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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장 1절-12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 매일성경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 본문인 마태복음 3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세례 요한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서, 요단 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새벽설교 준비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3장 1절-12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 매일성경 주석과 해설 정리



마태복음 3장 1절-12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1절, 주석과 해설


그 때에

이 구절의 뜻은 (1) ‘결정적인 어느 때’(Hill)를 말할 수도 있고, (2) ‘예수와 그의 가족이 나사렛에 살던 무렵’(Broadus)을 뜻할 수도 있다. 마태는 구약에서 어떤 특정한 시점(時點)을 나타내던 표현 방법(창 38:1, 출 2:11, 23, 사 38:1)의 영향을 받아 뒤에 이어지는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고자 이런 표현법을 사용한 것 같다. 한편 ‘그 때’는 2장과 약 30년의 차이가 있는 주후 28년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즉, 디베료 가이사(Tiberias Caesar) 재위 15년(눅 3:1, 2) 되던 해, 곧 세례 요한 내지 예수의 나이가 30세 된던 때였다. 여기서 ‘30’이란 나이는 모세 율법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민 4:3, 42-45). 이는 결국 율법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과업을 실행키 위해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의 사역을 인준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세례 요한

히브리어 요하난이란 이름에서 유래한 ‘요한’은 제사장이자, 유대의 지도자로서 B.C.106년에 사망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이래로 유대인들에게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신약에서 4, 5명 정도 등장하는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이란 이름 앞에 ‘세례’(Baptist)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주 나오는 다른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중점이 ‘세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히브리인의 이름에는 (1) 할례명(이 이름은 거룩한 이름으로 종교적 목적과 의식에서만 사용한다)과 (2) 개인명(個人名, 즉 세속명으로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이다) 및 (3) 그밖에 한 개인에게 관련된 공적 임무, 정신적, 신체적. 신분적, 도덕적 특성을 일컫는 이름이 있었다. 여기 ‘세례 요한’이란 이름은 바로 (3)번의 공식 임무에 관련된 직능적(職能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esephus)도 ‘세례 요한’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편 세례 요한은 엄격히 말해서 율법 시대에 속한 자요,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한 구약 최후의 선지자였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된 것처럼 그는 구약의 율법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의 은혜 시대를 예비하는 준비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세례 요한의 탄생 경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누가복음 1장을 참조하라.


유대 광야에서(수 15:61, 삿 1:16)

여리고 남쪽과 사해 서쪽 고원 지대에 걸쳐 펼쳐진 황량한 석회암의 굴곡으로 되어 있는 광야이다.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고, 엔게디 근처에는 폭포도 있어 목초지로 이용되던 땅이었다(시 65:12, 욜 2:22, 눅 15:4). 이곳은 ‘십 황무지’(삼상 23:14, 15), ‘마온 황무지’(삼상 23:24), ‘엔게디 횡무지’(삼상 24:1), ‘예루엘 광야’(대하 20:16)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는데, 그 모든 땅이 유다 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유대 광야’로 지칭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광야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칩거(蟄居) 생활을 하며 흩어져 살았는데 예수 당시의 극단적 유대교 종파의 하나인 엣세네파(the Essenes)도 그 중에 하나였다. 세례 요한의 성장지와(눅 1:80) 초기 사역지(요 3:23)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그를 엣세네파의 일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유대인들의 역사성으로 볼 때 ‘광야’(Desert, NIV)는 단순히 소외된 지역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는 특수 지역이었다. 그 예로써 율법이 광야에서 계시되었고 열심당원들(Zealots)도 광야를 은신처로 삼았었다(24:26, 행21:38). 이러한 의미에서 학자들은 세례 요한의 활동 무대였던 광야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Bonnard, Maier). 더불어 ‘광야에서’란 말 중에 ‘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기네타이’이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 ‘그가 … 에 와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단순히 장소를 강조한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의 현재성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사역의 현재성과 역사성을 생동감있게 전해주며, 그의 사역의 예언적 특성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전파하여

이에 대한 헬라어 ‘케륏손’은 ‘유앙겔리조마이’과는 달리 말씀을 선포하는 그 자체로서의 사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선포의 방법과 의미에 관계된 것이다. 즉 그는 메시지를 선포하되 단지 하나님께서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말씀만을 고(告)하는 것이 그의 사명의 전부이었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그가 광야를 사역 장소로 택한 것도 하나님의 지시(사 40:3)에 따른 것이었다. 실로 세례 요한의 전파지로 택하신 광야야말로 이스라엘의 피폐(疲弊)한 영적 상태를 적절히 묘사했다 할 것이다.



