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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 23절-34절,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 매일성경 강해 주석과 해설

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8장 23절부터 34절까지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자 갈릴리의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지고 어둠의 권세들이 떠나가는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만유의 창조주이심을 증명하는 본문의 강해와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8장 23절-34절,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 매일성경 강해 주석과 해설



마태복음 8장 23절-34절,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23절, 강해 주석과 해설


배에

배를 가리키는 본문의 헬라어 ‘플로이온’은 크기와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배를 가리킬 때 쓰이는 낱말이다. 하지만 이 곳의 배는 돛을 달지 않은 약 12-13명 정도의 어부와 잡은 고기를 실을 수 있는 조그마한 고기잡이 배였던 것 같다.


제자들이

본문의 제자들이란 항상 같이 다니던 12제자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마가에 의하면 예수가 탄 배와 함께 그 뒤를 이어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을 실은 다른 배들도 해안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막 4:36).



24절, 강해 주석과 해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이 구절은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때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카이 이두’(그리고 보라. 그런데 갑자기)란 말로 시작되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번역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큰 놀’로 번역되고 있는 헬라어 원어, ‘세이스모스 메가스’은 지진이나 바다의 폭풍우를 가리킬 때 쓰이는 것으로서 어부 출신 제자들 조차도 심한 두려움을 느낄만큼 강력한 힘의 풍랑을 뜻한다. 한편 갈릴리 바다에는 이 같은 현상이 자주 일어나곤 하였다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보다 약 240m 아래 위치해 있는 반면 주변의 산들은 고원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갈릴리 바다의 표면 온도가 갑자기 상승하면 기압이 형성되어 남동쪽의 고원으로부터 거센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이같은 거센 파도를 일으킨다. 그런데 당시 구약성경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더불어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을 것이다(욥 38:8-11, 시 29:3, 4, 65:5-7, 89:9).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마가는 “물결이 부따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 4:37)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곧 계속되는 풍랑에 의해 배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가리킨다.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마가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막 4:38)라고 주무시던 곳을 명시해 놓고 있다. 당신이 머리 둘 곳 없는 처지임을 말씀하셨던(20절) 예수께서는 평지의 안식처를 얻지 못한 채 격랑이 이는 바다 한 가운데서 고물에 머리를 의지한 채 주무시고 계신 것이다. 한편 이렇게 풍랑이 치고 배가 파선될 위기에 처해 있던 시각은 밤으로서 예수는 매우 짙고 피곤하여 깊이 그리고 조용히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자의 평온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더욱이 격랑이 이는 상황에서 계속 잠을 청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예수 자신의 자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다(요 7:6).



25절, 강해 주석과 해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여기 언급된 제자들 중에는 풍랑과 배를 다루는일에 노련한 어부 출신들도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나름대로 경험을 살려 위경(crisis)을 헤쳐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는 점점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드디어 현상적으로는 바다에 문외한인 목수 출신 예수께 나아오게 되었다. 한편 그들이 예수께 나온 것은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본다.


주여 구원하소서(퀴리에 소손)

여기서 ‘구원 하소서’란 ‘구출하다’, ‘보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소조’의 제 1 부정 과거형으로서 지급 즉시 구원해 달라는 간구이다. 이는 눈앞에 닥칠 위기의 급박성을 또렷이 나타내 준다. 즉 제자들은 절규에 가까운 간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를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는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눅 8:2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본질적인 통일성 가운데서 각 저자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 당시 위험에 집면해 있던 배 안에서는 이 말들이 모두말해졌을 것이지만 각 저자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외침만을 기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여 구원하소서’란 용어는 ‘우리를’이라는 목적어가 첨가된 상태로(Metzger) 1세기 이후의 예배 의식 중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죽겠나이다

헬라 원문에 현재시제로 묘사된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죽어가고 있나이다’가 된다. 실로 제자들은 자신에게 죽음의 위험이 다가오게 되었을 때 비록 조그마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가닥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았다. 이는 곧 날마다 죽음에 직면해야 하는 우리 죄인들이 찾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시사해 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분노의 폭풍우가 불어 닥칠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거기서 건져줄 자가 없음을 깨닫게 한다.



