvin) 이후로 많은 신학자들은 44, 45절을 하나님의 ‘일반 은총’과 관련시켜 왔다. 여기서 ‘일반 은총’이란 모든 인간에게 구별없이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은총을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써 모든 사람을 정죄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계속하여 오래동안 은총을 베푸셨다. 사실 ‘일반 은총’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로는 이구절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원수를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마음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도덕적인 면과는 무관하다거나 종말론적으로는 아무 구별없이 주어지는 사랑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구약성경에는 원수에 대하여 가혹한 태도를 요구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이러한 어두운 면을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극복(克服)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관념은 그에 반대되는 증거들을 살펴보면 부인될 수밖에 없다. 즉 구약성경에는 형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출 23:4, 5, 레 19:18, 33, 34, 삼상 24:5, 욥 31:29, 시 7:4, 잠 24:17, 29, 25:21, 22). 그리고 반면에 신약성경에서도 타락하여 버림 받은 자를 강력히 정죄하고 있다(눅 18:17, 고전 16:22, 살후 1:6-10, 딤후 4:18, 계 6:10). 오히려 44, 45절에서 주장하는 것은 43절에 인용된 구약성경의 율법이 천국의 상속자(相續者)들이 보여 주어야 할 풍족한 사랑, 즉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였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의 핵심은 아들이 되는 방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아들됨을 추구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자신을 예언자 계열 위에 놓는 것이다(5:12). 그러나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성품의 연장위에 놓는 것이다”(D. A. Carson).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Plummer). 이 두 마디의 말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 주위 사람들의 행동 양식보다 뛰어나게 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D.A. Carson).



46절, 강해 주석과 해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공관복음에 나오는 세리들은 로마 정부의 직접적 임명을 받은 조세징수(租稅徵收) 청부 계약의 주계약자가 아니다(라틴어로는 Publicani). 그들은 통상적으로 외국인이었고 ‘세리’들이란 단지 그 밑에서 일하며 한지방을 맡아서 징수하는 본토(本土) 출신 사람(라틴어로는 Portitores)들이었다. 사실 이들은 멸시받는 존재였다. 그 이유는 조세 청부 제도가 대규모의 부정 부패(不正腐敗)를 낳게 할 뿐 아니라 엄격한 유대인의 눈에는 세리들이 그들을 지배하는 외세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매국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뿐 아니라 세리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럽혀져서 부정하게 되었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상황은 조세징수의 계약자가 이방인 상급자들과 거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위 계급의 세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실로 세리들은 창녀와 다른 죄인들과 함께 취급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 즉 그의 모친이나 동료 세리들은 사랑하는 것이다(D.A. Carson). 그것은 너무도 인간적이요 본능적인 사랑이다.


무슨 상이 있으리요

이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삶을 세밀히 평가하고 계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후 5:10). 사실 신령한 일에는 세상의 보상보다 더 공정하고 영화로운 상급(上級)이 주어진다(1-12절).



47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이방인들도 … 적절한 인사를 하는 것은 예의와 존경의 표시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형제들’, 즉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다른 제자들에게만 그런 인사를 한다면 그들은 ‘이방인’(에드니코이)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에드니코이’는 선민(選民) 이스라엘에 반(反)하는 이방 민족들 전체를 가리키는데, 대부분의 이방인이 이교도(異敎徒)이므로, 이 말은 결국 인종적 의미 이상의 영적인 조롱의 뜻을 갖게 되었다. 사실 “사람이 친구를 사랑할 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친구 사랑은 일종의 확장된 이기심인 것이다”(Broadus). 예수는 바로 이런 이기적 사랑과 예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 “타락한 옛 인간의 삶은, 손해는 복수하고 유익은 돌려주는 소박한 정의에 입각한 삶이다. 그러나 구속받은 새 사람의 삶은 복수를 거부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삶이다”(Scott).



