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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1절-10절, 오실 그 이가 예수님입니까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11장 1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한 질문을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구약에서 예언한 오실 그 분이신지에 대한 요한의 질문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게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절-10절, 오실 그 이가 예수님입니까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마태복음 11장 1절-10절, 오실 그 이가 예수님입니까



1절, 강해 주석 해설


예수께서 … 마치시고

마태는 예수께서 특별한 강화를 끝맺으실 때마다(7:28, 13:53, 19:1, 26:1) 이와 유사한 형태의 종결 문장을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10장과 이 구절을 나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즉 본 절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기 위해 훈련과 각종 선교 지침을 가르치셨던 가버나움 근처에서의 장면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사건에 뒤이어, 마가나 누가의 기록에는 제자들이 각처에서 전도하고 돌아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막 6:30, 눅 9:10) 마태의 기록에는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마태가 사건의 진행 과정보다는 예수의 공적 사역에 관심을 더욱 집중시키고 조금 전의 제자 파송이 예수 자신의 일을 덜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천국을 널리 선포하기 위한 조치(management)였음을 보여주려는 집필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저희 여러 동네

여기서 ‘저희’(아우톤)라는 대명사는 ‘파송된 제자들’과 연관시킴으로써 (1) 제자들의 출생지(Zigabenus), 또는 (2) 제자들이 전도한 각 동네로 보기도 하고(Fritzsche, Meyer), 그 당시 예수의 전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갈릴리 사람들’과 연관시켜 (3) 갈릴리 주변의 성읍들로 해석하기도 한다(D.A. Carson). 이 견해들 중 (2), (3)번을 조화시킨 것이 가장 무난한 듯하다. 즉 예수께서는 파송된 제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시고 갈릴리 근방의 성읍들을 찾아다니시며 당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던 것 같다(Bruce, Chrysostome). 이 전도 여행을 끝마친 후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다시 모여 자신들이 행하고 가르친 모든 일들을 예수께 보고(report)하게 된다(막 6:30).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가르친다는 것과 전도한다는 것은 여기서 분명히 구별되어 쓰이고 있다. 즉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모여드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사적(私的)으로 자신의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고, 전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음을 공개적(公開的)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사역자들의 주임무가 신자들을 교육시키는 것(디다케)과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케뤼그마)임을 추론할 수 있겠다.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여기서 ‘거기’란 제자 훈육(discipline)과 파송을 했었던 가버나움 주변의 한 곳을 가리킨다.



2절, 강해 주석 해설


요한이 옥에서

헤롯은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였다가 침례 요한의 솔직한 책망과 비난에 분노하여 침례 요한을 옥에 가둔 일이 있다(14:3, 4). 한편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때 헤롯 왕은 침례 요한을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사해 동쪽의 마카이루스(Machaerus) 성에 감금해 두었다고 한다(Josephus, Antiq. XVIII, 119<2절>). 이러한 침례 요한의 투옥 사건이 있자 예수께서는 유대 지경을 벗어나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시게 된다(4:12). 한편 침례 요한은 이곳에서 1년 정도 감금된 후 사악한 헤로디아의 요구로 참수형(斬首刑)에 처해지게 된다(14:1-12). 여하튼 그는 구약 최후의 선지자요,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설교를 외치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기보다 능력이 많고 또 그를 믿는 이에게 그분은 성령과 불 침례를 주실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언어로 선포했었다.


그리스도의 하신 일

마태는 이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란 칭호로는 부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침례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회의(懷疑)하고 있는듯이 보이는데, 아마도 마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침례 요한이 의심하고 있는 그분 예수가 확실한 그리스도, 곧 오실 메시아이심을 깨우쳐 줌으로써 불필요한 회의를 막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마태는 그의 책 서두(1:1)와 서론에 해당하는 1-2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제해 놓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요한이 들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대해서는 (1) 세리들 및 죄인들과의 은혜스러운 교제(9장, F.R. Fay), (2) 예수의 이적과 교훈, 제자 파송 등의 사건들(5-10장), (3) 특히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키신 일(눅 7:11-17, A.T. Robertson), (4) 큰 이적과 기사를 베푸셨음에도 자신의 선구자요 친족이었던 침례 요한의 투옥에는 무관심했던 일 등으로 이해하는 견해들이 있다.


