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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27절-38절, 긍휼히 여기시는 목자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매일성경 큐티의 본문인 마태복음 9장 27절부터 38절까지의 말씀은, 앞을 못 보는 맹인들과 귀신 들려 말을 못하는 자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내용입니다. 이들의 상황은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들의 모습과 같음을 예수님은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27절-38절, 긍휼히 여기시는 목자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마태복음 9장 27절-38절, 긍휼히 여기시는 목자



27절, 강해 주석 해설


거기서 떠나 가실새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후 그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다음 절(28절)에 언급된 ‘집’이란 말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위치해 있는 자신의 거처가 아니면 다시 마태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중임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맹인이

복음서에는 소경이 치유함을 받고 눈을 뜨는 장면이 가끔 나타난다(20:29-34, 막 10:46-52, 눅 18:35-43, 요 9장). 그런데 마태복음 후반부(20:29-34)에 등장하는 소경 치유 기적은 바디메오라는 소경에게 발생한 것으로서 막 10:46-52과 눅 18:35-43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본문의 소경 치유 사건과 요한 9장의 실로암 사건과는 각기 별개의 사건이었던 것 같다. 여하튼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동쪽으로부터의 극심한 모래 바람과 거기에다 지면에 수분이 늘 부족한 관계로 일어나는 석회석의 먼지 등으로 인해 소경 및 안질환자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다윗의 자손이여

유대인들은 이 말을 메시아에 대한 별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1:1 주석 참조).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 호칭으로 불리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의 특징을 지적하면서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 ”(사 35:5 이하)라고 예언한 바 있는데 진정 메시아라면 이사야의 예언과도 같이 자기들의 눈을 밝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서 두 가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1) 이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일 것이라는 견해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으며(요 7:42), (2) 예수는 유대인들로부터 다윗의 줄기에서 나온 분임을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12:23)라고 하는 점이다.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말은 이 두 소경이 자기들에게는 메시아의 은혜를 입어 구원함을 받을만한 공적이 전혀 없음을 나타낸 표현으로서 우리는 이 말을 통해 그들이 비록 육신의 눈은 멀어 앞을 보지 못하지만 영적인 눈은 메시아를 식별하고 있었으며, 또 이렇기 때문에 이미 하늘의 빛을 어느정도나마 감지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28절, 강해 주석 해설


집에

이 곳은 마태의 집이거나 아니면 가버나움의 거처 또는 베드로의 집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이 두 소경들은 그동안 계속 예수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인 참된 메시아임을 믿고 끝까지 자비를 구하며 열심히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아마 이때 예수께서 끈질긴 그들의 호소에도 침묵하고 집 안까지 들어오신 것은 일반인들에게 정치적 해방자로 오해될 여지가 있는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내가 … 할 줄을 믿느냐

소경들이 더듬거리며 또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계속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집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하셨는데, 이는 일반인들의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억누르기 위한 조치(措置)이기도 했거니와 소경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내가’라는 말을 특징적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소경들에게 자신의 능력, 인격, 권위를 모두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암시적 질문을 하신 것이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들은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할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임을 진실로 믿었던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우리 역시 이 같은 소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상황에서 우리는 (1)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은혜를 믿는 살아있는 믿음과 (2) 이 은혜를 받아 누리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부르짖음 (3)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얻게된 구원에 대한 확고한 인식 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29절, 강해 주석 해설


저희 눈을 만지시며

이 같은 행동은 병을 치유하는 수단이 아니라 신앙을 북돋우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깃든 행위였던 것 같다(8:3). 왜냐하면 이들에 대한 치료는 예수의 권세 있는 말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 믿음대로(카타 테 피스틴 휘몬)

문자적으로 ‘너희 믿음에 따라’ 인데, 소경들의 ‘믿음의 정도에 비례해서’란 의미보다는 ‘믿고 바라는 바대로’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8:13).



30절, 강해 주석 해설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의 권세있는 말씀에 의해 그들이 가장 소망하던 바 눈이 밝아졌다. 그들이 눈을 뜨게 된 것은 그들이 눈을 뜰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의 분량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들이 믿고 바라는 바대로 그들에게 눈을 뜰 수 있도록 허락하신 때문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실로 예수를 영.육의 온전한 구원자이신 메시아로 인식하는 자에게 그의 도래로 인해 실현된 축복의 약속(사 35:5, 6)이 그대로 실현될 것이다.


