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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장 31절-37절, 성령 모독죄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정리

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12장 31절부터 37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사탄의 것으로 바꾸어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은 성령을 모독한 자들이라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본문의 강해와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1절-37절, 성령 모독죄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마태복음 12장 31절-37절, 성령 모독죄



31절, 강해 주석 해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 구절의 난제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해진 죄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성령을 모독(또는 훼방)하는 것 또는 성령을 말로 거역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그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는가? 다른 모든 죄와 모독이 사함을 받을 수 있는데, 왜 그 한 가지 죄만은 용서받을 수 없는가? 왜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로 거역하는 것보다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더 치명적인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갈등

예수께서 무엇에 관해, 누구에게, 어떤 상황 가운데서 말씀하셨는지를 알기 위해 본문의 문맥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마태복음 12장(참조 막 3:28, 29, 눅 12:10)에 나온 이 본문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마태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여긴 것 곧 안식일에 이삭을 따서 먹는 것에 대해 예수께 도전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마 12:2).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한편 손 마른 자를 치유하신다. 또다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예수를 비난하고, 그 사건이 끝나가는 무렵에 그들이 나가서 예수를 어떻게 죽일지 의논한다(10, 14절). 그런 후 예수께서는 물러나 자기를 따르는 무리 중에 있는 모든 병든 자를 고쳐주시면서, 당신의 치유행위를 알림으로써 불필요하게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를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15-16절).

그러나 귀신 들려 눈멀고 귀먹은 사람을 예수께 데려와 치유함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놀라서, 마음에 두지 않고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터놓고 말했다(22, 23절). 그들이 던진 이 수사학적 질문은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라는 증거를 나타내 보이고 있음을 암시하였다. 이 소문이 바리새인들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비꼬았다(24절). 그들은 그 기적을 부인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것을 귀신의 능력으로 돌리려 했다(참조 막 3:30). 예수께서는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설수 없는 것에 빗대어 그 말은 맞지 않다고 응수했다(25, 26절).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귀신을 쫒아낸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돌렸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중에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으나 그들은 그것을 부인했다. 예수께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30절)라고 밝히 말씀하셨다.


성령의 역사

예수와 바리새인들 간에 갈등하는 것이 그분이 본문의 말씀을 선포하신 배경이다. 헬라어로는 이 말씀이 ‘디아 투토’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데, “이런 이유로”, “이 때문에”라는 의미이다.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에 철저하게 반항하는 것의 위험에 대해 그분이 그들에게 이토록 분명하고 강하게 표현할 필요를 느낀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대담하고 고집스런 반대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귀신을 힘입은 것으로 여김으로써 예수님의 봉사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고 있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요 16:8). 성령의 역사에 고집스럽게 저항하면, 구원과 관련된 이 중요한 것들에 대해 더 이상 찔림이 없게 된다. 성령은 예수를 믿지 않을 때 죄를 책망한다(요 16:9). 바리새인들은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주어졌는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며, 그분의 감화력을 소멸하고 심지어는 그분을 제거할 온갖 기회를 찾아다녔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삶에 미치는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을 완악케 하여 그분의 책망하시는 음성을 듣지 않았고, 그렇게 하여 점점 그 음성에 무감각하게 되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고 그분께서 점진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책망에 반응하면서 동시에 말로 성령을 거역하기는 어렵다.

이와 유사한 경험이 디모데전서 4:2에서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 곧 성령의 촉구하심에 무감각하게 된 자들로 묘사된다. 히브리서 6:4-6에, 성령의 은사를 받고 비추임을 받은 후에 진리에서 돌이키는 것에 대해 매우 무서운 경고가 주어져 있다. 마태복음 19:26에서 예수님이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고 가르쳤을지라도 그러한 사람들은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해지는데, 그것은 그들이 온전한 지식이 있는데도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공개적으로 욕을 보이는 지경에까지 고집스럽게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가 의미하는 바다.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의 성격