제자들을 보내어

그 당시 요한은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 제자들을 두고 있었다(9:14). 그 때 제자들은 요한이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였으며 요한의 사후(死後)에도 무리를 이루어 약 3세기까지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었다고 한다.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제자들’앞에 전치사 ‘디아’(통하여)가 들어 있어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께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KJV에는 ‘디아’를 ‘뒤오’(둘)로 번역하여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 중 둘만을 예수께 보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눅 7:19). 그런데 침례 요한이 제자들을 왜 예수께 보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들어보면 (1) 메시아에 대한 회의 때문에(Tertullian, Bruce), (2) 자기 제자들의 의구심을 풀어주기 위해(Chrysostom), (3) 예수가 과연 자기에게 침례를 받았던 전날의 그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4)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확신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Holtzman)등이 있다. 그중 첫 번째의 견해가 환영받고 있다(3절 주석 참조). 이에 비해 어떤 학자는 침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낼 형편에 처해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어 본문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견해를 내고 있다(D.F. Strauss). 그러나 마가의 기록에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막 6:20)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자들과 만나지도 못할 그런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3절, 강해 주석 해설


오실 그이(호 에르코메노스)

몇몇 랍비들은 이 말이 메시아 왕국의 선구자라고 주장하지만(McNeile), 이 말은 분명 메시아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이다(막 11:9, 눅 13:35, 히 10:37). 이와 유사한 용어로서 ‘인자’(막 9:12),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시 118:26), ‘왕’(시 2:6), ‘정한때에 오시는 자’(합 2:3)등이 있다. 여하튼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하여 왔과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그의 오심이 에언되어 왔다(창 49:10, 사 9:1-6, 11:1-5, 35:4, 단 9:24-27 등). 따라서 메시아가 ‘오실 그 이’로 묘사될 수 있었다. 한편 누가는 요한의 제자들이 당도했을 때 예수께서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 소경을 보게 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눅 7:21). 아마도 누가는 요한의 의심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실 그이’가 왔을 때 일어날 메시아적 이적을 의도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이오니이까

헬라어의 어법상 주어가 없더라도 동사의 어미가 주어의 인칭을 나타내기 때문에 대명사는 흔히 생략되는데 본문에서는 주어를 강조하기 위해 ‘당신’(쉬)이란 대명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신이 바로 오실 그이오니이까?’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실로 이 질문은 ‘메시아의 오심’이라는 전체 신앙의 의심에서가 아니라 예수가 과연 호에르코메노스’(그 오시는 자)인지에 대한 역사적 진실에의 의문인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이를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낸 이유에 대해서는 전술한 바와 같은 견해들이 있는데 최근에 와서는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한 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면 예수를 두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했던 그가 왜 이런 회의를 품게 되었는가? (1) 아마도 그가 그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Bruce). 즉 시간이 갈수록 요한은 감옥에 갇혀 마음이 조급해진 반면 메시아로부터는 어떤 격려의 메시지도 없었던 것이다. (2)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예수의 제자와 요한의 제자들 간의 경쟁 의식에서, 예수의 명성이 높아가자 요한의 제자들이 질투심을 느낀데 그 원인이 있었을 수도 있다. (3) 그러나 주된 원인은 예수가 그 당시 흔히 이해되고 있었던 민족적 차원의 메시아 사역을 충족시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요한은 자기가 선포한 바와 같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3:10, 요 3:36)는 심판을 기대했으나 예수는 심판보다는 사랑의 사역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Dunn). 즉 그는 적어도 예수가 오실 메시아라면 엘리야와 같은 메시아적 표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여야만 하지 않는가 라는 강한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다(말 4:5, 요 1:19-21). 따라서 그는 예수의 행위가 메시아로서는 합당치 않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기다리오리이까(프로스도코멘)

이는 막연히, 수동적 입장에서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절실한 기대를 안고 마치 사모하듯이 기다려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실로 이 표현으로써 침례 요한의 타는 듯한 메시아 갈증을 읽을 수 있다.



