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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하 19장 40절-20장 13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9장 40절부터 20장 13절까지의 말씀은, 압살롬의 반역 이후에 또다시 이스라엘 지파와 유다 지파 사이의 다툼과 세바의 반란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고달픈 상황들을 맞이합니다. 큐티와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9장 40절-20장 13절



사무엘 하 19장 40절-20장 13절, 주석과 해설 정리



19장 40절, 주석과 해설


길갈로 건너오고

‘길갈’은 여리고 근처이며 요단 강변에 위치했다(19:15). 이곳은 역사적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강변이었으므로 많은 무리의 집합이 가능하였다(수 4:19, 5:10-12, 9:6, 10:6, 14:6, 삼상 7:16, 11:14, 15, 13:7-9).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

여기서 유다 백성은 모두 모인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절반 밖에 모이지 못한 까닭은, 유다 백성이 다윗 왕의 예루살렘 귀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다윗 왕이 요단 건널 때에 그 환궁 행사의 주도권은 유다 지파가 행사하였다. 반면,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는 단지 그 주변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모일 수 있었다(Pulpit Commentary, Lange).



41절, 주석과 해설


온 이스라엘 사람

이는 뒤늦게 왕의 귀환 소식을 듣고, 급히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과 합류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Clericus).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둑하여

뒤늦게 길갈에 도착한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들은 유다 지파 단독으로 왕의 귀환을 주도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유다 지파의 단독적인 행사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환궁(還宮) 문제는 온 나라의 협의하에 이루어져야 했으며, 이미 이스라엘 각 지파는 이 문제를 놓고 의논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9, 10절), 유다 지파는 그 결정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의 불평은 유다 지파와의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지파는 사사 시대 때부터 주도권을 장악했던 지파로서, 다윗 시대에 나라의 주도권이 유다 지파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삿 8:1, 12:1). 또한 이들이 유다 지파 소속인 다윗 왕 앞에서 유다 지파를 정면으로 불평한 것으로 보아, 유다 지파를 특별히 배려하고 있는(11-15절) 다윗 왕에 대한 불만도 가진 듯하다(The Interpreter’s Bible). 결국 이러한 이스라엘 지파의 불평은 수그러들지 아니하고, 곧 세바의 반란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20:1, 2).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

이는 다윗 왕이 압살롬에게 쫓기어 예루살렘으로부터 도망갈 때, 왕과 함께 동행했던 무리들을 가리킨다(15:17, 18).



42절, 주석과 해설


모든 유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여기서 ‘대답하되’란 말은 유다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단순히 답변한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에는 ‘대적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알’이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 이 구절은 유다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적하는 감정 섞인 말투로 그들에게 답변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는 양 지파간의 갈등이 심각한 정도로 발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연합된 공동체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한다. 즉 공동체의 연합을 깨뜨리고 결국에 모든 인격들을 함몰시키는 질투심과 불건전한 경쟁심 및 이기심은 외부에서 도전해오는 악한 세력보다 더 위험하다(고전 1:10-17, 갈 5:20). 이스라엘은 이러한 내부의 적에 의해 또 한 번의 분열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왕의 환궁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공동으로 추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도권을 유다가 가지고 이 일을 진행한 것에 불만을 품고 이스라엘 10 지파가 유다를 공박함으로 분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드러난 이유에 불과하며, 분규의 근본 원인은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 계속적으로 팽배해 있던 시기심과 경쟁심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은 솔로몬 사후(死後) 남북이 분열하게 된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왕은 우리의 종친인 까닭이라

여기서 ‘종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로브’는 ‘가까운’, 또는 ‘같은 혈족인’이란 뜻이다. 즉, 이 말은 다윗 왕이 자기들과 같은 유다 지파에 소속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러한 유다 지파 사람들의 말은 사실이지만, 당시로서는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의 지역 감정을 촉발시키는 촉진제 역할만을 할 뿐이었다.


