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의 본문인 민수기 1장 1절부터 54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남자 장정의 수를 계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본문의 매일성경과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민수기 1장 1절-54절, 하나님 나라의 군대
1절, 주석과 해설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10대 재앙으로 인해 마침내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 언약의 땅 가나안을 향해 출애굽을 감행한 시점과 장소는 B.C. 1446년 1월 15일 고센 지역 라암셋에서 였다(출 12:37). 그리고 이때는 야곱이 요셉의 초청으로 그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이주한 (B.C. 1876년) 때로부터 430년이 흐른 뒤였다(출 12:40). 한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후 2달만에 시내 산에 도착했다(B.C. 1446년 3월 15일, 출 19:1). 그리고 시내 산에서 성막 계시와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가지 규례들을 지시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출애굽 2년(B.C. 1445년) 1월 1일에 성막을 건립했다(출 40:17). 그리고 성막 건립 후 곧 레위기 규례가 주어졌다. 시기상 이 규례들은 출애굽 제2년 1월에 주어진 것이다. 이어 민수기 규례가 출애굽 제2년 2월 1일부터 주어지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이 모든 규례들은 시내 산 기슭에서 주어졌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제2년(B.C. 1445년) 2월 20일에 시내 산을 떠났다. 이때는 시내 산에 도착한 지 9개월 닷새가 지난 뒤였다(10:11).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시점부터 만 1년 보름이 지난 후의 첫날로서, 성막이 세워진 지 한 달 후이며(출 40:2, 17), 이스라엘이 군대로서의 조직을 완료하고 시내 광야를 떠나기 20일 전이다(10:11). 여기서 ‘둘째 달’은 ‘시브 월’ 곧 바벨론식 명칭(바벨론 포로 이후)으로는 ‘이야르 월’이며, 오늘날 태양력으로는 4, 5월에 해당한다. 한편 이스라엘이 이곳 시내 산에서 근 1년 동안 계속 체류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된 선민으로서 그들의 삶에 필요한 종교, 도덕, 사회의 각종 율법을 계시 받고, 또한 그들의 삶의 중심적 역할을 할 성막을 건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출애굽의 감격에 도취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시간 내에 가나안에 입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따르는 신앙과 그분 중심의 경건한 생활이었다. 만약 이것 없이 가나안이 쟁취된다면 그곳은 그들에게 복된 땅이 아니라 타락과 방종의 땅이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 말씀하여 이르시되
직역하면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이다. 여기서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본서와 레위기와의 연계 관계를 보여준다는 견해가 있으나, 차라리 먼저 전개된 출애굽기의 사건들을 이어받는 말로 보는 것이 좋다. 한편 원문에는 이 문구가 첫머리에 있어서 본서가 지니는 신적 권위를 처음부터 강변(强辯)해 주고 있다. 본서는 이렇게 여호와의 분부로 시작해서 여호와의 명령으로 끝맺고 있다(36:13). 이러한 구성은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의 광야 훈련 과정을 기록한 본서의 내용 전개와 잘 부합된다. 실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군대를 조직했고, 질서있게 진을 쳤으며(2:1-34), 질서있게 행군했고(10:11-28), 대적들과 싸워 연전 연승을 거두었다(21:1-3, 10-35, 31:1-54).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할 일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33:50-36:13). 비록 여러 번에 걸친 불신앙적 태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는 했어도, 전반적으로 광야의 훈련을 무사히 통과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매우 크다. 즉 이스라엘 군대의 행동 원리였던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절대적 순종’은 오늘날의 십자가 군대인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한다.
