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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하 22장 1절-25절,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사무엘 하 22장 1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은, 다윗이 사울과 모든 대적들에게 환난을 당하던 때를 기억하고,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을 지키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내용입니다. 매일성경큐티와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22장 1절-25절



사무엘 하 22장 1절-25절, 주석과 해설 정리



1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께서 다윗을 … 구원하신 그 날에

혹자는 다윗 왕이 이 시(時)를 쓴 때를 다윗 왕의 말기로 보고 있다(Keil). 즉, 모든 주변의 이방 국가들을 물리치고 또한 압살롬과 세바의 난(15:7-12, 20:1, 2) 등 모든 반란을 진압한 후에 본 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시의 내적 증거로 볼 때, 본 시는 다윗의 통치 초기 즉 다윗 왕이 주변의 대적들을 정복한 이후에 곧 바로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먼저 본 시 44-46절의 내용을 들 수 있다. 이 구절은 다윗 왕이 아람의 동맹군을 물리쳤을 때, 하맛 왕 도이가 그 아들 요람을 보내어 조공을 바친 역사적인 사실을 노래하고 있다(8:9, 10). (2) 또한 본 시에는 다윗 왕의 말년을 어둡게 하였던 강간, 살인, 반란 등 수치와 슬픔의 어두운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21-25절에는 다윗이 자신의 삶에 대한 넘치는 열정과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 시가 수치와 슬픔으로 점철되었던 다윗 왕의 말기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등극 후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승승장구하던 초기에 쓰여진 것임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본 시가 다윗 왕의 통치 초기(B.C. 1010-B.C. 995?)에 쓰여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본 시는 ‘감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제의하고(7:1, 2) 하나님께서 다윗과 ‘다윗 언약’(7:4-16)을 체결할 당시 곧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전달한 직후(7:17)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Pulpit Commentary, 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아무튼 기쁨, 감사, 감격이 넘치는 본시의 흐름으로 보아 이 시는 다윗의 신앙이 가장 고조되었던 때에 지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한편, 본 구절은 본 시의 역사성과 그 배경 및 취지를 소개한 표제어(表題語)에 해당된다. 이 표제는 사울 왕의 핍박과 이방인들의 세력에서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찬송과 감사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제어는 출 15:1, 민 21:17, 신 31:30의 표제와 유사하다.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여기서 ‘모든 원수’란 말은 즉위 직후 다윗이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기하기 위해 간단없이 전쟁을 치렀던 이스라엘 주변의 많은 이방 국가들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블레셋을 비롯하여 아람, 모압, 암몬, 아말렉, 소바, 에돔 등을 가리킨다(8:1-14). 그리고 ‘사울의 손’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 왕 생전에 사울 왕으로부터 당했던 무서운 추격과 생명의 위협을 가리킨다(삼상 18:10, 11, 17, 25, 19:2, 9-12, 20:1, 3, 31, 21:10, 23:15, 19-26, 24:2, 26:2). 이처럼 다윗은 구체적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막연하고 피상적인 시어(詩語)가 아닌 현장감 넘치는 언어로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들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구원 역시 결코 미래에 국한된 막연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체험하고 확신한, 즉 삶에서 구체화된 실존적인 구원의 노래여야 할 것이다.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본 구절은 이 시가 다윗 자신의 저작임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시는 시편 18편에서도 소개되고 있는데, 시 18편과 내용면에서는 완전히 일치하며, 문체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마도 본 시는 다윗 왕의 원시(原詩)요, 시 18편은 그의 말년에 교정을 본 시이기 때문에 두 시(詩) 간에 문체의 차이가 생겨났을 것이다(Henstenberg, The Interpreter’s Bible). 진정 이 노래는 여호와의 구원의 손길을 현장에서 생생히 체험한 다윗의 시(詩)요, 이 노래는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신앙 송으로서, 노래를 되뇌일 때마다 살아 계셔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분명 구원 받은 자의 특권이다.