2절, 주석과 해설


회개하라

이 말의 원어 ‘메타노에이테’은 고전 헬라어에서 순수한 의미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가지며, 통속적으로는 단순히 ‘무슨 일을 후회한다’라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의 용례(用例)는 ‘새 행실로 돌아 온다’는 히브리어 ‘슈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백성들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외침이다. 즉 유대인 중에도 믿음없는 자가 있고, 우상 숭배자가 있기에 그러한 불신과 영적 음행(淫行)에서 돌이키라는 구약적 의미인 것이다(Alford). 실로 이 말은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Turn ye) 전인격적인 참회(懺悔)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메시아를 영접하는 마음과 행위의 철두 철미한 변화 전반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궤도를 이탈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철저한 변화가 절대 요청되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롬 3:10). 한편 이 같은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서만 참 회개임이 증명된다.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요한의 설교의 두 번째 주제로서 회개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에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이기 때문이다(25:31-46).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 또는 ‘하늘 나라’(헤 바실레이아 톤우라논)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마가와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표현한다. 한편 이 표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 왕국에서 유래한 것으로서(단 2:44, 7:13, 14,27)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왕국’(말쿠트)의 주요 의미는 ‘통치’(reign)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왕국’을 뜻하는 ‘바실레이아’은 간혹 영토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4:8) 대부분이 역동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이는 당시 천국을 영적인것으로만 해석하고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것로 간주하던 랍비들의 해석이나 메시아 왕국이 이뤄질 때 로마의 지배가 무너지고 정치적 평화와 번영이 도래하리라던 A.D.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의 극단적 해석과는 달리 역동적(dynamic)으로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서는 대적들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실(사 9:7) 하나님의 강림(降臨)과 통치에 대한 기대로 고조되어 (1) 다윗 언약 성취에 대한 대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삼하 7:13,14). (2) 여호와의 날로서 심판의 어두움(암 5:18,19)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땅에 구체화될 천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본문에 제시된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예수의 초림으로 구체화될 천국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깝다’(엥기켄)라는 말은 천국이 갖는 역동적 의미와 함께 결합되어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이적과 함께 왔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왔으며, 이 시대의 종말에는 완성된 모습으로 올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하늘나라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즉 온 세계에 왔고, 마침내는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한편 마태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려했던(출 20:7) 유대인의 일반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 때문일 것이다.



3절, 주석과 해설


저는 … 자라(후토스 가르 에스틴)

본 절의 내용은 2절에서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하는 공적인 근거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 문장은 이유와 원인을 나타내는 ‘가르’에 의미를 살려 ‘왜냐하면 저가 … 자이기 때문에’로 고치는 것이 더욱 완전한 번역이 된다. 한편 본 절은 예언과 성취라는 구조(flufillment formula)로 묘사되어지지 않은 구약 인용 구절 중의 하나이다. 즉 본문의 경우는 단순히 문자적 예언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모형적, 종말론적 성취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언은 다른 복음서에도 공히 취급되고 있다(마 1:2, 3, 눅 3:4-6, 요 1:23). 특별히 세례 요한 자신은 요 1:23에서 ‘나는 …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하였고, 예수께서도 마 11:10에서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하심으로써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의 궁극적인 성취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증하고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사 40:3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그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이다(McNeile).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하나님의 선구자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소리’란 어떤 의지나 의미가 개입된 주체적 발언이 아니라 물리적 음파일 뿐이다. 이는 ‘로고스’, 곧 말씀으로 표현된 예수의 주체적 발언과 그인격을 소개하는 세례 요한의 메신저(messenger)로서의 기능을 확실히 드러내 준다. 그리고 ‘외치는 자’는 하나님이시요, 듣는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포로에서 귀한하는 것에 대한 이 예언은 온전한 성취가 못되었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필연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 즉 메시아 왕국(하늘나라)의 선포와 도래에 관심을 갖게 된다(Alford). 여기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역사적 측면에서의 포로 귀환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해방시키고 당신의 나라로 귀환시키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해토이마사테)

‘주’를 뜻하는’퀴리오스’은 하나님에 대한 신적 칭호로서 히브리어로는 ‘주인’을 뜻하는 ‘아도나이’에 해당한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십계명 중 제 3계명(출 20:7)의 금기(taboo)를 철저히 따른 것으로 여호와의 대(代)명칭이다. 한편 ‘예비하라’는 말은 정확하게 준비되었다는 뜻의 ‘헤토이모스’에서 유래하여 불편함 없이 적절히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는데 불편없도록 모든 것을 ‘예비하는’ 선구자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비된 길을 따라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을 또한 ‘예비하셨다’(요 14:2, 3).


