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cker

6/recent/ticker-posts

민수기 6장 1절-12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 - 매일성경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 본문인 민수기 6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인 나실인에 관한 규정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삶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임을 본문을 통하여 묵상하고 새벽설교 준비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민수기 6장 1절-12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 - 매일성경 주석과 해설 정리


민수기 6장 1절-12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



1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께서 …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말은 이하 제시되는 모든 말씀의 신적 기원성을 분명히 나타낸다. 이처럼 성경은 여호와의 계시의 말씀이 기록된 책이기에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변치 않고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참된 진리를 교훈해 주고 있다.



2절, 주석과 해설


남자나 여자가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그들의 규범(율법)은 대부분 남성 위주의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당시 남자는 남녀 두 성(gender)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또한 언약의 체결자로서 하나님께 대한 책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창 2:15-17, 3:11). 그런데 ‘나실인’(Nazirite)에 관한 규정을 다룬 본문에는 특이하게도 남자와 여자, 두 성(性)을 동일한 위치에 두고 같은 의무 조항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나실인 제도는 당시대의 종교, 사회적인 관행(慣行)을 초월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로운 만남과 자발적인 헌신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나실인 제도에 나타난 이러한 남녀 동등이라는 파격(破格)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 앞에서는 인격적인 면에서 결코 성(性)차별이 있을 수 없다(그러나 기능적 구별은 인정해야 한다, 창 2:23, 3:16-19). (2) 각 개인은 누구에게도 예속됨이 없는 독립체로서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 (3) 이러한 인간의 인식과 관습을 뛰어넘는 자유로움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의해서 가능하며, 그렇기에 이 자유로움은 인간의 권리 주장이 아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특별한 서원

여기서 ‘특별하다’(히, 팔라)란 ‘크고 경이롭다’, ‘구별하다’, ‘어렵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뒤에 연결된 서원(히, 네데르) 곧 하나님께 대한 약속이 매우 성스럽고 가치 있는 것이며, 아울러 그 서원 이행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임을 암시한 말이라 볼 수 있다.


나실인

이는 ‘구별하다’(separate), ‘분리하다’(set apart)란 뜻을 지닌 동사 ‘나자르’에서 유래된 말로 곧 ‘구별된 자’, ‘성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 ‘세상과 분리된 자’란 의미이다. 즉 세상적 욕망을 끊어버리고 자신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헌신하기로 서원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나실인 제도가 정착되기 전의 구약 초기 시대에는 신성한 종교적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신적 권능을 부여받은 고귀한 신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창 49:26). 그런데 후대에 와서 나실인 서원 규약이 율법에 의해 규정되고 표준화 되면서 자신을 종교 도덕적으로 구별시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서원한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일정 기간 또는 평생 동안 나실인이 될 수 있었다. 혹자는 이 나실인 제도가 애굽이나 당시 이방 국가의 금욕 서원 또는 머리털 봉헌 서원 등의 관습에 기인하고 있다고 주장하나(Spencer, Knobel), 근거가 없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 한편 나실인 중에는 삼손(삿 13:5)이나 침례 요한(눅 1:15) 등과 같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나실인이 되어 평생을 헌신한 자도 있었고, 사무엘처럼 부모의 서원에 따라 그렇게 된 자도 있었다(삼상 1:11). 물론 본 장에서는 자원하여 나실인이 될 자들이 지켜야 할 법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나실인의 서원 제도는 다른 모든 구약의 의식적인 율법이 그러하듯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 완성된다(마 12:1-8).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의식적 구별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방법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구별되어 새로이 거듭난 심령으로써이다(롬 7:5-6, 고후 3:6-11).

다음은 이 나실인 제도를 설명한 것이다.

1. 기원: 출애굽 제2년 2월 초에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함(6:1).

2. 목적: 하나님께 헌신, 봉사하기 위해 자신을 구별시킴(6:6).

3. 자격: 남녀 구분없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6:2).

4. 준수사항: ① 포도나무 소산 및 독주를 금할 것(6:3-4), ② 머리털을 깍지 말 것(6:5), ③ 시체 접촉으로 인해 부정케 말 것(6:6).

