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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8장 1절-26절, 레위인의 봉헌식 - 매일성경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 큐티의 본문인 민수기 8장 1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회막에서 헌신할 레위인들을 봉헌하는 내용입니다. 매일성경을 큐티하고 새벽설교 준비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민수기 8장 1절-26절, 레위인의 봉헌식 - 매일성경 주석과 해설 정리


민수기 8장 1절-26절, 레위인의 봉헌식



1절, 주석과 해설


주석

8장은 등잔대(1-4절)와 레위인의 성별 의식(5-26절)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이 동일한 시간에 연속적으로 계시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본서를 위시하여 레위기와 신명기가 그 발생된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서만 사건을 기술하지 않았고, 모세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율법의 내용과 사건을 중심으로 적절하게 구성하여 기술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핏 주석은 1-4절의 내용을 등잔대를 만들었던 출 37장 이후부터 본서 끝 부분에 이르까지 어느 부분에 삽입하더라도 그 독창성을 유지한다고 하였으며, 5-26절의 내용을 3:6-13 이후의 적당한 시기에 주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여하튼 본문의 두 계시가 시간적인 연관성에는 문제점이 있을지 모르나, 이것이 성막 봉사를 위해 레위인을 구별하는 정결 예식이 행해지기(5-26절) 전에, 레위인의 대표자 아론에게 성소에 등잔불을 켤 일에 관한 지시를 내린 것으로 사건을 엮고 있다는 점에서 본장의 구성은 그 내용상 매우 자연스럽다.


1-4절

여기서 하나님은 아론에게 일곱 등잔을 등잔대 위에 올려 놓아 등잔대 앞을 비추도록 지시하셨다. 그런데 등잔대에 관한 내용은 본문 뿐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되었는데, 등잔대에 관한 계시는 출 25:31-40에, 등잔대 제작은 출 37:17-24에, 그리고 등잔대 완성은 출 40:24-25에 각각 언급되었다. 계속해서 등잔대에 소용되는 기름에 관해서는 레 24:2에, 등잔대의 사용법과 용도에 관해서는 본 장에 기록되었다. 한편 등잔대에 관한 계시가 언급된 출 25장과 본 장을 비교해 보면 본질적으로 차이 나는 것은 없고, 다만 그 등잔에 처음 점화하는 것을 대제사장 아론에게 맡긴다는 사실만이 본 장에 더 첨가 되어 있을 뿐이다. 한편 구속사적으로 이 등잔대는 어두운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추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며(요 1:4-5), 더 나아가 죄악된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춰야 하는 성도들의 사명을 예표한다(마 5:14-16).



2절, 주석과 해설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직역하면 ‘아론에게 그 일을 알리라 그리고 그에게 명하라’이다. 이는 어떤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중복하여 언급하는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이다. 한편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등잔대’에 관한 책임은 대제사장 ‘아론’에게 있으며(출 27:21), 그 계시된 내용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임재 처소는 밤과 낮을 불문하고 항상 밝게 빛나야 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율법의 규정에 따라 아론과 그 아들들의 부단한 등불 봉사에 대한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일곱 등잔을 등잔대 앞으로

성경 문학적 표현으로 ‘7’은 ‘완전’과 ‘성취’(출 20:10)를, ‘등잔대’는 ‘성령의 역사’를 각기 상징한다(계 4:5). 그러므로 ‘일곱 등잔’은 성령의 온전하신 역사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일곱 등잔의 불은 등잔대 앞, 곧 진설병이 놓여 있는 떡상을 향하여 비추게 하였는데(레 24:1-4), 이것은 일차적으로 제사장의 제사 활동을 원활하게 할 목적도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이 등잔 빛이 아무렇게나 비추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비추는 빛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즉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말미암는 모든 진리(계시)의 빛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Ainsworth). 실로 성령의 도움 없이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밝히 볼 수 없으며 그에게 나아갈 수도 없다(슥 4:6).



3절, 주석과 해설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등잔대는 중앙 줄기를 중심으로 좌우에 3개씩의 가지가 있었다. 그리하여 도합 7개의 가지 위에 등잔 7개가 있었으며, 그 등잔에 등불이 켜졌다(출 37:23-24). 그리고 대제사장 아론은 그 등잔대의 등불 빛을 앞으로 비추도록 조절해야 했다. 그런데 등잔대 맞은 편에는 진설병 상이 위치하고 있었다(출 40:29-33). 진설병 상에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덩어리의 떡이 배열되어 있었다. 이것은 또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항상 불꽃 같은 눈으로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상징한다.