첩경(捷徑)을 평탄케 하라

여기서 ‘첩경’(트리부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실라’은 곧게 뻗은 대로(high-way)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마차가 힘차게 달릴 수 있었던 ‘마차로’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길은 분명 ‘왕의 대로’로 손색이 없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어지는 ‘평탄케 하라’는 말의 헬라어 ‘유데이아스’은 ‘곧다’, ‘기쁘다’, ‘바르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주의 길’을 회개로 표현한 은유법이다. 즉, 평탄케 하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일치하도록 ‘바른’ 질서를 유지하며, 정의를 이루라는 말이다. 이말이 당시 세례 요한의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4절, 주석과 해설


낙타털 옷

검소하고 금욕적인 구도자(求道者) 본연의 모습올 상징한 옷차림으로서 엘리야의 의상과 의도적으로 일치시킨다(왕하 1:8). 이는 결국 요한이 엘리야 재현 예언(말 4:5, 눅 1:7)의 성취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로 투박한 털옷은 선지자들이 주로 입는 옷으로 알려졌으며(슥 13:4).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백성의 죄를 자신이 대신하여 슬퍼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입었다 한다. 이 옷은 낙타의 가죽 옷이 아니라 단지 낙타 털로 거칠게 짠 옷이었다. 한편, 약대 털옷을 입은 세례 요한의 모습은 당시의 죄악된 현실을 부정하며, 회개를 선포하는 그의 사역과 일치한다.


가죽 띠

풍성한 겉옷올 허리에 단단히 묶기 위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메뚜기

중동지방에서는 고대로부터 메뚜기가 식용으로 애용되어 왔다. 아랍 지방에서는 지금도 메뚜기를 시장에서 식용으로 판매하고 있다. 오늘날도 단백질 보충을 메뚜기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부족들이 있다. 그들은 메뚜기를 불에 굽거나 끓여서 먹으며 남은 것은 햇볕에 말리거나 가루로 만들어 보관한다. 말린 메뚜기는 약 50%의 단백질과 20% 정도의 지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메뚜기와 석청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세례 요한이 꼭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고 살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요한의 약대 털옷과 가죽띠가 그가 선지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옷인 것처럼, 메뚜기와 석청도 그가 광야에서 생활한 금욕적인 선지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여기에 언급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그는 광야에서 구할 수 있는 몇 가지의 소박한 음식을 먹었지만 그중 광야에서의 금욕적인 생활을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 두 가지 음식만을 예로 들었을 수 있다.

그리고 광야에서 그가 다른 음식을 전혀 구할 수 없을 때는 오직 메뚜기와 석청만으로 산 때도 있었을 것이다. 두 가지는 다 광야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써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허락된 것들이며(레 11:22), 고대 아라비아 사람들이나 수리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먹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세례 요한이 이런 음식으로 최소한의 영양만 섭취하면서 일정기간을 견딜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는 것은 별다른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먹은 메뚜기를 식물(植物)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중요한 이유는 사람이 계속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서는 살기 힘들다는데 기인한다.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요한이 먹은 ‘메뚜기’(헬, ‘아크리데스’, ‘아크리스’의 복수형)가 곤충이 아니라 작은 야생 새라든가, 야생 배 혹은 과일의 일종이라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타티아누스(Tatian)의 디아테사론(Diatessaron)은 우유(milk)라고 기록하고 있다. 금욕주의자이며 채식주의자인 에비온파(Ebionites)는 ‘아크리데스’를 ‘엥크리데스’(과자)라고 바꾸었고, 헬라교회 교부들도 ‘아크로두리스’(열매)라고 읽었지만 성경상 근거는 없다.

한편, 세례 요한이 먹은 메뚜기가 곤충이 아니라 케롭나무의 열매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에는 유력한 언어학적 증거가 있다. 케롭나무는 지중해 연안에 광범위하게 자라는 식물인데 팔레스타인에서도 흔한 나무이다. 그 열매는 늦은 봄에 열리는데, 모양은 리마 콩과 비슷하며 생것으로 먹을 수도 있고 영양분이 풍부하여 중동 지방에선 가난한 사람들의 중요한 음식이 되기도 한다. 탕자가 먹은 쥐엄 열매(눅 15:16)가 바로 이 케롭나무 열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이 케롭나무 열매를 ‘메뚜기’(locust)라고 부르고 그 열매를 ‘요한의 음식’이라고도 하며 주로 가축 사료로 쓰고 있다. 엘렌 지 화잇이 세례 요한이 순수한 채식만을 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견해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석청

석청(石淸)은 야생꿀로서 나무의 수액(樹液)이라는 견해(Meyer, Burce, Diodorus)도 있고, 야생 벌꿀(Bengel, Carr)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이 말을 고려해 볼 때, 광야의 바위틈이나 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야생 벌꿀(삿 14:8, 9, 시 81:16)로 생각된다. 요나난은 전쟁 중에 바위 밑에 흐르는 꿀을 먹고 배고픔을 면하기도 했다(삼상 14:25-30).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 생활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상시키고, 철저한 자기 절제와 고독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들의 경건한 행위를 암시해 준다. 실로 세례 요한은 의복과 음식으로 백성들에게 회개와 임박한 천국을 전했던 것이다(Bengel).



