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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장 22절-30절, 귀신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가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매일성경 큐티의 본문인 마태복음 12장 22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 내시며 사람을 고치시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낸다는 어리석은 말을 되풀이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22절-30절, 귀신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가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마태복음 12장 22절-30절, 귀신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가



22절, 강해 주석 해설


그 때에(토테)

‘그 때’가 언제인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9-21절 사건보다 훨씬 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다이모니조메노스 뒤플로스 카이 코포스)

헬라어 원문의 정확한 의미는 ‘그 사람은 귀신이 들리게 되었으므로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자’이다. 마태는 그 사람의 병을 원인이 특별히 ‘귀신에 의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능력이 귀신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모함(謀陷)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예수가 다윗의 자손 메시아이심을 알지못한 바리새인들이 바로 ‘영적으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라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마태를 위시한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본 사건이 이적이라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바리새인들과 충돌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본 치유 이적을 간략히 소개하는데 그쳤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그 근본적인 장애 요인이었던 영적 장애(귀신들림)에 대한 근원적인 치유를 하심으로써 육체적인 장애(시각, 언어)를 제거해 주셨다. 실로 그분은 영. 육의 온전한 구세주이시다.



23절, 강해 주석 해설


무리가 다 놀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죽어버린 교훈에 이미 익숙해 있었던 무리들은 예수의 생명력 넘치는 이적 앞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실재하는 천국은 기습적으로, 각 사람들의 마음에 돌입한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예수의 치유의 기적을 보고 놀란 사람들 중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낸 반응의 말이다. 이 물음은 헬라어’메티’으로 시작되는 부정 의문문으로서 부정(不定)하는 답을 예상하고는 있으나 그것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이 아직 없기 때문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말은 ‘아무래도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나 그들 자신들이 메시아가 오면 표적을 행하리라고 하는 사실(38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기적이 혹시 메시아의 징표(徵表)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실로 예수가 권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은 무리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께서 세상의 왕과 같은 권세를 행사(行使)하지 않고 지금껏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취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아됨에 대해 의혹을 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이후에 기독교 공동체가 이해하게 되었고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상(像)과 유대 국가의 멸망이후 포로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유대인의 정치적 메시아상(像)이 근본적으로 불일치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파생된 저들의 메시아니즘(Messianism)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난과 섬김의 삶을 통한 인류구원을 위한 메시아의 길을 걸으셨다. 한편 그곳에 모든 사람들, 즉 병고침을 받은 자나 그 사건을 지켜본 자들은 예수가 메시아이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나 그곳에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을 감히 단정(decisive)적인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는 추측이 있다.



24절, 강해 주석 해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예수의 치유 능력을 보고 놀란 사람들 중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난 반응 속에서 나온 말이다. 첫 번째 부류의 삶들이 품고 있는 일말(一抹)의 희망, 즉 예수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축(一蹴)하고 그 확신을 제거키 위한 노력에서 나온 적대적 표현으로, 실제로 예수와 그들 사이의 바알세불 논쟁의 계기가 된 문구이다. 사탄이 예수의 영(靈)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가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막 3:30, 요 8:48). 한편 귀신의 왕 바알세불은 간혹 바알세붑으로도 불리우는데(왕하 1:6), 이 말은 땅의 주인인 ‘바알’이라는 뜻으로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우상의 이름에 그 기원이 있다. 후에 유대교에서는 귀신들의 두목인 사탄을 가리키는 수 많은 명칭들 중의 하나로 취급하였다(10:25).