마태복음 12:31, 32에 언급된 죄는 부주의나 무지나 단순한 불신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역사에 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집요하고 대담하게 거절하는 것이며, 그것을 악한 것으로까지 말하고 마음에 미치는 성령의 역사에 저항하는 것을 가리킨다. 말로 예수를 거역하는 것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죄이지만(마 12:32), 죄에 대해 책망하시는 사역을 하시는 분을 집요하게 거역하는 것에 대하여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는 고백하지 않고 용서 받기를 거절하는 죄이다. 어떤 사람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지 염려한다면 그 염려 자체가 성령께서 그 마음에 가책을 주시고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데, 이미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것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호소가 여기에 적절하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3:7-8)



32절, 강해 주석 해설


누구든지 말로

앞 구절에서 나온 바와 같이 ‘모독’, 곧 ‘블라스페미아’는 의지적 범죄로서 특별히 ‘말’에 의한 성령이 가르침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사실 ‘말’이란 인간 내면을 외부로 표출(表出)시키는 통로로서 ‘말에 의한 모독’은, 곧 전인격적 모독을 암시한다(24절).


인자를 거역하면 … 성령을 거역하면

성경은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다(요일 1:9). 그런데 본 절에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로 하였다. 그럼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바클레이(W. Barclay)를 비롯한 상당수의 학자들은 여기의 ‘인자’를 단순히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이해하여 말로 사람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지만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께서 ‘인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예외 없이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인자는 예수 자신을 의미한다.

스텐달(K. Stendahl)이나 보링(M. E. Boring) 같은 학자들은, 인자를 거역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이요, 성령을 거역하는 자들은 성령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불신자들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사함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체험한 후에 거역하는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도 죄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우선 말로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본 절은 바로 앞 절(12:31)의 대구가 되기 때문에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복음의 내용이 인자이기 때문에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복음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자를 거역하는 죄, 복음을 거절하는 죄까지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를 받지 못하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기에 그분을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게 되는가? 성령께서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려주신다(요 16:8). 그분은 사람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 따라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모든 영적 호소를 거절하고 진리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성령께서 주시는, 회개하고 진리 가운데 거하라는 호소를 거듭 거듭 거역하여 마침내 마음이 굳어져서 더 이상 성령의 호소에 반응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그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자리에 스스로를 둔 것이다.


거역하면[헬, 카타]

반적인 의미로서 무엇을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성령의 모든 사역과 그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을 통한 모독의 행위는 이 거역 중에 한 부분에 속한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이 말을 단지 관용적 표현으로 취급하여 결단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Plummer). 한편 ‘세상’의 뜻인 헬라어 ‘아이온’은 ‘세대’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이 세대’, 즉 구약의 유대인 세대(율법시대)로, ‘오는 세상’은 ‘오는 세대’, 즉 신약의 그리스도인 세대(은혜시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Clarke). 그러나 대체로 현존(現存)하는 세상과 예수의 재림으로 이뤄질 미래의 영원한 세계라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Calvin). 한편 유대인들은 전 역사를 메시아 이전과 이후 세계로 양분하여 생각하고 있다(에스라드마 2서 5:47,50). 그리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오는 세상에서의 사하심’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 ‘오는 세상’을 현 세상과 마지막 세상 사이의 중간 기간으로 이해 함으로써 이 구절을 그들의 연옥(purgatory)설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하고, 즉 회개치 않고 죽은 불신앙인도 세상 끝날에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강림이 그분의 미래적 강림(파루시아)의 기초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미래에 다가오는 세상의 역사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죄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신 것은 바로 성령 모독의 죄를 범한 사람은 영원히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위치, 즉 마귀들과 같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33절, 강해 주석 해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열매에 의한 나무 판단의 교훈은 이미 7:17, 18에서 본 바 있다. 한편 본문을 이중적 구조로 이해하여 첫 번째 등장하는 나무와 살과를 성령을 힘 입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치유에 의한 선한 결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등장하는 나무와 실과를 스스로 악히기(나무) 때문에 성령을 훼방하는 말(열매)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바리새인들의 행각(行脚)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Alford). 실로 나무는 필연적 인과(因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좋으면 둘다 좋고 나쁘면 둘 다 나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내고 정의를 외치는 예수의 실과(fruit)는 결국 그 근본 나무가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너무도 분명한 예수의 실과를 부인하지 못하였으니까 대신 예수의 나무를 비방했는데, 그들의 허구성(虛構性)이 이제 논리로 격파당한 것이다. 예수는 근본과 결과를 모두 선한 교사이신 동시에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소개,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의 교사이기도 하셨다.



