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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20절-30절, 다 내게로 오라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매일성경 큐티의 본문인 마태복음 11장 20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많은 이적과 권능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큐티와 강해 주석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30절, 다 내게로 오라 - 마태복음 강해 주석 해설



마태복음 11장 20절-30절, 다 내게로 오라



20절, 강해 주석 해설


권능(뒤나미스)

이말은 원래 자연의 물리적인 힘(롬 1:4)이나 하나님의 능력(롬 1:16)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이적’또는 ‘초자연적인 행위와 사건’을 가리킨 말로 쓰이고 있다. 한편 공관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이적적 사역을 표현함에 있어서 흔히 이 ‘권능’이란 말을 쓰고 있다.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먼저 ‘고을’이란 신앙과 인격의 주체로서의 전체 성읍을 가리킨다. 실로 고을의 운명은 그 거주자들의 신앙 유무(有無)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사상이었다(창 18:22 ff).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고을들이 당신을 배척하거나 비난했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곧 메시아시라는 신적(神的)인 이적들을 도시들에서 행하였음에도(5, 6절)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이다(3:2, 4:17). 이로써 확인하건대 인간이 심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푼 이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이적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것이다. 만일 주께서 그 고을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고와 이적들을 다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주님은 그들의 완고한 태도에 그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때에

11:20-24의 내용은 눅 10:12-15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는 본문을 70인 전도파송 사건 다음에 다루고 있어 예수의 갈릴리 사역 중 후기에 해당하는 때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마태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온 사건 다음에 다루고 있다. 이중 누가의 시간 순서가 정확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이는 마태가 연대순(chronological order)으로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그 때에’란 표현은 마태가 이를 엄밀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시간 부사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책망하시되

이 말의 원어 ‘에릍사토 오네이디제인’ 을 직역하면 ‘(비로소) 책망하기 시작하시다’로서 그릇된 종교관을 지닌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의 공개적 질책(叱責)이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23장에 이르러 예수의 책망은 최고조에 이른다. 예수께서는 그 고을들이 자신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책망했던것이 아니라 자신의 메시아 신분을 입증해 주는 대부분의 이적들을 다른 곳이 아닌 그곳에서 보여주었는데도 그 도시가 회개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이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또 은혜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즉 ‘새 언약, 곧 복음을 얻게 될 그리스도 이후의 신약 시대 사람들은 구약의 예언적 메시지를 들었던 자들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을 받거나 아니면 더욱 비참한 존재가 된다’(Bengel).



21절, 강해 주석 해설


화가 있을진저

이 말의 원어 ‘우아이’은 숙명적인 절망이나 엄숙한 경고 또는 연민의 정을 표현할 때 쓰이는 일종의 감탄사이다.


고라신

이 도시는 신약에서 본문과 눅 10:13에만 등장하는 지명(地名)으로서 그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 오늘날의 ‘키르베트 케라제’(Kirbet Keraze)에서 옛날에 파괴된 고라신의 유물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여하튼 예수의 사역을 기록한 복음서에는 ‘고라신’과 ‘벳새다’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나 예수의 선교 중심지였던 가버나움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 고을 선교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割愛)하셨을 것으로 본다.


벳새다

이 지명의 문자적인 뜻은 ‘사냥집’이며, 이곳은 안드레, 빌립, 베드로의 고향으로서(요 1:44) 갈릴리 호수와 강둑 위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람들은 거기서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했던 것 같다. 한편 이곳은 오늘날의 ‘알 텔’(al-Tell), 또는 ‘마사디야’(Masadiya) 등으로 여겨지며 일찍이 분봉왕 빌립이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딸인 줄리아(Julia)를 기념하여 뱃새다 줄리아스라고 명명했던 것 같다(눅 9:10).


두로와 시돈

이 두 도시는 팔레스타인 북부, 지중해 연안 뵈니게(페니키아)의 항구도시로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가끔 바알 우상 숭배지였던 이 도시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곤 하였다(사 23장, 겔 26-28장, 욜 3:4, 암 1:9, 10). 한편 솔로몬이 성전에 필요한 건축 자재들을 두로 왕에게서 공급(供給)을 받았을 만큼 두로는 고대로부터 문물(civilization)이 번성했던 것 같다(대하 2:11-16). 그리고 시돈은 아셀 지파의 구역에 위치해 있었으나 아셀 지파는 시돈을 한 번도 점령해본 일이 없었다(수 19:28, 삿 1:31). 여하튼 이 두 도시는 무역과 항해로 대단히 잘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에도 이 도시들은 이방 우상 숭배와 더불어 대단한 부(富)와 향략을 누렸던 것같다.