엄히 경계하시되(에네브리메데 아우토이스)

이는 다소 격렬한 감정적 요소가 있는 자에게 대한 경고의 말을 할 때 사용된 용어이다(단 11:30, 막 1:43, 요 11:33, 38). 한편 이 당시 유대인들은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 조국을 독립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그릇된 메시아관을 가진 대중들을 부추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메시아 이적을 발설치 못하도록 밝은 세계를 이제 막 봄으로써 환희에 들떠 있던 소경들에게 엄히 경고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군중들로부터 메시아 추대(推戴)를 받는 것이 그가 이 땅에 온 진정한 사명을 완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31절, 강해 주석 해설


나가서 … 전파하니라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나은 것이다(삼상 15:22). 따라서 눈을 뜬 이들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침묵을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은 아마 이 놀라운 사건을 당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예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선전하고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발설하였던 것 같다. 인간의 지혜란 것은 이렇게 어리석기 마련인 것이다(Calvin).



32절, 강해 주석 해설


저희가 나갈 때에

이 장면은 앞절과 연결된 것으로 소경을 고치셨던 바로 그 집에서 막 나가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을 가리킨다.


귀신 들려

성경에는 귀신에 사로잡힌 중풍병자나 소경 또는 벙어리가 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즉 사탄의 무리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런 질병이나 불구를 이용하여 침투하고는 교묘하게 자기들의 모습을 감추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 사람의 벙어리 병이 귀신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아시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고 종종 기록하는 신약성경의 언급들이 조잡하고 원시적인 미신에 근거한 성경 기자들의 우매성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적 발병과 귀신에 의한 병증을 구분할 줄 아는 영적 통찰력을 반증해주는 것이다(막 9:14-29, 귀신들림과 축사 참조).


벙어리 된 자(코포스)

이 말의 원어는 ‘귀머거리’(deaf), ‘벙어리’(dumb), ‘귀 먹고 말 못하는 자’(deaf-mute)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보면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귀가 먹어 듣지 못할 경우 자연적으로 말을 배우지 못해 벙어리가 되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자, 그리고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자들 역시 벙어리 귀신에 사로잡혀 말 못하는 벙어리인 것이다.



33절, 강해 주석 해설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 된 자의 질병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즉 태어날 때부터 귀가 먹어 벙어리가 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본문처럼 귀신들려 벙어리가 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벙어리의 원인이 귀신들린 데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므로 이 사람의 벙어리를 고치신 것이다.


벙어리가 말하거늘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 때에 일어날 사건을 예언하면서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 ’(사 35:5, 6)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벙어리가 말하게 된 이적은 메시아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던 것이다.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도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한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냄과 동시에 벙어리를 고치신 이적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다. 다음 구절에 언급되는 바리새인들의 반응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부자와 학자들보다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이 더 쉽게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된다.



34절, 강해 주석 해설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바리새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의 사역과 이적을 보고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아로 보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를 비난하고(9:3, 11, 24) 급기야 여기에 와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벙어리를 고치는 메시아 이적에 대해 예수께서 귀신의 왕의 힘을 빌었다고 극단적인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후의 예수의 가르침, 그중에서도 특히 10:16-28의 배경이 된다.


귀신의 왕

귀신들의 괴수, 곧 사탄을 지칭하는 말로서(4:1-11, 사탄과 귀신)이는 바알세불을 가리킨 것이다(10:25, 12:24 참조).


빙자하여(엔)

이는 귀신의 왕을 ‘통하여’ 라는 뜻도 있고 귀신의 왕 ‘안에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사탄을 방편삼았을 뿐 아니라 그의 능력을 덧입어 병자를 치유했다고 하는 것이다.


귀신을 쫓아낸다

이와 같은 악한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를 사탄에게로 돌리는 더할 나위 없는 악의에 찬 비난이었다. 이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대표자들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목수의 아들 예수를 통해 발휘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시기와 질투심에 가득차 있었으며 또한 자기들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데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에게 일어나는 이 신비로운 메시아의 광채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와 같이 악한 사탄의 말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비록 이들 바리새인들과 같은 정도의 악한 시기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죄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는 이상 이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하겠다.