4절, 강해 주석 해설


듣고 보는 것을

예수의 답변으로, 간결하고도 권위에 차 있었다. 즉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변호(辯護)를 일찌감치 접어두시고 단지 당신의 사역을 통해 메시아적 실재(實在)를 증거하셨다(사 29:18, 19, 35:5, 6, 61:1). 한편 누가는 “마침 그 시(時)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눅 7:21)고 기록하여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고 계시던 때에 도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예수는 당신의 메시아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받기 전에 이미 온몸으로 답변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듣고 보는 것’이란 그 당신의 관용구인 ‘경험한 것’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즉 (1) 예수의 증거는 말과 행동이 완전 일치(一致)됨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요 (2) 듣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진리의 영적 의미에 대한 해석이고, 보는것은 영적 진리의 진실성과 권위에 대한 증거로서, 결국 예수의 증거는 완벽한 권위(權威)를 갖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같이 답변하신 배경을 살펴보아야겠다. 실로 예수께서는 수감(收監)된 요한에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재고(再考)해 보아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즉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는 침례 요한이나 기타 유대인들이 기대한 바와 같이 급작스럽고 난폭한 심판보다는 사랑과 구원과 회복을 가지고 오셨다는 사실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드러내놓고 자신의 메시아 신분을 발표할 수가 없다는 점을 요한에게 깨우치고자 하셨던 것이다.


요한에게 고하되

예수의 답변은 침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요한에게 주신 것이었다. 한편 예수께서 내세우신 이적들은 사실 선지자들도 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또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이런 일들을 하셨지만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메시아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으며, 요한은 이 사실을 듣고보아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어렵지 않게 추론(推論)할 수 있었을 것이다.



5절, 강해 주석 해설


소경이 보며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면서 열거하시는 이 여섯 개의 표적들은 이사야가 메시아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제시한 내용이다(사 29:18, 35:5, 6, 42:7, 61:1). 실로 메시아의 통치가 실현될 새세계(new world)에는 모든 질병과 환난과 곤비함, 그리고 애통하는 것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없어지리라는 것이 그당시 팽배해 있던 보편적인 확신이었다(외경 에녹서 25:5 ff, 제 4에스라서 8:52 ff).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런 기대와 구약적 사고를 지닌 자들에게 구약에 근거하여 당신의 메시아직을 적절히 선포하셨다(Jeremias). 한편 예수께서는 당신의 메시아 이적 중 ‘소경이 보는 것’을 육체적 회복의 시작으로 삼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영적 사역을 그 절정으로 보이셨다. 그런데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사 61:1에 언급된 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에 대한 사실은 의도적으로 인용치 않으셨던 것같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이 생각한 메시아 사역의 정치적 측면을 개인 회복 내지는 전인(全人)적인 해방으로 그 초점을 맞추게 하시려 했던 까닭이다.


앉은뱅이, 귀머거리

메시아의 이적이 주로 현상(現象)적인 측면에서 육체적인 질병을 고침받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한 이적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된 자, 귀머거리, 앉은뱅이,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을 알고 찬양할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죽은 자가 살아나며

예수께서는 여러차례 죽은 자를 살리신 적이 있는데(9:18-26, 눅 7:11-15) 이는 메시아 사역 중 가장 탁월한 징표요 복음의 핵심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메시아의 표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능력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일 뿐만 아니라 구원 사역에 대한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즉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은 모든 죄인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은 죄로 인해 눈이 어두워 참 진리와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의(義)의 길로 다니지 못하는 앉은뱅이이며, 죄로 오염된 문둥이로서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며 또 자기의 병을 전염(傳染)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며,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죽은 자들인 것이다. 이 모든 질병과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 외에는 있을 수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능력만이 회개하는 심령들을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요체(要諦)가 아닌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여기서 복음이란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 ‘아름다운 소식’(사 61:1)과 같은 맥락을 이루는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말한다. 즉 그가 소경의 눈을 보게 하였으며 앉은뱅이를 걷게 했고 온작 부정(不淨)한 것으로 오염된 나병 환자를 깨끗케 했고 죽은 자를 살렸다는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이것은 가난과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메시아가 임했다는 기별(奇別)이고 통보였던 것이다. 한편 ‘가난한 자’란 학자들에 따라 (1) 물질적 빈곤자(Robertson, De Wette), (2) 심령이 가난한 자(Meyer), (3) 영.육이 모두 빈곤한 자 등으로 이해한다. 이중 (2)의 견해를 취하는 주석가들이 많으나 그 견해가 절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6절, 강해 주석 해설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여기서 ‘실족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스칸달리스데은 ‘길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된것에 부딪쳐 넘어지다’, 또는 ‘그것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침례 요한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그리고 급격한 변화와 심판을 동반한 가시(可視)적인 해방을 가져다 주는 구속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오신 그리스도는 비천(卑賤)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현격히 다른 메시아 사역을 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쉽게 거부했던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예수께서 보인신 참 메시아관에 부딪혀 걸려 넘어지게 되었고 또한 결국에 그를 통한 구원의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런 점을 주의시키기 위해 자신을 인해 실족치 말 것을 당부하신 것이다. 실로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계시의 발전 과정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것이라면 적어도 제한적 사고와 인식을 할수밖에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인 계시의 한 과정에 걸려 실족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조명(illumination)이나 그분의 능동적인 배려가 없이는 인간은 결단코 진리의 빛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이 있도다