5절, 주석과 해설


이 때에 … 다 그에게 나아와

‘이 때에’는 세례자가 ‘회개’와 ‘천국’ 선포 사역을 시작한 때(1절)를 가리킨다. 실로 400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 속에 살아가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그들의 영적 가뭄을 해갈(解渴)시켜줄 단비로 여겼으며 그중에서도 어떤 이는 그를 예언된 메시아로 기대하며(눅 3:15, 요 1:20) 그에게 모여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나오는 지명(地名)들은 2:3과 마찬가지로 장소를 의인화시킨 것으로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회개자로서 제일 먼저 광야로 향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긔고 ‘온 유대’에서 ‘온’이라는 말은 그 당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환대(歡待)를 암시한다. 그리고 ‘요단 강 사방’은 요단 강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이두매, 베레아, 사마리아등의 이른바 종교적으로 소외된 지역 전반을 가리키며, 또 요한 사역의 본거지가 요단 강인 것과 사역의 내용이 ‘회개 촉구’와 ‘세례 베푸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6절, 주석과 해설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이는 자기들이 범한 죄를 조목조목 고백했음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역사가 요세푸스이(Josephus)는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와 율법에 대한 죄를 고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죄의 고백은 율법에 규정된 의무로서 범죄한 당사자의 책임(레 5:5, 26:40)이자 제사장의 의무 중 하나였다(레 16:21). 이스라엘이 영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는 이러한 고백이 순조롭게 이뤄졌으나(느 9:2, 3, 시 32:5) 영적 기갈 상태에서는 침묵하고 있을뿐이었다. 한편 막 1:4과 눅 3:3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한다. 그러나 마태는 세례의 선행 조건으로 ‘죄의 고백’을 언급했을 뿐 ‘죄 사함’은 예수가 죽을 때(26:28)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의 세례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개인적인 ‘죄의 자복’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적이 없었다. 바야흐로 메시아 도래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요단 강

히브리어 ‘야라드’(내려가다)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빨리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 이 강은 헤르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바다를 경유(經由)한 다음 사해에 달하는 강이다. 요단의 수원(水源)에서 사해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217 km인데, 전장(全長)은 강의 굴곡과 경사 때문에 400 km 이상이 된다. 요단은 팔레스타인 최대의 강이며, 이스라엘 산업의 젖줄이 되는 중요한 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와도 필연적인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바, 아브라함과 롯의 분가(창 13:10)로부터 야곱의 밧단 아람 피신(창 32:10),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신 3:26-29), 사사시대에는 에홋(삿 3:26-30), 기드온(삿 7:24,25), 입다(삿 12:5,6)의 전장(戰場)으로, 엘리야의 승천(왕하 2:6-11), 엘리사의 나아만 치유(왕하 5:1-14) 등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곳에서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 요단 강은 물살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 중 한 여울에 자리잡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을 것이다.


세례를 받더니(카이 에밥티존토)

할례(circumcision)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 세례 행위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세례에 죄에 대한 고백과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가된 것은 요한에게서 유래한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증언하기를 세례 요한이 세례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예비 행위로서 의로운 행위, 곧 죄 고백을 요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받음으로써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자고 강력히 촉구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공개적으로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 세례의 전제 조건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또한 쿰란(Qumran) 종파는 제의적 부정(祭衣的 不淨)을 제거키 위해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랍비들은 유대인이 아닌 한도내에서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여하튼 요한의 세례가 온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세례(浸禮)를 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세례 의식이 침수(浸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상징하는 ‘회개와 사죄’,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새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은 계시 수준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께서는 완성된 사역의 서례를 베푸셨다(26:28).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유대 민족을 새 생명의 길로 불러내고 있었다(Robertson).



7절, 주석과 해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예수 당시 유대사회를 움직이던 지도적인 두 그룹은 사두개인들(Sadducees)과 바리새인들(Pharisees)이었다. 엣세네파(Essenes)가 있었지만 그들은 성전 제사를 거부하고 세상을 떠나 사는 은둔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으며 신약에도 나와 있지 않다.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인 열심당(Zealots)과 헤롯당(Herodians)들이 있었지만 소수였고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에 반하여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신약에 자주 등장하여 예수와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한 사람들도 그들이었으며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여 유대민족을 지배한 사람들도 그들이었다.