왕의 것을 조금이라도 얻어 먹었느냐

이는 유다 지파가 다윗 왕으로부터 아무런 특혜(特惠)도 받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말이다. 이와 같은 유다 지파 사람들의 말은 아마도 이전에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베냐민 지파 출신의 사울 왕으로부터 어떤 특혜를 입은 사실을 간접적로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삼상 22:7, Keil, The Interpreter’s Bible).



43절, 주석과 해설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 왕이 자기 지파 소속이라고 주장한 유다 지파의 말(42절)을 반박하기 위해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은 자기들의 숫자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즉, 다윗 왕은 다른 모든 왕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의 왕이며 어떤 특정한 지파의 왕이 아니므로, 다윗 왕은 유다 지파보다 훨씬 많은 열 지파나 되는 자기들과 더욱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Lange). 따라서 자신들은 다윗 왕의 귀환 계획에 마땅히 참여했어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은 자기들이 열 지파라고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들로부터 두 지파를 제외시켰다. 이에 대해 혹자는 (1) 이 두 지파가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라고 주장한다(The Interpreter’s Bible, Keil). 그러나 본 문맥의 내용상 레위 지파가 유다 지파와 더불어 이스라엘 열 지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 주장은 애매하다. (2) 혹자는 이 두 지파가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라고 주장한다(Smith). 그 이유로서 스미드 박사는 시므온 지파의 미미한 영향력과 유다 지파에 복속된 그 지파의 지역적 특수성을 든다. 그러나 다윗 왕의 귀환 문제라는 첨예한 문제를 놓고 혈연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유다 지파에 대해 숫적 우위성의 공동전선을 펴야 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기서 구태여 약한 지파라고 해서 시므온 지파를 제외시킬 리는 없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지파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라고 보아야 한다(Lange, Thenius). 왜냐하면 이스라엘 열한 지파 중 유일하게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의 단독 행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즉, 베냐민 지파의 실력자인 시므이는 천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제일 먼저 왕 앞에 배알(拜謁)했던 것이다(16-20절). 따라서 이러한 베냐민 지파의 움직임은 분명히 다른 열 지파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다. 결국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왕국이 여로보암에 의해 돌로 쪼개질 때 유다 왕국에 속하게 된다(왕상 12:21).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이스라엘 열 지파는 다윗 왕의 귀환 계획에 자신들이 참여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여기서 ‘강경하였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솨’는 ‘완강하다, 거칠다, 격렬하다, 날카롭다, 쓰리다, 고집이 세다’는 뜻이다(창 49:7, 출 13:15, 32:9, 33:3). 따라서 이 구절은 유다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욱 큰 목소리로 감정을 섞어 격렬하게 말하였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에 의해 저질러질 새로운 반역의 조짐을 느낄 수 있다(Hertzberg).




20장 1절, 주석과 해설


거기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솸’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이 말은 장소적(場所的)인 의미로서 ‘거기서’를 뜻한다. 따라서 이 말은 세바라 하는 자가 지파 간의 다툼이 벌어지고 있던 길갈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2) 또한 이 말은 시간적(時間的)인 의미로서 ‘그 후에’ 또는 ‘그 일로부터’를 뜻한다(왕상 17:13). 따라서 이 용어에서 우리는 결국 다윗 왕의 환궁(還宮)을 둘러싼 지파간의 다툼(19:41-43)이 원인이 되어 세바의 난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Lange).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여기서 ‘불량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 벨리야알’은 ‘무익한 사람, 무가치한 사람’, 또는 ‘파괴적인 사람’이란 뜻이다(16:7). 곧 부도덕하고 사악한 자로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무익하고 쓸모없는 자라는 뜻이다(고후 6:15).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혹자는 여기서 ‘비그리의 아들’이란 말은 아마도 베냐민의 둘째 아들인 ‘베겔의 후손’(창 46:21)을 뜻하는 것 같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그리고 혹자는 베냐민의 둘째 아들인 베겔이 사울 왕의 조상인 ‘베고랏’(삼상 9:1)과 동일 인물이라고 가정하면서, 아마도 세바는 사울 왕의 친척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Hertzberg).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는 불충분하다. 아무튼 세바가 사울 왕의 친척이든 아니든, 그는 베냐민 지파의 족장급 인물로서 사울가를 지지하는 과격한 선동가적 인물임은 분명하다(Lange).


