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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1절-15절, 소명과 파송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매일성경 본문인 마태복음 10장 1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도록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지혜와 분결할 것들에 대해 알려 주시며 파송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15절, 소명과 파송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마태복음 10장 1절-15절, 소명과 파송


1절, 강해 주석 해설


그 열 두 제자

이 어구는 마태복음에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지만 정관사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열 두 사람의 제자들은 이 이전에 이미 선택을 받았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임명하신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몇몇 예비적 단계들(4:18-22, 요 1:35-51)이 여기에 와서 결정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산상수훈 이전, 예수께서 밤새껏 기도하신 후 제자들은 택하셨고(막 3:13-18, 눅 6:12-16)또한 그들에게 얼마 동안의 제자 훈련을 실시하신 후에야(막 6:7-13, 눅 9:1-6) 비로소 그들을 선교지로 파송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열 두 제자 임명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갑자기 탄생할 개척 교회를 책임질 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열 둘’이라는 숫자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대한 새로운 탄생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12족장이 옛 시대의 이스라엘을 대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이들 12명의 제자들이 새 이스라엘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2제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갱신(eschatological renewal)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들의 직무는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자기들의 선생이신 예수로부터 가르침받은 교훈과 그가 세우신 종교의 본질, 또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열 둘이라는 숫자는 이 목적에 가장 적절한 숫자였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한편으로는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큰 숫자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질서하게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을 만큼의 작은 숫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또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도 같이 배운 사람들도 아니었으며 또 자기들의 기교나 재주로 이 종교를 전파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고 상당한 지위나 신분에 위치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타인에게 강제적으로 이 종교를 강요할만한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보고 들은 대로만 전달하는 정직하고 평범한 상식을 소유한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부르사(프로스칼레사메노스)

이 말의 원뜻은 ‘당신의 목적하신 바를 위해 소집하였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의 주춧돌이 될 12제자들을 당신의 구원역사를 쟁취하시기 위하여 불러 모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주권적이고 자의적인 선택을 통해 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민족 전체에게 소명(召命)을 부여하신다(막 3:13, 행 2:39, 고전 1:1, 2).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 …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여기서 먼저 ‘권능’ (여수시안)이란 ‘권세와 능력(힘)’ 또는 ‘권위와 통치권’이라는 의미로서 본문에서 특별히 정복자들로서의 능력을 가리킨다(F.R. Fay).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혜로우신 필요에 따라 천국 일꾼을 부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신다. 한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권능에는 먼저 ‘귀신을 쫓아내는’것이 있었다. 여기서 ‘귀신’이란 문자적으로 ‘더러운 영들’, ‘악한 영들’이라는 뜻으로서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에게 원수가 되며, 직.간접으로 인간의 정신과 도덕과 육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영들이다(12:43). 그런데 예수께서이 같은 더러운 영들을 쫓는 능력을 병고치는 능력과 구별하여 제공하신 것은, 그 일이 병고치는 일보다 탁월하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고, 또한 사탄의 왕국을 허물어뜨리는 직접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어떤 다른 권능을 행하는 것보다 소명받은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확증하는 데 유효한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유전(12족장의 유언, Lev. 18:12)에 의하면 이처럼 악한 영을 정복, 축출하는 일은, 곧 대제사장적 메시아의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여하튼 이 일은 메시아와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확실한 증표임에 분명하다. 한편 본문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은 본래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로서(4:23, 9:35 참조) 이제 당신의 권위를 덧입은 12제자들에게도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권능은 일반 성도에게 부여된 ‘병고치는 은사들’(고전 12:9, 28)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부여된 그 은사는 은사받은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고, 그들이 고칠수 있는 병의 종류도 받은 바 은사에 따라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로부터 신적 권위를 직접 위임받은 12제자들은 ‘모든 병과 모든 악한것’을 고치는 특수한 은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영적인 충만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사도들의 단회적(單回的)이고도 제한적(制限的)이며 유일무이(有一無二)한 특수 권능이었다.