2절, 나의 반석 … 요새 … 건지시는 자시요


본 시의 전체적인 내용을 총괄적으로 집약하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서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등의 말들은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들이다. 특히 ‘반석’과 ‘요새’는 팔레스타인의 지형적 환경에서 따온 용어들이다. 우선 ‘반석’(rock)은 가파르고 접근하기 매우 까다로운 바위를 의미한다. 위기에 처한 용사들은 곧잘 이곳에 피하여 몸을 숨기곤 하였다(삼상 13:6). 다윗도 사울의 추격을 받을 당시에 이곳에 몸을 숨김으로써 위기를 넘기곤 하였다(삼상 22:5, 24:23). 또한 ‘요새’(fortress)는 가파른 바위에 둘러싸인 산 꼭대기를 의미하며,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이러한 요새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삿 6:2, 욥 39:27, 28, 사 33:16). 이 또한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았을 때 숨었던 피신처였다(삼상 23:14, 19). 이처럼 다윗은 역경과 환난의 때에 자기를 바위와 요새에 숨기어 위기를 넘기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반석과 요새에다 비유하여 묘사하고 있다. 한편 ‘나를 건지시는 자’(my deliverer)란 앞의 비유적인 두 단어(반석, 요새)를 실제적인 의미로 바꾸어 표현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Keil).



3절, 주석과 해설


나의 반석

여기서 ‘반석’은 2절의 ‘반석’(히, 셀라)가는 다른 용어로써,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추르’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견고성(堅固性)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용어가 최초로 하나님께 비유된 유래는 모세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반석’이라고 묘사한 데서 찾을 수 있다(신 32:4). 여기에서 ‘반석’의 의미는 쉽게 흩날리는 사막 지대의 모래 산과는 대조적으로, 항상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산의 견고성과 불변성을 의미하며, 또한 광야의 여행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은혜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즉, 본 구절의 반석은 2절의 반석과는 달리 아주 거대한 바위 덩어리(산 자체)를 의미하며, 따라서 웅대하고 움직이지 않는 힘을 상징한다(신 32:15, 31, 사 30:29). 다윗은 이러한 반석과 같으신 하나님께 피할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그의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하였다.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힘’인데, 이는 능력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 호칭이다(창 1:1, 롬 11:36).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방패’(shield)는 수비용 무기이며, ‘뿔’(horn)은 공격용 무기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 때로는 적의 공격을 방어해 주기도 하시며(창 15:1, 신 33:29, 시 3:4, 59:12), 때로는 적의 세력을 파(破)하는 공격도 감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삼상 2:1). 그러므로 ‘뿔’은 그러한 세찬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힘’, ‘능력’, ‘권세’를 상징하기도 하며(삼상 2:1, 10, 시 89:17, 24, 겔 29:21, 신 33:17, 미 4:13), 그러한 공격의 결과 얻어지는 ‘승리’, ‘구원’을 상징하기도 한다(눅 1:69, 신 33:17, 합 3:4).


나의 높은 망대시요

여기서 ‘높은 망대’(high tower, KJV; stronghold, NIV)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스갑’는 ‘높은, 안전한’이란 의미의 형용사 ‘사가브’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이는 적의 공격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높은 산성, 다시 말해서 안전한 장소를 뜻한다(시 33:5, 잠 18:11, 시 9:9, 18:2, 46:7, 11, 사 33:16).


나의 피난처시요

‘피난처’(refuge)는 사막 지대의 기후상 갑자기 몰아닥치는 모래 바람과 폭풍우 등을 만났을 때, 그러한 것들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큰 바위 밑이나 동굴 안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나 인생의 폭풍우를 만났을 때 우리가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 되심을 고백한 것이다.