4절, 주석과 해설


등잔대의 제작법

성소에서 쓰인 등잔대의 모양과 특징은 출 25:31-40, 37:17-24 을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제작법’(히, 마아세)란 ‘만들다’, ‘실시하다’, ‘준비하다’는 뜻을 지닌 ‘아사’에서 유래한 말로써 ‘행동’, ‘기술’, ‘일’, ‘만든 것’이라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영어 성경은 대부분 이를 ‘work’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는 등잔대를 ‘만드는 방법’과 그 ‘모양’이라는 복합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양식

KJV에서는 이를 ‘pattern’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작품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의 히브리어는 ‘타브니트’로 ‘모형’(模型)이란 뜻이다. 즉 원형(原型)에 대한 모사품이라는 뜻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이미 등잔대의 제반 사항과 그 형체를 보이신 적이 있다(출 25:40). 한편 이러한 사실은 이 땅에 존재하는 등잔대 또는 성막 전체가 하늘에 있는 실체의 모형이라는 것을 암시한다(출 25:9, 히 8:5). 사실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는 신약시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그림자이며 더 나아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표적 기능을 한다(히 10:1).



6절, 주석과 해설


정결하게 하라

‘정결’(히, 토호라)이란 보통 ‘흠 없음’, ‘청결’로 번역된다. 헬라어로는 ‘카다리스모스’로서, 곧 ‘정화’, ‘속죄’, ‘결례’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정결’은 도덕적이나 영적으로 혼합이나 더러움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나 사물이 갖추어야 할 조건 또는 자질(資質)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레위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려지기에 앞서 속죄의 물로 자신을 정결케 한 다음 전신을 삭도로 밀고 의복을 새로 빨았다. 이처럼 상징적으로 정결 의식을 행하고 몸과 의복까지 깨끗이 한 것은 그들이 순결한 영혼으로서, 이제부터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7절, 주석과 해설


속죄의 물

직역하면 ‘죄의 물’이다. 여기서는 그 의미상 ‘죄를 속하는 물’이라는 뜻에 서 ‘속죄의 물’로 번역한 것 같다. 이 물은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를 섞어 만든 의식용 물로써(19:2-9) 이것을 레위인에게 뿌리는 것은 그들로부터 모든 죄악된 요소를 제거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고로 결국 이 물은 인류의 죄를 씻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예표한다(히 10:22).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이것은 물로 씻겨지지 않은 부분의 더러움까지 철저히 제거하기 위한 조치로써 곧 신체의 모든 털을 면도로 깨끗히 제거하라는 명령이다. 혹자는 6:9, 18의 나실인 규례와 연관시켜 여기 ‘전신’(全身)을 온 인격의 대표격인 ‘머리’로 보아 본 규례를 단지 ‘머리 카락’을 제거하도록 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분명히 ‘전신’(히, 콜 베사람), 곧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에 대한 명령이다. 한편 온 몸을 삭도로 밀게 하는 일은 나병 환자로 판명되었다가 그 병으로부터 치유되어 정결함을 선언받을 때 치르는 예식과 동일하다(레 14:8). 그러므로 이러한 규례는 정결례를 치르기 전 인간의 죄는 마치 나병처럼 심각하고 추악하다는 교훈을 준다. 아울러 이제 하나님께 헌신된 자에게는 어떤 흠과 티도 용납될 수 없으며 오직 온전한 성결만이 요구됨을 알려준다(레 11:45).


의복을 빨게 하여

옷을 빠는 행위는 하나님과의 만남 또는 그분께 대한 거룩한 봉사를 위해서 거의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던 의식적(儀式的) 책무였다(출 19:10). 이는 장차 어린 양의 피에 자신의 예복을 빨아야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다는 영적 진리를 예표한다(계 7:14).