48절, 강해 주석과 해설


온전하라

어떻게 인간이 하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무죄한 존재이시다. 그러나 타락 이래로 인간은 죄성을 타고난 존재가 되었다(엡 2:3).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산상설교(산상수훈)

본 절에 있는 예수님의 분명한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두 번째 부분의 결론이다. 산상설교 전체는 마태복음 5-7장인데, 그것의 둘째 부분은 5:17-5:48이다. 이 부분의 서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러 왔다고 주장한다. 서언 다음에 연속되는 여섯 개의 대조 진술(antithesis)이 뒤따라 나오는데, 예수님은 구약의 성경절이나 전해 내려오는 말씀을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인용한다. “ …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1, 22).

이 대조 진술들은 구약의 개념들을 거부하고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 경우마다 구약의 가르침을 더 심도 있게 적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자신이 온 목적이 구약의 원칙들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옛 명령의 깊이와 더 폭넓은 적용을 보여 주려는 것임을 나타내셨다.


원수를 사랑함

마태복음 5:43-48에 나오는 마지막 대조 진술은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를 다룬다. 예수님은 레위기 19:18의 일부(“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를 인용하면서, 거기에 전통으로 내려오는 진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그 유명한 원칙으로 전통적인 진술을 뒤엎는다. 계속하여 주님께서는 원수에게 이런 원칙을 행동으로 옮기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결과가 나온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와 맞먹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만을 사랑하는 사람들 또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자비가 크신 하나님의 행위와 대조하신다. 그런 사랑은 세리나 이방인 곧 성경적 종교의 범위 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나 진배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여 두 부류의 행동 방식 곧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사랑과 관심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 세리나 이방인이 대조되고 있다. 이런 내용이 있은 후에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라(마 5:48)는 요청이 뒤따라 나온다.

본 절의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지막 대조 진술의 문맥 안에서 온전[완전]은 결점이 없거나 일체의 도덕적 결함이 근절된 상태로 정의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와 사이가 가장 먼 자들 곧 우리의 원수에게까지도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대조 진술의 전체 문맥 안에서 본 절의 온전하라는 요청에는 가장 높은 도덕적 순결에 대한 의식이 포함돼 있다. 예컨대, 미움도 살인으로, 음욕의 눈길도 간음으로 재정의하고, 미움도 품지 말고 음욕도 품지 말라고 명한다.

이런 최상의 요구에 대면하여, 우리는 간단히 제자도를 포기해 버리려 하거나, A.D. 2세기에 한 저술가가 디다케(Didache)라는 책 6장 2절에서 본 절에 대해 말한 것처럼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대가 주님의 온전한 멍에를 멜 수 있다면 완전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대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또는 예수님의 의도가 그렇지 않은데도, 완전은 불가능한 것이며 게다가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런 것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온전”[완전]의 의미

완전에 대한 사람들의 싸움이나 주장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완전하다고 선언하셔야만 비로소 우리는 완전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완전하다고 하시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기 전의 “옛 사람”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해도 완전하다고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새 사람, 즉 새로운 피조물만 완전하다고 보신다(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마 7:21)이어야 한다.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본 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는 사람으로서 완전하라는 말씀이다. 사람으로서 완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시는 온전함을 받아들이고 옛 사람을 떠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정지되어 있지 않고 계속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이다. 본 절에서 “온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텔레이오스인데, “완전한, 결함이 없는, 온전한, 충분히 발전된, 성숙한, 목표나 목적을 달성한” 등을 의미한다. 어떤 것이 다 성장하여 그것의 목표에 도달하면 텔레이오스라고 말해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표가 있다. 그것은 하늘 지향적이다. 위에서 부르신 복음의 부름은 분명하다(빌 3:12-14). 하나님이 어떤 수준의 지점에서 우리를 발견하든 우리를 가납하시지만, 그 수준에 그대로 머물도록 내버려 두진 않으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인 성숙으로의 여행으로 우리를 초청하신다. 본 절의 예수님의 명령은 그 여행의 결실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 명령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여행을 받아들여 그분의 뜻 안에서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온전[완전]의 목표 곧 그리스도인 성숙, 다시 말해서 하늘 아버지처럼 되는 것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도덕적 어둠의 세계에 비치는 우리의 길라잡이별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본 절은 그리스도인의 목표[온전]를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라는 주님의 초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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