2절, 강해 주석 해설


사도(아포스톨로스)

이는 ‘내가 보내다’는 뜻의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냄을 받은 자’, ‘사신’(messenger, 요 13:16), ‘선교사들’(missonaries), ‘대리자들’(representatives), ‘전권대사(ambassador, 엡 6:20)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본문에는 특별하고도 협의적(狹義的)인 의미로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권(全權)을 위임받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된 특사, 또는 새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 확장에 선도적 역할을 감당할 예수의 증인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사도직’의 조건에 대해서는 행 1:21, 22에 규정하고 있는데 (1) 요한의 침례로부터 예수 승천시까지 예수와 동행한 자(행 1:21), (2)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자(행 1:22, 막 3:14), (3) 예수의 부활을 목격, 증언할 자(행 1:22) 등이다 <막 3:13-19, ‘사도직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사도’라는 용어는 예수 부활 이후에 좀더 광의적(廣義的) 의미로 사용되어 단지 12제자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수많은 전도자들(고전 9:1-5, 15:7, 갈 1:17), 바울과 바나바(행 14:4, 14, 갈 1:1),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 16:7), 실루아노(살전 1:1, 6), 예수의 형제들(갈 1:19)등에게도 지칭되었다. 여하튼 본문이 의미하는 바대로 좁은 뜻으로서의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 12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훗날 주님을 배반함으로써 여기서 탈락되며 그 자리는 맛디아로 대신 채워진다(행 1:26). 그리고 바울은 물론 넓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의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고전 15:8-10)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좁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할 수 있다(롬 1:, 1, 갈 1:1). 한편 본 절 이하에 제시된 12제자의 이름들에 대한 각 복음서간의 비교 도표에 대해서는 본 절의 강해를 참조하라.


베드로라 하는 시몬

먼저 히브리어로 ‘듣다’는 뜻인 ‘시몬’(Simon)은 ‘시므온’(Simeon)의 단축형 명칭으로서(창 29:33) 베드로의 본명이다. 이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는 요나의 아들들이자 어부 출신들로서(4:18-20) 갈릴리 벳새다의 토박이였다(요 1:44). 또한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침례 요한의 제자였던 것 같다(요 1:35-42). 한편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아람어로 ‘게바’(Cephas)라는 새이름을 지어주셨는데(16:18, 요 1:42, 갈 1:18),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가 된다(요 1:44). 향후(向後) ‘베드로’라는 이름은 사도로서의 공적 지위를 암시하는 이름으로 대부분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가 제자 명단에서 늘 첫째를 차지한 것은 (1) 다른 제자들에 우선한 그의 신앙 고백(16:16), (2) 예수의 예언적 인준, (3)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한 교회 창설의 주역(행 2:14), (4) 이방인에 대한 최초 선교자(행 10장) 등의 이유로 인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와 사명의 대표성이나 우선성을 말한 것이지, 그의 인격이나 지위의 선천적 탁월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여하튼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중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신실히 감당하게 된다(행 2:15 ff, 고전 15:5). 그러나 이것이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베드로의 수장적(首長的) 권위나 법왕권을 뒷받침해 주지는 못한다(갈 2:11, 벧전 5:1). 실로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던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신실한 예수의 증인으로 변화되어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존재로 활약했다. 한편 성경에서는 예루살렘 공의회(행 15장)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나 전설에 의하면 바벨론까지 선교 활동을 하다가 말년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려 순교했다고 전한다.


안드레

이름의 뜻이 ‘용감한 자’, ‘남자’ 등인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요 어부 출신으로서 성경에는 그렇게 두각(頭角)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막 13:3, 요 1:35-44, 6:8, 12:22). 특히 그의 활동중 두드러진 것은 그가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했다는 사실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구디아, 헬라, 소아시아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A.D. 70년경 파트라에서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야고보, 요한

‘발꿈치를 잡다’(창 25:26),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다’가 각각의 이름의 뜻이다. 이들은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께 각별히 인정받던 3대 제자에 속하였다. 한편 대부분의 기록에서 요한 보다 야고보가 항상 먼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사도들 중 최초로 순교함으로써(행 12:2, A.D. 44년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참수당함) 그의 형제 요한 만큼의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두 사람은 어부 출신이자 세베대의 아들들이었는데, 세베대는 삯꾼을 둘만큼 부자였으며(막 1:20), 그 아내는 예수의 사역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27:55, 56, 눅 8:3). 그런제 12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나, 또한 그의 가족이 대제사장 집안과 어떤 연계가 있었던 것은(요 18:15, 16) 아마도 세베대의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이어받은 듯한데 그들이 예수께로부터 받은 ‘우레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은(막 3:17, 9:38-41, 눅 9:54-56) 그 별명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들의 불같은 기질(氣質)을 반영해 준다. 여하튼 요한은 베드로와 각별한 우애를 다진 가운데 초대 교회의 한 모퉁이 돌로서의 사역을 감당했으며(눅 22:8, 요 18:15, 20:2-8, 행 3:1-4, 8:14, 갈 2:9),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도 에베소에 정착하여 선교, 교육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한편 그는 A.D. 95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때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해 넬바 황제때 에베소에 돌아와 지속적인 복음 사역을 감당하다가 트라얀 황제 때에 영면(永眠)함으로써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하여 폴리캅(Polycarp), 파피아스(Papias), 익나티우스(Ignatius)등과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등 초대 교회의 인재 양성에 남다른 공헌을 했다고 한다.