26절, 강해 주석과 해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배에 함께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바람과 파도의 지배권 아래만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지금 꾸짖으신 것은 단순히 그들의 감정적인 공포나 위기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잠재한 불신앙적 성향고 환경 의존적인 미숙한 신앙 상태 때문이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단적으로 그들의 믿음이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나타내준다. 결국 이 불완전한 믿음은 그들이 예수와의 관계를 확고히 하지 못한 데서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다. 정녕 그들이 예수와 완전히 일치된 관계성을 회복할 때 그들은 위험이나 질병이나 죽음 조차도 무서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계신 만유의 주인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올리고피스토이)

이 말은 믿음의 양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믿음의 질이 좋지 못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특히 본서에서는 이 말이 사물의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그 표면만을 보는 경우에 자주 사용된다. 마가는 이 부분을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둘은 모두 믿음과 두려움과의 대립된 성질, 곧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두려움은 믿음을 몰아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실로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사랑과 신뢰는 모든 두려움의 뿌리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다(요일 4:18).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이는 예수의 탁월하고도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행동이다. 혹자(Bruce)에 의하면 이 표현은 실제적 권능의 행사라기 보다 하나의 시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예수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다. 진정 예수는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말씀 한 마디로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다스려가시는 전능자이시다. 한편 본문의 ‘꾸짖으신데’(에페티메센)란 말은 미완료 능동형으로서 아직 채 꾸짖는 일이 완결되기도 전에 그 꾸짖음의 효력이 발생하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때 바람 뿐만 아니라 바다에게도 명령 하셨다 그러므로 바다의 풍랑은 그 즉시 그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에게네토 갈레네 메가레)

직역하면 ‘큰 놀이 일어나’라는 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의 권위에 찬 명령은 바로 이같은 극단의 변화를 가져오는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리고 자연의 인격적 지배자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는가? 그의 말씀은 곧 폭풍우도 굴복시키고 잠잠케하는 신적 권위인 동시에 전우주적인 능력이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마태는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예수의 모습과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예수의 모습을 대비시켜 놓고 있다. 이것은 마태가 종종 사용하는 방식이다. 사탄에 의해 시험받으셨으나 사탄을 꾸짖으셨고(4:1-11) 귀신이라 칭함을 받았으나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처럼(12:22-32) 여기에서도 예수께서는 육체적인 피곤함으로 인해 잠드셨으나 당신과 제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폭풍우를 잠재우셨다.



27절, 강해 주석과 해설


그 사람들이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본문의 ‘그 사람들’이란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인 것으로 보인다(Meyer, Jerome, Nosger). 그러나 다른 배들도 함께 출항했기 때문에(막 4:36) 제자들 이외에 다른 배에 승선했던 사람들도(Weiss) ‘그 사람들’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기이히 여겨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그들이 예수의 기적을 전혀 예상치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단정해서는 안된다. 이는 자신들의 간구가 실제적이고도 전인격적으로 응답됨으로 인해 당황하고 놀란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9:33, 14:33).


어떠한 사람이기에(포타포스 에스틴 후토스)

이와 같은 능력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감탄의 말이다. 배를 침몰시키려는 파도와 폭풍우를 말씀으로 잔잔케 하신 능력의 예수 앞에서 그들은 놀라고 놀라 그가 하나님 그 자신이심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제자 자신들이 지금껏 지녀온 그분의 인격에 관한 지식이 참으로 보잘 것 없었음을 실토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거센 파도와 폭풍우를 잠재울 수 없다는 고백인 것이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헬라어 원문에는 ‘순종하는고’란 말 속에 ‘그에게’를 강조하여 ‘아우토 휘파쿠우신’, 즉 ‘그에게 순종하는 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는 동시에 자연의 능동적이고 즉각적인 순종이 강조되고 있다 할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자연의 지배는 구약적 배경하에서(시 89:9, 107:25-30) 예수의 신적 탁월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28절, 강해 주석과 해설