34절, 강해 주석 해설


독사의 자식들아

바리새인의 본성을 지적하시는 엄한 표현으로 침례 요한의 입을 통해서도 나온 말이다(3:7). 바리새인들은 예수 뿐 아니라 침례 요한을 가리켜서도 ‘귀신이 들렸다’(11:18)고 했는데 결국 그들은 예수와 침례 요한을 똑같이 정죄(condemnation)한 것이다. 그러나 침례 요한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그 바리새인들은 이제 열매를 맺지 않은 그들의 사악함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찍혀 불에 던지우게 되는 운명에 이르른 것이다(3:10). 그들은 종국(終局)에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고 말 사탄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본질과 외부로 표출된 현상이 동일할 수 밖에 없음을 강력히 암시하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들의 실체(독사의 자식)를 노출시킴으로써 그들의 악의적 모함(예수를 바알세불이라 한 것)의 거짓말을 확증하셨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인간 본성의 중심체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 ‘가득한’을 뜻하는 원어 ‘페리스슈마’은 충일(充溢)함’, ‘(식사의) 남은 찌꺼기’등의 뜻으로 비의지적이고, 체질적이며, 생산적인 넘침을 암시한다. 실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자연적이고 체질적으로 ‘말’ 또는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요구하는 것은 마음의 참된 변화였던 것이다.



35절, 강해 주석 해설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쌓을 선’을 새 번역에서는 ‘선한 마음의 곳간’으로, 공동번역에서는 ‘선한 마음을 쌓아 두었다가’로 표현하고 있다. 실로 마음이란 그 사람의 모든 사상과 생각과 의지와 도덕률의 총체적(總體的) 창고이다. 선악의 창고인 사람의 마음에서 선한 말 혹은 악한 말이 나오는데 선한 창고, 즉 착한 마음씨에서 사람들에게 좋고 유익한 말이, 악한 창고, 즉 악한 마음씨에서 사람들을 해롭게 하는 말들이 나온다. 결국 이 표현은 ‘그 실과로 나무를 알 수 있다’고(33절)하는 진리와 일맥상통한다.



36절, 강해 주석 해설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여기서 ‘무익한’(아르곤)이란 부정 접두어 ‘아’과 ‘공적’(功積), 또는 ‘일’을 뜻하는 ‘에르곤’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부주의한’, ‘쓸모없는’ 등을 뜻한다. 특히 본문에서 이 말은 ‘근거없는’(unfound, JB)이라는 의미보다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나타내지 않은 채 ‘무가치한, 무의미한’(insignficant, Stendahl, Peake) 말, 곧 생명력이 결여된 도덕적으로 무익한 말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 모든 말을 일일이 아신다.


심판 날에 … 심문을 받으리니

전우주적 종말이 이를 때, 곧 심판 날에(10:15) 심판주이신 예수께서는 각인의 사소한 행동까지, 특히 그 사람의 ‘무익한 말까지 심문하실 것이다(갈 6:7, 엡 6:8). 실로 인간의 현재적 언어 생활은 종말의 영욕(榮辱)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다(엡 5:3, 4, 골 3:17, 약 1:19, 3:1-12).



37절, 강해 주석 해설


네 말로 의롭다 … 정죄함을 받으리라

‘의롭다 함’과 ‘정죄함’의 기준은 선한 말을 하였느냐, 악한 말을 하였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서 말과 행위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선한 말을 할 수 있고 또 진정한 의미의 선행을 베풀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의 수준을 그 사람의 말하는 것에서 판단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의롭다하심, 정죄하심을 인간의 말에 의해서 판단하신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고이’은 단순한 음성으로서의 말이 아니라 발화자(發火者)의 의식과 내재적 지식을 담고 있는 언어라는 뜻이다. 이는 결국 심판 대상이 되는 말은 겉으로 드러난 입술만으로서의 화려한 말이 아니라 그 원칙적 동기인 속마음으로 부터의 말임을 알 수 있다. 실로 예수는 인간의 속깊은 생각을 익히 알고 계신다(22:18, 요 2:2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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