베옷을 입고

베옷(sackcloth)은 낙타의 짧은 털로 짜 만든, 올이 거친 직물을 가리키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슬픔을 당했을 때 비탄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맨살에다 이 옷을 입곤 하였다(삼하 3:31, 왕상 21:27, 욘 3:5-8).


재에 앉아

사람들은 슬픔을 표하는 방법을 베옷을 입은 것 외에 재(ash)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즉 그들은 재를 머리에 뿌리거나(삼하 13:19, 애 2:10), 재 위에 앉거나 하였으며(욘 3:6), 또 그 위에 눕기도 하고(에 4:3) 심지어는 그 위에서 구르기도 했다(렘 6:26, 미 1:10). 여하튼 이 두 행위는 모두 회개와 애통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타락한 도시로 알려진 이방인의 도시들에게, 선민이라 자처하는 유대 고을들에게 베풀어졌던 것같은 이적과 회개의 기회들을 제공했다면 그들은 벌써 회개의 자리에 앉았을 것이라 단언하셨다. 여기서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런 기회를 제공치 않으셨는가 라는 의문점이 남는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먼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위해 보내셨던 것이다(10:6).



22절, 강해 주석 해설


심판 날에

이는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키는데(Bengel), 이때 예수께서는 심판주(審判主)로 임하실 것이다(10:15, 행 17:31, 벧후 2:9). 한편 예수께서는 이방 도시보다는 유대인의 성읍인 고라신과 벱새다에게 많은 권능을 행하고 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들을 들려주었으나 그들은 회개치 않았으므로, 결국 그들은 그 이방 도시들보다 더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몇 가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1) 예수께서 고라신과 벱새다에 베푼 이적들을 두로와 시돈에다 베푸셨더라면 그 도시들의 주민은 회개했을 것이다. 따라서 심판장은 이 점을 참작(consideration)하실 것이다. 그리고 (2)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 섭리 하에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만큼 심판 때에도 아주 공평(公平)하게 판단하실 것이며, 하늘나라의 축복 뿐만 아니라 지옥의 형벌에도 여러 등급이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롬 1:20-2:16). (3)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은 것을 찾으실 것이다(눅 12:47, 48).


견디기 쉬우리라(안네크토테론 에스타이)

직역하면 ‘훨씬 더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로, 그들의 도덕적 태도의 결과로 인한 보다 가벼운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23절, 강해 주석 해설


가버나움아

가버나움은 예수의 본 동리이며(9:1) 활동 무대(4:13)로서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시어 어느 성읍들에서보다 더 많은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셨다(4:13).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이 말은 최대의 번영과 특권을 누린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즉 가버나움은 여태까지 수많은 주님의 이적과 권능을 목격하고 그 영예를 누려왔던 것이다. 실로 하늘나라가 바로 이 성읍에서 역동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들 가버나움은 오히려 교만의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 표현은 바벨론 멸망 예언(사 14:12-15) 구절과 유사한 것으로서 결국 그들의 처참한 멸망을 비소(誹笑)하고 있는 것이다.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여기서 ‘음부’를 뜻하는 원어 ‘하데스’은 히브리어로는 ‘스올’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이 말은 1차적으로 무덤을 가리킬 때 쓰였으며, 2차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靈)들의 세계를 뜻했다(눅 16:23, 계 1:18). 따라서 이 말을 저주받은 자들만이 가는 장소로 이해한다면 원어의 뜻을 적절하게 살리지 못한 결과가 된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이 말이 하늘과 대조를 이루면서 앞의 ‘심판 날’과 조화를 이루어 교만한 자들이 종말론적으로 처하게 될 굴욕과 저주와 핍절과 멸망의 장소로 이해된다. 한편 예수의 이 예언은 영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성취되었다. 즉 이 두 도시는 로마군과 유대인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焦土化) 되고 말았던 것이다.



