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cker

6/recent/ticker-posts

마태복음 12장 1절-8절, 안식일의 주인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12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인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선포하신 본문입니다.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었고,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선포하신 본문의 주석과 해설입니다.


마태복음 12장 1절-8절, 안식일의 주인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마태복음 12장 1절-8절, 안식일의 주인



1절, 강해 주석 해설


그 때에 … 안식일에

이삭이 익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일년 전 4월의 유월절과 밀추수를 기념하는 칠칠절(태양력으로는 5-6월에 해당)의 중간 어느 한 안식일이다. 그런데 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취하신 날로서, 율법에는 이 날을 기념할 것과 쉴 것을 동시에 명하고 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자에게는 죽음과 같은 극단의 형벌이 예비되어 있었다(출 20:9 ff, 31:14 ff, 신 5:12 ff).


밀밭 사이로 가실새

먼저 랑게(Lange)에 의하면 전답(田畓)으로, 루터(Luther)에 의하면 곡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밀밭’(스포리모스)은 파종한 밭 혹은 곡식 밭으로 이해되며, 그중에서도 특별히 ‘보리밭’으로 해석 될 때가 많다. KJV에서는 ‘곡식밭’(grainfieled)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제자들이 이삭은 잘라 먹은 일에 대한 시비가 논쟁의 초점으로 대두된 것으로 보아 이때 예수의 사건은 바리새인들이 규정하고 있는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약 1.8 km) 내에서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 있는 경작지들은 대부분 길고 좁다란 이랑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이랑 사이의 땅이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제자들이 사장하여

그 당시 제자들은 안식일의 그지 조항을 간과해 버릴 만큼 몹시 배가 고파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예수의 선교활동이 매우 활발하고도 촉급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삭을 잘라 먹으니

율법에 의하면 이 행위는 추수하는 것과 동일한 일로 간주되었다. 한편 평행구인 눅 6:1에 보면 ‘손으로 비비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타작(打作)에 해당되며 만약 그 이삭 껍데기를 입으로 불어 털어 버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미(精米)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신 23:25에는 시장할 때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가 허용(許容)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 자체는 결코 죄가 되지 않지만 그 일을 안식일에 행했다고 하는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의 율법주석서 미쉬나(Mishina)에 따르면 ‘안식일에 어린 양이 한 입에 넣을 만큼의 이삭을 잘라 취하는 것도 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Mishnah. Sabbath, 7.4).



2절, 강해 주석 해설


바리새인들이 보고

이는 한 순간의 동작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찰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칼끝같은 눈초리로 예수의 무리들을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고하되 … 당신의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의 시선은 현상적으로는 제자들에게 머물러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께 고착(固着)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사사건건(9:14, 15:2) 제자들의 반율법적 행위를 빌미로 예수께 도전과 비난을 일삼았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여기서 ‘하지 못할 일’에 해당하는 ‘욱크여세스틴’은 ‘합당치 못한 일’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눅 6:1)었다. 이 행위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인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금하는 39개 범주의 노동이 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Mishnah, Sabbath, 7.2): (1) 운반하기 (2) 불 켜기 (3) 불 끄기 (4) 끝손질하기 (5) 글쓰기 (6) 지우기 (7) 요리하기 (8) 빨래하기 (9) 바느질하기 (10) 찢기 (11) 매듭짓기 (12) 매듭풀기 (13) 모양 만들기 (14) 쟁기질하기 (15) 심기 (16) 거두기 (17) 추수하기 (18) 타작하기 (19) 키질하기 (20) 고르기 (21) 체질하기 (22) 빻기 (23) 반죽하기 (24) 빗질하기 (25) 실 만들기 (26) 염색하기 (27) 땋기 (28) 베 짜기 (29) 피륙 짜기 (30) 실 풀기 (31) 건축하기 (32) 부수기 (33) 덫 놓기 (34) 털깎기 (35) 도살하기 (36) 가죽 벗기기 (37) 햇볕 쪼이기 (38) 광내기 (39) 표하기.

