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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5장 1절-12절, 아들 안에 있는 생명 - 매일성경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요한 일서 5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들 안에서 영생을 얻음을 설명합니다. 매일성경큐티와 새벽 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요한 일서 5장 1절-12절, 아들 안에 있는 생명


요한 일서 5장 1절-12절, 아들 안에 있는 생명



1절, 주석과 해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믿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은 현재형이고 ‘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겐네타이’은 완료 시상이다. 양자의 헬라어 시상에 의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먼저요 믿음은 그 다음이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 혹은 증거인 것이다(Smalley, Stott, Barker). ‘믿음’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으로(4:15, 요9:22)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다.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본문은 4:21의 반복이다. ‘내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겐네산타’은 ‘낳다’러눈 의미의 동사 ‘겐나오’의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서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낳으시고 자녀삼아 주셨으며 친히 아버지가 되셨다. 요한이 이같이 하나님을 ‘내신 이’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과 신자들을 가족 관계로 유비(類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에게서 난 자’로 번역된 헬라어 ‘게겐네메논’은 단수형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나(Augustine)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법상 단수로도 집합적인 의미의 그리스도인 전체를 지칭할 수 있으며, 문맥상 본문이 믿음과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또한 하나님 안에서 형제를 사랑한다. 요한은 본 절에서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의 불가 분리적 관계성을 강조한다(4:19,20).



2절, 주석과 해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본서는 전반적으로 형제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는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으나 본 절에서는 본 절에서는 그 표현이 반대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 절에 나타난 역설적 표현의 어색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로써’가 앞절에 설정된 원리를 가리키며, ‘우리가 … 사랑하는 줄을’을 ‘우리가 사랑해야만 한다’로 해석한다(Marshall, Dodd). 그러나 ‘이로써’가 앞절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이유는 없다. ‘이로써’는 본 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근거함을 나타낸다(4:8,16,19, Smalley).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불가 분리의 관계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며 형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입증된다.



3절, 주석과 해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순종과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는다. 모든 계명 중 가장 우월한 계명이 사랑 계명인 바 그 안에 하나님의 계명이 내포되어 있으며(Smalley) 그 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이미 예수께서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요14:31, 15:10).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무거운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레이아이’은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주장하는 무거운 또는 가벼운 율법이라는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마23:23, Smalley, Schnackenburg).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주장한 율법과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었던 반면에(마23:4, 눅11:46) 그리스도께서 주신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다(마11:30).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셨고(4:19)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주셨으며(Dodd) 설사 그 계명을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용서해주시기 때문에(Calvin) 하나님의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가벼운 것이다.



4절, 주석과 해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여기서 ‘난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토 게겐네메논’은 중성이다. 계속 남성 명사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중성 명사로 바꾸어 쓴 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인간적 욕망을 가리킨다(2:15-17, Smalley).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이러한 악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승리한다(18-20절, 2:13,14). ‘이기느니라’의 헬라어 ‘니카’은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요16:33, 19:30). 사도 요한은 본 절에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요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 이김은 우리의 거싱 되고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롬8:37). 여기서 ‘이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사사’은 부정 과거 능동태로 한 개인의 회심과 같은 개별적인 경험을 표현할 때나 공동체의 역사에서 특별한 한 순간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이다(Brooke). 본 절에서 사용된 ‘니케사사’는 과거에 성취된 명확한 승리와 상관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세상에 대한 승리를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것을 시사한다(Haas, Smalley).



5절, 주석과 해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1절의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이라는 표현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 계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Marshall).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세상을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유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된다. 한편 ‘이기는 자’의 헬라어 ‘니콘’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4절의 ‘니카’(’이기느니라’)와 같은 시상이다. 이는 투쟁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승리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6절, 주석과 해설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본문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옆구리를 창에 찔렸을 때 흘리신 물과 피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ugustine, Williams) (2)혹자는 요4장과 6장을 근거로 하여 침례와 성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ullmann, Westcott, Luther, Calvin). (3)혹자는 구약 시대의 희생제사와 연관하여 물은 정결케하는 것이며 피는 희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mer, Candlish). (4)혹자는 물은 예수께서 받으신 요한의 물 침례요 피는 십자가의 대속의 보혈이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Alford, Meyer, Barker, Stott, Marshall).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요한 당시에 케린투스(Cerinthus)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은 천상의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을 때 예수에게 임하셨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떠났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요한에게 물침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것을 분명하게 설파함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본문은 앞서 언급된 상반절의 반복으로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강조한다. 본 절 상반절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디’(’ … 을 통하여’)를 사용한 반면에 본문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엔’(’ … 안에서’)을 사용한다. 본 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께서는 물과 피를 통하여 임하셨을 뿐만 아니라 물 안에서 그리고 피 안에서 임하신 자이다’라는 의미이다. 요한은 위치나 장소를 나타내는 두개의 전치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더욱 강도하고 있다(Marshall, Smalley).



