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 11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종교 지도자들의 냉담함을 장터 아이들의 비유를 통하여 지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19절, 천국에서 큰 자와 이 세대
11절, 강해 주석 해설
내가 진실로 … 말하노니
마태에 의해 독특하게 기록된 이 권위에 찬 선언은 침례 요한의 지위와 역할이 예수가 가르치는 천국에 얼마나 지대(至大)한 공헌을 했는가를 단정적으로 보여준다. 이 메시아적 증언을 통해 침례 요한의 권위와 한계가 정확하게 규명되었다.
여자가 낳은 자
직역하면 ‘여자들에 의해 태어난 자’이다. 이는 고난받는 자 (엘루드 이솨, 욥 14:1) 욥에 의해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 죽음과 고통 아래 있는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이는 단수로 표현된 ‘한 여인에게서 나신 자’(창 3:15, 갈 4:4). 즉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과는 전혀 다른 표현이다.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 없도다
이는 침례 요한의 인격, 권능, 종교적 지위 등이 타(他) 선지자들보다 우수하다는 뜻이 아니라, 분명 이것은 천국의 주체이신 예수와 관련해서 생각되어야 한다. 즉 구약의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메시아 왕국을 멀리서 고대하고, 메시아의 선구자를 예언하는 정도에 그친 반면 요한은 그 나라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선구자, 예언의 대상이 되었다(사 40:3, 말 3:1). 또 친히 메시아의 길을 준비했으며,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그를 만 백성에게 소개하고 직접 침례를 베풀었다는 점에서 구약 선지자들 중 최고의 위치에 이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자였던 것이다.
천국에서는
천국(Kingdom of heaven)은 메시아의 통치가 실현되는 모든 영역으로서 시간적, 지리적 제한을 받는 현존하는 이 땅의 나라들과는 다른 영원에서 영원까지의 모든 나라 사람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나라이며, 일차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건설되는 은혜의 왕국이다. 그리고 천국은 현존하는 질서와 세계를 심판한 후 이와는 질(質)적으로 차원이 다른 영원한 새 세계 즉 영광의 왕국의 실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 나라에 입참(入參)하는 자는 단순한 인간적 평가를 훨씬 초월하는 신적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침례 요한의 사역의 주(主) 내용은 바로 이 천국의 도래를 예비하고 선포하는 것이었다(3:2).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먼저 이러한 대조는 인간적 자질이나 윤리적 우수성과 연관되지 않고, 계시의 발전적 측면 및 천국의 전혀 새롭고도 신적(神的)인 측면과 연관된다. 한편 본문의 ‘작은 자, 큰 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1) 예수의 메시아성을 의심한 것으로 인해 요한을 작은 자로 보는 견해(Weiss), (2) ‘작은 자’를 그리스도로 보아, 당시 요한의 인기와 영광에 의해 그 영광이 침해받은 작은 자는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될 것이라는 견해(Luther, Chrysostom, Origen), (3) ‘작은 자’는 예수 이후의 모든 신약 교회의 성도들, 그리고 ‘큰 자’는 침례 요한으로 대표될 수 있는 구약의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Alford, Bengel, Calvin, Plummer)등이 있다.
이 중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평가되고 있다. 실로 아무리 작은 자라 하더라도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목격하거나 천국의 실체를 경험한 자들, 혹은 이 모든 것을 믿는 자들은 단지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데 그쳤던 침례 요한보다 더욱 크며, 더욱이 천국 계시의 종합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구약의 어떤 위대한 인물보다 탁월하다. 한편 이 어구를 이상과 같이 이해하게 되면 예수의 선구자로서,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온 침례 요한이 3절에서 ‘오실 그 이가 당신이냐’고 묻게 된 배경을 또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즉 침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救贖史)의 감추어진 의미를 아직 이해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면에 신약 시대의 성도는 침례 요한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12절, 강해 주석 해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이말은 침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점부터 마태가 이 글을 기록한 때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Albright, Mann). 그러나 이보다는 ‘침례 요한의 때부터’란 아람어적 표현으로, 그 의미하는 바는 침례 요한이 활동하던 동안에 비록 예비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하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며(Jeremias), ‘지금까지’란 표현은 한정된 시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천국의 확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를 당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비아제타이’ 은 수동태와 중간태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수동태로 이해하면 이 어구는 천국이 어떤 강력한 힘을 소유한 자에 의해 강탈당하거나 거칠게 다루어져 점령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Meyer, Lightfoot). 즉 천국은 습격에 의해서 정복된 성과 같이 빼앗긴다는 뜻이다.