이는 예수와 그의 사역을 믿으며 그를 참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찬 말씀이다. 그러나 불쌍히도 유대인들은 그릇된 메시아관으로 인해 참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고답적(高踏的)인 사고를 초월한 복음 사역과 그의 천한 모습과 겸손한 태도에 걸려 실족함으로써 그들이 누려야 할 복(福)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의 약하고 볼품없는 모습과 그의 탈(脫)유대적 인간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과 능력으로 인해 그를 오실 메시아로 믿고 따르른 자는 그분의 나라에 속한 참으로 행복한 자인 것이다. 실로 예수는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세상 진리의 한 측면이 아니라, 안 믿으면 영원한 심판과 형벌, 믿으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이 보장되는 진리요 생존의 근거가 된다(요 20:31).



7절, 강해 주석 해설


저희가 떠나매(투톤 포류오메몬)

현재형 독립 속격 분사 구문으로서 ‘저물어 막 떠나가고 있을때’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제자들의 뒷모습을 아직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있을때로 보는 것이 좋다.


예수께서 … 말씀하시되

이를 직역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Jesus began to speak, NIV)가 된다. 즉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가고 있을 때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으로 인해 손상된 침례 요한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말씀을 꺼내셨던 것이다(F.R. Fay). 한편 혹자(Plummer)는 이때의 메시지가 바로 침례 요한을 위한 장례사(葬禮辭)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요한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을 기회로 삼아 요한의 참된 사명에 관하여 무리들에게 가르치신다. 침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 그가 외치는 말씀을 들었으며 특이한 그의 외양(外樣)과 가르침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3:1-12). 그러나 그 중에서 일부는 또한 그저 호기심에서 그를 보러 나갔던 것 같다. 아마 지금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무리들도 요한에게 나아갔던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께서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하여 그들이 과연 요한에게 나아가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하신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여기서 먼저 ‘광야’란 침례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었던 유대 광야를 가리킨다(3:1). 실로 그 당시 침례 요한의 우레와 같은 메시지 앞에 유대 군중들은 구름떼처럼 그곳 광야로 몰려들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일시적이요 충동적이었을 뿐(요 5:35) 더 깊은 영적 진리에로 이르지는 못했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 같이 질문하시게 된 또 하나의 의도는 그들이 침례 요한을 신(神)적 권위를 입은 선생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가 안내한 바 있는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불신앙을 깨우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먼저 여기 나오는 ‘갈대’(칼라몬)는 집합적인 단수로서 커다란 줄기를 가진 식물을 의미하며 요단 강 하류 쪽에 많이 자라고 있다. 이 갈대(calamus)는 가볍고 길어 글씨를 쓴 도구(요삼 1:13), 지휘대(27:29), 측량자(계 11:1) 등으로 많이 사용 되었다. 한편 이 ‘갈대’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정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방황하는 유대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도(Grotius, De Wette) 있으나 오히려 침례 요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Allen, Bruce, D.A. Carson). 즉 갈대란 오늘은 이것을 믿고 이렇게 말하다가 내일은 저것을 믿고 저렇게 말하는 불안정하고 변덕이 심한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너희가 과연 요한을 그렇게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자로 이해하고 있었더냐’는 것이다. 실제로 요한은 수차에 걸쳐 예수가 메시아란 사실을 증언하였으며(3:11-14, 요 1:19-36, 3:27-30), 자신의 증언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일단 받아들인 진리를 계속해서 믿고 선포했던 것이다.