그가 나팔을 불며

여기서 ‘나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파르’는 숫양의 뿔로 만든 양각(羊角) 나팔을 가리킨다. 이 쇼파르는 2개의 음만을 내기 때문에 악기로 사용되지는 않았으며 다만 신호용(信號用)으로 사용되었다. 즉, 이것은 임박한 재앙을 경고하거나 파문(破門)을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다(E. Werner). 이렇게 볼 때 세바가 쇼파르를 분 것은 다윗 왕의 파문과 자신의 반란의 시작을 선포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여기서 ‘분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헬레크’는 ‘기업’ 또는 ‘분깃’을 의미하며(창 14:24, 민 18:20, 신 10:9, 12:12, 14:27), ‘유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할라’는 ‘유산, 소유물’ 등을 의미하는데(왕상 12:16, 대하 10:16, 사 58:14), 구체적으로는 공히 ‘토지’(수 18:5, 6, 7, 9, 22:25, 27, 왕하 9:36, 37)나 ‘백성’(신 32:9)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다윗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움으로써, 그들의 토지나 백성들이 다윗의 간섭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세바의 반역적인 언사였다.


이새의 아들

세바는 ‘다윗 왕’이라고 하는 명예로운 호칭 대신 ‘이새의 아들’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러한 호칭은 다윗을 일개 필부(匹夫)의 아들로 격하(格下)시키는 호칭으로서, 곧 다윗을 모욕하는 것이었으며(삼상 20:27, 22:7, 25:10),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적인 표현이었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여기서 ‘장막’(히, 오혤)은 ‘집, 처소’란 의미인데, 이 용어는 출애굽 이후 광야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 생활을 한 사실로부터 나온 용어이다(Fay, Wycliffe). 한편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집으로 되돌아가는 행위는 다윗 왕에게 등을 돌려 그의 통치를 거절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R. Payme Smith). 그런데 이때 세바가 반란의 격문으로 외친 이 말은 후일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질 때 여로보암에 의해 재주창된 말이라는 점에서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왕상 12:16).



2절,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 올라가


이는 세바의 반역적인 말에 동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길갈’에서 길을 돌이켜 세바를 따라 ‘에브라임 산지’로 올라갔음을 보여 준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여기서 우리는 지파 간의 감정 때문에, 자기들이 기름 부어 세운 다윗 왕을 또 다시 배반하는 이스라엘 지파의 반역적 행위를 발견할 수 있다.
유다 사람들은 …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세바의 반란이 시작된 길갈은 요단 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저자는 길갈을 넓은 의미에서 요단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한편, ‘합하여 … 따르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크’는 ‘들어붙다, 연합하다’는 뜻을 가진다(창 2:24, 신 28:60, 욥 19:20, 29:10, 시 102:5, 119:25, 31). 따라서 이 말은 유다 사람들이 다윗 왕을 철저하게 호위하는 가운데 길갈로부터 예루살렘 성까지 모시고 왔음을 의미한다.



3절, 후궁 열 명 … 생과부로 지내니라


여기서 열 명의 후궁(後宮)은 예루살렘 성에 남겨졌던 후궁들로서(15:16),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백주에 강간했던 후궁들이었다(16:21, 22). 따라서 다윗 왕이 이들을 별실에다 가두어 격리시켜 놓은 것은 이들의 불결함 때문이었다(Grotius). 그러나 한편으로 다윗 왕은 수치를 범한 여인에 관한 하나님의 율법 조항(신 9:1-4)을 따라 이와 같이 조치한 것이었다. 즉, 모세 율법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아내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신 24:4). 더구나 아들과 동침한 여인과 다시 동침하는 행위는 가증한 근친상간죄에 해당되기 때문에(레 18:6-8), 다윗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다윗 왕은 이들을 성밖으로 내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이 일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죽이거나 내쫓는 가혹한 형벌은 주지 않았다.