5. 봉사의지: ① 자발적 서원으로(6:2, 행 18:18), ② 부모의 서원으로(삼상 1:11), ③ 하나님의 명령으로(삿 13:5, 7).

6. 봉사기간 : ① 일정기간 동안(삼상 1:11), ② 일평생 동안(눅 1:15).

7. 실례: ① 삼손, 사무엘, 레갑 족속(삿 13:5,7, 삼상 1:11, 렘 35:6-7), ② 침례 요한, 사도 바울(눅 1:15, 행 18:18).

8. 교훈: ① 혼탁한 현대를 사는 성도에게 순수한 신앙 촉구, ②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히 7:26), ③ 온전한 헌신은 철저한 경건생활로부터 가능(약 1:27), ④ 자기 부인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음을 교훈(마 16:24).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직역하면 ‘여호와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구별하려면’(RSV, to separate himself to the Lord)이다. 이 말은 나실인의 헌신 대상 및 목적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순전히 ‘여호와를 위해서, 여호와께’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드렸던 것이다. 그들은 일정한 장소나 업무에 국한되지 않고(출애굽 여정 동안에는 주로 성막 중심의 봉사를 했던 것 같다).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자신의 서원을 구체화 했다. 한편 그들은 여호와를 위해 자신을 구별하는 일에 타인의 조언(助言)이 필요치 않않다. 다만 헌신을 받으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바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을 구별한다는 것은 (1) 항상 (2)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3) 속된 것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거룩한 삶을 일컫는다.



3절, 주석과 해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여기서 ‘멀리하며’(히, 야지르)란 말은 ‘분리하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나자르’의 사역형 능동태(Hiphil)의 미래 구문으로서, 곧 (앞으로 서원 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멀리하라’, ‘철저히 멀리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실인은 모든 술을 절대 입에 대지 말아야 했으며 특히 포도 나무에서 얻어진 어떤 종류의 소산물도 먹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나실인이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제사장처럼(레 10:9) 마음의 청결과 절제를 유지하여 맑은 정신으로 여호와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명령의 더 깊은 의미는 술로 대표되는 ‘모든 육적인 유혹’을 전적으로 멀리하라는 데에 있으며(렘 35:6, 7). 동시에 자신들의 ‘가장 큰 기쁨’은 오직 여호와께 있다는 데에 있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포도가 상징하는 것을 알아보면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즉 포도는 기쁨, 축제, 풍요 등을 상징했으며(전 10:19, 요 2:1-11), 동시에 그 발효된 알콜 성분으로 인한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쾌락과 세상적인 사치(창 9:21, 사 28:7)를 상징했다. 그러므로 정신을 혼미케 하며 세상적 쾌락과 사치(삼상 25:18, 36, 호 3:1)를 조장하는 포도주를 멀리해야 하는 것은 구별된 자의 당연한 도리였다. 사실 하나님을 자신의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는 자에게는 술(세상)이 제공하는 기쁨은 관심 밖의 일이 된다. 한편 ‘독주’(히, 쉐카르)는 포도주와는 구분되는 기타의 독한 알콜성 음료로써 마시는 자를 혼미케 할 정도의 강력한 술(strong drinks)을 총칭하는 말이다(잠 20:1, 사 28:7).


포도주로 된 초

여기서 ‘초’(히, 호메츠)란 ‘신맛이 나다’, ‘발효하다’, ‘알록달록하다’는 뜻의 ‘하메츠’에서 유래한 말로써 ‘포도주’(히, 헤메르)보다 알콜 농도가 낮은 신 포도주였을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빵을 먹을 때 찍어 먹는 양념으로 사용되곤 했다(룻 2:14).


독주로 된 초

역시 ‘포도주로 된 초’와 동일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시지 말며

‘마시다’는 말은 단순히 ‘들이키다’는 뜻 외에 ‘술 취하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앞의 ‘멀리하며’란 말과 동의어이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강조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포도즙

원문대로 해석하면 ‘익은 포도를 넣고 발로 짓이겨 뽑아낸 즙’을 가리킨다(느 13:15, 욥 24:11, 사 5:2).


