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6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가에 대해 예수님께서 교훈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백성들이 가져야 할 기도의 자세에 대한 주석과 해설입니다.
마태복음 6장 1절-18절, 이렇게 기도하라
1절, 강해 주석과 해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 구절은 1-18절까지의 서론에 해당된다. 이 단락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세 가지 종교적 의무, 즉 의(義, 2-4절), 기도(5-15절), 그리고 금식(16-18절) 등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제시되고있다. 즉 5장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직접적인 내용에 대한 올바른 정신과 해석을 설명하시고도 높은 경지의 의(義)를 가르치신 후 이곳에서부터는 율법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유전(inheritance)과 관습에 관한 바른 지침 및 그들이 당면할 종교적 위선의 위험성을 계시하고 있는것이다. 특히 예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外飾)적으로 이 같은 종교적 관행을 하고 있음을 비난한다. 여기서 ‘보이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아데나이’은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강조하는 제 1부정 과거 수동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에게 보이려고’란 ‘그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사람에게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제시한다. 이처럼 전적으로 인간을 의식하고 그의 판단을 고려하면서 취하는 행동은 항상 위선의 위험성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성을 익히 아시고, 또 그것을 능히 극복케 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고려하고 날마다 신전(神前,Coram Deo)의식을 지닐때 인간의 오류와 위선은 최소화 될 수 있다.
너희 의를
어떤 사본에는 이 말이 ‘너희 구제를’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까닭은 아마 ‘의’란 말이 히브리어로 ‘체다카’으로서 70인역(LXX)에 따르면 간혹 구제를 위한 의를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신 6:25).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의’를 ‘구제’란 의미로 직접 변형하여 사용한 적이 없고, 또 다음 절에는 ‘구제’란 말이 따로 쓰이기 때문에 이를 구제란 말로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구별되는 ‘너희’라는 말과 더불어 이 ‘의’(디카이오쉬넨)는 예수의 제자들이 지켜나가야 할 의로운 생활 방식의 배후에 있는 거룩한 동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D.A. Carson).
행치 않도록
의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의 요구 사항을 실천하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바른 행위를 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또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자로 인정받기 위해 고의적(故意的)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이를 행하였다. 이에 주께서는 이러한 위선적 행위를 규탄하고 하나님의 실존을 의식하고 그분이 미구(未久)에 내려주실 온전한 보상만을 기대하며 몸과 마음을 일치시켜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해야 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주의하라(프로세케테)
이는 주로 고대 헬라어에서 종종 발견될 뿐 성경 문학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서(LXX, 욥 7:17), 특히 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는 ‘마음’을 뜻하는 ‘눈’이란 말이 생략된 형태이다. 따라서 이 말의 원의(原意)를 살펴보면 ‘이것을 항상(생각)하라’,’오직 이 일에 마음을 집중시키라’는 뜻이 된다.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염려했으며, 또 그들에게서 이미 위대하며 경건하다는 칭찬을 상(賞)으로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사람의 행위 전체를 바라보고 계셨던 하나님께는 받을 상이 없는 것이다.
2절, 강해 주석과 해설
그러므로
이 말의 원어 ‘운’은 여기서 앞 구절에 대한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보충적 설명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는 ‘예를 들자면’, ‘이에 대한 구체적 사례를 들자면’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구제할 때에
이 어구가 ‘구제한다면’이라는 조건문으로 기록되었으면 구제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이 어구는 단순히 직설적으로 ‘구제할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주께서는 구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말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구제가 공적(功績)을 쌓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편 중의 하나로 생각할 정도로 구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구약 외경 토비트 12:8, 9). 어쨌든 여기서는 공적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하거나 그들의 구원관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선(善)을 행함에 있어서 과시나 보이기 위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외식하는 자(호이 휘포크리노마이)
이는 ‘가면을 쓰다’, ‘위선적 태도를 취하다’, ‘ … 인 체하다’는 등의 뜻인 ‘휘포크리노마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타인의 흉내를 내는 사람’, ‘배우’등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 용어는 주로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른 바리새인들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형태와 연관되어 본서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5, 16절, 7:5, 15:7, 23:13-15, 24:51). 여하튼 ‘외식’은 타인과 자신을 동시에 속이는 악행으로서 전지(全知)하신 하나님 앞에 반드시 단죄될 것이다(고후 5:10).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의와 기도 그리고 금식으로 삼대별(三大別)되는 유대인의 종교적 의무 중에서 아마 ‘의’의 일부에 속한 이 구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셨던 것 같다. 그러나 외식자들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동기(動機)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회당과 거리에서 이러한 종교 의무를 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인간의 본분인 하나님께 ‘오직 영광’(Sola Gratia, 전 12:13, 롬 11:36)을 돌리는 데는 전혀 무신경했던 것이다.