광야 회막에서
여기서 ‘광야’(히, 미드바르)란 건조한 계절에는 생물이 살 수 없는 불모지가 되고 강우기(降雨期)에만 풀들이 자라는 ‘스텝’(steppe) 지역을 가리킨다. 결국 10월과 4월 사이에 내리는 약간의 겨울비와 8, 9월에 내리는 이슬로 1년을 버텨야 하는 팔레스타인의 기후 조건으로 볼 때 ‘광야’는 인간이 견뎌내기 힘든 ‘죽음의 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곳에서 식량 생산을 위해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1년여 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정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그런데 이 ‘죽음의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임재 처소인 ‘회막’은 바로 이 기적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공한다. 즉 그들은 그들의 삶 중심부 깊숙이 개입하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죽음의 땅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광야에 세워진 회막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생명을 싹트게 하는 생명의 처소, 곧 ‘광야 교회’라 불려질 수 있다(행 7:38). 한편 본문에 언급된 회막(히, 오헬 모에드)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만나는 장소’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그리고 개역개정 성경에는 ‘오헬’이라는 동일한 원어가 ‘성막’(출 26:9), ‘장막’(출 16:16), ‘회막’(출 33:8) 등으로 특별한 구별없이 번역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처럼 ‘만남의 장소’라는 독특한 의미를 강조할 때의 원어는 ‘약속한 시간과 장소에서의 만남’이란 뜻의 ‘모에드’와 결합된 ‘오헬 모에드’ 형태로 언급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이며 동역자인 모세를 당신의 처소에서 친근히 만나 그에게 당신의 원대한 계획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공의로우시기만 한 분으로서 인간이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초월적인 분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버릴 수 있다. 진정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만나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고 또한 기뻐하신다(사 55:1-7).
2절, 주석과 해설
회중
이 말의 원어 ‘에다’는 ‘약속하다’, ‘징벌하다’는 뜻의 ‘야아드’란 말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결국 이는 단순한 의미의 군중(히, 콜 카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하에 있는 이스라엘, 곧 언약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를 가리켜 ‘회중’이라 할수 있다.
각 남자의 수
고대 이스라엘은 통상적으로 여자와 어린 아이를 독립된 개체로 인정치 않았으므로 오직 남자 성인(20세 기준)만을 인구로 계수하는 것이 관행이었다(마 14:21). 그러나 이는 그들이 여자나 어린이의 인격과 생명을 무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이것은 당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부장(家父長)이 그 가족을 대표했으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 주로 성인 남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것 등의 종교적인 견지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전 11:3, 7-9, 딤전 2:12, 13). 특별히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군대를 조직하려는 목적상 하나님의 거룩한 군사로의 부름 때문에 성인 남자들만이 계수되었다.
종족과 조상의 가문을 따라
종족(히, 미쉬파하)이란 아버지와 어머니를 중심한 1세대의 가정을, ‘조상의 가문’(히, 베트 아보트)이란 ‘아버지’, ‘우두머리(조상)’를 의미하는 ‘아브’와 ‘집’, ‘가족’ 등을 의미하는 ‘바이트’의 합성어로서 곧많은 가족들이 모인 집단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종족’보다는 크고 ‘지파’보다는작은 규모의 집합체를 뜻한다(수 7:14). 한편 이와 같이 혈연 관계를 중심하여 각각을 계수하게 한 것은 결코 분열 의식이나 비정상적인 경쟁 의식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1) 각자의 출생 근원을 기억하게 하며, (2) 각각의 가족 공동체가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추진해 간다는 공동체 의식과 선민(選民)의식 및 역사 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명수대로
여기서 ‘명수’란 사람을 셀 때 각각의 대상이 되는 ‘머리’(head), 또는 ‘계산된 수’(count, number)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KJV에서는 ‘그들의 이름 수대로’(according to the number of names)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한 사람의 누락도 없이 모두 계수되어야 함을 나타낸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치 택한 백성들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하나의 누락도 없이 등재(登載)됨을 연상시킨다(계 21:27).
계수할지니
‘계수(計數)하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파카드’인데 ‘계수하다’는 의미보다 오히려 ‘점호하다’, ‘정열하다’는 뜻의 군사적인 용어로 번역함이 좋다(Lange).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군대 조직으로 재편성하시기 위해 인구조사를 명하셨기 때문이다(출 12:17, 51). 한편 KJV에서는 ‘총계를 내다’(take the sum)로, 여타 영역본에는 ‘명부에 게재하다’, ‘등록하다’(register)로 번역했다.