바리새인의 뜻은 ‘분리하다’ 또는 ‘구분하다’(to separate)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나왔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부정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였으며, 일반 대중인 그 땅의 부정한 백성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였고, 정치의 오염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했다. 바리새파는 B.C. 2세기경 경건파였던 하시딤(Hasidim)에서 유래한다고 여겨진다.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 왕 때부터 생긴 권력자들의 불화 때문에 사두개파와의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 이어서 로마의 통치와 헤롯 왕조 밑에서도 그들의 정치적인 세력은 계속 억제를 당하였고 그들은 주로 국민들에게 광범한 종교적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바리새인들은 랍비 요한 벤 작카이(Johann ben Zakkai)를 중심으로 얌니아(Jammia)에 정착하여 활동하였으며 요세푸스는 그 당시 바리새인의 수가 약 6천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보통 중산층의 사람들이었으며 대개가 상업에 종사하였다. 바리새인들이라고 다 율법의 전문가들이 아니었으며 율법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학자인 서기관들을 전적으로 의지하였다. 바리새파에 가입하려는 사람들은 엄격한 신청 절차를 밟고 바리새파의 모든 규약과 전통을 순종하겠다는 서약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비교적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바리새파 신조의 두 기둥은 율법(Torah)과 전승(Tradition)이었다. 그들은 율법의 정확한 해석에 주력하였으며 이런 바리새파 학자들의 노력으로 방대한 분량의 랍비 문헌이 이루어졌다. 그들 예배의 중심지는 회당이었고 교리에는 진보적이어서 부활과 심판 같은 교리들을 믿고 받아들였다. 바울 당시 바리새파의 두 지도적 학파는 샴마이(Shammai)학파와 힐렐(Hillel)학파였으며 바울은 힐렐 학파의 거두인 가말리엘 문하서 교육을 받았다(행 22:3).

바리새파라는 말은 신약에 약 100번 정도 언급되어 있다. 신약에서는 바리새파가 위선자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마 23장에서는 예수의 책망을 듣기도 했다. 그들은 그들의 위선으로 끊임없이 예수를 괴롭혔으나 많은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예수께서도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아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였다(눅 7:36-50).

사두개파에 대해서는 신약과 그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바리새파의 기록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들은 귀족계급이었고 부유한 상류층이었으며 헬라문화에 대해서 개방적이었고 지배권력과 협력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또한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었으며 구약 중에서 모세오경만 받아들여 엄격히 적용하였다.

사두개파에 대해서는 요세푸스의 기록밖에 없으며 요세푸스도 이 분파의 특성에 대해서는 묘사해 주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사두개’라는 이름은 ‘의롭다’라는 히브리어 ‘차디크’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지만(Epiphanius), 다윗 왕 당시의 대제사장 ‘사독’에서 나왔다는 설(Thayer, Carr)이 유력하다. 아마도 사두개파들이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사독 제사장과 자신들을 연결시킴으로 대제사장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했을 것이다. 사두개파들은 히르카누스 왕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핍박을 당하자 번영하기 시작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보수적이었고 바리새인들의 교리가 타협적이라고 거부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만 받아들이고 바리새인들의 구전(oral law)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두개파들은 바리새파의 규약들을 무효로 선언하고 모세의 율법에 없는 것이라고 배척하였다. 사실상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 즉 오경만 권위가 있는 것으로 인정했다. 그러므로 마 22:32에서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관해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더 확실한 이사야서나 욥기가 아니라 모세오경에서 인용(출 3:6)하여 대답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부활을 믿지 않았고(막 12:28, 행 23:8), 영혼은 육신과 함께 소멸(消滅)하는 것이므로 사후에 어떤 보상이나 벌도 받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런 현세주의적 견해는 사두개인들이 현실에 안주하는 태도를 취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렇지만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에 나오는 천사의 교리까지 부정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천사나 영의 개념은 특히 신구약 중간시대에 발전한 교리들로써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진리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사두개인들은 이런 교리들을 배척함으로써 자기들의 순수함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갈다.

사두개파라는 명칭은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제사장과 연관되어 나온다. 사두개파는 예수의 공생애 초기에는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그들의 지도력과 기득권을 위협하게 되자 바리새인들과 합세하여 예수를 못 박게 된다. 세례자 요한은 사두개인들을 바리새인들과 함께 “독사의 자식들”(마 3:7)이라고 꾸짖고 있으며,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께 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마 16:1)을 보여 줄 것을 요구했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 16:6)고 권면하고 있다. 복음서에 나오는 사두개파에 대한 가장 확실한 사건은 그들이 부활에 대하여 예수께 질문하는 장면이다. 사두개파는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교묘한 질문을 고안해냈다(마 22:23-33, 막 12:18-27, 눅 20:27-28).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인정하는 모세오경을 인용하여 그 문제에 대답하셨다. 예수의 부활 후, 제자들의 설교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크게 당황하게 된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사두개인들은 제자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행 4:2) 제자들을 잡아 가두었다. 행 23장에서 공회 앞에 끌려온 바울은 산헤드린 공의회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이루어진 것을 알고 부활 문제를 들고 나와 재치 있게 산헤드린의 탄핵을 피했다.