7절, 주석과 해설


주석

제임스왕역(KJV)과 새제임스왕역(NKJV)의 요한일서 5:7-8에서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매우 명백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제임스왕역의 본문에는 ‘요한의 콤마’(Johannine comma)라 불리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이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표현이다. ‘콤마’는 헬라어로 ‘짧은 구절’을 뜻하는 말로, ‘요한의 콤마’는 이 본문에 삽입된 구절을 가리킨다. 아래 제임스왕역 본문에서 밑줄 친 부분이 ‘요한의 콤마’이다.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And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1 John 5:7-8, KJV).

“하늘에서 증언하시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라. 이들 셋이 하나이니라. 또한 땅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7-8).

그런데 이것을 현대의 역본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거의 모든 현대 영어 역본들과 개역개정판을 포함한 대부분의 한글역본에는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이 표현이 빠져 있고,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7-8, 개역개정판)

현대 역본들에 빠진 단어들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없어지므로, 기독교의 중요 교리에 중대한 상실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 이런 단어들이 제임스왕역에는 들어 있고, 현대의 역본들에는 빠져 있는가?

사본의 증거 : 신약의 일부나 전부를 포함하고 있는 5,600 개 이상의 사본 중에서 약 600 개가 일곱 개의 일반 서신(요한일, 이, 삼서, 베드로 전, 후서, 야고보서, 유다서)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요한일서이다. 추가된 단어들(‘요한의 콤마’)은 이들 600 개의 사본 가운데 여덟 개에만 들어 있다. 이 여덟 개의 사본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이 중 아무것도 최고(最古)의 사본들에 들어 있지 않다. 이 여덟 개 중 네 개는 난외에 그 추가적인 단어들을 실고 있으며(난외주는 일반적으로 주석적인 해설이었음), 그중 하나만이 16세기 이전 곧 10세기의 사본이다. 나머지 네 개 중 셋은 16세기의 것이고, 하나는 18세기의 것이다.
  • 어떤 교부도 위에서 말한 “요한의 콤마”를 인용하지 않았다. 3∼4세기에 있었던 여러 삼위일체 논쟁을 염두에 두고 보면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분명히 사용했을 것이다.
  • “요한의 콤마”는 라틴어 번역을 제외하고 고대의 어떤 역본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라틴어 역본에 그것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4세기의 어떤 스페인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헬라어 본문을 라틴어로 번역한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교회 학자였던 히에로뉘무스(Jerome, A.D. 345∼420년)가 라틴어 성경인 그의 불가타역에 “요한의 콤마”를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히에로뉘무스 시대 이후의 불가타역에 나타났다. 북아프리카에서 라틴 교부들이 요한의 콤마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때 이후로 계속하여 그 사용이 증가되었다.

더욱이, 약 600 여개의 사본에서 중요한 기별이 담긴 것인데도 “요한의 콤마”를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지웠다고 말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불가타역의 후기 판을 따르는 후대의 몇몇 사본들이 그것을 추가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타당할 것이다.

불가타역에서 제임스왕역까지 : 제임스왕역이 기초로 삼은 헬라어 본문은 매우 정직하고 신실한 로마가톨릭 학자 에라스무스(1466∼1536년)가 편찬한 헬라어 신약의 개정본이다. 에라스무스는 라틴어 성경들에 나오는 “요한의 콤마”를 포함하여 성경이 가톨릭 전통에 반대되는 것을 말한다 해도 모든 점에서 올바로 되어 있기를 바랐다.

에라스무스는 라틴어 본문보다는 헬라어 본문에 기초된 신약을 편찬하기로 마음먹었다. 시작 단계에서 그는 12세기 헬라어 사본 넷을 발견했고, 후에 두 개를 추가로 발견했다. 이 여섯 개의 사본 중 어느 것도 “요한의 콤마”를 포함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그의 헬라어 사본이 1516년에 출판되었으나, “요한의 콤마”가 빠진 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유감을 표했다.

그는 거듭거듭 질문을 받았다. “왜 당신은 이 중요한 진술을 빠뜨렸습니까?” 그것이 원래 헬라어 본문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요한의 콤마’를 포함하고 있는 헬라어 사본을 단 하나라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것을 저의 헬라어 본문에 포함시키겠습니다.” 몇 년 후 “요한의 콤마”를 포함한 사본이 만들어졌다.