24절, 강해 주석 해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소돔은 그들의 악한 죄로 심판받아 멸망한 도시이다(창 19장). 그러나 그리스도는 가버나움에서 보여주신 이적과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회개하고 심판을 면하여 그 때까지 존속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가버나움 주민들의 죄악이 엄청난 특권을 부여(附與)받았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라리 아무런 이적도 보지 않았던 소돔의 죄악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는 뜻이다.



25절, 강해 주석 해설


그 때에

마태는 이 시간의 어구를 역사적인 시점을 명시(明示)해 주는 시간적 표현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만 앞뒤 문맥을 분명히 구분하며 잇는 연결 내지는 접속사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20-24절의 내용이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묘사라면 이 어구가 시작된 25절에서부터 30절까지는 하나님이 용납(容納)해 주신 자들에 대한 설명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누가는 눅 10:21에서 이 어구와 비슷한 ‘이 때에’ (엔 아우테 테 호라)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70인 전도사역의 성공적인 결과와 연결시키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예수께서는 지금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갖는 엄숙하고도 고결한 영적 교제의 분위기에 잠겨 계신다(A.T. Robertson). 실로 예수께서 막힘없는 언어로 엮어낸 이하의 말씀은 당신의 경건한 영혼에서 우러나온 기도이자, 찬양이며, 자기 성찰(省察)이기도 했다(Bruce).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는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킨 표현이다. 특별히 ‘천지의 주재’라는 표현은(Tobit 7:18)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이 그분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시 146:6, 사 42:5, 행 17:24). 그리고 ‘아버지’란 성부 하나님과의 인격적 일체(一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한 것이다(6:9, 26:39, 요 11:41, 17:1). 한편 이 말들을 다음 절의 내용과 연결시키면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이시므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그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하며 감추시기도 한다는 점이 암시(暗示)되어 있다.


이것을

예수의 이적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그 당시에 펼쳐지기 시작하였던 메시아 시대에 대한 인식과 예수가 가르치신 교훈의 의미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

어떤학자(Meyer)는 이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문맥상 이 어구는 이 보다 더 넓고 포괄적인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는 16절에서 이 세대를, 그리고 20-24절에서는 몇몇 도시들을 책망하셨던 바, 이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이적과 권능을 보고도 자고(自高)하여 예수를 영접지 않는 이 도시들의 주민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숨기시고

실로 자기 아집(我執)과 편견 및 이성적 판단으로서 예수와 그의 나라를 영적으로 깨닫기는 불가능하다. 특히 본문의 ‘숨기시고’, ‘나타내심’등의 표현은 이러한 영적 진리의 이해가 하나님의 주권적 배려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시사한다. 정녕 성령의 도우시는 내적 조명(illumination)이 없이는 아무도 자연적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에 접근할 수 없다.


어린아이들

어린아이와 같이 솔직하고 순박한 자들로서(시 19:7, 119:130)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의 가르침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스스로 만족하며 자칭 지혜롭다 하여 주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인 반면 어린아이들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감사하나이다(여소몰로구마이 소이)

찬송을 연상시킬 만큼의 감격적인 고백을 뜻한다(수 7:19, 대하 30:22, 롬 15:9).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ruling)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同意)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계신 것이다.



26절, 강해 주석 해설


옳소이다

이 말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감사하신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본 절의 맨 앞부분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왜냐하면’)란 말이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으며, ‘아버지’란 호격(呼格) 역시 번역에서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된 것