3절, 주석과 해설
이십 세 이상으로
여기서 ‘20세’란 육체적으로 성숙하고 건장한 자인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미숙하지 않은 자란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1) 비록 체력적으로 건장하고 나무랄데가 없다 할지라도 연령이 20세에 미달될 때에는 군대 조직에 계수함 받을 수 없었고, (2) 비록 연령상으로는 20세가 넘었다 할지라도 체력적으로 전쟁에 참가하기 어려운 자, 곧 신체 허약자 및 신체 장애자들 역시 군대 편제상 계수함 받을 수 없었다(Matthew Henry).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 중 이 두 조건이 모두 갖춰지지 못할 때 그는 ‘싸움에 나갈 만한 자’가 되지 못했다. 이는 오늘날 십자가의 군사로 부름 받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고 강건할 때 비로소 대적 마귀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요일 2:13, 14). 한편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는 본 장에서 무려 14회 반복되고 있다. 히브리 문학에서는 어떤 사실을 강조하고자 할 때 그것을 반복하는 역설체적(力說體的) 기법을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위의 문구(文句)는 그러한 조건에 합당한 자는 계수에 있어 절대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단순히 인간적인 열정과 지혜로 수행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에 근거하여 수행되어져야 한다.
그 진영별로
여기서 진영(체바오트)이란 말은 ‘싸우다’(차바)에서 파생된 말이다.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죄악이 관영한 가나안 민족을 심판하기 위해 싸울 군대로 삼으셨고(출 12:17), 당신 자신은 그 군대의 총사령관이심을 분명히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이스라엘 군대 앞에서 행진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반영한다(10:33). 한편 사사 시대 이후에는 하나님을 전쟁의 신(神)으로 묘사하는 명칭인 ‘만군의 여호와’란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삼상 1:3). 그리하여 ‘체바오트’가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되어 ‘만군의 여호와’ 등으로 쓰인 경우가 구약 성경에 약 285회나 된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 아테네(Athene)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무엇보다 죄와 싸우시는 분이시다.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각각 77회, 62회씩 언급한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실로 성경은 만군의 하나님께서 장차 죄악 세상을 평정하시고 공평과 정의의 세상을 세우실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사 9:3-7).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의 군대인 교회의 사명도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롬 14:17)를 대망하며 ‘세상의 죄와 싸우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4절, 주석과 해설
우두머리
각 지파 장로들의 모임을 대표하는 자(NIV, the chief leader)를 가리킨다. 그런데 ‘우두머리’을 뜻하는 히브리어 ‘로쉬’는 본서에서 ‘우두머리’로 번역되었으나, 본서 이외에서는 대부분 ‘족장’으로 번역되어 있다(수 14:1, 19:51, 21:1, 대상 5:7, 스 8:16). 이처럼 ‘로쉬’라는 말이 혼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두머리와 족장은 동일한 의미인 듯하다. 여하튼 이들은 모세와 아론을 보필하여 이번 연구 조사를 주도해갈 자로 부름받았다. 한편 이것은 성막세를 거둘 때의 인구 조사시 레위인들이 보필했던 것과는 대조가 된다(출 38:21). 그 이유는 아마 성막세를 거둘 때의 인구 조사는 순수한 종교적 목적으로 시행된 것인 반면, 여기서의 인구 조사는 군대 편제상의 목적에서 실시한 것이기 때문인 듯하다(Pulpit Commentary).
너희와 함께 하게 하라
직역하면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라’란 뜻이다. 이미 이스라엘은 수많은 민사 소송을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한 행정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출 18:13-26). 하지만 광야 행진과 가나안 정복 전쟁을 조직적으로 수행해 낼만한 군사 체계는 아직 미흡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군사조직으로서의 편재를 갖추는데 힘쓰며. 또한 정비된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지휘관들을 직접 선택하심으로써 향후 광야 행진과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해 이스라엘을 명실상부한 군대로 재정비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단의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즉 군대는 한 사람의 독불 장군이 지휘할 때보다 명석한 참모들과 유능한 일선 지휘관들의 협조가 뒷받침될 때, 보다 능률적으로 움직여진다는 사실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판단보다 여러 사람의 판단과 협력이 어우러질 때 교회가 더욱 성장할수 있다(잠 15:22).
5-15절, 주석과 해설
주석
본문은 인구 조사를 담당할 실무진들의 명단을 하나님께서 친히 제시한 장면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들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하나같이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그들의 이름에는 ‘엘’(하나님), ‘아비’(아버지), ‘아히’(형제), ‘술’(반석) 등의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셈족 계통의 어근이 들어있다. 이는 적어도 그들의 삶이 하나님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각 이름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르우벤 지파의 우두머리는 “엘리술”이며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은 반석이심” 이다.
2. 시므온 지파는 “슬루미앨”이며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과 평화롭게” 이다.
3. 유다 지파는 “나손”이며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 예물 드린자” 이다.
4. 잇사갈 지파는 “느다넬”이며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심” 이다.