25절, 강해 주석 해설


저희 생각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 시점에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가를 비로소 명확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 … 동네 … 집

‘나라’(바실레이아)는 영토적 지역을 말한다기 보다는 전체를 움짖일 수 있는 힘으로서 왕권, 주권(主權)을, ‘동네’는 정치적 사회, 즉 이웃 공동체 집단을, ‘집’은 건물이 아니라 가장(家長)을 위시한 질서 체계가 바로 잡힌 가족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집단일수록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세력에 의해서는 하나로 결집되어 그 세력을 막아내지만 내부에서 발생되는 싸움에 의해서는 완전히 파멸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사탄이 그의 부하들인 귀신을 조종(操縱)하는 사탄의 나라도 동일한 것이다(H. Kruse). 즉 만약 귀신들(demons)의 군주인 사탄이 그의 부하들을 쫓아낸다면 그는 사실상 자신을 쫓아내는 것과 다를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부하들은 바로 그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Broadus). 한편 여기서 귀신들은 흔히 역사의 전면에서 실제적으로 활약하는 악의 세력으로, 사탄은 그 실제적 활약자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궁극적 악의 실체로 이해된다.



26절, 강해 주석 해설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내면

이 말은 사실상 모순(contradiction)이다. 사탄의 나라에는 사탄만이 귀신들의 왕이므로 따라서 이말은 사탄이 그의 부하세력인 귀신이 사람을 사로 잡고있는 상태에서 그를 축출해 내버리는 것을 뜻하며 이는 그들 나라의 파멸을 자초(自招)하는 결과가 된다. 실로 사탄은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통찰력과 분별력이 있다는 점에서 자기 파괴적 행동은 삼가 할 것이다. 그러나 엡 6:12, 계 20:7-10에 의하면 사탄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분명히 존재하게 됴마 것이다.



27절, 강해 주석 해설


너희의 아들들

단순히 ‘너희(바리새인) 사람들’(your peoele, NIV)을 의미할 수도 있고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자들, 즉 제자들이나 그 당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너희늬 아들들’이란 표현이 바리새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아들들’의 의미로서 옛부터 가나안과 유다에 족속해 있던 마술사(삼상 28:7-14, 신접한 자 혹은 박수)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들을 히브리어로는 ‘오브’라고 부르는데, 이는 원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풀무같은 도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신접(新接)한 자가 그것을 가지고 기체와 같은 영(靈)을 구멍에서 불어내는 동작을 취한데서 나온 이름이다. 물론 이스라엘에서는 일찍이 이들의 행위를 금지(禁止)시킨바 있다(레 19:31, 20:6, 27, 신 18:11). 그러나 왕조시대에는 이방 문물과 종교의 수입으로 인해 이러한 행위와 이에 대한 미신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왕하 21:6, 23:24, 대하 33:6). 물론 본문에서의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혹은 추종자들 역시 그들 역시 조상의 영향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는 등의 능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몇몇 그릇된 상황과 관습에 의존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행 19:13, 외경 Tobit 8:2,3, Justin Martyr 85). 특히 유대사가 요세푸스의 보고에 따르면(Josephus, Antiq. VIII, 45-48, id., Wars VIII, 185) ‘솔로몬은 귀족 축출(逐出)법을 터득하여 각종 질병을 치료하고 후대에 전하였는데, 그 방법에 의해 치료받은 자가 다시 그 귀신의 지배를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치료법을 구사(驅使)했다. 이 치료법은 오늘날 까지도 효과적이다. 내가 목격한 바로 베스파시안(Vespasian) 황제 때 엘리아살(Eleazar)이라는 사람이 황제와 그 아들, 지휘관들과 군중들 앞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치료법은 솔로몬이 창안한 것 중 하나로 한 식물 뿌리로 된 반지를 귀신들린 자의 코에 꿰고 그것으로 귀신을 끌어내어 그 사람이 졸도하면, 그 때 솔로몬의 이름과 솔로몬이 만든 주문(呪文)을 외우면서 귀신에게 다시는 그 사람에 들어가지 말 것을 명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솔로몬의 지혜와 기술이 매우 명확히 증명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의해 전수(傳受)된 주술이나 마술들로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질병과 슬픔과 악에서 구원받으려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더욱이 초대 교회 교부였던 이레니우스(Ireneaus) 는 그의 ‘이단 교서’(2권, 4:2)에서 유대인들이 사술(black magic)을 사용하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귀신을 쫓는 습관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 바리새인들이 말한대로 예수께서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 역시 바알세불의 도움에 의해 귀신을 축출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예수의 말씀의 요지였다.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예수께서는 저들이 제자들의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 일체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등의 말씀은 없으셨다. 다만 바리새인들은 저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서 따라서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즉 ‘너희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면 그들은 너희들이 내게 대하여 잘못된 말을 한 것, 즉 바알세불의 힘을 입었다고 한 것 때문에 너희를 위선자요 죄인으로 선고하리라’고 하는 표현이다. 실로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았다면, 유독 예수만을 바알세불의 능력하에 있다고 하는 것은 부당(不當)한 일임에 분명했다. 예수의 이 반론에 의해서 이제는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자들의 귀신축출 행위가 바알세불에 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 또한 예수의 행위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28절, 강해 주석 해설