3절, 강해 주석 해설


빌립(필리포스)

순수한 헬라명으로 그 뜻은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도 역시 침례 요한을 떠나 예수를 따랐으며(요 6:5-7, 12:21, 22, 14:8-14) 베드로와 같은 고향인 벱새다 출신이다(요 1:44). 그는 주로 헬라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한(요 12:20-22) 것으로 보아 적어도 헬라의 언어와 문화에 일가견(一家見)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다른 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12제자 명단 중 제 2그룹의 첫 번째에 언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렇게 두드러진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A.D. 2세기 감독인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빌립이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에서 사역하다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바돌로매

히브리 이름으로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이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인 ‘나다나엘’과 동일시 되고 있다(Carr, Ewald, Meyer). (1) 나다나엘은 12제자와 관련 있는 인물로 나타난다(요 1:43-51, 21:2). (2)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데려왔다(요 1:43-46). (3) 사도들의 명단들에서 빌립과 바돌로매가 항상 연결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증거가 확실한 것이 아닐지라도 만일 바돌로매가 곧 나다나엘이라 한다면 그는 적어도 가나 출신이며(요 21:2), 예수께 칭찬받은 자임을 알 수 있다(요 1:47). 한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애굽, 인도, 알마니아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도마

도마는 ‘디두모’(Didymus, 요 11:16, 21:2)라고 불리우는데 디두모는 아람어로서 ‘쌍둥이’(Twins)를 의미한다. 실로 그는 회의론적 신앙인의 대명사로 통할만큼 의심이 많았지만, 그와 더불어 용기있고(요 11:16), 바른 신앙 고백자로도(요 20:28) 널리 알려졌다. 어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와 파르티아에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성 도마 교회’가 인도에 현존) 그곳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세리 마태(말다이오스 호 텔로네스)

그의 본명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야코보스 호 알파이우)

그는 ‘작은 야고보’로 불리어지는 자로서(막 15:40)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된다. 한편 ‘작은 야고보’라는 별명에 대해 학자들간에는 ‘몸이 왜소한 야고보’, ‘동생 야고보’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희박하다. 그러나 그가 만일 27:56, 막 16:1, 눅 24:10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본다면 적어도 그의 어머니는 예수의 어머니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와 자매지간인 ‘마리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때 다른 여인들과 그곳에 가까이 가 슬퍼했던 여인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요 19:25에 언급된 글로바와 동일 인물로 보고, 그가 곧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친족이라 보기도 한다(Eusebius).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명확히 확증지을 수는 없는 내용들이다.


다대오(닫다이오스)

베자 사본에 따르면 ‘다대오’란 이름대신 ‘여자의 마음’이란 뜻인 ‘렙바이오스’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대표적인 사본들(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 Western)에는 본문과 같이 ‘다대오’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본서와 마가의 명단에 언급된 ‘다대오’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명단과 비교했을 때 그곳에 나온 ‘야고보의 형제(아들) 유다’ (유다스 야코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형제(아들)’라는 말이 없어 설왕 설래하고 있다. 그런데 유다서의 저자가 자신이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유 1:1), 만약 유다서 저자인 유다가 사도인 ‘야고보의 유다’와 동일 인물이라면 이는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된다. 반면에 혹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가 예수의 이복 형제이며 동시에 예수의 이복 형제인 야고보의 친 형제라면 ‘야고보의 유다’는 곧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된다. 한편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the beloved)를 의미하는 어근(語根)으로부터 유래하였다. 따라서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 유다’ 즉 ‘유다 다대오’로 불리어졌을 것이며, 결국 이 명칭은 ‘가룟이 아닌 유다’(요 14:22)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일대기를 기술한 외경 ‘다대오전’에는 그가 시리아, 알마니아 등지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4절, 강해 주석 해설