5. 스불론 지파는 “옐리압”이며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 이다.
6. 에브라임 지파는 “엘리사마”이며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들으심” 이다.
7. 므낫세 지파는 “가말리엘”이며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은 상급이심”이다.
8. 베냐민 지파는 “아비단”이며 이름의 의미는 “아버지는 심판관이심” 이다.
9. 단 지파는 “아히에셀”이며 이름의 의미는 “내 형제가 도움” 이다.
10. 아셀 지파는 “바기엘”이며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만나 주심” 이다.
11. 갓 지파는 “엘리아삽”이며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더하심” 이다.
12. 납달리는 “아히라”이며 이름의 의미는 “고난의 형제” 이다.
함께 설 사람
여기서 ‘서다’(아마드)란 말은 시중들기 위해 곁에서 긴장하며 기다리고 서 있는 자세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모세, 아론과 ‘함께 설 사람’이란 두 지도자를 보좌하여 하나님의 뜻을 원활히 수행해 갈 협력자 내지 조력자(助力者)를 뜻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들은 바로 우리의 유일한 지도자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선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조력자로서 복음 전파 사역을 담당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16절, 주석과 해설
회중에서 부름을 받은 자
여기서 ‘회중’(히, 에다)은 ‘증거’(창 31:52), ‘증인’(레 5:1) ‘징벌’(미 6:9), ‘약속’(암 3:3)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로서(2절), 이스라엘이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언약 민족임을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민의식 속에서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다(출 19:5, 6). 그런데 5-15절에 언급된 족장들은 부름 받은 회중 가운데서 또다시 부름을 받은 자들이므로 더욱 영예로운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 역시 죄악 세상에서 불러내시어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롬 8:30)으로 말미암아 선택 받은 자로서의 영예를 누리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벧전 2:9). 더욱이 그 중에서도 일꾼으로 소명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은 더 한층 그 영광의 직분에 감격하면서 성심껏 봉사해야 할 것이다(고후 3:6-11).
종족들의 우두머리
여기서 ‘종족’(엘레프)이란 문자적으로는 ‘천’(1000)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말은 ‘가족’(family) 혹은 ‘종족’(clan)등의 뜻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단순한 문자적 수효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가족이나 종족이 모인 ‘수많은 무리’를 가리킨다. 한편, 이처럼 각 종족의 우두머리들에게 이 수식어를 붙인 것은 그들에게 위임된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를 보여 준다. 실로 거룩한 공동체를 관리, 운용해 가며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처럼 이 세상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란 없다.
17절, 주석과 해설
지명된
‘그 이름으로 표시된’이란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매우 직접적이고 개인적이다. 아마 그것은 사명감을 보다 분명히 하고, 신적 직분의 권위를 각자에게 부여하기 위한 배려로 생각된다. 모세(출 3:1-4:31), 여호수아(신 31:23), 기드온(삿5:11-24), 사무엘(삼상 3:1-21), 이사야(사 6:1-13), 예레미야(렘 1:4-19),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막 3:13-19), 바울(행 9:1-22) 등이 하나님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명된 일꾼의 대표적 경우이다. 한편 초대교회 이후에는 사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교회 직원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행 7:5-7, 14:23, 딛 1:5). 그러나 간접적으로 선출된 일꾼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명 받아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딤전 6:12), 디모데처럼 신적 권위를 갖고 사역해야 할 것이다.
18절, 주석과 해설
자기 계통별로 신고하매
즉 ‘출생을 밝히다’. ‘계보에 입적하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선민으로서의 구비 요건 중 가장 중요시 한 것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출신을 명확히 아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개체로서의 자신 이전에 하나님과 연관된 가문 및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신을 더 중요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 가문을 통해 계속 자신이 살아갈 것을 신앙처럼 믿고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각 지파는 계보에 올라가 있는 자들에 한해서 군사수를 점검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보에 들지 않은 자들은 약속의 후손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이다(스 2:62). 그 결과 출애굽시 이스라엘을 따랐던 ‘수많은 잡족’(출 12:38)은 군사로 동원되지 않고 단순히 노동에만 종사한 듯이 보인다(신 29:11).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살면서 불평 불만의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케 했다(11:4-6, 33).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이 군대 편성에서 제외된 것은 당연하다. 한편 오늘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교회 역시 구성원들인 성도들의 계보와 출생이 분명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1:13),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신 자(약 1:18), 생명책에 녹명된 자(빌 4:3)라야 진리와 복음을 위한 투사가 될 수 있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사탄의 수하에 있으므로, 진리의 편에 서지도 못하고(요 8:44) 사탄을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 12:25, 26).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가시적인 교회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는 거듭났다고 자처하는 신자들이 최선을 다해 불의와 싸우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자들이 거듭나지 못했거나 영적 출생을 거의 무시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폐단을 개선하지 못하는 한, 교회는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히는 소금’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마 5:13).