이를 중간태로 해석하면 ‘힘으로 진격하다’, ‘휘몰아쳐 오는 바람처럼 힘으로 떠밀려 제 갈 길을 가다’, ‘격렬하게 빼앗다’등의 뜻이다. 이는 NIV 성경에서처럼 ‘하늘 나라가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the Kingdom is forcefully advancing)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천국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분명 중간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것은 이 구절과 평행절인 눅 16:16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능력과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땅에 기습적(奇襲的)으로 도래한 천국은 단지 침략과 약탈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역동적(dynamic)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짐으로서 열정적 신앙인들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Ridderbos, Chilton, Hendriksen).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혹자는 본문의 ‘침노하는 자’를 해석함에 있어서 앞 구절의 ‘침노당하다’란 동사를 수동형으로 보아 ‘강탈자’나 ‘난폭한 자’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자로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 어구를 ‘하늘나라는 맹렬한 공격을 당하고 있으며, 난폭한 자들은 그 나라를 강탈하고 있다’란 의미로 해석한다(Hill, Meier, Hobbs 등). 그러나 이 어구는 앞의 동사 ‘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해석함과 연결하여 ‘용기 있는 자’ 또는 ‘강한 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용기 있는 자들 또는 강한 집념을 지닌 자들이 그 나라를 차지하려 한다. 그러므로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하는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Pamment, Kummel), ‘그러므로 너희들로 그런 열정으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그것을 차지해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본문의 ‘빼앗느니라’(헬, 하르파주신 아우텐)는 말은 마치 야수나 거친 도적들이 무엇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사력(死力)을 다해 움켜잡는 상태를 뜻한다. 물론 여기서는 순전히 선한 의미로서, 구원을 얻고 천국의 유업(遺業)을 얻기 위해 온 정열로 애쓰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고 단정지으며 멸시했던 세리나, 창녀, 각종 범죄자들 및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간절히 갈구(craving)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눅 7:28-30). 그들은 의와 평화 그리고 기쁨의 나라를 얻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와 악한 동료들과의 단절(斷絶)이라는 수동적 변화와 더불어 난폭할 만큼 격렬한 신념과 용기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영혼들의 순수한 열정을 통해 천국은 더욱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13절, 강해 주석 해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
본문의 선지자와 율법은 구약성경을 지칭하는 말이며 일반적으로 율법이 선지자보다 앞선다(5:17, 7:12, 눅 16:16). 여기서 먼저 ‘모든’이란 어떤 특정한 구절들에 국한(局限)해서만이 아니라 ‘전체를 망라해서’,또는 ‘전체적인 맥락에서’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는 선지자 뿐 아니라 ‘율법이 예언한다’는 특이한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 전체가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키며 앞으로 임할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임을 뜻한다.
요한까지니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간 침묵의 기간이 흘렸으나 구약시대는 아직 마감되지 않았다. 이제 침례 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통해 구약은 최종 마감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로 인한 새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표현을 두고 선지자들과 율법이 침례 요한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한다(Sigal).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으로서 이는 선지자들과 율법이 침례 요한때까지 그 예언적 기능을 다할 것이며 하늘나라가 시작되기에 앞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침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무대에 등장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마태는 본문에서 구원사의 새 전환점을 밝힘과 동시에 선지자들과 율법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시대가 이제 다가왔고 시작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특히 마태는 구약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이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늘 염두에 두고 본 복음서를 기술하였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14절, 강해 주석 해설
즐겨 받을진대
먼저 ‘즐겨’에 해당하는 원어 ‘데레테’은 ‘좋아하다’, ‘바라다’는 의미 외에 ‘뜻을 세우다’, ‘선택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의지적이고 선택적인 결단에 의한 수용을 암시하는 말로서, 결국 진리를 수용하는 일이 감정적 흥미에서가 아닌 의지적 선택이 수반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침례 요한이 자기들에게 강력한 비판과 엄격한 회개를 요구하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치 말라고 꾸짖기까지 했기 때문에, 더욱이 지금 현재 그가 헤롯의 정치범으로 옥에 갇혀 있음을 보고 요한이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라는 사실을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며, 또한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이 구약의 에언과 율법적 기대가 성취된 것으로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오리라 한 엘리야
엘리야에 대해서는 열왕기상.하에 잘 기록되어 있다시피 큰 권능을 가졌던 유명한 선지자로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승천(昇天)한 바 있다(왕하 2:11). 그런데 수백년 후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바로 그 엘리야가 보냄을 받을 것이며, 와서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말 3:1, 4:1, 5).