하나님의 성령

평행구절인 눅 11:20에는 ‘하나님의 손’으로 나온다. 하나님의 손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미하는 구약적 표현(출 8:19, 31:8, 시 8:3)으로서 ‘성령을 힘입는’것과 결과적으로 동일한 묘사이다. 예수의 귀신 축출행위와 사탄과의 연관성은 논리적 모순임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시기심을 밝혀내신 예수께서 이제 자신의 행위가 성령의 임재와 사역에 의한 것으로 역(易)으로 그리스도의 권세가 지상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임을 주장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신약에는 천국이 이미 임했다는 사상(마 12:28, 눅 11:20, 17:20-21)과 앞으로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마 24:29-31, 26:64, 막 9:1, 13:26, 14:25, 눅 22:16, 18, 21:27)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현재 임하여 있는 천국과 미래에 임할 천국은 무엇인가?

여기서 “임하였느니라”는 헬라어로 ‘에프다센’인데 과거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을 말하는 부정과거형이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웨슬리(Wesley)와 스티어(Stire)는 본문을 “하나님 나라는 너희가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너희 앞에 전개되어 있다”고 해석하였다. 신약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왕국은 꺾였고 종말은 시작되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했다고 선포한다(눅 10:18, 히 9:26).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은 분명히 사탄의 왕국이 궤멸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적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새로운 피조물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다(요 1:12, 고후 5:17, 빌 3:20).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요 5:24)진 것이다.

그럼 그 나라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는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나라란 인간의 마음속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미치는 구체적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던(Dunn)은 ‘이미 실현된 종말’(the realized eschatology)이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종말론적인 성령’(the eschatological Spirit)은 예수에 의해서 이 땅에 강림했으며 또한 종말론적인 나라(the eschatological Kingdom)도 역시 예수에 의해서 그 시작이 알려졌다. 종말론적인 성령이 활동하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활동도 진행되고 있으며 그 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역사의 현장 그 한 복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적으로 볼 때 단순한 축복의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미치는 전 영역을 가리킨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성육신 사건으로 인해 이 땅에 실제적이고도 종말론적으로 도래했으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이 “썩어짐의 종 노릇”에서 해방되어 마침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롬 8:21). 그뿐 아니라 구속받은 자들까지도 탄식하며 우리 몸의 마지막 속량을 기다리는 것이다(롬 8:23). 그것은 훗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 형태로 도래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천국은 이미(already) 도래하였으나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인 긴장(eschatological tension) 속에서 치우치지 않는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종말적 삶의 자세란 언제(when) 세상의 종말이 오느냐가 아니라 오늘이라는 종말적 순간을 어떻게(how) 살아가느냐 하는 것에 있다.