19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께서 … 명령하신 대로
이 말은 회막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받았던 모세가 그 명령을 게으름이나 부주의함 없이 신속, 정확하게 준행했음을 보여 준다. 실로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이어서 인간이 그것을 수행해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볼 때 그 명령이 불합리하고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오직 전적인 순종만이 요구될 뿐이다(창 22:1-19).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폭군의 포악스런 명령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 명령과 더불어 그 명령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역동적인 힘을 제공한다(창 1장, 느 9:8). 그러므로 명령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순종뿐이다.
계수하였더라
성경 기록상 계수 기간은 단 하루 걸렸음을 알수 있다(1, 18절). 이처럼 60만 명이 넘는 장정들의 인구 조사가 단 하루 동안에 끝날 수 있었던 이유는 (1) 일전에 성막건축을 위한 인두세(人頭稅) 수금시 인구 조사를 철저히 실시했던 그 자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며(출 30:11, 12, 38:26), (2) 이스라엘 백성이 한 곳에 밀집하여 모여 있었다는 사실도 그 이유가 될 수 있고, (3) 또한 각 우두머리들의 헌신적인 노력 및 백성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절, 주석과 해설
르우벤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
르우벤은 이스라엘(야곱)의 12아들 중 장남이었으나, 서모(庶母) 빌하와 간통함으로써 가문과 여호와의 영광을 더럽혔다(창 35:22, 49:4). 그 결과 그는 저주를 받아 장자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대신 요셉이 그 권한을 부여받았다(대상 5:1,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여전히 르우벤 지파가 인구 조사 결과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아마 그의 영적 장자의 지위는 인정치 않더라도, 육체적으로 야곱의 첫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는 본서 기자(記者)의 의도 때문일 것이다.
22-25절, 주석과 해설
주석
르우벤 지파와 함께 시므온과 갓 지파가 언급된 것은 그들이 르우벤 지파와 가장 절친한 형제 지파이기 때문이다. 즉 시므온은 르우벤을 장남으로 낳은 레아의 둘째 아들이며, 갓은 레아의 시녀인 실바의 장남이다(창 29:33, 30:10, 11). 한편 이들 세 지파는 진 배치에 있어서도 동일한 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이같은 일련의 조치는 결코 파벌 의식을 조장키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갈등과 마찰을 해소시키고 형제의 우애를 돈독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로운 조치였다. 사실 인간이 모인 곳에는 어디나 갈등과 긴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유를 통일하시며 평안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당면한 모든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엡 4:6).
26-31절, 주석과 해설
주석
광야 행진에서 유다 진기(陣旗)에 속한 지파의 총계이다. 여기서 유다가 레아의 넷째 아들이면서도 르우벤 진(陣) 배열에 소속되지 않은 것은 그가 르우벤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장자에 피택되었으므로 독립적인 지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창 49:8-12). 특별히 이 지파는 가장 많은 군인 수를 보유하였을 뿐 아니라. 광야 행진중 선봉(先鋒)에 서는 영예로운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야곱의 예언(창 49:8-11)이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이후 예수께서 이 지파에서 출생하심으로써 야곱의 메시아적 예언은 온전히 성취되었다 (마 1:2, 계 5:5), 한편 유다 지파와 절친한 레위 지파가 이곳에 등재되지 않은 것은 그 지파는 특별히 성막 봉사자들로 성별(聖別)되어 군복무를 면제 받았기 때문이다(47-53절, 8:9-26). 그리고 유다 진영의 깃발 아래 소속된 잇사갈과 스불론은 각각 레아의 다섯째와 여섯째 아들이다.
