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1일의 매일성경 큐티 본문은 역대상 13:1-14입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선한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윗과 웃사의 비극적인 실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우리의 열심과 계획을 점검하며 설교문을 정리하였습니다.
역대상 13장 1절-14절,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함께 할 찬송
- 새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
- 새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서론
아론의 두 아들이자 제사장이었던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불을 가지고 나왔을 때, 즉시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삼켰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과 순서대로 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안타까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은 웃사가 '새 수레'라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언약궤를 옮기려 하다가 생명을 잃은 사건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웃사는 '새 수레'를 통하여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 하였고 섬기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대상'뿐만 아니라 '방식'에 대해서도 명확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이 지침을 무시한 행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었고, 즉각적이고 준엄한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본론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핵심 진리는 단호하고 명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졌다 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열심과 지혜가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하게 될 때, 그 끝은 축복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1. 인간적인 합의, 하나님의 부재
먼저, 본문의 배경을 한 번 보십시오. 다윗은 마침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국가적 통합과 영적 갱신에 대한 열망이 최고조에 달한 때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영적 실패가 사울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방치하고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이라고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를 나라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다시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경건한 동기입니까?
다윗은 일을 추진하기 위해 이렇게 하였습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역대상 13:1,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다윗은 국가의 모든 지도자와 온 회중에게 자신의 비전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습니다. 4절은 그 결과가 "뭇 백성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입니다. 민주적 절차, 완전한 합의, 그리고 영적인 목표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첫 번째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과 의논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하신 한 분의 뜻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즉 율법책을 펼쳐 "하나님, 당신의 거룩한 궤를 어떻게 옮겨야 합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로 시작하지 않고, "우리가 보기에 좋으므로"라는 인간적인 합의에서 출발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빠지기 쉬운 가장 교묘한 함정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장을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수많은 전략 회의를 열고, 세상의 성공적인 경영 기법을 도입하며, 대중의 기호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합니다. 그 동기는 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모든 계획의 최종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지혜와 다수의 동의라면, 우리는 이미 다윗의 길, 실패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교회의 유일한 청사진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뿐입니다.
2. 세상의 방식, 거룩하지 않은 행렬
그러나, 다윗의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을 모아 거국적인 축제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7절에서 우리는 두 번째, 그리고 결정적인 오류를 발견합니다.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역대상 13:7,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새 수레'. 이 방법은 어디서 왔습니까? 이것은 과거 사무엘 시대 때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돌려보낼 때 사용했던 이방 민족의 방식이었습니다(삼상 6:7).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에게는 새 수레, 깨끗한 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명확하고 구체적인 명령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4장 15절은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이 채를 어깨에 메어 궤를 운반해야 하며,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그들이 죽으리라"고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무게를 인격적으로 감당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수레는 편리하고 효율적인 인간 중심의 방식입니다. 다윗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다루는 일을 세상의 방식으로 대체하는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결국, 수레가 흔들리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떨어질 것 같으니, 웃사가 언약궤를 붙잡고 말았습니다. 10절처럼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언약궤를 옮기고자 하는 계획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오늘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 질문을 던집니다. 나의 삶과 사역 현장에는 어떤 '새 수레'가 굴러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보다 더 의지하는 세상의 지혜, 대중의 인기, 인간적인 계획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웃사처럼 무감각한 손을 뻗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벧에돔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그분의 임재를 모시고 있습니까?
다행히 다윗의 이야기는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 값비싼 교훈을 통해 깨달았고, 역대상 15장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레위인들의 어깨에 궤를 메어 옮김으로써 마침내 온전한 기쁨과 축복을 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단 한 번도 '새 수레'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 덕분에 우리는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는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하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모든 선한 의도와 뜨거운 열정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제단 위에 올려놓읍시다. 인간의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방식을 따를 때,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는 웃사의 비극이 아닌, 오벧에돔의 복과 다윗의 참된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함께 하는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의 열심과 선한 의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을 앞섰던 교만을 회개합니다. 세상의 방식인 '새 수레'를 따르며, 주님의 일을 우리의 생각대로 하려 했던 불순종을 고백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진리를 마음 깊이 새기게 하소서. 이제는 모든 계획보다 먼저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 참된 예배자가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 내 생각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주소서.
-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교만을 깨닫고 회개하게 하소서.
- 모든 계획의 시작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소서.
-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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