시장하여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은 (16) 거두기, (18) 타작하기, (19) 키질하기, (20) 고르기 등의 노동을 한 셈이다. 거두기에는 자라고 있는 어떤 곡식을 자르거나 뽑는 행위, 혹은 꽃을 따거나 나무에서 열매를 따는 행위가 포함된다. 타작하기에는 곡식을 껍질로부터 분리하는 행위, 과일을 짜서 주스를 만드는 행위 등을 말하기 때문에 제자들이 손으로 비벼 껍질을 깐 행위는 여기에 해당한다. ‘키질하기’는 바람을 이용하여 곡식을 겨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든 행동을 말한다. 제자들이 손으로 비벼낸 껍질을 입으로 불어 알곡만 남도록 했을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에 저촉된다. ‘고르기’는 음식물의 불필요한 부분을 손으로 골라내는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음식을 먹기 전에 나쁜 것을 골라내서는 안 된다. 다만 좋은 것을 먹고 나쁜 것은 남겨 놓으면 된다. 제자들은 밀 알곡을 입에 넣기 전에 겨를 골라냈을 것이기 때문에 고르기를 한 셈이 된다.

유대교 법인 할라카(Halakah)에 의하면 성전에서 예배드릴 경우나 기근(饑饉) 등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에는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본문의 경우에서처럼 피할 수 있는 경우에는 밀추수를 하는 일은 엄연한 범법(犯法)행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본 사건이 있은 때보다 훨씬 후에는 이 조항들이 다소 완화되어 안식일일지라도 손으로 곡식을 잘라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어떤 기구를 사용하는 것만큼은 금지하였다(The Gemara).



3절, 강해 주석 해설


다윗이 … 시장할 때에 한 일

이는 삼상 21:1-6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다윗이 요나단의 도움으로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을 피하여 호위병 몇 명과 함께 도망하다가 놉에 있는 하나님의 전(殿)에 들어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거룩한 떡으로 그들의 주린 배를 간신히 채웠던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일은 제사장만이 그 거룩한 떡, 즉 하나님 전에 진열되었던 12개의 떡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모세의 율법(레 24:5-9)을 위배(違背)한 행위가 된다. 또한 삼상 21:5-6의 본문에는 진설병이 방금 대체(代替)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안식일에 발생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유대사가 요세푸스는 진설병은 금요일에 만들어져 다음날 안식일에 진설했고, 그 묶은 것은 대체되어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고 한다(Josephus, Antiq., III, 10:7). 여하튼 예수의 의도는 다윗이 시장할 때 모세의 율법을 어겼으므로, 시장한 그의 제자들이 조상의 유전을 어긴 행위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이며, 어떤 예외(exception)들을 허용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들을 주장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다만 구약 자체는 다윗의 그러한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나치리만큼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 정신에 어긋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Cranfield). 즉 예수의 기본 관점은 ‘안식일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지, 너희가 안식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Mek Exod 26:13, 2 Macc. 5:19)에 지나치리 만큼 매사에 적용하고, 유전을 사람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실로 아히멜렉이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도 다윗과 그의 소년들에게 떡을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바리새인이라고 한다면 시장한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를 당연히 용납했어야지 정죄해서는 안되었던 것이 아닌가(Hooker).



4절, 강해 주석 해설


하나님의 전

이는 솔로몬 때에 건축된 성전이 아니라 광야의 여행길을 앞서 가며 이스라엘을 인도했었던 그 희막을 가리킨다(삿 18:31). 그러나 ‘하나님의 전’이라는 이 표현은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이 거처(居處)하시는 거룩한 곳이라는 보편적 의미로 흔히 사용되기도 했다(대하 5:14, 딤전 3:15).


진설병

이스라엘 12지파의 수(數)에 따라 성소의 금상위에 두 줄로 배설했던 12개의 떡이다(출 25:30, 레 24:5-8). 이는 제사 제물이 아니라 여호와의 생명적 교제를 상징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주의 거룩한 성만찬을 예시(豫示)하고 있다.