건포도

이것은 호화롭고 부유한 계층이 즐기던 식품이었다(삼상 25:18). 물론 이것을 섭취한다 해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상 숭배자들이 추구하는 향락을 상징하는 식물이기도 했다는(호 3:1) 점에서 구별된 자의 식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4절, 주석과 해설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나실인의 제한된 생활 규범은 서원한 기간 동안 철저히 이행되어야 했다. 만약 이 규범을 어기면 그는 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서원을 해야 했다(12절). 그러나 서원한 기간을 끝낸 후에는 그들도 포도의 각종 소산물을 먹을 수 있었다. 이것은 (1) 나실인도 그의 서원 기간이 종료되면 평범한 일반 백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며, (2)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조건 일상의 생활까지 제한하실 정도로 지나친 분이 아님을 말해 준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오히려 나실인의 금지 규례를 서너 가지로 정하여 주신 것은 흔히 이방의 금욕 종교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몸을 자학(自虐)하는 갖가지 금욕 규례를 스스로 만들어 자신의 몸에 굴레를 덧씌우는 그러한 폐단을 방지코자 한 의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씨나 껍질이라도

혹자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서는 포도의 씨와 껍질을 이용하여 술이나 기타 음식물을 만들었다고 한다(Pulpit Commenrtary). 여하튼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포도 나무에서 나오는 하찮은 소산물이라도 금하라는 것이다. 즉 나실인들에게는 포도 나무의 모든 소산, 곧 그것으로 대표되고 상징되는 세상적인 모든 쾌락으로부터 ‘절대 성결’이 요구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은 조그마한 유혹의 가능성마저 배제해야 한다.



5절, 주석과 해설


삭도를 …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여기서 ‘삭도’(히, 타아르)란 ‘발가벗기다’, ‘없애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라’에서 유래한 말로서 주로 면도용 칼을 의미한다. 한편 나실인이 왜 머리를 깎아서는 안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랑게(Lange)는 나실인이 머리털을 기른 것은 생명의 고상한 힘, 곧 하나님의 주권과 승리의 화환(花環)을 상징하는 머리털(고전 11:3-7)을 기름으로써, 자신을 주장하는 자가 세상 권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 당시의 관념으로 머리털은 피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상징했기 때문에,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행위는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경외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Fairbaim, Baumrarten). 한편 길게 자란 머리를 ‘힘과 충만한 생명력의 상징’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Keil). 왜냐하면 살아 있는 존재만이 머리카락을 생성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실인이 머리를 기른 것은 ‘자신은 여호와에 의해 조성된 그분의 소유로서 온 정력을 다 바쳐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표식으로써, 머리털은 곧 여호와를 위하여 쓴 관(冠)이라 생각할 수 있다. 실례로 평생 나실인이었던 삼손 같은 경우, 그의 머리털은 신적(神的) 능력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삿 16:17). 결국 나실인이 머리를 깎지 않은 것은 (1)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오직 그분만이 유일한 경배 대상임을 나타낸 것이며, (2) 하나님만이 자기 생명과 힘의 유일한 근원임을 인식하여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는 거룩한즉

직역하면 ‘성결하게 되었으니’, ‘봉헌 되었으니’라 할 수 있다. 즉 서원한 기간 동안 그는 하나님의 소유로 구별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의 몸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고, 다른 주권자도 있을 수 없었다. 오직 그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써야 했다. 이러한 요구는 오늘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으로 부름받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실로 오늘날 모든 성도들은 영적 나실인이다.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표이다. 한편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리는 것은 수치스럽고도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으며(왕하 2:23). 죄로 오염된 이방 문화의 부산물로 받아 들여졌다(레 21:5). 반대로 머리를 전혀 깎지 않고 자연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나실인과 같은 특정인에게만 허용되었고, 일반 백성 또는 제사장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겔 44:20). 사실 히브리인들은 애굽과 같은 고대 다른 이방 족속들과는 달리 수염과 머리를 깎는 관습이 있었다(Keil).