나의 구원자시라 … 구원하셨도다

본 시에서는 ‘구원’(salvation)이라는 용어가 처음부터 마지막에 걸쳐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1, 4, 20, 47, 51절). 이같은 사실로 볼 때, 본 시는 다윗이 자기에게 구체적으로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는 시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4절, 여호와께 아뢰리니 … 구원을 받으리로다


여기서 ‘아뢴다’는 말은 여호와의 도움을 위해 ‘간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아뢰리니’와 ‘구원을 받으리로다’는 미완료형(未完了形, imperfect tense)으로서 계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지금까지 내가 여호와께 기도할 때마다 구원을 얻었고, 또한 앞으로 계속해서 기도할 때마다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로다’란 의미를 지닌다(Lange, Keil).



5절, 사망의 물결 … 불의의 창수


이러한 표현들은 자신을 삼키고자 마치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왔던 사울의 무서운 핍박과 다윗 초기에 있었던 숱한 전쟁의 위험을 상징한다. 여기서 ‘사망의 물결’이란 표현은 시 18편에서는 ‘사망의 줄’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불의의 창수’에서 ‘불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벨리야알’은 불의(不義)란 뜻 외에도 ‘무익한 것, 파괴, 파멸’이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 이 말은 파괴를 일삼는 사악하고 가치 없는 자에 의한 재난의 위기와 죽음의 위협을 의미한다.



6절, 스올의 줄 … 사망의 올무


다윗은 5절에서 자신에게 닥치는 위험을 성난 파도의 해일(海溢)로 묘사했다. 이어 본 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자 설치는 악인의 계교를 사냥꾼의 사냥(hunting)에 비유하고 있다. 즉 여기서 ‘줄’(히, 헤벧; trap, cord)이나 ‘올무’(히, 모케쉬; snares, trap, noose)는 사냥할 때 사냥꾼이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들은 마치 사냥꾼이 밧줄과 덫으로서 짐승을 사냥하듯 적의 갑작스런 공격과 간교한 속임수를 나타낸다(Keil). 여기서 다윗은 아마도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의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Lange). 그리고 다윗은 실제로 사울 왕의 추격을 사냥 행위에 비유하기도 했었다(삼상 24:14, 26:20). 한편, ‘스올’(창 37:35 주석 참조)는 죽은 자의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스올의 줄’이란 곧 사망의 줄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7절, 주석과 해설


아뢰며 … 아뢰었더니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카라’는 ‘부르짖다’는 뜻이다(시 34:6, 55:17, 118:5, 119:145, 146, 120:1, 렘 29:12, 31:6). 이는 곧 간절한 기도로서 하나님께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아뢴 후 주의 도우심을 간구했다는 의미이다. 즉 여기서 다윗은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구원자와의 긴밀한 교제를 묘사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엄하고 권위적이며 공의를 따라 철저히 다스리는 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간에는 결코 좁힐 수 없는 커다란 간격이 놓여있다고 대체로 믿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구체적 삶에 찾아 오셔서 그 형편과 처지에 따라 도움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임을 체험을 통해 간증했다(시 50:15, 59:10). 다윗이 이처럼 구약적인 한계를 떨쳐버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1)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2) 그분과의 개인적인 만남으로 인해 가능했다. 즉 기록된 율법서나 타인의 가르침에만 의존해서 하나님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기초하여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윗은 이처럼 인식할 수 있었다.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여기서 ‘성전’(히, 헤칼)이란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를 의미한다(Smith, Keil). 고대인들은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하늘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며, 따라서 인간의 참된 간구가 이 보좌에 상달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와 당신의 도움을 베푸는 것으로 이해하였다(시 11:4). 그러므로 여기 다윗의 노래도 이러한 개념에서 수사학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8절, 이에 땅이 진동하고 … 하늘의 기초가 … 흔들렸으니