25절에 언급된 바 하나님의 독특하신 계시 전달 방법을 가리킨다.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직역하면 ‘당신 앞에 좋게 여겨지는 바가 되었습니다’가 된다. 이를 아람어식 표현으로 이해할 때 ‘당신의 은혜로우신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로 번역할 수 있다(삿 13:23).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실현이 완전히 합치(agreement)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하나님의 즐거움이요 기쁨이 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의지의 실현을 고대(苦待)하며 실현된 의지를 전적으로 수납(受納)했던 자들의 신앙 고백이 되기도 했다(말 1:15, B. Berakhoth 17a, 296). 실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지상의 기이한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란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때가 빈번히 있다. 즉 우리의 지식을 넘어선 신비로운 사건에 대해 그것이 정당했다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뜻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27절, 강해 주석 해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예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는 구별되는 성부에 의한 성자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주장하셨다(28:18, 요 13:3). 이 내용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도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요 3:35, 6:46, 골 1:26, 27). 여기서 ‘모든 것’이란 성부께서 위임(委任)한 모든 것에 대한 통치권(Meyer), 또는 모든 인류를 통괄하실 권위(Bengel, De Wette), 가시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Weiss), 전적인 위탁(委託)과 위임(McNeil), 그리스도의 진리에 관련된 모든 것(Grotius, Kuinoel),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Wycliffe)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에의 위임은 성부의 통치가 중단되었음을 뜻하기 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하여 만물을 지배하고 계시며 또 온 우주가 그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구속할 수 있으며 그들을 영광스러운 곳으로 인도하실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실로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시다(엡 1:21). 한편 본문의 ‘주셨으니’ (파레도데)란 무시간(無時間)적 부정 과거형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모든 것을 성자께 주셨음을 뜻하고 있으며, 결국 예수의 역사적 선재성(先在性)을 증거해 주고 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분명한 어구이다.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규정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인격적 일체성을 이루는 특별한 것으로서 다른 어떤 피조물의 접근도 불허(不許)하고 계신다. 한편 ‘아는’에 해당하는 원어 ‘에피기노스케이’은 단순한 지적인 인식(기노스케이)을 훨씬 능가하는 의미이다. 즉 이는 완전한 상태의 지식, 또는 전인적이고 초월적인 앎을 뜻하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본질적인 동일성을 이루지 못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고전 2:10). 실로 아버지와 아들 상호간의 지식은 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계시가 인간에게 전달되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 곧 성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여기서 ‘소원대로’(부레타이)란 ‘ … 을 하기 원하는’이라는 뜻으로 강한 의지적 소망을 담고 있다. 이는 결국 성자는 성부를 인간들에게 능히 계시(revelation)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시하시고자 하시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계심을 보여준다.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는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본질적인 형상으로서의 성자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자요(골 1:15),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자(요 1:14, 18) 말씀 그 자체이시다(요 1:1). 하나님은 예수와 부자(父子) 관계에 있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자신을 나타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를 계시하여 아버지를 알게 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을 권한도 부여받았던 것이다.



28절, 강해 주석 해설


수고하고

원어 ‘호이 코피온테스’은 현재 분사 능동형으로 명사적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스스로 많은 일들을 하여 계속해서 피곤에 지친 상태를 말한다.


무거운 짐진 자

원어 ‘페포르티스메노이’은 현재분사 수동형으로서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는 죄와 염려의 고통이나 육체적 의무 외에 특별히 전통적으로 부과되고 있는 율법과 유전(遺傳)의 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비난하신 적이 있다(23:1-4).


다 내게로 오라

예수는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죄인들을 초대(invitation)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마음을 두고 나아오는 그 어떤 사람도 모두 받을만한 넓은 사랑과 모든 인간을 친히 부르실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시고 구원과 안식(rest)에의 초대를 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예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25절)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그리고 ‘아이같이 지혜는 없으나 순박한 자들’을 모두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것은 마지막날의 영원한 안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갈등을 해소(解消)한 후의 평화와 안식까지도 가리키고 있다. 즉 신자가 주께로 가면 신자는 죄에서의 해방과 율법의 속박에서의 해방, 불안과 염려, 고통에서의 해방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특히 ‘내가’ (카고)란 말이 강조되어 있다. 즉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맡겼던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친히 권위에 찬 초청에 걸맞게 절대적인 안식을 약속하셨던 것이다.



29절, 강해 주석 해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이사야는 메시아를 겸손히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하였고(사 42:2, 3, 53:1-2등), 다른 예언자들은 종말론적 메시아를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로 소개하고 있다(슥 9:9). 마태는 이 예언의 성취(成就)를 지적하기 위해 예수의 겸허하며, 비천(卑賤)하신 모습을 종종 언급하였다. 여기서 ‘마음’ (카르디아)이란 원래 심장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순히 육체의 일부로서의 심장 기관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히브리적 관념으로 인간이 지닌 전인격의 핵심적 좌소(坐所)로 이해된다. 이는 결국 예수의 본질적 성품을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이 아니라 종(servant)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당해서 타인의 아픔을 안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있는 말이다.