나팔을 불지 말라
이에 대해 많은 주석가들은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성금을 모을때 나팔을 불던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다(Hill, Bonnard). 그리고 칼뱅(Calvin)은 구제자들이 성금을 내면서 이 사실을 알리고자 나팔을 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어떤 학자는 헌금궤(눅 21:1)의 모양이 뿔피리 모양으로 생긴 데에 이 말의 근원이 있다고 주장한다(Edersheim, Jeremias).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이를 뒷받침할만한 확정적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단정 지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실제로 나팔을 부는 것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자랑하지 말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이와 더불어 ‘뷔흘러’(A. Buchler, St. Matthew V:1-6)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즉 ‘공적인 금식 기도는 나팔소리에 의해 선포되었다. 그런 때에는 사람들이 비오기를 탄원하는 기도 등을 길 거리에서 드리곤 하였다(5절).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구제 행위가 자신들의 그러한 금식과 기도의 효과를 한층 더 보장해 준다고 생각했다(Sanhedrin 35a, P. Tannith 2:6). 그리하여 사람들은 구제를 하게 되었는데, 이런 구제 행위가 자기 과시(誇示)적인 행동을 낳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상을 … 받았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원하던 것은 하나님의 상이 아니라 대중의 칭찬이었으므로 그들은 헛된 영광의 상을 이미 받은 것이다. 여기서 ‘받다’에 해당되는 원어 ‘아페쿠신’은 상업 용어로서 자주 쓰이는데, 거기서 이 말은 전액을 영수(receipt)했다는 뜻이다.
3절, 강해 주석과 해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도와주며 이둘은 항상 함께 일한다. 따라서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자신이 베푼 자선을 도무지 기억지말고 의식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그 선행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듯이 하라는 당부인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몇가지 설명을 들자면, (1) 겸손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말없이 주는 것을 상징한다(Chrysostom). (2) 오른손으로 일을 해놓고 왼손으로 그 결과를 거두려고 하지 말라(Luther). (3) 선을 행하고는 그것을 바다에 던지라 고기들은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시리라(동양 격언) 등을 열거할 수 있다.
4절, 강해 주석과 해설
은밀하게 하라
이는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명령이기도 하고 또한, 사람의 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이 어구는 이곳 외에 6절과 18절에 다시 반복된다. 그런데 KJV나 Textus Receptus의 자의적 해석에 의하면 본 절과 6절에 ‘은밀히’와 대구를 이루는 ‘드러내 놓고’(openly, 엔 토 파네로)란 말이 첨가되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갚으시리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의역이라고 생각된다. 예수께서는 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저 침묵하실 뿐이다. 여하튼 우리가 우리의 자선을 잊게되면 잊게 되는 만큼 하나님이 주목해 보실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그것을 높이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한 만큼 하나님은 그것을 무시하실 것이다.
너의 아버지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은밀한 중에 그 위선의 속깊은 내면을 보고 계시는 심판주로 다가오시기 때문에 매우 두려운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의(義)를 드러내지 않는 주의 제자들에게는 자신의 선한 행위를 조용하고 따사로은 눈길로 다 하나하나 보시고 기억해 두시는 ‘아버지’로 다가오실 것이며, 따라서 그 같은 사실 자체가 크나큰 기쁨과 위로가 될 수 있다.