이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셔서 시내 산 언약을 선포하셨을 때의 자연 현상과 비슷하다(출 19:16, 18).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윗의 대적을 멸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 일어나사 이 땅으로 강림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Keil, Lange). 즉,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대적들의 위협과 올무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현현(現顯)을 시적(詩的)으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강림하셨을 때, 실제로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적인 표현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구원의 손길을 박진감 있게 묘사한 시적 표현일 뿐이다. 한편 ‘지진’은 하나님의 진노의 강림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징조였다(욜 2:10, 11).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강림의 목적이 다윗의 대적을 진멸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 또한 여기서 ‘하늘의 기초’(’산들의 터’, 시 18:7)가 요동하고 흔들렸다고 하는 말은 전 우주의 떨림을 묘사한 말로서, 곧 대적을 멸하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 분연히 일어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운 실상을 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9절, 주석과 해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여기서 ‘코’ 또는 ‘입’과 같은 용어가 하나님께 적용된 것은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sm)적 표현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초이성적인 측면을 의인화시켜 이성적으로 묘사함으로 인간의 이해를 가능케 하는 문학적 표현 방법이다. 그리고 여기서 ‘연기’는 불이 나오기 이전의 단계이다. 즉 연기가 나온 다음 불이 타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 연기가 하나님의 코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묘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난 사람이 숨을 거칠게 쉬고 코를 씰룩거리며 콧김을 연발하듯이,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들에 대하여 분을 내심을 회화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신 32:22). 또한 연기에 이어 불이 솟아오른다. 이 불은 모든 사악한 원수들을 일거에 소멸시키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를 상징한다(신 32:22, 출 19:18).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이 구절을 정확히 번역하면 ‘그것에서부터(히, 밈멘누) 숯이 피워졌다’가 된다. 여기서 ‘그것’은 문맥상 ‘하나님의 입’이 틀림없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불이 어찌나 뜨겁든지 그것은 마치 불타오르는 난로나 가열된 용광로에서 꺼낸 숯불과도 같아서 모든 것을 순식간에 태워버리는 무서운 효력을 지녔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불이 모든 사악한 것을 태워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창 15:17). 한편, 혹자는 여기에서의 숯불을 빛을 번쩍이는 ‘번개’로 이해하였으나(R. Payne Smith), 연기와 숯의 상관 관계에서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리고 진노의 불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표현한 까닭은 아마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말씀이 그의 입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Lange).



10절, 주석과 해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이는 낮게 깔린 빽빽한 비구름을 묘사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임박성(臨迫性)을 나타낸다(시 144:5, 사 64:1). 여기서 ‘드리우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타’는 ‘기울이다, 숙이다’는 뜻으로서(삿 9:3, 16:30, 시 40:1, 잠 4:27, 시 102:11), 마치 하늘이 땅에 허리를 굽히고 접근하는 듯한 상태를 묘사함으로써, 시시각각 다가오는 심판의 임박성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이는 빽빽한 비구름으로 인해 땅 위에 깔려지는 짙은 흑암의 상태를 묘사한다. 이와 같은 흑암의 상태는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으로서,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가린다는 의미가 들어있다(출 19:16, 20:21, 신 4:11, 시 104:29, 나 1:3). 결국 이러한 흑암과 더불어 땅 위에 강림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악인들에게 있어서 곧 무서운 심판을 의미하므로, 큰 두려움에 휩싸일 수 밖에 없다. “실로 악인들은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볼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와 심판의 무시무시한 징조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J. H. Michaelis, Keil & Delitzsch).



11절, 주석과 해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그룹’(cherub)은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수종드는 천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본 구절에서의 그룹은 특별히 언약궤의 덮개 위에 있는 두 그룹을 의미한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 두 그룹 사이에 좌정하사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 25:20-22, 삼상 4:4, 시 80:2).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날으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보좌가 지상으로 이동하사 강림하셨다는 의미이며, 이렇게 볼 때 여기서의 그룹은 하나님의 보좌를 실어 나른 셈이 된다(Keil). 이런 의미에서 여기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날으신다는 표현은 그룹의 날개짓을 연상케 한다. 출 25:20에 보면, 언약궤를 덮었던 그룹들의 날개는 항상 나를 준비가 된, 높이 편 상태로 있었다.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이 역시 하나님의 강림을 묘사한 시적인 표현이다(시 104:3). 즉 바람의 빠른 성질을 이용하여 그것을 날개 삼아 지상으로 강림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한편 여기서 ‘나타나셨도다’란 말은 시 18:10에서는 ‘솟아오르셨도다’로 표현되었는데, 이 표현 역시 재빠르게 이동하여 강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2절, 주석과 해설