8절, 주석과 해설


번제물 … 소제물 … 속죄제물

레위인의 헌신을 위해 요구되어진 제사는 (1) 번제 (2) 소제 (3) 속죄제 등 세 가지였다. 그리고 그 예물은 각각 번제에 수송아지 하나, 소제에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속죄제에 역시 수송아지 하나가 요구되었다. 여기서 번제와 속죄제에 특별히 제사 예물 중 최고의 예물인 ‘수송아지’가 요구된 것은 레위인 정결 예식이 집단적으로 거행되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이 이스라엘 회중 전체를 대표하는 의식(儀式)인 만큼 비중이 높은 예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번제’는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헌신을(레 1장), 소제는 순수한 봉사와 충성 및 순결을(레 2장), 속죄제는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해(레 4, 5장) 각각 드려졌다. 그러므로 위의 예물들은 이제 하나님의 일에 임하는 레위인의 자세를 명시한 것으로, 곧 그들은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과 봉사를 아끼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영적, 도덕적으로 순결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일에 힘써야 했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도, 헌신도 모두 불가능하게 만드는 신앙의 최대 장애 요인이기 때문이다(창 3:22-24).



9절, 주석과 해설


회막 앞에 나오게 하고

여기서 ‘회막 앞’이란 5:16의 ‘여호와 앞’이란 말과 같은 의미로써 곧 번제단이 있는 성막 출구 쪽을 가리킨다. 이곳에 레위인을 나오게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성막 봉사자의 임무를 부여 받는다는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더욱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 제물로써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 드려져 이후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할 자라는 측면에서 번제단이 있는 ‘회막 앞’에 나오게 한 것이다(11절). 한편 회막 봉사에 합당한 자(30-50세의 남자)로 계수함 받은 레위인의 수효는 8,580명이었다(4:48). 그런데 당시 번제단이 있는 회막 뜰의 크기는 기껏 10 X 20m 정도에 불과했으므로 천 명을 넘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므로 레위인들의 대부분은 성막 바깥 입구 쪽에 서 있었고, 실제로 의식에 참여하는 자는 그들 중 각 지파를 대표하는 자들로 몇 백명 정도만이 뽑혀 의식에 참석했을 것이다.


온 회중을 모으고

역시 한정된 지역 안에 200만 가량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다 모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말은 이스라엘 자손 중 그들의 두령이나 지도자된 자들, 곧 각 지파의 대표자들을 모았다는 뜻으로 봄이 무난하다(Keil, Mattew Henry).



10절, 주석과 해설


안수하게 한 후에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성막 봉사를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의무를 그들에게 전가(轉嫁)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여호와께 봉사토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이는 희생제물을 바치는 자가 자신이 바치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여 자신의 모든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이다(레 1:4). 그러므로 이 안수(按手) 행위는 이제 성막봉사의 의무가 이스라엘 전 회중으로부터 레위인에게로 공식 전가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혹자(Keil, Matthew Henry)에 의하면, 이때 안수는 백성 전체에 의해 시행된 것이 아니라 각 지파의 족장들이 대표로 나와서 집행했다고 한다. 이것이 타당한 견해이다. 안수에 대한 추가적 설명은 레 24:14의 ‘손을 그의 머리에 얹게 하고’ 주석을 참고하라.



11절, 주석과 해설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요제(搖祭)란 희생제물의 가슴 부분 혹은 땅의 첫 수확 등을 제사장의 양손 위에 올려 놓고 제단 앞에서 앞뒤로 흔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 방법을 말한다. 이렇게 흔드는 행위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요제로 바쳐진 제물은 제사장의 몫으로 다시 돌려졌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레위인을 어떻게 요제로 드리느냐는 것이다. 어떤 이는 레위인을 제단 위로 올라가게 한 다음 다시 내려오도록 하는 행위를 통하여 그들을 요제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한다(Keil). 또 혹자는 실제 요제 행위가 아니라 이리 저리 움직이는 그들의 부단한 제사 봉사와 직무 수행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한다(Matthew Henry). 그러나 가장 무난한 해석은 레위인을 대신한 제물을 요제로 삼아 바쳤다는 견해이다(12절). 결국 이 레위인 요제는 레위인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바침과 동시에, 그 바쳐진 자들을 다시 제사장의 몫으로 돌렸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따라서 레위인들은 제사장의 수하에서 그들을 도와 성막 봉사를 하였다). 그런고로 이제 레위인들은 ‘요제’를 통해 세상과 구별된 자로서, 제사장에게 소속되어(3:9) 회막에서 하나님만을 위해(15절) 봉사해야만 했다(눅 9:62).