가다라 지방

마가(마 5:1-20)와 누가(눅 8:26-39)의 기록에는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표기되고 있다. ‘가다라’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데가볼리(Decapolis, 팔레스타인에 있는 헬라 도시들의 연합체로서 10개의 도시를 의미함)중의 한 도시였다. 반면 거라사는 가다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12마일 떨어진 곳이다. 그러나 본문의 가다라 지방이란 표현은 마가와 누가의 기록과 상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다라’는 베레아 지역의 수도(首都)였으므로 그곳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거라사’까지 가다라 지방으로 호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Carr). 더욱이 복음서 기자들은 이 지역에 대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명칭을 통일시키지 않아도 무방하였을 것이다. 한편 이 지역은 이방인들의 거주 지역이었다(4:25). 이는 돼지 떼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로(30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생각했으므로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돼지를 거의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귀신들린 자 둘이

마가와 누가는 예수 앞에 등장한 귀신들린 자를 한 사람만 언급하고 있다(막 5:2, 눅 8:27). 이는 아마 이들이 다른 한 삶은 제쳐두고 증세(症勢)가 보다 더 심각한 한 사람에게만 주의를 집중시켜 초점을 맞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Augustine, Calvin). 한편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귀신들린 자’들은 주로 정신적 결함이나 자폐적 환자로서가 아니라 악한 영의 지배권 아래 놓인 자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대항키 위한 사탄의 극렬한 저항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Homer A. Kent. Jr).


무덤 사이에서 나와

마가와 누가는 이들이 무덤 안에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가다라 지방에는 석회암으로 이뤄진 언덕이 있었고 그 언덕위에는 고대 무덤들이 있었는데 그 무덤들은 조그만 방이나 굴 식(式)으로 되어 있었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유대인의 무덤은 동굴처럼 되어 있으며 성벽 바깥에 흔히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귀신들린 자에게는 이와 같이 어두침침하고 음산한 동굴같은 무덤이 거처하기에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 사람들이 가까이 갈 경우 그사람은 의식적으로 더럽힘을 입었다고 간주되었다.


저희는 심히 사나와

본 절과 평행구인 막 5:2-6과 눅 8:27에서는 귀신들린 자의 난폭한 성격과 행동이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실로 이들은 군대 귀신들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광적인 힘을 과시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인격이 파괴된채 오직 마귀의 파괴적 성향만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아무도 그들이 거하는 곳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친 바다를 잠잠케하셨던 그 주께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이곳을 친히 찾아오셨다.



29절, 강해 주석과 해설


하나님의 아들이여

이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지칭할 때, 특히 신성을 지닌 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칭호이다(3:17). 이 말을 통해서 살펴볼 때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정학히 알았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예수의 권위있는 말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영적 감지력(感知力)으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행 19:15).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의 제자들은 아직도 이 진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마 4:3의 주석을 참고하라.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티 헤민 카이 소이)

이 말을 직역하면 ‘우리와 당신(사이)은 무엇이냐’란 말로서 그 뜻은 ‘왜 우리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당신이 우리를 괴롭히며 방해하느냐?’ ‘제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냐?’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구약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관용어다(삼하 16:10, 왕하 9:18, 스 4:3). 여하튼 사탄의 세력들은 영원한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까지 상대적이며, 제한적인 자유가 허락되어 있었던 것이다(엡 2:2, 6:12).


때가 이르기 전에

본문의 ‘때’(appointed time)란 것은 마귀의 최후 운명의 날이요 세상의 종말, 곧 대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 악령들을 미혹하고 괴롭히도록 허용되지만, 심판날에는 모든 악인들과 함께 영벌에 처해질 것이다(벧후 2:4, 유 1:6, Enoch 16:1, Jub 10:8, 9). 결국 본문의 이 말은 그들이 예수가 그 심판주이심을 알았음을 시사하며 더욱이 지금, 즉 그 때가 이르지도 전에 혹시 무저갱에 던져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계 20:3). 한편 이 ‘때’가 이르기 전에 예수께서 귀신들의 활동을 억제하시고, 추방하셨다는 것은 종말의 순간에 예수께서 귀신들을 모두 심판하실 것에 대한 전조적(前兆的) 행동인 동시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이신 것이가(12:28).


여기 오셨나이까

귀신들린 자의 ‘여기’란 말은 온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할 종말 개념과 연관된 ‘때 가 이르기 전에’란 말과 결부시켜 볼 때 미혹과 파괴를 일삼는 귀신들의 활동이 자유로운 이 땅 전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종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하셨던 것이다.