그가 흑암 …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이 구절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의 모습을 악인들에게서 감추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인들에 대해 분노하사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강림하실 때, 짙고 어두운 비구름이 마치 둘린 장막처럼 하나님을 에워싸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악인들은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은 볼 수 없게 되고, 대신 캄캄한 흑암만이 무서운 심판의 전조로서 그들에게 보여질 뿐이다.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

‘흑암’ 과 ‘모인 물’과 ‘빽빼한 구름’은 모두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들로서, 곧 ‘짙은 비구름’을 가리킨다. 즉 ‘짙은 비구름’은 ‘흑암’을 동반하며, 또한 그것은 ‘모인 물덩어리’와 같으며, 그것은 ‘빽빽한 구름’인 것이다. 한편 시 18:11에서는 ‘모인 물’ 대신에 ‘물의 흑암’이란 말로 표현했다. 역시 동일한 의미의 시적 표현이다.



13절, 그 앞에 있는 광채로 … 숯불이 피었도다


여기서 ‘광채’(brightnes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노가흐’는 ‘불꽃’, 또는 ‘섬광’(閃光)을 의미하는 말로서, 여기서는 빽빽한 구름 사이에서 번쩍이는 번개를 뜻한다(Keil, Smith). 따라서 이 말은 9절의 ‘불’과는 다른 의미의 말이다(Lange). 또한 ‘숯불이 피었다’는 말은 그 번개의 화염에서 불꽃이 튀어 나왔다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장면을 시적으로 생생히 묘사한 표현이다.



14절, 우렛소리를 내시며 … 음성을 내심이여


전형적인 시적(詩的) 병행 구절로서, ‘우렛소리’와 ‘음성’은 동일한 의미의 표현이다. 즉 히브리인들은 우렛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여기서는 악인에 대한 분노의 음성이기 때문에, 그 우렛소리는 더욱 무서울 수 밖에 없었다(욥 37:3, 출 9:23, 시 29:3, 46:7, 68:34, 77:18).



15절, 주석과 해설


화살을 날려 … 번개로

여기서 ‘화살’(arrow)은 ‘번개’(lightning)와 동의어이다. 고대인들은 번개를 하나님의 화살로 생각했다. 즉 하나님은 악인을 징벌할 때 번개 화살을 사용하여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시 7:13, 14, 38:3, 욥 6:4, 신 32:23, 애 3:12, 13).


무찌르셨도다

기본 동사 ‘하맘’은 ‘깨뜨리다, 혼란케 하다, 파괴하다’란 뜻으로, 이는 하나님께서 천둥, 지진, 번개 등을 동원하여 적을 기적적으로 쳐부술 때 사용된 표현이다(출 14:24, 23:27, 수 10:10, 삿 4:15, 삼상 7:10).



16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

여기서 ‘꾸지람’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우렛소리를(시 114:7), ‘콧김’은 하나님의 분노(9절)를 각각 상징한다.


물 밑이 드러나고 땅의 기초가 나타났도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역사로 말미암아 다윗이 창수(漲水)와 같은 대적들의 위협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내용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여기에서 ‘물’은 다윗을 핍박한 대적의 세력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리고 ‘물 밑’이나 ‘땅의 기초’는 바닷물이 무겁게 내리누르는 바다 밑바닥을 가리키며, 이는 상징적으로 다윗이 대적으로부터 받아온 압박감(壓迫感)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물의 세력, 곧 대적의 세력이 완전히 파멸되고, 다윗이 그 모든 환란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Delitzsch). 한편, 혹자는 ‘땅의 기초’를 ‘스올’이라고 보았으나(Keil, Hengstenberg) 본 구절의 문맥상 이는 이미 언급한 대로 다윗의 환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Lange).