32-37절, 주석과 해설
주석
본문은 요셉과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들의 총계이다. 여기서 요셉의 두 아들의 지파가 삼촌들의 지파와 동등한 위치에서 계수된 것은 구속사의 일익(一翼)을 담당했던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축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창 48:5-20). 그중에서도 동생 에브라임 지파가 모든 면에서 형 므낫세 지파보다 우위를 차지한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주권적 선택의 결과였다(창 48:13, 14, 17-19), 즉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유언적 예언을 통해 ‘그 아우를 그 형보다 크게’ 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성과 제도에 얽매이시지 않고 당신의 선한 계획을 추진해 가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주권적인 섭리 앞에 인간은 다만 겸손히 그것을 수용, 인정해야 한다(롬 9:18-29).
38-43절, 주석과 해설
주석
본문은 단 지파와 그의 가까운 지파들 곧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군인수 총계이다. 이들은 계수 때나 행진시를 불문하고 맨 마지막에 언급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육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열등한 지파였기 때문이다(2:25-31, 10:25-27). 특히 단 지파는 가나안 정착 이후에 이스라엘 내에서 기업이 될 땅을 얻지 못해 방황하기도 했으며, 또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자적으로 우상 숭배를 일삼아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기도 했다(삿 18장). 그러므로 계시록의 기록에 의하면 결국 이들은 12지파의 반열에서 제외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계 7:5-8). 이는 단의 장래를 예언한 야곱의 말이 온전히 성취된 것이다(창 49:16-18). 이러한 단 지파의 결말은 곧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자들의 최후가 허무와 절망임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단 진영의 깃발 아래 소속된 아셀은 레아의 여종 실바의 막내 아들이고, 납달리는 라헬의 여종 빌하의 막내 아들이다(창 30:3-13).
44절, 주석과 해설
열두 지휘관
이들은 이번 인구 조사를 위해 이스라엘 12지파를 대표하여 뽑힌 자들이었다. 특별히 여기서 ‘지휘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시’는 ‘높이 들리다’란 뜻의 ‘나사’에서 파생된 말로, 곧 각 지파의 군대 지휘관들을 의미한다. 한편 이 말이 4절에서는 ‘우두머리’(captain)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보다 자세한 내용은 4절 주석을 참조하라.
45절, 주석과 해설
계수되었으니
즉 성전(聖戰)을 담당할 군인 명단에 등재 되었음을 뜻한다(2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1) 그들이 사적인 존재에서 이스라엘은 백성을 대표하여 싸우는 공적(公的)인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점, (2) 그들 사명의 최종 목표는 가나안 정복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점, (3) 그리고 무엇보다 계수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확실한 증표를 얻었다는 점 등을 강조한다(딤후 2:19). 한편 오늘 십자가의 군병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도 단순히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등재된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구됨과 소유됨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삶의 최종 목표인 영적 가나안 곧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날마다 사탄과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46절, 주석과 해설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
이스라엘 12지파 중 싸움에 나갈 만한 군사로 부름받은 자의 총계(總計)이다. 그런데 이 숫자는 대략 아홉 달 전 성막 건축을 위한 속전 대상자의 총계와 동일하다(출 30:11-16, 38:26). 이러한 일치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본문의 통계는 성막 건축 전 속전 대상자의 명단 조사 결과(출 38:26)에 전적 의존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단지 군대 편제를 위해 가족과 종족과 지파별로 분류하여 공문서로 작성했을 뿐이라는 견해(Keil, Pulpit Commentary). (2) 본문의 통계는 속전 대상자의 인구 조사와 긴밀히 연관되었으나 ‘603, 550명’이라는 정확한 수치는 이번의 인구 조사에서 처음으로 총계된 숫자라는 견해이다(Lange). 여기서는 첫 번째 견해가 타당한 듯한데, 그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즉 (1) 이번 징병 대상자의 총계가 단 하루 동안에 완료되었다는 사실, (2) 시간상 지난번 성막 건축 전의 속전 대상자의 총계가 있어야만 분명히 인두세(人頭稅)를 징수할 수 있었고, 또한 그 세금에 근거하여 그 기금으로 성막 건축을 완료할수 있었겠기 때문이라는 사실, (3) 그리고 이번의 인구 조사에서는 각 개인보다는 유난히 ‘가족과 종족을 따라’ 계수하라는 명령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결국 오경(五經)의 기록자인 모세는 지난번 성막 건축전의 속전 대상자 총계를 근거로 이번 징병대상자의 총계를 산출했던 것 같다.