오는 것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한 부류로 묵어 기록한 것은 본서에 5회(16:1, 6, 11, 12) 나타난다. 상호 적대적인 두 파가 함께 왔다는 데에는 이의(異意)가 없으나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혤라어 본문에서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 세례 장소에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분명한 구별을 짓지 않고 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세례 요한의 질책(叱責)으로 보아 그들은 세례 모습을 관찰하러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Bruce). 이 두파는 종교적 목적에서는 상호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를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목적에서는 연합하였다 (16:1, 22:23, 34, 행 4:1).


독사의 지식들아

이는 예언적 전통에 속한 선언이다(사 14:29, 30:6). 요한은 광야에서 흔히 블 수 있는 독사들을 보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간교한 뱀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현대처럼 저속한 욕설이 없던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였던 그들에게 저주받은 뱀(창 3:14)의 후예라고 욕한 것은 위선과 변절, 기만 등으로 길들여진 그들을 향한 신적 권위에 의거한 화(禍)의 선포였다.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같은 책망을 하신 적이 있다(23:33). 이 욕설은 ‘아브라함의 자손’(9절)으로 자랑하던 그들에게 사탄의 도구인 뱀의 후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누가 … 피하라 하더냐

이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의 질책성 질문이다. 엘리야로 예언된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등장하여 천국을 선포(2절)할 때 이미 ‘임박한 진노’가 암시되어 있었다(말 3:1, 2, 4:1, 5).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이 당황스런 질문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임박한 진노를 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자각케 하고 끝내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란 말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감정을 인격화한 표현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정태적(靜態的) 감정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실제적이며 존재론적 극형(極刑)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한편 ‘임박한 진노’는 이방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영접을 준비(회개)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홀연히 다가오는 종말론적인 것이다(살전 1:10). 물론 이 진노는 A.D. 70년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됨으로서 1차 성취되었지만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마지막 심판 때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계 6:16, 17).



8절, 주석과 해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참된 방법이 제시된다. 즉 사탄이 그들에게 귀뜸해준 위선적 종교 행위와 같이 단지 형식적인 세례 행위로는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운)외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참된 회개(2절 참조)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란 말이다. 여기서 ‘합당한’(앝시오스)이란 단어는 ‘같은 분량의’란 뜻으로서 마음속의 실제 회개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위(열매)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많은의로운 일들(righteousness actions)을 행하였으나 그들의 내면은 결코 의롭지 않기(not righteousness)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는 합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사람이건 외견상 의로운 행동들을 할 수 있으나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 못한다. 즉 내면이 청결한 사람만이 오직 의로운(올바른, 좋은) 행동들과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열매들을 추수할 수 있는 것이다(Bruce). 한편 여기서는 열매가 단수(칼폰)로 묘사되었는데 비해 본 절과 평행 구절인 눅 3:8에는 복수(칼푸스)로 표현되었다. 이 차이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조화가 가능하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변화된 삶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은혜로 여겨지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될 수 있으며(21:3), 그 열매들의 뿌리는 오직 하나라는 점에서 단수(갈 5:22)로 묘사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9절, 주석과 해설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일어난 공적신학(功積神學, merit theology)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용어는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의 공적이 그 후손에게 효력을 미친다고 생각케 했다(Carson, Divine Sovereignty, pp.39ff). 유대인트리포(Trypho) 순교자 저스틴(Justine)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육신을 따라 다윗의 흩어진 자손들에게 저희가 죄인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패역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나라가 주어지리라는 생각에서 당신들도 그것을 준행하였고’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Alford). 랍비들의 교훈에도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아무도 없다’라는 말이있다. 여기서 ‘생각지 말라’(메 독세테)는 부정 명령법의 단호한 명령으로써 요한 자신과 그들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커다란 괴리(estrangement)가 존재하고 있음을 명백히 나타낸다(Robertson). 그리고 ‘속으로’(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은 그들의 외적 상황(아브라함의 혈통)이 마음의 생각(구원받을 것임)으로 변한 동작을 표시하는데 사용된다(Beck). 그러나 구원의 참된 조건은 육적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고믿음으로 영적 자손이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다(롬4장). 이처럼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오해는 사실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을 탐하는 가증한 위선적 범법 행위였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사 전개의 중심이요 도구로 삼기 위하신 것이었지 그들을 무조건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2) 구약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대로 그들이 선민이 된 것은 결코 무슨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이 선민의 지위를 유지하여 온 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 덕택이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도 여느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타락과 교만의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 (3) 따라서 그들이 선민의 혈통에 끼이게 된 것은 그저 감사할 조건일 따름이지 결코 아무때나 내세우는 특권층 신분증명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돌들로도(에크 톤 리돈투톤)