갚으시리라(아포도세이 소이)
직역하면 ‘그에 합당한 양을 어김없이 되돌려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께서는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갚아주실 것인지 또는 그 보상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들이 계시하고 있는 여러 증거들을 참고할 때 우리는 그 보답이 현세와 내세에서의 지고(至高)한 기쁨과 원숙한 인격의 완성으로 주어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Broadus).
5절, 강해 주석과 해설
기도할 때에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직접 아뢰는 것으로서 인간으로서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따라서 이는 구제보다 더 즉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때에’(호탄)란 말이 가정법 현재 시상과 더불어 사용됨으로써 규칙적인 기도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넌즈시 비추고 있다(Lenski).
외식하는 자
외식하는 자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1) 악하면서도 선을 가장(pretence)하는 유형, 이런 사람은 자신이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22:15-18). (2) 자기 만족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속이면서 또 타인을 속이는 유형, 이런 유형의 외식자들은 보통 스스로 경건한 체하지만, 타인을 속이지는 못하고 곧 발각된다(9:1-5). 아마 예수의 책망을 들었던 이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 유형에 속했던 것 같다. (3) 외식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스스로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유형, 이는 가장 완벽한 위선자이다. 따라서 이들은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그 행위를 보는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다.
되지 말라
이는 제자들의 기도를 전제한 표현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이 의식적인 기도에 빠지지 않도록 여기서 그 허황된 위선에 대해 경계하신 것이다. 특별히 이 ‘되지 말라’는 말은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미래 시상의 어구로서 이 경고를 받은 이후부터 절대 그 같은 잘못을 범치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회당과 큰 거리 어귀
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로서 1차적으로 외식자들이 자신의 경건 생활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수단으로서 이 장소를 택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비난한 내용이다. 대개의 경우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회당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다(눅 18:9-14, 행 3:1, 10:9). 만약 외출 중에 기도 시간을 맞게 되면 길가에 서서라도 기도하는 열성을 보였다(M.Taanith 2:1, 2). 이렇듯 그들 행위의 처음 의도는 순수했으나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즉 기도 시간에 일부러 외출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오직 하나님과 자아와의 순결한 만남의 장(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명성을 얻고자하는 것은 금을 주고 돌을 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며 나아가 창조자의 순결한 사랑을 인간의 음흉한 위선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눅 18:1-4). 이처럼 예수께서는 기도의 장소나 자세 등을 문제 삼아 그들을 책망하였다기 보다는 그들이 기도한 동기와 목적이 불순(impurity)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기도를 통해 진실로 하나님께 호소하는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는 칭찬을 듣고자 외식적 태도로 장황하게 기도했던 것이다.
서서 기도하기를
성경에는 기도의 자세가 몇 가지 언급되고 있다. 즉 기도는 엎드려서(민 16:22, 단 8:17, 계 11:16), 또는 무릎을 꿇고(대하 6:13, 눅 22:41, 행 9:40), 또는 앉아서(삼하 7:18) 또는 서서(삼상 1:26, 막 11:25)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도의 자세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 한 그들의 헛된 동기(motive)인 것이다.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외식자들은 관례에 따라기도 시간(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맞추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 장소에 나아가 수려하고 장엄한 언어로 기도한 것 같다. 그렇게해서 사람들의 영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여지(margin)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한 사람들 중에는 아예 공적(公的) 기도를 폐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분명 예수는 모든 공적기도를 금하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는 그것을 오해하지도 않았다(18:19, 20, 행 1:24, 4:24-30). 실로 공적인 기도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공적인 기도와 사적인 기도의 구분이 기도하는 사람의 동기를 판단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칭찬에 더 관심있는사람, 곧 경건보다 경건으로 인한 명성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 사적인 기도는 무시한채 공적인 기도만을 추구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식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다음에 이어지는 ‘골방 기도’이다.