가나안인 시몬(시몬 호 카나나이오스)

‘가나안인’은 아람어로서 헬라식 표기로는 ‘젤로테스’인데, 이 둘은 모두 ‘열심가, 열심당원’이라는 의미이다(눅 6:15, 행 1:13). 이로 보건대 그는 제자로 부름받기 전 유대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인 정치 단체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이었음이 확실하다. 한편 셀롯당은 가다라 출신 유다가 A.D. 6년 구레뇨 총독의 국세 조사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과격한 집단으로서, 예루살렘 패망의 불씨를 당긴 유대 전쟁(Jewish War)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 당시에는 그 활동이 대단치는 않았던 것 같다.


가룟 유다(유다스 호 이스카리오테스)

이 가룟 유다의 아비는 ‘가룟 시몬’(Simon Iscariot)이다(요 6:71, 13:26). 한편 ‘가룟’이라는 이름에 대해 여러 학설이 소개되고 있다. (1) ‘케리옷 출신 사람’(man of Kerioth)이라고 보고, 남쪽 유다의 한 지역인 가룟이라는 동네에서 그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2) 가룟은 열심당원들의 운동(movement)과 유사한 운동을 의미하는데 사용된 라틴어인 ‘시카리우스’(sicarius)의 음역이라는 설명이 있다. (3) 가룟은 ‘여리고의 사람’(man of Jericho)을 뜻한다는 설이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헬라어와 와전(訛傳)을 근거로 한 설명이다. (4) 가룟은 ‘거짓’(falsehood). ‘배신’(betrayal)을 뜻하는 아람어의 음역이라는 설이 있다(C.C. Torrey). (5) ‘가룟 유다’는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 ‘염색공 유다’(Judas of the dyer)라는 견해가 있다(A. Ehrman), (6) 다섯 번째 견해를 약간 수정하여 ‘머리가 빨간 유다’(Judas the redhead)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Albright). 이중 두 번째 견해가 일반적이기는 하나 첫 번째와 여섯 번째 견해도 주의를 귀기울일만하다. 여하튼 이 유다는 12제자 중 회계를 맡고 있었으나 지나친 물욕(物慾)으로 인해 정직하지 못하였고(요 12:6, 13:29), 그 결과 그는 스승인 예수를 완악한 대제사장들의 손에 넘겨 주는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5절, 강해 주석 해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이는 문자적으로 ‘이방인의 길을 통해서 떠나지 말라’이다. 이것은 결국 ‘이방인을 향해서 가지 말라’(Do not go in the direction of the Gentiles)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마 28:19)라고 명령하셨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을까?

이 장면은 예수의 초기 사역시 열두 제자를 두 명씩 파송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마가(6:7-13)와 누가(9:1-6)도 열두제자 파송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마태보다 간단히 취급하고 있다. 오직 마태만이 이방인의 고을에 들어가지 말라는 아주 배타적인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그들에게 이방인에게로 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예수께서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말씀하셨으며, 가버나움의 백부방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1-12)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도록 거듭거듭 당부하신 바 있으며(마 28:19-20, 행 1:8), 스스로도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하셨다(요 4장).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라는 이 명령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겠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첫째로,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의 파견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천국에 관한 복음을 듣기에 이미 준비된 사람들에게 전도 활동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짧은 기간에 그들은 이방인 지역은 물론 유대인들에게도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제자들은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만한 마음의 준비다 되어있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 번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자 하늘에서 볼이 떨어져 그들을 멸하기를 청하여 예수의 책망을 받은 일도 있었다(눅 9:52-54).

셋째로, 구속사적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이 먼저 이스라엘로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에 퍼져 나가야 하였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언약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백성이기 때문이다(롬 3:1-2).