12절, 주석과 해설


레위인으로 … 안수하게 하고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드릴 제물들 곧 수송아지들에게 안수함으로써, 그 제물들을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상징하는 대속물로 삼아 그것들을 통해서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드렸다. 이것은 후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Substitution)의 원리를 예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마 20:28).


속죄제물로 … 번제물로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고. 헌신의 표인 번제물을 뒤에 드린 것은 먼저 죄 문제가 해결된 뒤에야 비로소 봉사와 헌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3절, 주석과 해설


레위인을 … 여호와께 요제로

이것은 레위인을 대신하여 드려지는 희생제물이 요제의 방식으로 드려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11절 주석 참조). 특별히 여기서 요제의 방식이 채택된 이유는 ‘요제’(搖祭)가 갖는 특수한 성격, 즉 하나님께 드려진 후 다시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왜냐하면 레위인들도 본래는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지지만 실제적으로는 제사장에게 돌려져 제사장 수하에서 성막 봉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3:5-10).



14절, 주석과 해설


구별하라 … 내게 속할 것이라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위하여, 그리하여 그분과 특별한 교제를 나누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세상과의 ‘구별’이다. 여기서 ‘구별하다’(히, 바달)란 ‘나누다’, ‘선택하다’는 의미로서 본 절에서는 완전한 분리를 가리킨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의 거룩을 요구하시며 세상과의 분리를 원하신다(레 11:45). 이는 신구약을 통해 계속적으로 요구되어온 것으로 세상(땅)에 속한 자는 결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집안 식구에게로부터까지 분리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마 10:34-36, 19:29). 그러므로 참된 경건의 제일 요소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약 1:27)이다.



15절, 주석과 해설


주석

레위인들은 성막 봉사의 나이(30세로부터 50세까지)가 되었다고 하여 무조건 성막에서 봉사할 수는 없었다. 성막 봉사 전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특별히 구별되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정결 의식’과 제사장의 수하에서 그를 도와 성막에서 봉사한다는 ‘요제 의식’을 반드시 치러야 했다. 그런 후 비로소 레위인들은 성막 봉사의 임무에 들어갈 수 있었다.



16절, 주석과 해설


온전히 드린

‘주다’(나탄)는 말이 두번 중첩되어 그 뜻을 강조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는 ‘확실히(실패없이) 수여하다’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 그 소유권이 완전히 이양되어, 어떤 세력도 그것을 더 이상 넘볼 수 없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19절, 주석과 해설


그들을 … 주어

하나님은 ‘레위인을 취하여’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제사장들(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었다(3:9). 11절에 언급된 ‘요제’의 형식을 따라서 준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원활한 성막 봉사를 위해 레위인들을 그들의 조력자로 제공하셨다. 한편 제사장들의 조력자였던 레위인들에게도 일꾼들이 주어졌다(스 2:43).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일을 책임진 자들에게 필요에 따라 적절한 ‘선물’(사람, 제물, 능력, 은사 등)을 제공하셔서 그 맡은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를 대신하여 봉사한 것은 곧 이스라엘 전체를 대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자는 그 집안 식구를 대표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창 49:3). 한편 여기서는 레위인이 선택된 목적 한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대신하여 특권을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대신하여 ‘봉사’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의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자세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들의 임무는 성막 봉사 뿐 아니라 백성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전 민족의 명예와 안전과 번영을 위해 일해야 했다(1:53). 이는 구체적으로 제사장의 제사 사역을 ‘성심껏’ 도와줌으로써, 그리고 성막을 잘 지키고 보존함으로써 이루어질 일이었다.


속죄하게

비록 제물을 드려서 죄를 속하는 일은 직접적으로 제사장이 수행할 일이었지만, 레위인들도 회막 봉사와 제사장의 제사 집례를 보조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는 일에 간접적으로 일익을 담당했다. 더욱이 그들은 성막 경호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무모한 죽음을 예방하였는데(1:53), 이 역시도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속죄’에 대한 간접적 봉사라 할 수 있다. 사실 그들의 최종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면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보존하는 동시에 백성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게 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었다. 후일 이러한 사명을 가장 명쾌히 수행하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시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며 인간에게 봉사하셨다(막 10:45).