6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네 골방에 들어가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 드리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엘리사의 침실과 비슷한 곳이었던 것 같다(왕하 4:33). 여기서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한편 ‘골방’의 원어 ‘타메이온’은 ‘자르다’는 뜻의 ‘템노’과 ‘청지기’란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로서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내밀(內密)한 대화를 나눌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저장실(store room), 내실(inner room), 침실(bed room, 사 26:20)등을 가지고 있다.
문을 닫고
사 26:20에는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란 말씀이 있는데, 본문은 분명히 이 예언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 예언을 베풀 때는 분명 마지막 심판날의 무서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아마 제자들이 이런 심판날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되, 이를 관습화하기 원하셨던 것같다. 여하튼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잠시나마, 오직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제 3자의 개입을 불허(不許)한다는 뜻인 동시에 순결한 영혼의 교제만이 있을 뿐임을 시사한다.
은밀한 중에 … 기도하라 … 갚으시리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구하는 자에게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을 듣고 계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두 ‘갚으실’(4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품성을 온전히 반영한 약속이다.
7절, 강해 주석과 해설
이방인과 같이
산상수훈에는 이방인이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5:47, 6:32), 본문의 이방인은 두 번째의 언급이다. 갈릴리 지방은 이방 지역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방인들의 출입이 잦았고 심지어 그들과 섞여 살기도 했다. 따라서 갈릴리 사람들은 이방의 관습에 익숙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해서 예수는 자연적으로 앞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적 행동을 비난함과 아울러 바른신앙 생활을 가르치셨던 것같이 이들 이방인들의 잘못된 종교 관행을 빌어 참된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신 것이다. 물론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앞에서는 기도의 장소와 그 동기적 측면이 강조된 것이라면, 본문은 주로 기도의 내용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하겠다.
중언 부언
이 말의 원어는 ‘밭타로게세테’으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을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어원 역시 분명치 않다. 어떤 학자는 말더듬이인 ‘바투스’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며(Erasmus), 또 어떤 이는 장황하고 반복적인 시(詩)를 읊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대부분 이 말이 정확하지도, 그렇다고 명쾌하지도 않은 일종의 의성어(onomatopoeic word)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중언 부언’이란 말은 잡다할 정도로 말을 길게 끌거나 아무 의미없는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이방인들은 이와 같은 주문(呪文)과도 같은 내용을 지겹고도 공허하게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들의 신(神)을 질리게 만들었다(왕상 18:26, 28).
말을 많이 하여야
이는 중언 부언하는 기도의 방법이다. 그렇다고 기도를 언제나 짧고 간단하게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온 밤을 지새우며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따라서 본문은 장황하고 긴 기도가 믿음의 순수한 표현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는 기도의 길이에 관계 없이, 그분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또한 기쁘게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이다(사 65:24, 히 11:6)
8절, 강해 주석과 해설
본받지 말라
기도를 길게 하거나 반복하게 되면 기도의 효력이 강화(强化)되어 쉽게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진 이방인들의 어리석은 신앙관(왕상 18:26-28)에 미혹되어 신앙의 본질을 망각치 말라는 당부이다.
구하기 전에 … 아시느니라
이는 기도에 앞서 가져야 할 신앙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더 잘 아시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특히 여기서 ‘이시느니라’(오이덴)는 말은 긴밀한 관계성 속에서 이뤄지는 직관적 인식을 뜻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이전부터 그 간구하는 자의 삶에 깊이 개입(介入)해 오신 분으로서 그 필요(necessity)를 익히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오해하여 전혀 간구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의 인격적 대화를 원하시며 또한 그들이 당신께 대한 깊은 신뢰감을 지니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 필요를 구하기를 원하신다(Hill). 그렇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많은 기도와 많은 노력을 통해 신에게서 탈취하듯 복(福)과 소원을 앗아옴으로써 그 간구한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9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너희는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우리 기도의 영원한 모범이 된 주기도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가도 주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는데(눅 11:2-4), 양식(form)적인 면에서 몇가지 상이(difference)점들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두고 복잡한 견해들을 내놓고 있으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수차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마태는 그 중의 한 경우를 기록했고, 누가는 또 다른 경우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Carson). 본문의 ‘너희’는 이방인들과 대조된 주의 제자를 가리킨다.