“현재 그것이 나타난 대로, 그 헬라어 사본은 아마도 1520년 옥스퍼드에서,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역에서 논란이 되었던 단어들을 받아들인 프로이(Froy) 혹은 로이(Roy)라 일컬어지는 한 프란체스코파의 탁발승에 의해 기록되었다.”(Bruce M. Metzge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101)

그리하여 신의를 지키는 사람 에라스무스는 하는 수 없이 “요한의 콤마”를 헬라어 신약의 1522년 판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새로운 헬라어 신약 판에 “요한의 콤마”를 포함시키도록 에라스무스를 압박한 것은 이 새로운 헬라어 사본만이 아니었다. 에라스무스는 예수가 하나님임을 거부하는 아리우스주의자로 몰려 고소를 당했는데, 그것은 심각한 고소였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교회를 자기보다 우선시 여겼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그 추가적인 단어들을 삽입하는 것을 잠잠히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하여 그 단어들이 원래 본문에 들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사건들의 이런 순서가 Joseph M. Levine, “Erasmus and the Problem of the Johannine Comma,” Journal of the History of Thought 58 [1987]: 573∼596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렇게 하여, 이후에 나온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의 모든 판들에 “요한의 콤마”가 포함되었다. 1611년 제임스왕역을 번역한 위원회가 사용한 것이 바로 “요한의 콤마”가 포함된 본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원어로 된 성경본문의 역사는 제임스왕역의 독법이 정확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것이 제임스왕역에 대한 심한 비평인가? 그렇지 않다. 제임스왕역에서 이 구절이 부정확하다고 말하는 것이 영어 성경으로서 제임스왕역을 사용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첫째로, 제임스왕역이 기초로 한 헬라어 본문과 다른 모든 현대 역본이 기초로 한 헬라어 본문의 차이는 기껏해야 5퍼센트도 안 되며, 이런 경미한 불일치는 주요 교리 하나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 둘째로, 고대 헬라어 사본과 영어 역본들을 여러 해 동안 연구한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가장 좋은 사본과 가장 나쁜 사본 그리고 가장 좋은 번역과 가장 나쁜 번역이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오의 계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며, 이 모든 것으로 모든 주요 교리들이 잘 지지될 수 있다고 명백하게 결론지을 수 있다.

여기서 함께 지적해야 할 점은 반박할 수 없는 헬라어 사본들에 기초한 성경의 다른 구절들이나 진술들 역시 삼위일체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9이 그 확실한 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그러나 마태복음의 이 구절도 “그들이 하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은 4세기에 가서야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를 명시적으로 진술하지 않는 본문들에 기초하여 발전된 이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도 삼위일체의 교리를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요한일서 5:7-8을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하는 성경절로 사용할 수 없다.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개역성경에는 본 절이 앞절과 분리되어 또 하나의 절로 기술되어 있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본 절이 앞절에 포함되어 있다. ‘증거하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마르튀룬’은 현재 분사로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증거하심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로 오셨음을 믿게 하는 성령께서 믿는 자안에 내주하셔서 지속적으로 예수에 대해 증거하신다(2:20,27, 4:1-6, Stott). 또한 성령은 예수께서 물로 침례를 받으실 때에 임하심으로 객관적인 증거를 보이셨다(요1:32).


성령은 진리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요14:6)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성령이라고 증거하셨다(요15:26, 16:13).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본문에서 성령께서 진리이심을 선언한 것은 진리이신 성령만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증거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Johnson).