이스라엘에 복음이 어느 정도 전파되자 복음은 땅 끝까지 펴져 나가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찾아온 헬라인들을 만나신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그들을 만나신 다음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요 12:24). 말씀 그대로 십자가 이후에 복음은 불길처럼 전 세계로 퍼져 나가 많은 열매를 맺었다.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사마리아는 가나안 정복 당시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게 분할되었던 지역으로서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이곳은 솔로몬 통치 이후 여로보암 때로부터 시작하여 앗수르의 살만에셀에 의해 패망할 때까지(왕하 17:1-6, B.C. 722) 북(北)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그런데 정복자 살만에셀은 피지배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북(北) 이스라엘인을 포로로 끌고 가는 한편, 이민족(異民族)을 이곳에 대거 이주시켜 나머지 북(北) 이스라엘인과 통혼하게 함으로써 민족을 혼혈화시켰다(왕하 17:24). 그 결과 사마리아는 혈통과 문화와 종교에서까지 선민으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히브리 공동체에 끼이지 못하였으며, 포로기 이후 산발랏과 므낫세를 중심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건축하였다(느 13:28). 이 성전은 B.C. 109년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그곳을 성지(聖地)로 삼아 모세 오경을 근간으로 독특한 종교생활을 영위해 왔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합 족속이라고 경멸하였고 그들과의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의 직통거리인 이 지역을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왕래하곤 하였다.



6절, 강해 주석 해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는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Stendahl). 구약적 배경에서(레 50:6, 겔 34장) 이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Hill). 예수는 이들 유대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다가 생명과 진리가 결여된 딴 길로 가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였다(9:36). 그런데 이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고 또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하여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이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역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롬 1:16, 2:9)라는 선교 원칙을 준수하였다.



7절, 강해 주석 해설


가면서 전파하여

이는 여행 중에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여행하고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잃어버린 영혼들을 만나게 되므로 그 순간마다 그들에게 예수와 그의 구원의 능력을 선언해야 한다. 한편 ‘전파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뤼쏘’ 은 공적 차원에서 ‘널리 전하다’, ‘선포하다’는 뜻으로서 마치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포고문(布告文)같이 긴박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선포의 내용’(케뤼그마)은 곧 주의 나라의 기습적인 도래였다. 제자들이 선포해야 할 이 선언의 말씀은 침례 요한이 전파한 것이기도 하며(3:2), 또한 예수께서 친히 전파하신 말씀이기도 하다(4:17). 실로 유대인들은 바로 이 천국의 제 1차적 상속자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도래했으나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천국이 지체하지 않고 구현될것이기 때문에 이 천국을 준비해야만 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들의 상속권은 이방 세계로 넘겨질 것이다(Quesnel).



8절, 강해 주석 해설


병든 자를 고치며 … 귀신을 쫓아내되

이는 천국 도래를 실증적으로 확인시키는 네가지 이적으로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능력에 해당한다(1절). 한편 이 네 종류의 이적을 구분하면 (1) 신체적 치유(병든 자), (2) 존재론적 치유(죽은 자), (3) 종교.의식적 치유(나병 환자), (4) 영적.정신적 치유(귀신들린 자)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결국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능(1절)은 결함이 전혀 없는 전인격적이고도 완전한 능력이었다. 한편 ‘죽은 자를 살리라’는 이 명령은 대부분의 주요 사본들(시내, 바티칸,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나 레기우스 사본 같은 2류 사본에는 1절 내용과의 조화를 위해 누락시키고 있다. 여하튼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 부활 이전에 죽은자를 살린 일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라는 권능의 명령을 예수 부활 이후에 전개될 제자들의 사명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행 9:36-41).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의 원뜻은 ‘선물로 받았으니 값을 받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가 지켜야 할 대단히 주요한 원칙이다. 사실 복음 사역자들이 받은 복음과 권능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받은 것을 전하는 것으로 최상의 만족을 삼아야 했다. 사실 사역자는 재산을 모으거나 큰 돈을 벌기 위해 복음을 전파해서는 안되며 또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타인에게 봉사하고서 그 대가를 요구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사역자가 굶주려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일군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10절)은 마땅하지만 본문의 이 말씀은 거저 받은 복음의 권능을 사리 사욕(私利私慾)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며 오직 은혜로 받은 것을 은혜로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9절, 강해 주석 해설


전대에

이는 돈을 넣어 품속이나 허리춤에 넣고 다니는 돈주머니를 말한다. 이 전대는 의복의 일부로서 귀중한 것을 휴대하기 편하도록 만든 일종의 지갑과 같은 것이다.