21절, 주석과 해설


죄에서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즉 레위인들이 정결에 필요한 모든 의식적인 규범(7-8절)을 수행하였다는 뜻이다. 그 당시 의식적(儀式的) 정결은 곧 전인격적인 정결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이러한 정신이 혼탁해지면서 단지 ‘의식(형식)’에만 집착한 위선의 종교가 나타나게 되었고(사 1:10-17), 계속되는 범죄로 인해 의식적 종교 생활이 지니는 한계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에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의식적 정결’이 지니는 한계성을 극복하고 십자가에서 ‘피흘림을 통한 정결’이라는 가장 완전한 정결 규례를 완성하셨다(엡 2:15).



22절, 주석과 해설


회막에 들어가서 … 봉사하니라

곧 회막의 뜰에서 봉사했다는 뜻이며, 혹은 광야 이동시 운반을 위해 분리된 후 그것들을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회막이 설치된 후 소위 언약궤(법궤)가 있는 지성소는 물론이고, 분향단과 등잔대 및 떡상이 있는 성소 안으로는 일반 레위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 성소 안으로는 오직 제사장들만이 제사 사역을 위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오직 일 년에 하루 곧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24절, 주석과 해설


이십오 세 이상으로

앞 부분에서는 레위인의 봉사 연한을 30-50세 사이로 규정하고 있다(4:3-49). 그러므로 성막 봉사의 최소 나이가 본문과는 5세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는 상호 모순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앞 부분에서 언급된 30세는 광야의 성막 이동시 그 성막의 기구 및 부품들을 운반할 수 있는 자격자로서의 최소 나이를 언급한 것인 반면, 여기서는 (후일) 성막이 정착된 후 그 성막에서 일할 수 있는 자의 나이를 언급한 것이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Pulpit Commentary, Keil). 아마 광야에서의 성막 물품 이동에는 그만큼 주의력을 요하는 나이가 요구되었기 때문이고 후일 성막 봉사에는 그만큼 체력을 요하는 나이가 요구되었기 때문인 듯하다(Matthew Henry). 따라서 후일 성전이 완전히 건립된 다윗 시대(대상 23:24)에는 그 봉사의 최저 나이가 20세로 더욱 낮아진 사실을 볼 수 있다(4:3). 그리고 이것은 실제 운용상 25세 이후 5년의 기간은 견습생(見習生)으로 일하고, 30세 이상부터 비로소 공식적인 봉사에 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상 23:24에서는 그 견습 연한이 20세로까지 더욱 낮아졌다는 의미가 된다.



25절, 주석과 해설


오십 세부터는 그 일을 … 아니할 것이나

여기서 ‘일’(히, 아바드)이란 주로 노예가 수행할 수 있는 정도의 힘든 노동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희생제물의 각을 뜨거나 장작을 마련하여 성막 기구들을 걷고 세우며 운반하는 등의 무겁고 힘든 일을 의미한다(Keil). 물론 50세 이상자들도 이 일을 감달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기력이 쇠한 관계로 직무 수행 중 자칫 실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일에서 제외된 것 같다.



26절, 주석과 해설


그의 형제와 함께

여기서 ‘함께’라는 말의 히브리어 ‘에트’는 ‘ … 의 곁에’, ‘가까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더불어’ 일한다는 의미 외에 ‘조력하다’(assist)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NIV는 이를 ‘형제들을 도와’(assist their brothers)로 번역하였다. 즉 봉사 연령의 상한선인 50세 이상이 되면 그들은 레위인의 직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수행하는 젊은 레위인의 조력자로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돕는 직무

여기서 ‘직무’의 히브리어 ‘미쉐메레트’는 ‘보호하다’, ‘시중들다’는 뜻의 ‘솨마르’에서 파생된 말이다. 결국 ‘돕는 직무’란 ‘보조적인 일’, ‘지원하는 일’ 등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이는 주로 성막의 각종 비품들을 관리하거나 견습 중에 있는 레위인들을 교육하는 등 육체적인 무리가 따르지 않지만 경륜과 지혜가 필요한 직무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처럼 50세 이상된 레위인들도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나름대로 명예로운 봉사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실로 하나님께 대한 봉사는 나이나 환경을 초월하여 실행되어야 할 신앙인의 지상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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