17절, 주석과 해설


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손을 펼치신 것을 의미한다(시 144:7, Lange, Keil). 여기서 ‘위에서’라 함은 하나님의 초월성, 또는 지존성(至尊性)을 나타낸다. 즉,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 위로부터 강림하셨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지엄하신 강림으로 인해 자연계가 요동하고 악인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순간에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바라본 것이다. 곧 주위 사방에서 사나운 파도와 같이 대적의 세력이 밀려올 때에도 다윗은 그 신앙의 눈으로 위로부터 임하는 구원의 은총을 노래한 것이다.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여기서 ‘건져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솨’는 모세가 나일 강물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 사용된 용어이다(출 2:10). 그러므로 이 말에서 ‘모세’(’건짐을 받은 자’란 뜻)라는 이름이 파생되었다. 다윗은 여기서 ‘많은 물’로부터 건짐을 받은 자신의 구원을 나일 강물로부터 건짐 받은 모세의 경우에 비유하여 여호와의 크신 구원의 은총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Luther, Keil, Fay). 한편, 그리고 여기서 ‘많은 물’(히, 마임 라빔)은 ‘사망의 물결’ 또는 ‘불의의 창수’(5절)와 같은 죽음의 위험과 재앙을 가리킨다(시 32:6, 46:12, 69:2, 3, 사 43:2).



18절, 주석과 해설


강한 원수

여기서 ‘원수’는 단수형이다. 그러나 이 말이 오직 다윗의 하나의 원수, 곧 사울을 지칭한다고 말할 수 없고 오히려 다윗을 대적한 모든 원수들을 다 포함한 집합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Lange, Keil). 왜냐하면 곧 이어 나오는 동의어(미워하는 자들, 원문은 복수 형태의 분사임)나 지시대명사(그들은)가 모두 복수 형태로 나와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다윗은 사울 뿐만 아니라 그의 집권 초기에 그를 위협했던 주변 이방 국가의 강력한 정복자들로부터 자신을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다.


그들은 나보다 강했기 때문이로다

이 구절은 본 시에서 다윗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감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다윗은 철저하게 왕으로서의 자신의 탁월성과 위대성을 감추고, 오직 자신의 인간적인 연약성(軟弱性)과 무능력만을 드러냄으로써 원수들에 대한 자신의 승리와 성공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이 은혜의 법을 잘 깨닫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Hertzberg).



19절, 주석과 해설


나의 재앙의 날

이 날은 어느 특정한 한 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다윗이 대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큰 곤궁에 빠지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을 때를 말한다. 특히 사울의 추격을 받아 더 이상 피할 곳도, 그리고 도움을 바랄 수도 없게 되었을 때를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환란 중에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한 다윗의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의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안’은 ‘기대다, 의지하다’는 뜻의 동사 ‘솨안’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며, 이의 본래 뜻은 ‘지주’(支柱), ‘버팀목’이다(사 3:1, 시 18:19). 따라서 본 구절은 환자가 전적으로 버팀목에 의지하듯이 환란을 당한 다윗이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여 위로를 받는 모습을 묘사해 주고 있다. 이러한 다윗의 순수한 신앙은 시 23:4에 잘 나타나 있다.



20절, 주석과 해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여기서 ‘넓은 곳’이란 환란과 압박의 좁고 협착한 상태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유가 넘치는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를 상징한다(Fay, Smith). 즉 이 말은 어린 양이 넓은 들에서 마음대로 걱정없이 풀을 뜯고 있는 자유와 평화의 상태를 나타내 준다(호 4:16, 시 31:8, 118:5, 합 1:6).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베푼 모든 선한 일의 이유와 결론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와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하신 이유는 다윗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변치않고 어떠한 위경 가운데서도 다윗을 구원하셨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고 있었던 다윗은 자신을 대적하는 모든 악인들의 심판을 통해 얻게될 자신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이신 동시에 자신의 구원자로서 확신하였다(롬 11:36, 고전 8:6). 이처럼 전우주를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 미미한 존재인 자신을 기뻐하시고 구원하셨다는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당신을 의뢰하는 한 생명을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생생히 증명해 준다(마 6:25, 10:31, 16:26).