4절, 주석과 해설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 불러 모으고

다윗 왕은 세바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아마사를 국민병 모집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이러한 조치는 지난번 아마사에게 제의한 약속(19:13)을 이행하기 위한 예비 조치였다. 즉 아마사의 등용 기회를 찾고 있던 다윗은 세바 반란 진압을 아마사에게 맡김으로써, 반란군을 진압하고 요압의 기(氣)를 꺾는 동시에 아마사와의 약속을 이행하는 3중 효과를 노렸다.


너도 여기 있으라

이는 국민병을 소집하고 아마사도 그곳에 함께 있으라는 말이다. 다윗 왕이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은 세바의 난을 진압할 군대의 사령관으로 아마사를 임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다윗의 이와 같은 조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즉 (1) 다윗은 무엇보다도 아마사를 군대의 총사령관에 임명함으로써, 거칠고 반항적인 요압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며, (2) 또한 압살롬 반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마사를 내세움으로써, 압살롬의 난에 선봉장(先鋒長) 역할을 한 유다 지파의 사기를 북돋워 주려 했다(19:13). 그러나 이와 같은 다윗 왕의 의도는 군대 소집의 지체와 요압의 반발로 인하여 실패하고 만다.



5절, 아마사가 …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아마사가 군대의 소집을 기한내에 완료하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아마사의 무능력 때문이었다(Payne). 즉, 다윗 왕은 요압에게 하듯이 아마사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아마사는 경험 많고 노련한 요압에 비해 실무(實務) 능력이 현저하게 뒤떨어졌다. 그러기에 아마사는 마하나임 전투에서 압살롬의 대군을 이끌고도 요압의 소수 정예병력에 의해 격파당했던 것이다(17:25, 18:6-8). (2) 유다 사람들의 비협조 때문이었다(Keil, Lange). 다시 말해서 아마사는 반군의 지도자였다는 이유로 유다 백성들로부터 의혹과 불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유다 백성들은 아마사의 모병(募兵)에 응하지 아니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다윗의 아마사 등용 정책(19:13)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즉 다윗의 아마사 등용 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겨왔던 유다 사람들은 반역자요 변절자인 아마사 휘하에 들어가기롤 꺼려함으로써, 아마사의 등용을 방해하였다. 이에 다윗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아비새에게 반란군 진압을 명함으로써 사태를 일단 수습하였다(6절).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백성들과 측근을 무시한 행동으로, 특히 그의 측근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기는 일이었다. 결국 과격하고 정치욕이 강했던 요압은(3:27, 18:14) 질투심과 원한에 의해 반역자 아마사를 살해하였다(10절).



6절, 주석과 해설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아마사의 지체에 불안을 느낀 다윗 왕이 아비새에게 기습적인 군사 행동을 명한다. 여기서 다윗 왕이 아비새를 세바 진압의 지휘자로 임명한 것이 흥미롭다. 즉 평소 같으면 그동안 이스라엘의 군장(軍長)으로 계속 활약해 왔던 요압에게 명령했을 것이나 이례적으로 동생인 아비새에게 지휘권(指揮權)을 준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다윗 왕은 자신의 명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인(18:14) 난폭한 성미의 요압을 상당히 못마땅해 했음을 알 수 있다(Wycliffe Bible Commentary, Lange).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세바의 난이 압살롬의 난보다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다윗 왕의 예상이다. 그 근거로서 다윗 왕은 세바의 난과 압살롬의 난 사이의 근본적인 성격 차이를 생각한 듯 하다. 즉, 압살롬의 난은 압살롬 개인의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세바의 난은 오래 묵은 지파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번 세바의 난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할 경우, 그 피해는 압살롬의 난 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온 나라에 미치게 될 것이라고 다윗은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판단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파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그 세(勢)가 약화된 르호보암 때에는 세바의 주창과 같은 구호를 내건 여로보암에 의해 나라가 둘로 나뉘어졌기 때문이다(왕상 12:16, 17).