나의 멍에를 메고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육(訓育)관계를 가리킬 때 이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멍에란 것은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pair)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는 바, 결국 예수께서 주신 멍에를 멘다는 것은 곧 예수와 함께 메는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여하튼 본문은 제자들의 영적인 신앙 생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율법의 멍에(Pirke Aboth 3:6, 집회서 51:26)를 메게 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지고 있는 멍에를 질 것을 당부한다. 실로 율법과 세상의 멍에가 아니면 예수와 사랑의 멍에를 메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사망을 안겨다 주는 세상과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방법, 곧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새롭고도 가벼운 멍에를 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인생 질고(疾苦)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내게 배우라

이는 자신을 ‘모방하라’, ‘자신의 경험을 배우라’(Stauffer)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계시의 진리를 와서 배우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Schmid). 이는 결국 완전한 신앙 생활에의 부름일 것이다.


너희 마음이

여기서 ‘마음’(프쉬케)이란 예수의 ‘마음’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생명의 요체(要諦) 또는 생명의 혼(soul)을 뜻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자의지(自意志), 자아(自我)라 할 수 있다.


쉼을 얻으리니

이는 28절의 ‘쉬게 하리라’는 약속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서 ‘얻으리니’(휴레세테)란 원래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참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었고, 또 그분이 주리라 약속한 것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어구는 렘 6:16의 어구를 인용한 것 같다. 거기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따라서 본문을 이 부분과 연관지어 이해하면 ‘옛적 길 곧 선한 길’로 행하려면 예수의 멍에를 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멍에는 율법학자들이 뒤집어 씌운 그런 무거운 짐이 아니라 안식을 가져다 주며 평강을 가져다 주는 쉽고도 가벼운 것이다.



30절, 강해 주석 해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쉽고’(헬, 크레스토스)란 ‘부드럽다’, ‘좋다’, ‘은혜스럽다’, ‘안락하다’, ‘친절하다’등의 다양한 뜻으로 해석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고난의 길이다

예수께서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4-35)라고 하셨으며, 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을 따르는 길이 고난의 길임을 암시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는 것인가.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 멍에가 내 멍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이며 그 짐은 내 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짐이라는 사실이다. 수고스럽고 무거운 내 멍에와 내 짐을 홀로 지고 고통당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멍에와 짐을 지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고 그리스도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다.

그럼 그리스도의 멍에와 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멍에는 고대로부터 복종의 표시였다. 예수께서 주시는 멍에는 예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죄를 용서받게 하고 우리 죄의 무거운 짐을 벗겨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준다(요 8:36). 거기에는 영생의 약속이 있고 자원하는 사랑의 순종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멍에와 짐은 쉽고 가볍다.

전승에 의하면, 요셉의 목공소에서 예수께서 만드신 소의 멍에는 딱 들어맞고 가벼워서 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소를 창조하신 솜씨로 그 소에 딱 맞는 멍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각 사람들에게 딱 맞는 가볍고 쉬운 멍에를 주신다. 그리고 그 멍에를 감당할 힘을 주신다.

우리의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이다. 모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제거할 수 있는 죄의 짐에 억눌려 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사 1:5-6)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사 53:6).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짐을 지시고 우리의 고단한 어깨에서 짐을 가져가실 것이다. 그리고 쉼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쉼에는 조건이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우리가 그분께로 가서 순종할 때 우리의 짐은 가벼워지고 참된 쉼이 이르러 올 것이다. 완전한 굴복(순종)에 완전한 쉼이 있다.

예수의 멍에는 이 다양한 의미를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벼운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어거스틴(Augustine)은 예수의 멍에를 새의 깃털에 비유하여 그 깃털이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만큼 가볍다고 설교하였다(F.R. Fay). 이와 같이 예수께서 제공하신 짐, 곧 그의 계명은 사랑의 게명(commandment of love)으로서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 5:3). 그러나 이는 결코 예수의 가르침이 세상의 도덕이나 율법보다 무가치하거나 경박(輕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보다 더 준엄하고 숭고(崇高)하며 엄정한 것이다(Clausner). 그러나 예수의 짐은 (1)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2) 선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3) 항상 예수의 능력에 의존하는 신앙이 전제되기 때문에, (4) 나 혼자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랑으로 메기 때문에 가볍고, 또 영생을 동반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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