21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여기서 ‘상 주시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말’은 ‘보상하다’는 뜻으로(신 32:6, 대하 20:11, 시 103:10), 이는 악인 또는 의인에게 그 행한 대로 갚는 공정한 보응을 의미한다. 따라서 다윗은 이 구절에서 자신의 구원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의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공의’라 함은 전혀 죄가 없는 상태, 곧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한 절대적 의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의 ‘공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 또는 사악함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나님과 지속적인 친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영적 상태를 말한다(Keil). 다시 말해서 이 ‘공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 손의 깨끗함

여기서 ‘손’은 인간의 행위를 상징한다(Lange). 따라서 이 말은 죄와 불의로부터 떠난 다윗의 깨끗한 행위를 의미한다(시 7:5, 24:4, 26:6, 욥 9:30, 22:30).



22절,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다윗이 자신의 공의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상을 받은 이유와 또한 자신의 손(행위)이 깨끗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21절) 근거가 제시되어 있다. 즉 그것은 공의의 길이요 정결의 길인 ‘여호와의 도’를 지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도’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제시하신 ‘규례’와 ‘율례’를 가리킨다(23절). 즉 그 규례와 율례의 길에서 좌우로 벗어나지 아니하고, 온전히 붙들고 따랐다는 의미이다.



23절, 법도 … 규례


여기서 ‘법도’(히, 미쉬파트)와 ‘규례’(히, 후카)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교훈을 강조하는 중언법(重言法)적 표현이다(신 4:1 주석 참조). 결국 구약적인 의미에서 ‘의’란 윤리적이고 도덕적 측면보다는 법적인 뉘앙스가 더 짙은 용어로서,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과 규범에 일치한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도에 순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의와 불의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절대 의를 소유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제시한 모든 법도는 당신의 성품을 대변한 것으로서 의롭다. 이런 점에서 다윗이 자신의 의와 정결과 완전함을 하나님께 보임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본문의 말은 스스로 구원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교만의 의미가 아니다. 이는 다윗이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살아간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상급)을 은혜로 받았음을 가리킨다(창 7:9, 15:6, 22:12-18).



24절,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여기서 ‘완전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밈’은 21절의 ‘내 손(행위)의 깨끗함’과 대조적으로 마음의 고결함 또는 순결함을 가리킨다(창 20:5, 시 26:1, 잠 10:9). 특히 이 말은 욥의 ‘순전(純全)한’ 마음에 적용된 용어로서 그 마음에 사악한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욥 1:1). 그러나 이 말이 결코 도덕적으로 전혀 무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서 그 신실함과 의로움을 인정하실 만한 순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Hertzberg). 성경은 이러한 내적인 완전(순수)의 상태에서 정결한 행위가 나온다고 증거하고 있다(마 23:26). 한편, 이런 맥락에서 이 말은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칠만한 흠(欠) 없는 정결한 동물을 가리킬 때 적용되었다(레 1:3, 10, 3:1, 6 등). 그리고 후일 사도 바울은 이 ‘타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모모스’를 사용하여 신자들의 성화(聖化)를 강조하고 있다(엡 1:4, 5:27, 골 1:22).



25절, 내 의대로 …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본 절은 21절의 고백에 대한 또 한 번의 확증적 증언이다. 이러한 다윗의 이중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성도의 의로운 행위를 결단코 잊지 아니하고, 때가 이르면 반드시 갚아 주시는 상급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 상급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베푸시는 구원의 원리와 더불어 성도들에게 주어진 귀한 은총과 은혜의 원리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구원의 원리’가 무조건적인 은총의 원리라면, ‘상급의 원리’는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보응적 은혜의 원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상급의 원리는 구원 받은 자로 하여금 더욱 신실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고, 의롭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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