35절, 강해 주석 해설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이는 예수께서 한 곳에 정체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전도 사역을 진행하셨음을 암시한다. 한편 ‘성’이란 성곽으로 둘러 싸인 비교적 큰 성읍을, ‘촌’은 성곽이 없거나 ‘성’에 영향을 받는 모든 촌락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모든’이란 수식어에는 단지 ‘성’에만 제한된다. 따라서 예수는 이때 모든 촌을 샅샅이 다니신 것이 아니라 많은 곳을 두루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마태는 잠시 분위기를 바꾸어 예수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배경을 잠시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35-38절은, 4:23-25이 첫 번째 강론(5-7장)을 위한 전제였듯이, 두 번째 강론(10:5-42)의 전제가 된다. 이는 시간적으로 정확히 언제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제별 기사 배열을 자주 사용했던 마태의 기술 방식에 따른 갈릴리 사역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덧붙여 본문은 사도 파송(派送)이라는 새로운 사건을 위한 준비기라 할 수 있다.


가르치시며 … 고치시니라

이는 마태가 예수의 사역에 대해 기록한 것을 돌이켜 보고 난 다음 그것을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여 정리한 부분이다. 예수는 자기를 환영하는 무리로부터 얼마든지 좋은 안식처와 훌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갈릴리 전 지역을 순회하며 한 시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천국 복음

이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좋은 소식임과 동시에 메시아가 도래하여 다스리라는 좋은 소식을 가리킨다. 실로 예수 자신은 곧 천국 복음의 실체였으며, 그분의 메시지는 그 복음의 내용들이었던 것이다.


병과 모든 약한 것

그리스도가 임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의 임재를 나타내 주는 증거들이 나타났다. 예수는 오직 유익하고 생명을 주는 기적만을 행하셨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리스도가 임하시면 마찬가지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당시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분의 원래 목적은 이적을 행하는 초능력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은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36절, 강해 주석 해설


민망히 여기시니(에스플랑크니스데)

이 말은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에서 유래하였다. 유대인들은 창자에 동정심이라든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 등이 담겨 있다고 보았으며 이렇기 때문에 창자란 감정을 가진 기관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여기서 ‘민망히 여기다’는 말의 뜻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내부의 창자에서부터 동정심이 우러나와 마음이 움직이다’로서 이 말은 격한 동정심에 대한 강조적 표현인 것이다.


목자 없는 양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주 목자로 비유되어졌다(겔 34장).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여겨졌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눈에는 이들이 목자없이 방황하는 양 떼로 보였던 것이다.


고생하며(에크레뤼메노이)

이 말의 원뜻은 ‘가죽을 벗기다’, 칼로 ‘썰다’로서 극심한 고통이나 걱정, 약탈 또는 탈진한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주로 종교적 정황을 묘사한 것으로(A.T. Robertson) 백성을 올바로 지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백성을 괴롭히고 학대하며, 심지어 천국 입성을 방해하곤 했던(23:13)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백성들이 바리새인들의 종교 의식이나 교리 등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유리함이라(엘림메노이)

술에 만취하거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곤두박질한 상황을 일컫는다. 이는 그 당시 일반 백성들의 회복 불가능한 정도의 절망적 상태를 나타낸다.



37절, 강해 주석 해설


추수할 것은 많되

이는 복음과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영혼들이 많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추수가 영혼 구원의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13:49) 추수할 시기 곧 세상 끝과 그 때 있을 심판으로 해석된다.


일군은 적으니

여기서 일군이란 예수 자신, 침례 요한, 예수의 치유 이적을 경험한 산 증인들 정도의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실로 유대 지방에는 수많은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등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곁에서 방관하는 신사들이었지 직접 나서서 추수하는 일꾼들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백성을 구원하는 참 목자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만 지우고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거짓 목자였기 때문에 일꾼이 부족했던 것이다.



38절, 강해 주석 해설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여기서 ‘청하여’(데에데테)란 공적 간구라기 보다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간청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도 하나 문맥상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실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하늘 일꾼을 보내달라고 친밀히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천국 일꾼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한편 여기서 ‘천국 일꾼’이란 10:1 이하에 제시되는 12제자에 국한시키는 것은 어색하다. 오히려 12제자에 구애됨 없이 많은 하늘 일꾼들로 보는 것이 좋다.


보내어 주소서(호포스 에크발레)

이는 강제력이 동원된 상태로 밀어내 달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것은 급박한 상태에서의 절대적 요청을 나타낸다. 실로 그 때나 지금이나 천국 일꾼이 시급히 필요한 때인 것이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일꾼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스스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택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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