47절, 주석과 해설
레위인은 …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레위 지파는 병역 의무로부터 면제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성별(聖別)되어 하나님의 임재 처소인 성막을 호위하며, 또한 그곳에서 진행되는 제반 업무에 전적으로 봉사할 사명을 맡았기 때문이다(3장, 출 13:2, 13).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세상적인 일, 심지어 자신의 생계를 위한 여타의 노동도 할 수 없었으며,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다(3:12, 13). 한편, 그러나 여기에 레위인이 계수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전체 이스라엘 군인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일 뿐, 그들이 전혀 계수함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레위 지파가 가지는 독특한 의미 및 직무를 따라 일 개월 이상된 남자들로써 별도로 계수함 받았다(3:39).
49절, 주석과 해설
레위 지파만은 … 계수 중에 넣지 말고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에 계수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은 금송아지 숭배 사건 때 하나님께 전적 헌신함으로(출 32:26-29), 그후 오직 하나님의 일만을 하도록 특별히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레위인 성별 사상은 일찍이 레위기 규례 속에서 암시되어 오다가(레 25:32-34), 이제 본서에 이르러 완전히 공식 인준되고 있다. 따라서 레위인들은 명분상 이스라엘 장자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초태생 규례(출 13:2, 13)에 근거해 그들 대신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간주되어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 속에는 계수되지 않았다.
50절, 주석과 해설
증거의 성막
곧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성막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이 생겨난 것은 성막 속에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증거하는 증거판(십계명 두 돌판)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막이나 장막이란 말 외에 특별히 ‘증거의 성막’(the tabernacle of the testimony)이라 지칭할 때엔 언제나 하나님의 율법, 계명, 규례 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모든 기구
이 말은 ‘그것(성막)에 속한 모든 기구’, 곧 언약궤, 향단, 진설병상, 등잔대, 번제단, 물두멍등을 가리킨다(출 25:29, 38, 39, 27:3, 4, 37:16, 24, 39:36-39)
모든 부속품
‘그것(성막)에 딸린 모든 것’, 즉 말뚝, 줄 등을 말한다(출 35:18, 38:40). 성막과 모든 기구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내는 동시에(출 40:34, 35),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그의 중보 사역을 보여주는 가견적 상징물이다 (히 8:1-6, 9:1-15, 10:19, 20). 그러므로 그것들은 세심한 배려 속에 잘 관리되어야 했다. 한편 영적으로 오늘날에는 성도들 각자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전이며(고전 3:16, 17, 6:19), 신령하고 보편적인 성전을 이루는 각 지체들이다(엡 2:21, 22).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몸을 모든 악의 요소로부터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성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롬 12:1, 2).
운반하며
기본 동사 ‘나사’는 ‘들어 올리다’로서 곧 손으로 옮기는 행위 외에 각종 도구를 사용하여 물건을 운반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사실 레위인 중에는 성물을 그 종류에 따라 고핫 자손처럼(4:15) 어깨로 메어 옮기기도 했으며,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처럼(7:7, 8) 수레로 운반하기도 했다.
거기서 봉사하며
곧 ‘그것을 돌보며’(NIV, take care of it)로 번역할 수도 있다. 즉 레위인들에게는 성막의 기구들을 돌보는 책임이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는 의미이다. 한편 그러나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는 교회의 지체들, 곧 성도들을 돌보는 책임이 부과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빌 2:4).
성막 주위에 진을
이 말은 레위인의 존재 목적을 분명히 한 구절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처소인 거룩한 장막 주위에 항상 거하면서 (1) 성막 봉사를 위한 준비를 해야 했으며, (2) 성막에 접근하는 자들을 통제하고, (3) 성물이 탈취당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지 않도록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친위대로서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는 오늘날 우리들의 존재 목적을 명확히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늘 동행하면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영적 레위인들이다(고전 10:31).
51절, 주석과 해설
걷고 … 세울 것이요
이 말은 하나님의 지상 임시 처소라 할 수 있는 장막의 이동과 설치를 가리킨 말이다(4:4-33),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동 생활을 연일 계속해야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동에 편리한 장막 구조를 허락하셔서 그것을 걷고 세우는 일을 반복케 하셨다. 한편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영원한 거주지로 삼을 수 없었으며, 가나안을 위하여 장막을 걷고 세우는 일에 충실해야 했다. 이는 오늘날 광야 같이 험준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세상에 대해서는 행인과 나그네요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히 11:13, 벧전 2:11) 우리들은 유한하고 제한적인 이 세상에 안주하여 잠시 잠깐의 쾌락을 추구하기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매일 진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분명 이 땅에 거주하는 인생을 ‘풀’, ‘안개’와 같이 순간적이고 임시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시 103:15, 약 4:14).