이렇게 기도하라
‘이렇게’에 해당하는 원어는 ‘후토스’으로서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내용 및 그 순서상의 방법에 대한 모범적 제안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앞에서 경고하신 바, 그릇되고 아무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신것이다. 한편 여기서 ‘기도하라’(프로슈케스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회적인 행동이 아닌 지속적(continual) 행동을 염두에 둔 명령이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할 때마다’ 이러한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호 엔토이스 우라노이스)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계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권능과 지혜로 친히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초월적인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 특히 원문서는 복수로 표기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3충천(天)으로 조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즉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 왕상 8:27)과 편재성(偏在性, 시 139:8, 사 66:1)을 언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3충천의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다(시 33:14, 사 57:15, 63:15). 따라서 ‘하늘에 계신’이란 기도의 문두(文頭)는 당신의 사람들로 하여금 전지전능하시며 초연하여 계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소망과 깊은 신뢰를 안고, 또한 하늘나라가 진정 자신들의 본향(本鄕)임을 인식하고 기도할 것을 바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리 아버지(파테르 헤몬)
구약에서는 여호사 하나님을 이렇게 호칭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이사야 선지자같은 경우 이스라엘의 반역은 ‘자녀들’의 반역으로(사 1:2). 하나님을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피조물들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분으로 묘사하여(사 63:16)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것은 예수에게서였다(Jeremias, Prayers, pp. 11ff). 따라서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기도의 서두에 ‘우리 아버지’로 묘사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는 단순히 ‘존재의 근거’(grounds of being)가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며, 폭군이나 압제자가 아니라 친밀히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을 지닌 유일한 아버지(only father)이시다(엡 3:14, 15). 한편 ‘우리 아버지’(Our father)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라는 복수형태가 주기도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 예수의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독특한 관계성을 정립(定立)시켜 주는 말로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아니시다(5:45). (2) 주기도문이 혼자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제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며 드리는 기도의 모범(18:19)이 됨을 시사해 준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의 본론에 해당하는 7개항의 기도 내용 중(앞선 3개항-찬양과 친국 도래 및 하나님의 주권, 뒤이은 4개항-개인의 현실문제)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십계명의 제1, 3계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출 20:3, 7).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며 그가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의 그 자신이시다(출 3:14). 따라서 그의 이름에는 거룩하신 인격과 능력과 권위도 함께 한다. 그리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의 가치만큼 거룩하게 대접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레 19:2, 겔 36:23, 벧전 1:15). 즉 이 세상에는 그분의 이름만큼이나 거룩한 것은 없으므로 그 거룩한 이름이 주의 형상대로 창조함 받았으나 순수성을 상실(loss)해 버린 인간들의 천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 경멸받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이다(말 1:6). 실로 간혹 ‘분리’, ‘성별’이라는 의미로 생각되는 ‘거룩’은 하나의 속성이기보다 ‘하나님 자신’(What he is)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신성 자체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세속과 사악에서 구별되며, 절대무흠(無欠)하신 지존자(至尊者)요, 유일한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사 29:23).
10절, 강해 주석과 해설
나라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거룩하시듯이 또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영원히 통치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Kingdom)란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reign)가 미치는 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나타났지만 세상 끝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막 1:15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28:10, 눅 21:27, 28, 계 21:1-8).
임하옵시며
사람들이 하나님께 머리숙여 복종하고 또 구원의 종말론적 축복을 미리 누림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계속 확장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며, 그 나라가 완성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고전 16:22, 계 11:17, 22:20). 한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를 기다렸으며, 메시아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었다. 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 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다(Jeremias, Prayers, p.98).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에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나라가 시작되어 그 나라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 ‘델레마’은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 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 26:42)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같은 대속적(代贖的) 죽음이 실현되어야 하고, 동시에 절대적 순종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한편 본문의 ‘하늘에서’란 하나님과 천사들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두 번째의 간구(’나라이 임하시옵시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의(義)가 지금 현재 온전히 성취된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이와 상용되는 ‘땅에서’란 말은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대상(타락한 이 지상과 역사와 인격들 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뜻은 현재 ‘하늘’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거기에는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구현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메시아 왕국의 왕성을 뜻하는 기도라 할 수 있다.