6절, 주석과 해설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

나실인은 그 정한 기간 중에는 비록 가장 친한 친지들(부모, 형제, 자매 등)이 죽었을지라도 그 시체와 접촉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나실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곁에서 어떤 사람이 죽었다면, 그는 정결케 하는 날 곧 제7일에 머리를 깎아버리고 제8일에 제사장에게 예물을 드려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써 시체로 인한 부정을 없애야 했다(9-12절). 왜냐하면 시체는 결국 죄악이 빚어낸 결과이므로(롬 6:23) 의식상 부정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실인이 시체를 멀리해야 하는 것은 의미상 죄를 멀리해야 하는 것의 상징적 표현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을 제사장 성별 규례에 대한 기록인 레 21장과 비교할 때, 나실인은 심지어 대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사항까지(레 21:1-12) 자신들의 의무 조항으로 받아들여야 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마저 금지시킨 이러한 요구는,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부모, 형제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함을 강조한 것일 뿐, 결코 부모, 형제와의 정리(情理)를 완전히 끊어버리라는 뜻은 아니다(마 8:21-22, 10:35-38).



7절, 주석과 해설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의 머리에 있음이라

이 말은 ‘하나님께 자신을 성별하여 온전히 봉헌한다는 외적이고 상징적인 표시로써 깎지 않은 긴 머리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나실인의 긴 ‘머리카락’은 그 머리에 관유로 기름부음 받아 성별된 제사장의 머리(레 21:12), 또는 대제사장의 머리에 씌어진 ‘관’(冠)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출 29:6, 슥 6:11). 즉 나실인의 긴 머리털은 하나님의 소유됨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인식표였다. 한편 ‘구별하다’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나자르’에서 ‘화관’(花冠)이나 대제사장의 ‘관’(冠)을 뜻하는 단어 ‘네제르’가 파생된 사실(출 29:6, 레 21:12)은 위의 견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Pulpit Commentary). 한편 ‘머리’가 부정케 된 것은 그의 전인격이 부정케 된 것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시체로 오염된 자는 구별된 자로서의 표식이자 전인격의 상징인 머리털을 깨끗히 밀어냄으로써 부패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9절).



8절, 주석과 해설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즉 이 기간 동안 나실인의 몸은 더 이상 자신의 유익이나 친지나 친구를 위해 사용할 수 없었다. 그 기간 동안 나실인의 몸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따라 살아가야만 했다. 한편 유대 랍비들의 말에 의하면,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최소한 그 구별 기간을 30일 이상 정해야 했다고 한다(Matthew Henry).



9절, 주석과 해설


갑자기 그 곁에서 죽어서

여기서 ‘갑자기’(히, 베페타 피테옴)란 ‘눈 깜박할 사이’, ‘뜻밖에’라는 뜻이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그 곁에서’라는 말과 어우러져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그 해결 방안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만일 나실인이 그 서원 기간동안 고의로 그 금지 규례를 어겼을 경우에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었다. 아마 이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독한 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엄한 형벌이 내려졌으리라 추정된다.


그 곁에서

이 말은 ‘그의 옆에서 일어나다(발생하다)’로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자발적으로 시체를 접촉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기 곁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보살폈거나 그 시체를 만졌을 경우를 일컫는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주검의 부정에 대해서는 고의로 범한 부정과는 구분하여 그 해결 방안이 마련되어 있다(9-12절). 이는 행동의 결과 이전에 동기를 먼저 보시며 인간의 약함을 깊이 이해하시는(히 4:15)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조치이다.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면

여기서 ‘머리(털)’는 전인격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나실인의 머리털은 자신이 하나님께 구별된 자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히 인식시켜 주는 ‘증표’였기 때문이다(Keil).


몸을 정결하게 하는 날

이 날은 시체로 인해 부정하게 된 날로부터 ‘제7일째’되는 때였다. 특별히 이 날을 ‘정결하게 하는 날’로 정한 것은 시체를 만지는 자는 ‘7일 동안’ 부정할 것이라는 율법조항 때문이다(19:11). 즉 시체를 만진 자는 7일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부정한 자로 지내야 했으며, 7일 이후에야 비로소 속죄를 위한 각종 제사가 허락되었다. 한편 여기서 ‘7’이란 숫자는 ‘완전수’로서, 부정케 된 자가 자신의 허물을 완전히 인식하고 통회할 수 있는 충분하고도 완전한 기간을 암시한다. 사실 죄(허물)에 대한 깊은 자각이 없이는 아무도 정결례나 제사에 임할 수 없었다. 이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 생명을 얻어 풍성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머리를 밀 것이니