네 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여기서 ‘네 주의 부하들’이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왕의 시위병들과 정예 군사들을 가리킨다(7절). 한편 여기서 다윗 왕은 지난번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갔을 때 아히도벨이 베푼 모략과 똑같은 지시를 여기서 내리고 있다(17:1-3). 즉, 일단 반기의 기치를 든 세바가 자기의 세력을 키워 대항해 오지 못하도록 그에게 시간적인 여유를 전혀 주지 않고 즉각적인 공격을 가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우리들을 피할까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칠 에네누’를 직역하면, ‘우리의 눈을 빼앗을까’란 뜻이다. 즉, 여기서 ‘히칠’의 기본형 ‘나찰’은 ‘빼앗다, 찾다’는 뜻이며(창 31:16, 삼상 7:14, 삼상 30:8, 18, 호 2:9), 그리고 ‘눈’(히, 아인)은 신 32:10, 슥 2:10에 관련시켜 볼 때 ‘가장 가치있는 것’ 또는 ‘중요한 소유물’을 상징한다(Thenius, Böttcher, Keil). 따라서 본 구절은 다윗 왕국의 중요한 소유물들, 그것이 백성이든 아니면 토지이든 성읍이든, 그러한 것들을 세바가 빼앗아 가지 않을까 염려하는 다윗 왕의 말이라고 볼 수 있다.



7절, 주석과 해설


요압을 따르는 자들

그동안 요압의 통솔을 받아왔던 요압의 정예 군사들을 가리킨다.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

이들은 왕의 근위병들이었다. 이들의 업무 분담에 대해서는 8:18을 참조하라. 다윗 왕이 이들을 파견할 경우 다윗 궁은 완전히 무방비(無防備) 상태가 될 것이었지만, 다윗은 사태의 긴박성을 깨닫고 이들까지 파송하였다.


모든 용사들

여기서 ‘용사들’이란 히브리어로 ‘깁보림’인데, 이들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유랑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다윗 왕을 추종한 다윗의 용사들을 의미한다(삼상 23:13, 27:2). 이들은 압살롬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한결 같이 다윗 왕을 보좌하였던 충성된 일꾼들이었다(15:18). 다윗 왕은 이들까지 파견함으로써, 성중에 있는 모든 병력을 세바의 반란 진압에 투입하게 되었다.



8절, 주석과 해설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기브온’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수 18:25), 이곳은 예루살렘 북서쪽이며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해 있다(수 9:17). 당시 세바는 에브라임 산지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아비새는 다윗과 요압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간 것이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이는 아마사가 아비새의 군대 앞에 당도하였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아마사가 아비새의 군대와 만나게 된 경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혹자는 아마사가 베냐민 지파에서 군사들을 징병해 오던 중 아비새의 군대와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한다(Lange). 그러나 이 견해는 유다 사람들만을 소집하여 오라고 한 다윗의 명령(4절)과 일치하지 않는다. 즉 아마사가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베냐민 지파의 땅으로 가서 징병을 했다고 보기 보기는 매우 어렵다. (2) 따라서 아마사가 유다 지파에서의 징병을 이제 막 완료하고, 다윗 왕의 재가를 얻어 출동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즉 아마사는 세바 진압 작전의 사령관으로 아비새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이들 앞에 당도한 것 같다.