이것이 요한의 발 밑에 있던 요단 강변의 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Carr, Virnect), ‘아브라함의 자손’과는 무관한 이방인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Chrysostom). 그런데 문맥상 이 견해들을 모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자손들’(banim)과 ‘돌들’(abanim)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풍유(諷諭)가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돌’처럼 여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유대인)들의 악한 교만 때문에 그들이 마찬가지로 ‘돌’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들어 약속의 ‘자손’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실로 하나님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창 2:7) 당신이 원하시기만하면 발 밑의 돌이나 아니면 유대인들의 발 밑의 돌처럼 천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재창조하실 수 있는 것이다(롬 4:17)여기서 요한은 이방인 역시 선민의 대열(교회)에 들어와 아브라함의 특권과, 품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10절, 주석과 해설


이미 … 놓였으니

메시아의 진노가 임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곧 시간적 여유가 더 이상 없는 바로 이 시점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Broadus). 한편 세례 요한은 ‘열매 맺음’을 언급할 때에 ‘타작마당’(12절), ‘나무와 뿌리, 알곡과 쭉정이, 도끼질과 사르는 불’ 등을 연상했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심판을 도끼로 나무를 찍는 일에 비한 사실은 구약의 관용적인 용어(사 10:33, 34, 렘 46:22 등)에 준해서 심판을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제 천국이 가까이 옴(2절)과 동시에 심판도 가까이 왔다. 이 천국과 심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서 천국을 선포하는 것은, 곧 심판의 도래를 선언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그 도끼가 줄기 혹은 가지에가 아니라 ‘뿌리에’ 놓임으로 심판이 완전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놓였으니’(케이타이)는 현재 완료형으로 시행할 준비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더욱이 이 현재적 시상이 ‘찍어’, ‘던지우리라’는 말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서 심판 준비가 다 되어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불에 던지우리라

심판은 성경에서 곧잘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불로 묘사된다(말 4:1, 마 13:40, 18:8, 9, 막 9:43, 요 15:6). 이 심판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이다(히 6:8).



11절, 주석과 해설


나는 …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란 말이 막 1:8이나 눅 3:16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마태가 요한을 예수보다 하위에 두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취한것으로 보려는 학자도 있으나(Hill), 막 1:4과 눅 3:3에서도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한 사실과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에 이말은 단지 ‘나는 회개와 관련한 세례를 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즉 그의 ‘물로’(엔 휘다티)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예수의 속죄사역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예수께서 베푸신’성령과 불’의 세례가 없다면 물 속에 침수하는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적인 사역에 불과한 것임을 요한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 뒤에 오시는 이

‘내 뒤에’(오피소 무)는 시간적 순서로 ‘후에’란 의미이다. 요한은 이 표현에서 자신과 메시아의 사역적, 개인적 관계를 서술한다. ‘오시는 이’(호 엘코메노스)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피한 칭호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메시아에 대한 잘 알려진 관용적 표현으로써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와 같은 구약의 진술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즉 본 구절은 요한이 담대하게 사역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식되는 것을(눅 3:15) 스스로 불식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단지 메시아의 전구(前驅)임을 명백히 밝힌 표현이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뒤에 오는 이’가 능력이 더 많고 귀하다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덜 귀한 사람이나 제자가 뒤를 따르는 것이 상례(常例)였기 때문이다(16:24). 특히 ‘능력있다’(이스퀴로스)라는 말은 후천적인 지위나 능력이 아닌 자생적 권위와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으며(렘 32:18, 사 40:10, 단 9:4), ‘능력이 많으시니’(이스퀴로테로스)는 능력의 자의적(自意的)이고 인격적인 소유를 말한다. 더욱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인 세례 요한이 노예들이나 하는 일인 신을 들고 다니는 일조차 감당치못할 그러한 분은 누구인가.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의 지극한 겸손이지만 과장된 겸손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오시는 이’는 바로 ‘말씀’(로고스)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신을 들기도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아주 천한 신분의 노예가 자기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Edersheim).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그러한 천한 일 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극구 시인하고 있다.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이는 도덕적, 영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실로 요한의 이 고백은 예수의 충만한 신성(神性)을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가능했다(사 6:5).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오순절의 불같은 성령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태복음 3:12과 연결하여 문맥상 심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마태복음 3:11과 누가복음 3:16에 나오는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물과 성령을 예리하게 비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사역을 자기의 세례 사역보다 높이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에 불이란 단어를 추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불은 신자의 구원 이후에 나타나는 불신자에 대한 심판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즉 ‘성령’(프뉴마)을 ‘바람’으로 해석하여 신자들이 성령의 거룩한 바람에 불려가고 그 나머지는 심판의 불에 태워진다는 이중적 의미의 해석이다(Bruce). 그러므로 성령은 의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사(恩賜)요, 불은 악인 위에 내리는 맹렬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이 설명은 다음 절과 문맥상 통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해석상의 난관에 봉착한다. (1) 성경에서 심판을 “불의 세례”로 묘사한 일이 없다. (2) 세례는 정결케 하는 것이요 구원의 상징이기 때문에 심판의 불을 세례로 볼 수가 없다. (3) 요한은 여기서 물로 대표되는 자기의 세례와 성령으로 대표되는 예수의 세례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갑자기 심판의 불을 말할 리가 없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 … 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전치사 ‘엔’(en)이 성령과 불을 다 받기 때문에 성령과 불을 반대의 의미로 분리할 수 없고, 성령과 불, 두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불을 성령의 사역적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세례 받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사역의 성격을 불이라는 단어로 나타냈다는 것이다.