11절, 강해 주석과 해설
오늘날(세메론)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기도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실제 필요한 내용들이 기도되고 있다. 그중 첫째가 ‘양식’(bread)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이란 ‘오늘’ 또는 ‘지금’이란 뜻으로서, ‘매일 매일’ 또는 ‘날마다’라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로 보건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구하는 것은 ‘그날’ 하루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요구이지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은 겸손한 기도는 하루에 한 번씩 급료를 지급받아 생활했기 때문에 만일 며칠을 앓아눕기라도 하면 그만 굶을수 밖에 없는 1세기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여유있는 자들에게는 이 기도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지도 모톤다. 하지만 그날 벌어 그날 먹어야 하는(from hand to mouth) 자에게는 이 기도야말로 귀중하고 절박한 간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이를 ‘날마다’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본문의 오늘날이란 개념 속에는 ‘지금’이라는 뜻 외에 ‘바로 뒤 따르는’(immediately following)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종합적으로 이해하면 ‘앞으로 올 날을 위하여 우리의 양식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란 뜻이 된다.
일용할(에피우시온)
이 단어 역시 그 의미가 좀 애매하며 또한 어원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이 단어는 흔히 ‘내일을 위한’, ‘생존을 위한’, ‘오늘 필요한’, ‘매일 필요한’ 등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제롬(Jerome)은 이를 라틴어 ‘Superstantialem’(뜻 ‘물질을 초월하는’, above material substance)으로 번역하여 그 양식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언어학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뒤이어지는 ‘앙식’은 실제의 음식물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인간이 물질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Luther). 한편 이 말은 전치사 ‘에피’( … 에 대하여)와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동사의 변형으로 합성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또는 ‘매일의 생존에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양식을 주옵시고
여기서 ‘양식’이란 모든 음식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용어이다(잠 30:8, 막 3:20, 살후 3:12, 약 2:15). 그런데 초대 교부들은 이를 물질적인 의미의 음식이 아니라 성찬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를 이 같이 비물질적 의미로 해석하는데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그 근거가 확보되지 못했으므로 적절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록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인간 생존(生存)에 가장 필요한 것들인 육(flesh)의 ‘양식’을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그 생존의 기본 원리와 생존의 근본 동인(動因)의 문제를 밝히 드러내셨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것은 하나님께서 앙식을 ‘주신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일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6:34)을 전제할 뿐 아니라, 노동으로 우리의 양식을 벌수 있는 능력은 물른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온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신 8:18, 고전 4:7, 약 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부(富)가 증가하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에 만족하게 될 때에는 쉽게 망각한다.
12절, 강해 주석과 해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신약성경에서 혼히 죄로 번역되는 원어는 ‘하마르티아’으로서 어떤 목표에 미달(未達)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누가도 이 부분을 ‘하마르티아’로 기록하고 있다(눅 11:4). 그러나 마태는 이곳을 흔히 빚(debt) 또는 부채(loans)로 번역되는 ‘오페이레마타’으로 기록하였다. 아마 마태의 기록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은 것이고, 누가의 것은 2차적으로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즉 누가는 온유적 의미가 담긴 빚이란 말보다는 그 뜻을 보다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죄는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할 바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빚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 사하여 준 것 같이