외인
원래는 이방인이나 적대국 백성을 의미했으나, 여기서는 비(非)레위 지파 사람들 즉 이방인 뿐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서도 레위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한편 레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준받지 않은 외인들의 성막 접근을 철저히 막아야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침범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총 없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을 스스로 보존하시기 위한 비상 조치이다(츨 19:12, 삼상 6:19). 한편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보존하는 파수꾼으로서 ‘외인’의 접근을 사전에 막아야 했으며, 그래도 가까이 오는 자는 단호히 살해해야 했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성막이 파괴되거나 하나님의 거룩이 훼손되는 날이면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전체에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53절, 17:13, 18:5, 수 9:20, 22:20).
52절, 주석과 해설
이스라엘 자손은 막사를 치되
여기서 ‘막사’란 거주 또는 공격을 하기 위해 치는 ‘진’(陣)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성막을 중심하여 성막 주위에 이스라엘 12진파의 진 곧 장막을 칠 것이 명령되어 있다(2:1-34).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할 때나 질주할 때를 막론하고 항상 하나님의 성막을 중심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군기 곁에 칠 것이나
히브리어에는 군기를 가리키는 세 가지 용어가 있다. 첫째가 본 절에 사용된 ‘데겔’로서 백성들의 단체나 집합을 상징하는 의미의 기(standard)를 의미한다(2:34, 시 20:5). 이것은 주로 전쟁에 사용하는 군호(軍號)를 가리킨다. 둘째는 ‘네스’인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집중시키는데 사용되는 푯대 또는 기를 가리킨다(사 13:2, 18:3). 따라서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기)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네스’, 즉 이스라엘의 구심점이 되심을 보여 준다(출 17:15). 셋째는 ‘오트’로서 이것은 ‘데겔’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지만 ‘데겔’이 큰 군대를 위해 사용된 반면 이것은 작은 무리나 가족을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시 74:4). 그리고 성경에서 ‘오트’는 ‘데겔’이나 ‘네스’보다 더 많이 사용 되었는데 흔히 표지, 푯대를 뜻한다. 한편, 이처럼 이스라엘이 성막을 중심으로 4방면에 기(旗)를 세우고 진(陣)을 친 것은 적어도 다음 3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이스라엘의 삶이 예배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2) 이스라엘 군대의 통수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다. (3) 이스라엘의 군대 조직과 질서가 ‘여호와 신앙’으로 통일성을 갖는 동시에 각 지파별로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성도들의 삶도 이와 같아야 한다. 곧 성도 각자가 몸 담고 있는 교회를 중심한 예배 생활에(행 2:46),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생활(대상 29:11, 12), 신앙 공동체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바로 인식하여 서로 단결하며 피차 조화를 이루는 생활(고전 12:4-27)이 되어야 한다.
53절, 주석과 해설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특별히 하나님께 바쳐진 레위 지파 사람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그 사방 가까이에 진을 쳐야 했다. 그 이유는 (1) 그들의 직무상, 그들은 성막을 위해 언제라도 봉사해야 했기 때문이었고, (2) 그들의 책임상, 그들은 성막 안으로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 사면을 단단히 호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성막을 침범한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 전체 위에 임했다. 물론 당시 성막 호위를 맡은 담당 레위인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책임을 지킬지니라
여기서 ‘지키다’(히, 솨마르)란 말은 모든 주의를 기울여 세심하고도 확실하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본 명령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생명을 돌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수행할 것을 요구한 내용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절대적인 명령이기도 하다(창 26:5, 레 8:35).
54절, 주석과 해설
행하되 … 행하였더라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은 행했다 … 그렇게 행했다’란 뜻이다. 이스라엘의 전적인 복종을 강조하기 위해 이처럼 반복법이 사용되었다. 실로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순종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가장 귀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즉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로 추앙을 받는 모세도 사실은 하나님의 사환(使喚)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히 3:5).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이셨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나 장로는 하나님의 종으로 봉사할 수는 있어도 지도자로 군림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지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기 때문이다(마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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