5절, 강해 주석 해설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다윗의 안식일 예외 조항에 이은 두 번째 예외 사례이다. 안식일 법은 출 20:8-11과 신 5:12-15의 십계명 중 제 4계명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안식일 규례에도 불구하고 성전 안에서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의식(儀式)을 행할 때 몇 가지의 일들, 예를 들어 진설병은 대체시키는 것(레 24:8), 숫양 둘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민 28:9-10) 등의 직무를 행한다. 이러한 율법의 규정은 안식일에 관한 법이 하위법이요, 성전에 관한 법이 상위법이며 또한 상위법을 지키기 위해 하위법을 범(犯)해도 된다고 하는 사실을 구약성경 자체가 인정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 규정을 범한 것과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존 칼뱅(J. Calvin)은 ‘성전법이 희생드리는 일과 모든 외적 제사에 관련된 제사장들이 안식일 범법행위를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한다면, 참되고 신령한 성전인 예수께서는 그 예배자들이 신성한 의무를 행할 때 그들이 범한 모든 과오(예를 들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를 보다 더 거룩케 하실 능력이 있다. 더욱이 제자들은 현재 복음으로 인해서 다소 거룩해진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강건하게 하여 복음전파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려고 하는 생각에 열중해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행위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대속사업의 지속과 복음전파를 돕는 것과 예배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때에 이는 결코 과오로써 인정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실로 제사장들이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성전 제사를 집례(執禮)하기 위해 일을 하여도 율법적으로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었다면, 그 성전과 제사의 궁극적 존재이신 예수와 그의 사역을 위해 안식일을 범한 제자들의 행동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께서는 율법 자체가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안식일의 노동을 명시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레 24:8) 안식일에 대한 당신의 새로운(유대인의 고답적인 사고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위한 외적이고 통속적인 규례를 철폐(abolition)하시고(F.R.Fay)이제 하나님 중심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규례를 깨우치고 계신 것이다.



6절, 강해 주석 해설


성전보다 더 큰 이

성전법이 안식일 법에 우선하듯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동은 성전법보다 우선한다. 이 구절의 논쟁의 형식은 할라카(Halakah)의 매 규정들을 확립시키는 데에 있어서 이미 공인(公認)된 논증 절차인 ‘칼 와호메르’(qal wahomer)에 해당한다. 이 ‘칼 와호메르’는 문자적으로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즉 어떤 애매모호한 논리에 대해 더 분명한 논리를 제시하는 논쟁법이다(Daube). 한편 성전보다 ‘더 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이존’은 남성명사일 수도 있고 중성명사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메이존’에 대한 견해는 (1) ‘예수가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 성전에서의 ‘제사장 예배’보다 더 위대하다는 의미라고 하는 게하르트슨(B. Gerhardsson)과 힐(David Hill)의 주장, (2) 성전보다 더 크다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의미한다고 보는 시갈(Sigal)과 콘 쉐어봐(Chon Sherbok)의 견해가 있다. 이들은 7절의 ‘자비를 원한다’는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다. 또한 (3) 성전보다 더 큰 것이 굶주림에 대한 긍휼의 생각 혹은 사랑의 운동이라고 여기는 슈티엘의 견해가 있으며, (4) ‘메이존’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보른캄(Bomkamm)과 그랜더(Georfges Grander)의 견해가 있다. 이중 (4)의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성전은 안식일보다 더 크고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이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율법 이해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데, 율법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분 안에서 율법은 비로소 완상된다고 하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5:17-48).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이는 예수의 권위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무죄(無罪)케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Lohmeyer). 따라서 예수가 그의 모든 제자들이 바로 신약 시대에 있어서 제사장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예수가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의 권위와 제사장들의 권위를 대조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Carson). 사실 성육신(Incamation)하신 말씀으로서의 신인(神人), 즉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권위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인간 제사장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한편 성전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 다음가는 최고의 존재였었다. 그런데 예수의 이 견해에 의하면 건물로서의 성전은 한낱 예수 자신을 예표, 상징(히 8:5)하는 일시적 모형일 뿐, 예수 자신의 등장 이후에는 결코 존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성전 속에서 그의 임재와 현현(顯現)을 나타내어 보이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성전인 예수 안에서 임재하시고 그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요 12:45). 따라서 예수가 모세보다(5:21-28), 아브라함보다(요 8:58) 성전보다 더 큰 이임은 당연하다.