이는 하나님의 사죄의 양(量)과 우리의 사죄의 양을 비교하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사실에 대한 비교이다. 누가는 이곳을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눅 11: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죄와 우리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반면에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있다. 한편 본문에 대해 혹자(Jeremias)는 ‘우리가 사하여 주었다’는 뜻인 ‘아페카멘’을 완료시제로 보지 않고 현재완료형으로 보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이 기회에 용서해 주오니’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보다 용서에 있어서 그 ‘공적’(deserts)과 ‘자격’(capacity)을 구분하여 해석한 모울(C.F.D. Moule)의 주장이 더욱 원문에 가까울 것이다. 즉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일단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남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가 상대적으로 극소화되어 나타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잘못은 극소화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와 자각은 단순한 후회와는 달리 철저한 자기 부정과 겸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13절, 강해 주석과 해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사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사실 신약 성경 여러 곳에는 성도들이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온다(고전 10:13, 약 1:2). 하지만 이러한 시련(testing)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하여 더 큰 믿음을 낳게 하려는 것으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혹 어떤 이들은 ‘시험’이란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종말론적 환난, 즉 배교(apostacy)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Jeremias, Prayers, pp. 104-7). 그러나 본문의 시험(페이라스모스)란 단어에 어떤 한정사가 첨가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문맥상 본문의 기도가 단지 종말에 국한시켜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한편 본문을 허용적 뉘앙스를 지닌 문장으로 이해하여 ‘(악마에) 의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시험’(temptation)이라는 말이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막 14:38, 갈 6:1). 여하튼 이 간구는 분명 시험에 날마다 노출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사악한 악마의 미혹에 쉽게 넘어질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실로 우리는 감당할수 없는 시련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뿐 아니라(고전 10:13) 그러한 시험에 직면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극복케 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알라)
이는 ‘그러나’, ‘도리어’라는 뜻의 반의적(反意的)인 접속사로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앞의 간구와 분명히 대조되는 또 하나의 간구(일곱 번째 기도)임을 보여 준다. 즉 이 ‘알라’라는 접속사는 바로 전의 간구가 소극적이고 피동성이 강한 기도였다는 전제를 깔면서 바로 이어지는 간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이 강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사실 이어지는 간구는 악에 대한 능동적 승리를 기도한 것이다.
악(루 포네루)
이 말은 남성 또는 중성 소유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중성으로 해석할 경우는 추상명사로서의 악을 가리키고 남성으로 이해할 경우는 악한 자로서의 사탄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여러 곳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이는 분명히 남성인 것으로 보인다(요 17:15, 살후 3:3, 요일 2:13, 14).
구하옵소서
이는 사탄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이다(엡 6:16, 요일 3:12). 우리는 사탄 앞에서는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서 그를 이길 수 있는(4:1-11) 주님만이 우리의 보호자가 될 수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 있사옵나이다 아멘
고대의 유력한 사본 및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누가 복음에는 나와있지 않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기도의 끝에 반드시 송영(Doxology)이 뒤따랐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후대 기독교회가 주기도문을 완전한 기도문의 형태로 만들기위해 첨가 내지는 삽입한 것 같다. 한편 본문의 송영 자체는 신학적으로 심원하고 문맥상으로 적절하다. 특히 마지막 세 간구들 안에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송영이 문맥상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송영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각각의 사역에 대한 내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성부의 창조와 섭리는 우리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고, 성자의 속죄는 우리의 용서를 확보해 주며, 성령의 내주(內住)하는 능력은 우리의 안전과 승리를 보장한다고 말한다. 한편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10절). 따라서 그 나라를 유지(維持)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선한 약속들을 성취시킬(12절) 권세와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영광’이(9절) 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앞의 주기도문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본문의 송영은 전통깊은 교회의 신앙 고백적 찬양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에 의해 계속 낭송되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14절, 강해 주석과 해설
과실(파라프토마타)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한 편에 치우침’이란 뜻으로서 진리나 의(義)로부터의 이탈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는 분명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주는 근본적인 범죄, 곧 ‘하마르티아’과 구별된다.