이 사람이니라
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 주의 사자는 그에게 요한의 탄생을 고지(告知)하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 예비하리라”(눅 1:17)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은 엘리야의 인성과 모습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한 자신은 엘리야임을 부인하였다(요 1:21). 그런데도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승천 때와 같은 그런 인격적인 엘리야로 다시 올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실재하는 역사의 반복으로서 엘리야의 귀환을 고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엘리야의 도래(到來)는 육체적, 문자적 도래라기 보다 종말론적 구원자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적, 정신적 도래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침례 요한은 그의 사명상 엘리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한 주의 사자(messenger)였던 것이다.
15절, 강해 주석 해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은 예수께서 빈번히 사용하신 관용적인 표현으로서(13:9, 43, 눅 14:35, 계 2:7) 복음의 영적인 진리를 은유적으로 묘사할 때나 복음의 영적인 진리에 진지한 호기심을 갖도록 하는데 흔히 사용되었다. 특히 ‘들을지어다’(아쿠오)란 말이 단순히 들으라는 뜻이 아니라 ‘주의하여 듣고 깨달으라’는 강한 의미의 요청으로서 직면한 상황에 대해 환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앞에서 선언한 내용의 말씀들이 대단히 중요하고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에 듣고 확신해야만 함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 조차도 분명한 진리의 말씀들을 듣고도 이를 경시(輕視)하여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빛에 가까이 나아가면 자신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귀를 막고 악의에 찬 방해를 서슴없이 감행하는 것이다. 실로 진리를 수용하고 믿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가 복있는 자일 것이다.
16절, 강해 주석 해설
이 세대를
‘세대’(게네아)란 ‘뿌리가 같은 한 족속’, ‘동시대 사람들’ 또는 ‘30년으로 끊어지는 한 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여기서는 요한과 그리스도의 동시대 사람들(12절)을 가리킨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이 세대’란 말이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는데(12:41, 42, 45, 23:36등), 이 말은 흔히 예수의 메시아이심을 부인(否認)하는 내용과 함께 쓰이거나 예수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때 사용되었다.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이는 비유를 이끌어내기 위해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교육기법이다(눅 7:31). 그런데 ‘비유할꼬’(호모이오소)의 원뜻은 ‘무엇을 닮게 하다’, ‘비교하다’로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그 닮은 것을 곁에 두어 비교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영적인 지혜를 일상 생활의 사건들과 비교하여 설명하심으로써 무지한 백성들에게 깨달음을 제공하시고자 했던 것이다(Stier). 이처럼 예수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목도(睦睹)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아이들의 놀이까지 빠뜨리지 않고 비유로 사용하여 이 세상의 성격을 규명하신 것이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여기 ‘장터’란 말의 원어 ‘아고라’은 원래 ‘회합’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점차 ‘모이는 곳’이란 의미를 가지게 된 낱말로서,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란 의미보다는 오히려 대중들이 드나들며 대화하는 공적인 장소라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 물론 이곳에서 여러 보임 외에 상거래(商去來)가 형성되기도 했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지금껏 무관심 속에 버려졌었던 어린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예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아이들의 불일치하고 모순되며, 각자의 투정 때문에 함께 놀만한 어떤 놀이를 결정치 못하는 것(눅 7:31-35)을 예의 주시(銳意注視)하셨던 것이다(Wycliffe, A.T. Robertson).
제 동무를 불러
장터에서 아이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한쪽이 다른 쪽에게 어떤 놀이를 제안하는 모습이다.
17절, 강해 주석 해설
피리를 불어도 … 춤추지 않고
‘피리’와 ‘춤’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헬라, 로마인들에게서도 결혼식과 같은 잔치집에서 기쁨을 표하는 방식의 하나로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Buxtorf). 이 당시 아이들은 어른들을 모방(imitation)하여 결혼식 놀이를 하였던 것 같다.