30절, 강해 주석과 해설


많은 돼지 떼가

마가는 돼지 떼의 수효가 약 이천 마리라고 밝히고 있다(막 5:13). 한편 마태는 돼지 떼가 ‘멀리서’(some distance from them) 먹고 있다는 상세한 보고를 함으로써 자신의 기록의 사실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돼지 떼의 바다에의 몰사(沒死)가 단순히 사람들의 소동에 놀라 도망치다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신적 능력에 따른 결과로서 되어진 일임을 시사해 준다.



31절, 강해 주석과 해설


귀신들이 간구하여

마가와 누가는 예수께서 이 귀신들린 자를 만나자 마자 귀신들에게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했음을 밤히고 있다(막 5:8, 눅 8:29). 이에 대해 귀신들은 예수께 간구하는데, 이는 마귀의 활동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귀신들이 이러한 요구를 한 이유에 대한 몇 견해가 있다. (1) 귀신들은 육체적인 ‘거처’(home)를 소유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돼지 떼 속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2) 하나님의 피조물을 증오하는 마음에서 돼지 떼에 들어가 그 돼지 떼의 죽음을 초래하려 했다. (3) 그 지방 사람들의 소유인 돼지 떼들을 몰살시킴으로써 그 지방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를 배척하고 미워하는 생각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 세 가지 의견들 중에서 첫 번째 의견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귀신들은 돼지 떼를 자기들의 새로운 ‘거처’(home)로 삼기를 갈구하였다면 어떻게 그 새로운 거처에 들어가자마자 그 거처를 파괴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와 세 번째에 제시된 이유는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들 중에 다른 곳에서도 예수에 의해 쫓겨난 귀신들이 난폭한 행위나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자기들의 분노를 표시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17:14-20, 막 9:14-32). 한편 율법은 돼지 고기를 먹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레 11:7). 그렇다면 이 돼지 떼를 먹이는 주인은 이방인이거나 아니면 이방인에게 팔기 위해 이 돼지떼를 기르는 불경건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32절, 강해 주석과 해설


가라 하시니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예수께서 마귀의 요구를 들어주신 사실에 대해 (1) 어떤 이들은 (Plummer, Weiss) 예수가 귀신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귀신들린 자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라고 허락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2) 마귀가 무저갱에 떨어질 종말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선택할 일말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Hendriksen). 이와 더불어 (3) 예수께서 그곳 주인들에게 귀신들린 이 두 사람의 가치가 돼지 떼보다 더 귀중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고 이해하는 학자들(Rosenmu ler)이 있다 여하튼 귀신들은 모든 생명체, 특히 무인격체에 쉽게 들어가 그 대상을 자유로이 장악할 수 있었기에 돼지에게로 손쉽게 돌입할 수 있었다.


온 떼가 비탈로 몰사하거늘

이는 귀신들린 자가 귀신들에게 완전히 놓임받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다. 실로 대자연의 주인이신(23-27절) 예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구원키 위해 그 천하 중 일부를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귀신들의 난폭성이 두사람에게서 떠나 돼지에게로 옮겨짐으로써 판단력이 결여된 무인격체인 돼지들은 죽음에의 질주(疾朱)를 하게 된다. 본 절에 대한 보충 설명은 막 5:13의 주석을 참고하라.



34절, 강해 주석과 해설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이 지방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재산에 입힌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예수를 체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를 만나려고 앴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보자 그 위엄에 제압당하여 단순히 그곳을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릇된 생각을 불러 일으켜 그리스도를 반대하게 한다. 특히 사탄은 ‘온 시내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두려움을 크게 주입시킴으로써(눅 8:37) 자연히 온 시내 사람들과 예수 사이를 완전히 결별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2) 이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곧 가엾은 사람들에게 행하신 선한 일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그들은 구세주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였으며 세상을 더 사랑했던 것이다. 실로 물질적 한계 상황에만 머무르는 사람들은 진리와 구주를 수용할 여유를 전혀 갖지 못한다. 오늘날도 이 가다라 지방 사람들처럼 선한 기적을 보고도 자신들의 재산에 손해가 온다는 이유로 기독교의 참된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 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을 떠나달라고 요청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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