7절, 강해 주석 해설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미 앞에서(9:13)인용된 바 있는 호 6:6의 말씀으로 ‘자비가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비의 헬라어인 ‘엘레오스’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구제 행위로서 중심에 사랑과 자비와 헌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경건한 행위이다. 그리고 제사를 뜻하는 ‘뒤시아’은 연기로 제사를 올리는 희생제물이나 제사행위를 말한다. 물론 여기서는 단순히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무의미한 종교 행위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자비를 원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제사 행위를 부인하거나 중단해 버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종교적 의무를 배겨고한 채 온전히 인본주의만을 주장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 곧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자비의 행위를 율법의 의무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자비와 제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피치 못한 경우가 생겼을 때에는 제사보다는 오히려 자비가 먼저 베풀어 진다고 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예배가 소홀해졌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알았더면

예수는 또 다시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 즉 율법을 대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호세아 시대 사람들이 피상적(superficial)이고 위선적으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그들의 유전인 할라카가 바로 이를 입증한다고 하는 것이다. 실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갖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모든 세대 사람들의 공통된 과오’에 속한다고 피력한 칼뱅(Calvin)의 견해는 깊이 음미해 볼 만한다.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이로써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무죄(innocent)하다고 하는 선언을 받은 셈이다. 물론 제자들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배가 고픈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로르도르프(Rordorf)의 견해보다는 오히려 성전보다 큰 이가 그들과 함께 게시며 그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카슨(Carson)의 주장이 더 적절한 해석이 될 수 있다.



8절, 강해 주석 해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란 언급은 신약에 세 번 나오는데(마 12:8, 막 2:28, 눅 6:5), 모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는 바람에 안식일 논쟁이 벌어진 후에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헬라어 성경에는 이 절이 ‘왜냐하면’(gar)이란 접속사로 시작한다. 즉 전 절에 있었던 사건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을 잘라먹어도 죄가 되지 않음을 밝히고 그 결론으로써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즉 인자는 안식일에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주관할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 안식일은 인자의 전적인 통제 하에 놓여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만든 어떤 규정도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비난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가? 안식일은 다음의 의미가 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며(요 1:2-3, 골 1:16), 사람의 행복과 축복을 위하여 안식일을 제정하여 복 주고 거룩하게 하고 쉬신(창 2:1-3)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2) 그러므로 안식일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그분의 뜻대로 지켜져야 한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2:27), 안식일은 사람의 행복과 축복을 위한 것이지 사람을 속박하고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는 일에, 자비를 빼앗는 일에 쓰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원하시는 안식일은 어떤 날인가? 성경은 안식일의 의미와 목적에 대하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2-3)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다 마치고 일곱째 날을 복 주셨다. 일곱째 날은 창조를 다 마친 후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고 기뻐하셨던 창조의 기념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기억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것은 시간 속에 내리신 축복이었다. 만일 어떤 인종이나 장소에 축복하셨다면 온 인류가 공평하게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에 내리신 축복은 그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기억해서 지켜야 한다(출 20:8). 광야에서 내린 만나는 안식일에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여 주시는 축복에 대하여 알려준다. 따라서 사람들은 안식일에 육신을 위하여 일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 축복을 누릴 수 있다.

둘째로,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었다. 거룩하다는 말이 처음으로 일곱째 날 즉 안식일에 사용되었다. 안식일이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이라는 인간 시간의 유한성 속으로 들어오셔서 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겔 20:12, 20) 안식일에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사람은 의롭고 거룩하게 되어 성화의 길을 걷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쉬시고 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창조된 후 바로 안식일을 맞이하였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하기도 전에 안식일의 쉼에 들어갔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릴 수 없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리는 먼저 하나님과 함께 쉬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가 선행(先行)될 필요가 전혀 없다. 안식일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가 인간의 행위 없이 그분의 공로를 통하여 안식함으로 참여하는 것을 나타낸다.

요약하면,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요 1:2-3, 골 1:16) 그리고 사람의 행복과 축복을 위하여 안식일을 친히 제정하여 복 주고 거룩하게 하고 쉬신(창 2:1-3)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그렇게 때문에 안식일은 안식을 제정하신 주인의 뜻대로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안식일 제정의 목적은 사람의 행복과 축복과 거룩함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속박하고 괴롭게 하는 일에 쓰여서는 안 된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