애곡하여도 …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곡하고 가슴을 치는 것은 장례식의 풍습을 말한다(23:30, 겔 24:16). 즉 아이들은 처음에는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불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그 놀이에 참석하여 어른들처럼 춤을 추라고 권유하였으나 동무들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같이 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놀이를 바꾸어 장례식 놀이를 하며 애곡(哀哭)하였는데, 이번에도 그들은 이 애곡에 맞추어 가슴을 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다. 이는 철저한 무시(無視)요 무관심과 불일치를 암시한다.
함과 같도다
예수께서 이 세대의 성격을 규명하신 말씀이다. 즉 아이들이 제 동무들을 불러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피리를 불었으나 춤추지 않고, 애곡하였으나 가슴을 치지 않았다. 적어도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으나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과 예수의 동시대 사람들이었던 유대인들은 회개와 애통해 할 것을 역설(力說)한 침례 요한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구원과 해방과 기쁨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에 대해서도 반응이 없는 무감각(insensibility)중에 빠져 있었다. 실로 그들은 내심 그 두 분을 모두 멸시하고 철저히 무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현상은 오늘날에도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즉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기쁨도 없고 자기 죄악에 대한 안타까운 눈물도 없는 것이다.
18절, 강해 주석 해설
강해
이 구절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이 세대를 불일치와 무반응한 아이들의 놀이로 비유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요한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wild honey)이었으며(3:4), 개인적인 식사 초대에는 쉽게 응하지 않았던 것같다. 그리고 요한은 나실인의 규례를 따라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였다(눅 1:15, 7:33). 즉 그는 금욕적인 절제의 생활을 하며 주의 길을 에비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귀신이 들렸다
요한의 설교에 유대인들은 회개하거나 뉘우치지 아니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이제는 그를 두고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즉 주의 선구자로서 금욕적인 모습으로 그가 나타나자 교만한 유대인들은 그를 ‘슬픔의 귀신’에 사로잡혀(F.R. Fay) 어둡고도 침울한 생활을 하는 자로 매도(罵倒)하였던 것이다.
19절, 강해 주석 해설
인자는 와서
인자란 칭호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할 때 특히 공생애 후반기에 흔히 사용하는 말로서 이 말 속에는 자신이 고난당하실 종말론적 메시아란(단 7:13) 사실이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눅 5:24 강해 ‘인자’참조).
먹고 마시매
이는 예수께서 침례 요한처럼 금욕적이고 야생(野生)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상의 생활을 하신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또한 요한과는 달리 죄인들과 함께 자리하여 세리들과 식사하기도 하였으며 천한 무리와 어울려 다니기도 하였다(9:10, 11, 눅 15:1, 2 등). 이는 예수의 관점에서 바리새인을 위시한 위선적 종교가들의 가식적 종교 형태를 온몸으로 비난하신 것이 되며, 바리새인의 관점에서는 파행적 행동을 한 예수야말로 율법의 파괴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소외된 자, 죄인들과의 식사는 복음이 지닌 자유의 기쁨의 한 편린(片鱗)이었음에 분명하다.
먹기를 탐하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과도 같이 이 완고한 사람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침례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이제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예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는 대식가(大食家)요,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으로 몰아세운다. 즉 이 세대는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도 메시지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직 진리를 향하여 악의에 가득찬 비난거리만을 찾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이 말은 문자적으로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술꾼이란 뜻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처럼 특이한 옷차림을 하였던 것도 아니며 나실인으로서 자신을 성별(聖別)시킨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일상적인 방식에 따라 먹고 마셨으며, 특히 포도주는 그 당시의 주요 음료 중의 하나였기에 마셨을 뿐인 것이다.
죄인의 친구로다
그들은 값싼 즐거움(pleasure)을 기다리다가 침례 요한의 절제와 금욕 생활을 보고는 미쳤다고 비난했으며, 죄인들과 분리되기를 바라다가 이번에는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는 죄인의 친구, 곧 죄인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한 통속(secret society)이라고 비난한다.
옳다 함을 얻느니라
문맥 속에서 이 어구를 이해하면 이 어구는 앞의 비유와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침례 요한과 예수의 생활 양식과 결부되어 있다. 즉 사람들은 요한과 예수의 생활 방식을 모두 비난했으나 하나님의 지혜가 인도하는 대로 요한과 예수는 바르게 살았으므로 그 두 사람의 행위는 결국에 가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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