나실인이 만약 시체로 인해 부정케 되었다면, 그는 ‘구별’과 ‘헌신’의 가시적 증표인 긴 머리를 밀므로써 자신의 부정을 없애야 했다. 한편 여기서 ‘밀다’(히, 갈라흐)는 말은 ‘면도하다’, ‘대머리가 되게 하다’, ‘황폐케 하다’는 의미로써, 결국 머리털을 완전히 밀어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머리를 민 것은 자신의 허물에 대한 슬픔과 통회의 외적 표시라 할 수 있다(사 22:12, 렘 16:6, 겔 7:18). 그런데 모세 율법에서는 원래 이렇게 머리를 미는 것이 금지되었었다(레 19:27, 신 14:1).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그 죄악을 철저히 없앤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특별 규례가 제정된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오늘 영적 나실인이 된 우리는 자신의 범죄에 대해 머리를 미는 대신 각자의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욜 2:13).



10절, 주석과 해설


여덟째 날에

성경에서 ‘8’은 회복과 부활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여기서는 허물 많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함을 뜻한다(마 28:1). 즉 이 날은 나실인이 부정했던 흔적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서 새롭게 교제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날인 동시에 새로운 헌신에의 결심을 다지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가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는 회복과 중생의 날을 예표하는 날이라 할 수 있다.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

비둘기는 노아시대(창 8:20)와 아브라함때부터 제물로 바쳐진 정결한 짐승이었다. 이 새들은 가난한 자들의 식용(食用)으로 사용되었으며, 경제적으로 빈곤한 자들의 제사 제물로 규정되었다(레 14:22). 여기서는 경제적인 측면의 가난보다 나실인이 자신의 허물로 인한 영적 빈곤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 제물이 요구되었던 것 같다.


회막 문에 와서

여기서 ‘회막 문’은 성소 앞 곧 성막 앞, 번제단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5:16). 이처럼 부정을 입은 나실인이 회막문에 선 것은 부정하게 된 자신을 하나님께 보이며, 성결과 헌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였다(레 14:30). 이처럼 모든 죄와 허물은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11절, 주석과 해설


속죄제물로 … 번제물로

‘속죄제’는 자신이 저지른 허물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의미에서(레 4:2-5:13), ‘번제’는 또 다시 하나님께 완전한 ‘헌신’을 다짐한다는 표시로 드려졌다(레 1:3-17). 이처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자는 과거의 죄에 대한 철저한 청산과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경건한 계획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의 머리를 성결하게 할 것이며

본 절은 나실인이 9절에서 ‘머리를 민’ 행위로 그의 허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피흘림이 있는 제사’를 드림으로 비로소 속죄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처럼 “피흘림 없이는 사함이 없다”(히 9:22)는 규례는 구약 시대 속죄의 대원칙이었다. 한편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도 적용 된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반성 정도로 그 죄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죄든지 예수의 보혈 공로를 힘 입을 때에만 비로소 그 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엡 1:7).



12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원문에는 ‘새로 정하고’라는 말이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 ‘지나간 기간은 무효니라’는 말이 있으므로 문맥상 위의 말이 첨가됨이 마땅하다.


일 년 된 숫양을 … 속건제물로

속건제(trespass offering)는 주로 하나님과 이웃에게 해(害)를 끼쳤을 경우 드리는 의무제로서, 여기서는 시체로 인한 부정에서 용서 받고, 부정을 입기 전의 상태로 회복되기 위해 드리는 제사라 할 수 있다(레 14:12).


무효니라

이 말은 ‘떨어지다’, ‘멸망하다’는 뜻으로 이때까지의 ‘구별’이 헌신 기간에 전혀 계산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한 순간의 실수가 온전하고 경건했던 지난 날을 무익하게 만든다는 냉엄한 신앙 윤리를 제시한다(겔 33:13). 따라서 이제 나실인은 자신의 헌신 서약과 헌신 기간을 다시 정함으로써 처음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이것이 신앙인의 진취성이다.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기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날마다 확장될 수 있다(빌 3:13-14).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