용서하면
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죄 용서함을 받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부적인(conditional) 공적(merit)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겠다. 단지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원하는 자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실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며 참된 회개의 자세이다.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이는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절)라는 다섯 번째 갈구를 더욱 심화시키고 강조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이곳 뿐만 아니라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다(18:23-35, 막 11:25). 이는 예수를 주로 모신 공동체의 성격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15절, 강해 주석과 해설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용적 측면에서 14절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실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자는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원하는 바를 우리는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황금율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얻고자 하면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원하면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
16절, 강해 주석과 해설
금식할 때에
모세의 율법에는 1년에 한 번 지키는 속죄일에 모든 백성이 다 금식(禁食)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레 16:29-31, 23:26-32, 민 29:7). 그리고 바벨론 유수 기간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셨던 지난 날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정기적으로 금식할 것을 규정하였다(슥 7:3-5, 8:19). 그러나 이런 국가적 차원의금식 외에 각 집단이나 개인의 차원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금식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금식은 때때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또는 주앞에서 더욱 겸비해지기 위해서(느 9:1, 2, 시 35:13, 사 58:3, 욘3:5 등) 그리고 헤어날수 없는 큰 번민과 위기 또는 절망에 빠졌을때 하나님께 구원을호소하기 위한 방법으로(출 24:18, 삼하 1:12, 예 4:16, 행 14:23 등) 행해졌다. 사실 이금식은 구약 시대 뿐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신앙적 측면에서 자기 훈련의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구약 시대에서부터 금식이 단순히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으로 행해지는 경우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이 가해졌다(사 58:3-7, 렘 14:12, 슥7:5, 6). 그중에서도 특히 금식을 하면서도 이웃 구제에 무관심한 사실에 대해 혹독한 비판이 내려졌었다(사 58:1-7).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이는 바로 앞의 ‘금식할 때에’라는 말이 현재 시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당시에 금식은 어떤 특별한 행사라기보다 유대인들이 늘상 게속해 오던 행사였던 것이다. 사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한 주에두 번, 즉 월요일과 목요일 경에 금식하였다. 그리고 ‘안나’와 같은 경건한 여선지는 일상적으로 금식하였다(눅 2:37). 그런데 이러한 금식을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배고픔과같은 육체적인 고통통 따르게 마련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은 고통을 자기 의(義)와 경건을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자연적 고통에 인위적인 표정까지 가미(加味)하는 위선을 범하지 말 것을 명하셨다. 마찬가지로 일상의 신앙 생활을 결코 자기의(義)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전락(轉落)시켜서는 안 된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뤄져야 하는 참된 경건인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을 할 때에 자연적으로 용모가 흐트러지고 또한 자신의 내적인 죄악을 깊이 통회하고 자복하는 중에 기름을 바르지 않고 재(災)를 뒤집어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자신의 진실된 통회의 표시로써 금식이 행해졌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자신의 종교심을 자랑하고 또 사람의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는 동기에서 외식적인 금식이 행하여졌던 것에 대해서이다.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여기서 ‘흉하게 하다’는 뜻의 원어 ‘아파니주신’과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뜻인 ‘파노신’은 그 음운상 비슷한 단어로서 헬라 문학에 있어서의 일종의 재담적(才談的)표현이다(Robertson). 한편 ‘얼굴을 흉하게 하는’것이란 먼지와 재 등을 머리에 뒤집어 씀으로서 본 얼굴을 거의 보이지 않게 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삼하 15:30, 겔 24:17).
17절, 강해 주석과 해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여기서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어떤 특별한 기름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몸단장을 위한 한 절차로서 사용된 것을 말한다(룻 3:3, 삼하 12:20, 전 9:8). 그 한 예(例)로써 다윗은 밧세바가 낳은 아이의 병을 위해 금식하다가 그 아이가 죽고 나자 금식을 중단하고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발랐다(삼하 12:15-20). 이처럼 기름을 바르는 것은 금식의 행위를 밖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는 구체적인 대응 방법으로 간주할 수 있다.
얼굴을 씻으라
이 역시 일상의 몸단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지시를 하신 예수께서 금식 그자체를 금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금식의 필요성을 절대 부인하지 않으셨다(9:14, 15). 다만 진정한 금식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므로 특별히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슬픈 기색을 지을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신 것이다.
18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네 아버지께 보이게
금식은 자기 부정의 행위이며 육신의 고행(苦行)이고, 또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위한 일종의 육체적 단절 행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갖 세상욕망과 혈기를 죽이고 더욱 거룩, 겸손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금식은 반드시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여야지 조금이라도 사람을 대상으로하면 차라리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4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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