금, 은, 동

로마나 헬라의 화폐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화폐 가치가 적은 헤롯의 화폐는 동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들은 모두 돈을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가지지 말고

돈을 소유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전도 파송을 앞둔 주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수적이고도 한시적인 선교 방법이었다(눅 22:35, 3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복음 사역자는 돈을 탐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돈을 탐하여 마음에 두게 되면 죄의 유혹을 받게 되며 따라서 악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에(딤전 6:10) 복음 사역자는 이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보내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당연히 그 보냄받는 자를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부족함없이 주시리라는 것 또한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이 명령은 물질적 욕구의 절제를 명한 것인 동시에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풍성한 후원을 약속한 내용임에 틀림없다.



10절, 강해 주석 해설


주머니

이것은 음식이나 식량을 가지고 다닐 때 쓰이는 것으로서 가죽이나 결이 거친 천으로 만들어졌다. 제자들은 여행하는 도중에 식량 공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음식을 저장하기 위한 이런 주머니는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두 벌 옷

여행할 때는 반드시 갈아 입을 옷이 하나 더 필요하다. 더욱이 밤낮의 기온 차이가 심판 팔레스타인을 순회 전도해야 하는 제자들이 밖에서 밤을 지내야 할 경우에 입고 있는 옷 외의 다른 한 벌의 옷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하지만 주의 뜨거운 사랑의 후원을 받을 제자들에게 있어 ‘여분의 옷’은 분명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5:40).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그 당시 맨발로 다니는 것은 유대 전통에 이해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신발 착용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명령은 지금 신고 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것을 준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부분을 ‘지팡이 외에는 …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막 6:8, 9)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은 마치 서로 모순(矛盾)되어 보이는 것 같으나, 마가는 여행을 위해 제자들이 이미 여행할 차비를 마친 상태에서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준비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저 먹을 것 받는 것

이 어구는 제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병고침을 받은 자들이 제자들의 생필품들을 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즉 피전도자는 받은바 영적 은혜의 감사 표시로 전도자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줄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A.D. 100-120년 경에 기록된 ‘12사도훈’(Didache)에는 ‘여러분에게 온 주의 사도는 주님처럼 환영해야 합니다. 만약 그 사도가 3일을 머물고자 한다면 그는 거짓 사도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나고자 할 때 여러분은 그가 다음 거처에 이를 때까지 필요한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돈을 요구하게 되면 그 자신이 스스로 거짓 사도임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녕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물질적인 요소들이 결코 사역자들의 일을 방해할 수 없으며 두벌 옷이나 전대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역자들이 아무런 어려움이나 불편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야한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일꾼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열매를 허락하신다(고전 9:14, 갈 6:6, 딤전 5:17, 18). 그러므로 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한 선한 일꾼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일한 대가를 얻을 수 있다(Clement of Rome).



11절, 강해 주석 해설


성이나 촌에

여기서 먼저 ‘성’(포리스)이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달한 큰 도시를 의미하고, 이에 비해 ‘촌’(코메)은 자연 발생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을 뜻한다. 이는 예수 제자들의 선교 대상지가 어떤 특정한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기독교가 처음 시작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모든 복음 사역자들이 방랑자들처럼 떠돌아 다니며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이 구절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합당한 자

이는 천국 메시지에 영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자(Homer A. Kent, Jr.)로서 복음 전파자들을 친절히 맞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있으며 복음을 받아들일 만한 순결한 영혼을 갖춘 자를 말한다. 이와 더불어 윤리적으로도 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자로도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의 사역자들은 자기가 머문 그곳을 기점으로 그 온 동네를 복음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경건하며 건강한 생활을 하는 자들의 집에 머물러야 했던 것 같다.


떠나기까지 … 머물라

누가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눅 10:7)는 말을 하고 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는 것은 한 집으로 만족하지 않는 듯이 보이며 또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게 되어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게 되어 결국에는 복음사역의 가치를 떨어뜨려 복음 전파에 막중한 지장을 초래(招來)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12절, 강해 주석 해설


평안하기를 빌라(아스파사스데 아우텐)

직역하면 단순히 ‘인사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은 ‘샬롬’, 곧 ‘평화’이다. 실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소개하는 자들의 첫마디 인사가 ‘평화’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편 이 ‘샬롬’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평화 관계에서 비롯되는 영육 간의 모든 축복을 포함한다. 그런데 그 당시 헬라 사람들의 인사말은 주로 ‘카이레인’(기쁨, 은혜)이었다. 바울 서신서에는 이 양자를 모두 합한 인사, 즉 은혜와 평강을 동시에 묻는 인사말이 자주 등장한다(롬 1:7, 고전 1:3). 여하튼 주께서 이처럼 들어가는 그 집의 평안을 빌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일상적인 경의를 표하고 또 그들을 정중하게 대하라는 명령이었던 것 같다. 복음 전파자라고 해서 사회 일상의 통념을 무시하고 무례한 행위를 할 권한은 없는 것이며 오히려 일반 사회인들보다 더욱 예절과 상식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13절, 강해 주석 해설