8절, 강해 주석 해설


부드러운 옷

여기 ‘부드러운’(말라코스)이란 부드럽다는 뜻 외에 ‘사치스러운’, ‘방탕한’, ‘나약한’이란 의미도 들어 있다(눅 7:25, 고전 6:9). 따라서 예수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분명 풍자적인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한편 ‘부드러운 옷’은 왕실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주로 입던 가볍고 얇은 장식용 의류를 말한다. 이 옷은 올이 가는 린넨 실로 만들어진 고가품(高價品)이었다.


입은 사람이냐

요한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띤 검소한 옷차림을 하였다(3:4).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한 이 질문은, 그들이 광야에 요한을 보러 나간 이유는 훌륭한 옷이나 외모를 보러나간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는 점층법적인 수사법을 쓰면서 마지막에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왕궁에 있느니라

이는 헤롯 궁정을 뜻한다. 즉 부드러운 옷 입은 자를 만날 곳은 헤롯 안디바스의 궁정 같은 곳이지 요한이 있던 광야는 아닌것이다. 이런 옷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수는 요한이 이 같은 부귀와 영화를 대변하는 인물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요한 역시 예수와 마찬가지로 야생(野生)의 투박하고 천한 생활을 하였으며 고난을 겪었지만 확고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고난 당하는 메시아의 선구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9절, 강해 주석 해설


어찌하여 나갔더냐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던 이유는 세상의 부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의 메시아 되심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과연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는가?.


선지자를 보려더냐

사실 그 당시는 말라기 이후 약 400년 동안 하늘의 음성이 단절된 침묵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때로서 모든 백성들은 마음에 선지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런점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광야에서 권위에 찬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인정이 정당했음을 지적하셨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께서는 침례 요한에 대해 무리들에게 세가지 질문(7, 8, 9절)을 던지시고 또한 스스로 답변을 제시하셨다. 이는 10, 11절의 진리를 확실히 제시하시기 위해서 취한 문답식(問答式) 강론이었다. 특히 예수는 당신의 독자적 권위(내가 … 이르노니)로써 말씀하신 것이다.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

여기서 ‘나은 자’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쏘테론’ 은 남성형이라기 보다 중성형 단어로서 ‘넘치는’, ‘능가하는’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 자체가 비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 뜻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즉 ‘페리소테론’이란 ‘무엇보다 더욱 탁월하다’(more excellent)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구약의 최후 선지자이자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구자란 점에서 그 이전에 왔던 다른 선지자들보다 더 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주의 길을 예비(豫備)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말 3:1). 이사야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예언서를 남겼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선지자란 인정을 받기에 충분하였으며, 더욱이 매우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사야보다 나은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아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이사야보다 더 분명하게 그의 오심을 선포했고 또 메시아를 백성들 앞에 소개하는 일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10절, 강해 주석 해설


기록된 바

예수께서는 침례 요한의 탁월한 선지자적 성격에 대해 구약의 권위를 빌어 인준(認准)하신다.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이는 말 3:1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의 인용인 것으로 보인다(70인역과는 다른 표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어구는 말 3:1의 내용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메시아, 곧 자기를 위해 사자(messenger)를 보내 메시아 앞에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계신반면,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 당신 앞에서 길을 예비하게 할 것이며 또한 당신이 친히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에언하고 있다. 즉 말라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분으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본문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다. 즉 이 차이는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는 것일 뿐이다. 사실 예언서에 의하면 성자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칭해졌던 것이다(사 9:6). 여하튼 침례 요한은 여호와의 나라를 예비하는 선지 엘리야로서(말 4:5, 6, 눅 1:76), 성육신(Incarnation)하신 하나님의 선구자인 것이다.


예비하리라(카타스큐아조)

원뜻은 ‘세우다’로서 어떤 일을 위해 미리 기반(base)을 닦아두는 것을 가리킨다. 본 절에서는 특히 메시아의 선구자로서의 침례 요한의 전(全)사역을 의미한다. 실로 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에 주 예수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킨 도구였다. 아마도 그는 예수께서 공생애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이 일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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