‘불’은 성령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연단하는 자의 불로(말 3:2, 3), 정결케 하는 불로(사 6:6, 슥 13:9, 벧전 1:7), 또는 성령 강림의 상징으로(행 2:3) 나타나기 때문에 두 단어는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상이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오순절에 불의 모습으로 오셨던 성령의 충만함이 그것을 드러낸 좋은 실례이다. 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뿐만 아니라 징벌과 심판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세례는 정결과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불의 세례를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으며 엘리야는 불 수레와 불 말들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왕하 1:9-12).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고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출 19:18)하셨다. 따라서 성령과 불의 세례란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드러낸 말이다.

한편 여기서 물 세례가 눈에 보이는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신앙 고백적, 공식적 의식이라면,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씻음과 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인정의 결과이다. 한편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진 것으로서(겔 36:25-27, 39:29, 욜 2:28) 신약 성경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용어가 아니다.



12절, 주석과 해설


손에 키틀 들고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먼저 ‘키’는 풍력(風力)을 이용하여 곡식의 쭉정이를 분리해 내는 일종의 소쿠리이다. 한편 ‘손에’(토 프투온) 든 키는 10절의 ‘놓여있는’ 도끼보다 더욱 강력한 심판의 상징이다. 한국과 유사한 유대 농촌을 연상시키는 이런 심판의 비유는 구약에서도 자주 보인다. 키를 ‘손에 든’ 메시아는 ‘타작 마당’(시 1:4, 사 5:24, 단 2:35, 호 13:3)으로 비유된 자신의 세상에서 신자로 비유된 알곡과 불신자로 비유된 쭉정이를 철저히 나누실 것이며, 또한 그 각각을 심판 또는 구원이라는 단위로(’모아’) 취급할 것이다.

그분은 무서운 ‘불’에 알곡 아닌 모든 쭉정이를 남김없이 태워 자신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한편 ‘정하게 하사’(디아카다리에이)의 ‘디아’와 ‘태우시리라’(카타카우세이)의 ‘카타’은 완료형이며 종료(終了)의 뜻을 가지고 있어 악한 자를 멸절시키는 최종 심판이 철저하고 완전할 것임을 강조한다.


곳간

‘곳간’은 중근동지방에서 주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하 또는 토굴에 설치해 두었었다. 물론 본문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 곧 어떤 악한 세력에도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처소로 이해할 수 있다(시 71:7).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본 절에서 알곡은 의인을, 쭉정이는 악한 자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하다면 악한 자가 심판의 날에 들어갈 꺼지지 않는 불은 무엇인가? “꺼지지 않는 불”은 사람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상태에서 영원히 불타는 지옥을 의미하는가? 호크마 주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은 어떤 한 시점에 이르러 소멸되는 불이 아니라 어떠한 결핍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화력을 지닌 불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벌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심판(사 34:10, 66:24, 렘 7:20)과 지옥을 의미하기도 한다(5:22).”

그러나 이 설명은 성경을 곡해한 생각이다. 예수께서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말라기 4:1이 있었을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극렬한 풀 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악인을 초개와 같이 사르는 풀무불 같은 심판의 날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풀무불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불쌍한 영혼들을 영원히 태우는 그런 지옥불이 아니라 “그 뿌리와 가지를” 살라 “남기지 않는” 그런 풀무불이다. 다시 말하면, 완전히 살라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 불인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꺼지지 않는 불”의 진상이다.

유다서 7절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는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나온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마지막 심판의 예표이다. 그렇다면 그 영원한 불은 지금도 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소돔과 고모라는 흔적을 찾을 길이 없이 완전히 없어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영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완전하고도 철저함을 의미한다.

즉 “그 뿌리와 가지를 살라 남기지 않는” 그런 불의 형벌을 영원한 형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꺼지지 않는 불”도 “계속해서 영원히 타는 불”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뿌리와 가지를 살라 남기지 않”을 때까지 철저히 태우는 그런 불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라”(렘 17:27)고 하였다.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불순종하여 몇 년 후 불이 예루살렘 궁전을 삼켰다. 그 불이 지금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꺼지지 않는다는 예레미야의 말은 예루살렘 궁전이 완전히 타서 재가 되어 없어질 때까지(벧후 2:6) 타오를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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