29절, 강해 주석 해설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이 구절에 대해서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종말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구절은 종말의 완성으로 이해될 필요없이 순수히 예수의 사역(work)을 나타내는 것으로, 즉 기독론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몇몇의 유대 문헌에는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아가 사탄을 결박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Moses, 10:1, 계 20:2). 여기서 ‘강한 자’란 사탄을 가리키는데 예수는 자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행동을 통해 (1) 자기가 이미 사탄을 결박하고 있다고 함과 (2) 따라서 자신이 귀신의 왕인 사탄 보다도 더 강한 자(’능력이 더 많으신 이’, 3:11)라는 사실과 (3) 이 세대의 종말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존하여 악의 권세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재림으로 인한 완성된 종말의 날이 될 때까지 그 강한 자인 사탄의 세력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겠지만 그는 이미 예수에 결박되어 있는 존재이다. 한편 ‘강한 사람’의 뜻인 ‘이스퀴로스’이 손과 관련된 기능, 수완이 좋은 사람을 나타내며 특별히 사탄에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견해(Campbell)가 있으나 본문의 맥락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세간’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퀘에’의 문자적 의미는 ‘그릇들’(vessels)이다. 이는 결국 사탄에게 사로 잡힌 자, 즉 귀신들린 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늑탈하다’의 뜻인 ‘디아르파조’은 약탈을 하되 모두 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KJV에 의하면 특별히 이 ‘늑탈하다’(plunder)라는 말은 전시(戰時)나 내란(內亂)때 적들로부터 물건을 샅샅이 약탈당한다고 하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전복자 예수께서 지금껏 사탄이 마음대로 지배하던 이 세상에서 영혼과 육체 모두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물건을 빼앗아 악의 세력에서 건져질 것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빼앗은 그들 모두를 다시 인생의 원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되돌려 보내시어 하나님이 주시는 힘, 즉 성령에 따라 사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사역은 십자가, 부활 사건 이전에 부터 이미 활발히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같은 사실은 사 49:24, 25의 예언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지금은 이미 도래된 메시아의 시대이고 예수께서 사탄의 소유물이 되었고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품으로 회수(回收)하시는 기간이다. 따라서 지금은 예수에 의해 사탄의 집이 약탈(掠奪)되어 가는 과정이며 사탄의 집이 모두 털린 후에, 즉 악의 세력에서 모든 사람이 풀려난 후에 예수의 재림으로 결박된 사탄은 영원히 멸망 당하게 될 것이다. 눅 10:17, 18의 칠십 명의 전도인들에 의하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그들에게도 항복하였으며 예수께서는 사탄이 하늘로 번개같이 떨어짐을 목격했다고 하였다. 사탄이 권세의 무너짐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계속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복음전파와 그 실천적인 삶에 의해 점차 진전(development)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30절, 강해 주석 해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

여기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의 반대적 의미는 막 9:40과 눅 9:50에 의하면 ‘우리’(마가) 또는 ‘너희’(누가)를 ‘위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무관심한 자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며 누가복음에선 예수를 따르기를 거부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비해 본문의 논지는 매우 직선적으로 중립적인 태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권세와 사탄의 권세가 서로 투쟁하는 와중(渦中)에서 중립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함께 아니하는 자’에 대해 크리소스톰은 ‘마귀’로, 벴겔과 네안더는 앞에서 나온 ‘유대 마술사’ 등을 언급한다고 본다. 이 중에 크리소스톰의 견해가 환영받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함께 아니하는 자’란 단순히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해 무관심한 자, 예수와 연합(union)하기를 싫어하는 자를 말한다기 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바리새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공공연히 예수를 비난하고 서로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

구약에서 흔히 하나님이 추수하는 분으로 묘사되었듯이 신약에서 예수는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모으고 또한 추수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3:12, 13:30).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기적행위를 보고 그를 메시아로 고백하려는 자들에 대해 예수가 바알세불의 힘을 입은 자라고 거짓 증언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려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확산을 막기 위해 예수로 부터 사람들을 흩으려는 자들이 바로 ‘모으지 아니하는 자’, 곧 흩어버리는 자들인 것이다. 실로 예수의 위대한 사역은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모으고 또 모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사탄은 되찾은 양 조차도 다시 빼앗고 될수 있는 대로 그들을 흩으려는 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여하튼 본문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결단코 중간적 입장에 머무를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정녕 예수의 사역에 적극 동참치 않는 자들은 예수의 나라를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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