8절, 주석과 해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성령과 물과 피’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 혹자는 성령과 물과 피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세 가지 등급으로 생각하여 예언자와 침례 요한, 그리고 요한 일서의 저자인 자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engel). 그러나 성령을 예언자와만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한 발살이며 피를 요한 일서의 저자와 연결시키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논리이다. (2) 혹자는 세 가지 증거들이 침례(요3:5-8), 성만찬(요 6:54-56), 그리고 성령을 받음(요20:22)의 ‘신비적인 사건들’에 각각 상응한다고 주장한다(Windisch). 그러나 이 주장은 상당히 작위적이다. 이 견해는 정당성을 주장키 위해 본 절의 세 가지 증거들의 순서를 바꾸고 있으며 더욱이 근거로 제시된 참고 성경 구절들도 예수를 증거한다는 개념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3) 혹자는 세 가지 증거들이 기독교 초기에 존재한 ‘기름 부음과 침례와 주의 만찬’이라는 예배 의식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한다(Manson, Nauck).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침례 이전에 기름 부음을 실행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 (4) 혹자는 물과 피를 침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례전의 상징으로 보아 침례와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된다는 견해를 주장한다(Dodd, Bultmann, Law, Westcott, Barker). 침례와 성만찬 즉 이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여 증거한다. (5) 혹자는 ‘물과 피’를 6절과 같은 의미로 보아 물은 예수의 침례를 상징하고 피는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상징하며, ‘성령’은 예수께서 침례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의 머리 위로 강림하셨고(요1:32),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흘리사 그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요19:30) 영광을 받으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증거하심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요7:39, 20:22, Smalley).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두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한은 본문에서 성령과 물과 피가 같은 결과를 향하여 함께 작용함으로써 한 점에 수렴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세 가지 증거들이 예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증거함을 시사한다. 한편 구약 시대 율법에 의하면 증인이 둘 이상이라야 어떤 사실이 입증되었다(신19:15). 요한이 이러한 율법을 염두에 두고 세 가지 증거를 제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Stott).



9절, 주석과 해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율법에 의하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증거하는 일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신19:15).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의 증거일지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면 더욱 크고 완전한 하나님의 증거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증거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선포되며 물과 피를 통하여 역사 속에 선포된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면(裏面)에서 세 가지 증거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증거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본문은 두 개의 ‘호티’(’왜냐하면’)로 구성되어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를 나타낸다. 그 하나님의 증거는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세 가지 증거들,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증거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마르튀레켄’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신 것이 지속적으로 유효함을 나타낸다. 즉, 예수께서 침례받으실 때에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자신의 아들임을 확증하셨으며(마3:16,17, 요1:33,34) 예수의 고난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증언하셨다(요12:28-30). 이러한 역사적 증언은 성령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증언되고 있으며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의 내증으로 실현되고 있다(Stott, Barker).



10절, 주석과 해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절). 그 결과 믿는 자들은 자기 자신 안에 하나님의 증거를 소유하게 된다. 이 증거는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내주하여 증거하시는 내적 증거를 의미한다(8절, Brooke, Law, Williams). 이러한 내적 증거는 외적 증거인 ‘물과 피’와 조화를 이루어 믿는 자들의 믿음을 근원이 됨과 동시에 결과가 된다(Stott).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본문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란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음을 말한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물과 피로 임한 인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해 이렇게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증거를 거짓으로 만들며,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취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극단적으로 확증한다. 한편 본 절은 롬1:19,20을 상기시킨다. 우주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으므로 믿지 않는 자들은 도무지 자기의 불신앙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11절, 주석과 해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영생’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이 생명은 본래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가(1: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완벽하게 현시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이신 예수와의 관계성 속에서 믿는 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과 유일하시며 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고의 생활이다(요17:3, Smalley). 이러한 영생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신 인간이심을 증거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 들일 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그러기에 이 결과인 영생을 알고 소유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증거가 참되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인간임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한편 ‘주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켄’은 유일회적인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보정 과거 능동태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통해 구속 사역을 행하신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생을 이미 주셨으며, 영생을 주신 사실은 불변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영생과 아들의 불가 분리적 관계를 나타낸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한 인간이신 예수 안에 현시되어서 그 아들이 행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 즉 ‘물과 피’의 증거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생명임에도 불구하고(요14:6) 요한이 예수와 생명을 동일시하지 않고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고 표현한 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성육신하셨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하다.



12절, 주석과 해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여기서 ‘있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콘’은 ‘에코’(’가지다’)에서 파생된 현재 분사이다. 요이1:9에서는 같은 뜻의 현재 동사 ‘에케이’(’가지다’)가 ‘모시다’란 말로 번역된 것으로 보아 본 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란 현재 아들을 마음 속에 모신 자를 가리킨다. 아들이 생명 자체이며 아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11절, 1:2, 요11:25, 14:6) 아들을 모신 자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아들의 말씀에 순종하여 높은 수준의 영적, 도덕적 삶을 영위함과 동시에 그러한 삶 속에서 아들의 인격을 닮아가게 된다. 아들은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면서 함께 삶을 영위하며(3:24) 완전하게 하며(4:12) 영원한 삶을 영위케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생명을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어떤 길에서도 생명을 찾을 수 없다(요14:6, 행4:12).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를 마음 속에 모시지 못한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한편, 본 절 상반절에서는 ‘아들’이라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점에 주목하여 ‘하나님의’란 말이 추가된 것에 대해 혹자는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Bengel, Plummer) 혹자는 영생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rooke, Mars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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