그 때에 요압이

요압이 당시 아비새의 군대에 있었다는 사실은 다소 특이하다. 왜냐하면 본 세바 진압 작전에서 다윗 왕이 요압의 출전을 명령한 사실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1) 본 구절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다윗 왕은 요압의 출전을 명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Keil).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이번 세바 진압을 계기로 요압 대신 아마사를 군장으로 등용하고자 하는 다윗의 의도와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연스럽지 못하다. (2) 오히려 요압은 아마사가 아비새의 군대와 합류할 것을 예상하고, 왕의 명령과는 상관없이 동생 아비새와 함께 동행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더 자연스럽다. 즉 요압은 자기의 자리를 빼앗은 아마사를 살해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아비새의 군대와 동행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Hertzberg, Wycliffe Bible Commentary). 이런 추측은 요압의 치밀하고도 독단적인 성격과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문법상 이 구절은 요압이 우연히 칼을 떨어뜨린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음에 벌어지는 상황과 연결시켜 볼 때, 요압은 고의적으로 칼을 떨어뜨렸을 가능성이 높다(Maurer, Böttcher, Wycliffe Bible Commentary).



9절, 주석과 해설


내 형은 평안하냐

요압과 아마사는 실제로 외사촌간이었다(17:25).


오른손으로 … 수염을 잡고

당시 히브리인들은 입을 맞추기 위한 예비 동작으로 상대의 수염을 잡았다(Keil, The Interpreter’s Bible). 즉 이는 서로 친한 관계에 있는 자들이 포옹하여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하는 데 방해가 되는 수염을 옆으로 치우기 위한 행동이었다.



10절, 주석과 해설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1) 혹자는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요압이 떨어뜨렸다가 다시 주운 칼이라고 주장한다(Lange).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아마사는 분명히 요압의 그 칼을 주의했을 것이다. (2) 이렇게 볼 때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요압이 자기의 품속 어디엔가에 숨겨놓은 ‘단검’(短劍)이었다고 볼 수 있다(Hertzberg, Wycliffe Bible Commentary). 즉 요압은 자기의 칼을 떨어뜨림으로써 아마사를 안심케 한 후,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입마추는 순간 왼손으로 품 속에 있는 단검을 꺼내어 찌른 것이다. 이처럼 요압은 정치적인 원한과 질투로 인해 세 번째의 살인(3:27, 18:14)을 하였다. 물론 아마사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점에서 요압의 살인은 변명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의 살해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분노와 질투심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변명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마 5:22). 요압이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였다면, 그의 원통함을 자신이 해결하려 들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였을 것이다(롬 12:19). 결국 이러한 요압의 방자하고 난폭한 행동은 다윗의 분노를 더욱 사게 되고, 후일 요압을 제거하라는 다윗의 유언(왕상 2:5, 6)을 받은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한 요압을 마침내 죽인다(왕상 2:28-35).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 뒤쫓을새

이는 요압이 아마사를 살해한 후 아비새와 더불어 스스로 군대의 지휘자로 나선 것올 보여준다.



11절, 주석과 해설


요압의 청년

요압을 따르는 자들(7절) 중의 하나로, 곧 요압의 정예 부대의 한 군사를 가리킨다.


요압을 …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이는 요압의 정치적인 입장을 대변해 준 말이다. 즉 요압이 다윗의 군장인 아마사를 살해함으로써, 아마사의 모병에 응한 다윗의 국민병들은 다윗에 대한 요압의 충성을 의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압의 측근인 이 병사는 요압과 다윗은 결국 같은 편이라는 의도로서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12절,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요압을 옹호하는 병사의 말은 별 효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비참하게 쓰러져 있는 아마사의 시체를 보기 위해 많은 병사들이 멈추어 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병사는 백성들이 더 이상 멈추어 서 있지 못하도록 아마서의 시체를 대로에서 밭으로 옮겨놓았다. 그래도 효과가 없자, 그 병사는 외투를 벗어 아마사의 시체를 덮음으로써 그 시체가 더 이상 주의를 끌지 못하게 하였다.



13절, 사람들이 … 뒤쫓아가니라


요압의 병사가 자기의 옷으로 아마사의 시체를 덮자, 멈추어 섰던 아마사의 징병군들이 요압을 따라갔다. 왜냐하면 당시 반란군을 진압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아마사의 죽음의 원인을 밝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Fay). 이렇게 되자 아마사의 시체를 보지 못한 병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요압을 따라간 것이다(Pulpit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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