그 집이

이는 가정이나 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12절의 집과 같은 대상이다. 따라서 이 집은 복음 전도자가 머물러 유하기에 적절한 가정을 뜻하며 이 집의 가장(家長)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된 자이어야 한다.


합당하면

이는 그 집이 복음 전파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기꺼이 받아들임을 가리킨다.


거기 임할 것이요

제자들은 평안의 인사나 기도 또는 가르침 등을 통해 그 집에 행복과 번영 그리고 화평이 임하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복음의 축복이 그들에게 부여되기를 기원(prayer)하였다. 그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가르침에 순종할 때면 제자들이 한 평화의 기도는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순종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관건(關鍵)인 것이다.


합당치 아니하면

이 말은 제자들이 머물러 유할 집이 복음을 기꺼워하지 않거나 또는 제자들이나 복음에 대해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다윗은 원수들이 병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한 바 있는데 이때 그의 기도가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자기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노래하였다(시 35:13). 제자들이 만나는 이에게 평안을 빌고 복음을 전할 때 만약 그들이 그 평안과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그 평안과 복음을 통해 유익을 얻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이 복을 빈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이 빈 평안과 축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누구에게인가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족장 시대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이미 말하여진 선한 축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동적인 생명체로 존재하여 결코 사장(死藏)될수 없고 그 성취의 순간까지 지속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활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믿어져왔다(창 27:33 ff, 사 45:23, 55:11). 따라서 누구든 타인의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는데 주저하거나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실로 타인의 평안을 원하지 않는 자는 주(主)의 제자되기에 적합치 않은 자이다.



14절, 강해 주석 해설


영접도 … 아니하거든

예수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축복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복음을 거절하는 것으로 저주를 자초(自招)하는 것이다. 진정 제자들은 예수를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물 한모금 주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를 떠나보내게 하는 것이며, 그들을 기쁘게 영접하는 것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25:40). 실로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입술과 인격을 통해 복 주기 원하신다. 그런데 그들이 복의 근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통로로 복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이는 상대와의 관계 단절과 의식적 정결례를 상징하는 행위이다(느 5:13, 행 18:6).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문물(文物) 뿐만 아니라 먼지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들이 이방인 지역에 갔다가 유대땅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그들의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써 의식적 청결을 유지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의 제자를 영접치 않고 또 복음을 듣지도 않는 자들을 향한 이 먼지 떠는 행위는 그들이 참으로 구원의 복음과 무관한 자들로서 이교(異敎)적이고, 심히 부패해 있으며, 끝내 심판에 처해질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사 1:9, 눅 17:29, 벧후 2:6). 비시디아 안디옥을 전도하던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바로 이같은 상징적 행위를 한 적이 있다(행 13:51).



15절, 강해 주석 해설


내가 진실로

예수께서는 이런 형식으로 당신의 교훈의 각 마디를 종결 지으시며, 또한 주의를 환기시키셨다(23, 42절).


심판 날에

여기서 심판 날은 복음과 그 사역자들을 배척한 자들이 맞을 멸망의 순간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최후의 심판 날을 가리킨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악독한 범죄로 인해 아브라함 당시 여호와가 보내신 불과 유황에 의해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으며(창 19장), 그 이후부터 모든 부패와 최후 심판의 대명사가 되었다(신 29:23, 사 1:9, 3:9, 렘 50:40, 유 1:7).


견디기 쉬우리라

앞에 언급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배척함과 동시에 그들의 사역을 방해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보다는 약한, 단지 예시적(豫示的) 기능을 할 뿐이다.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한 죄가 이처럼 무서운 것이라면 복음 그 자체를 배척한 자들의 심판(11:20, 눅 12:47) 또 얼마나 무서운것이 되겠는가? 이처럼 복음은 결과론적인 이중성을 띠고 있다. 즉 복음이 선포된 후에는 영생과 축복, 아니면 무서운 저주와 심판이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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