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22장 26절부터 51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다윗은 자신을 구원하시고 승리케 하시며 만민 중에 으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고백과 감사의 찬송이 담긴 본문을 큐티하고 새벽설교를 준비하는 자료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22장 26절-51절, 주석과 해설 정리
26절, 주석과 해설
26-27절
21-25절에서 자신의 상급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순전한 마음과 깨끗하고 의로운 결과임을 밝힌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의 보편적 진리(the general truth)를 도출해 낸다. 곧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행위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진리를 그동안의 생의 경험을 통하여 확신하고, 여기서 이 진리를 자신있게 선포하고 있다.
자비한 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시드’는 ‘인애, 사랑’이란 의미의 단어 ‘헤세드’의 변형이며, 따라서 이 말은 ‘사랑을 품은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사랑은 인간 사이의 일반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사랑을 의미한다(Lange, Keil, Pulpit Commentary).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견한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신 33:8, 시 4:3, 12:1, 50:5).
27절, 주석과 해설
깨끗한 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바르’는 본래 ‘분리시키다, 쪼개다, 선택하다’는 뜻의 동사 ‘바라르’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자신을 온갖 세속의 더러움과 죄로부터 분리시켜, 날마다 의로움과 순수함을 추구하는 ‘거룩한 자’를 의미한다(사 52:11, 시 18:27, 단 11:35).
사악한 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익케쉬’는 ‘굽다, 뒤틀리다’란 뜻의 ‘아카쉬’에서 파생된 말로, 곧 생각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나 왜곡되고 삐뚤어진 자를 의미한다(욥 9:20, 잠 28:18).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티타팔’의 기본 동사 ‘파탈’은 ‘역겨움을 느끼다, 붙들고 싸우다, 심술궂음을 보이다, 거칠게 대하다’란 뜻이다. 곧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해 삐뚤어지고 왜곡된 행동을 하는 사특한 자에게 역시 하나님께서도 거칠고 심술궂게 대하사 그를 낭패와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말이다.
28절,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 낮추시리이다
26, 27절에서 언급된 보편적 진리를 재확인한다. 즉 다윗은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를 대조시켜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보상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잠 6:17, 21:4, 30:13, 시 101:5). 여기서 ‘곤고한 백성’은 억압받는 경건하고 겸손한 무리들을 의미하며 ‘교만한 자’는 부와 권세를 자랑하는 경건치 못한 무리들을 일컫는다(Keil, Lange). 그리고 ‘교만한 자’는 시 18:27에는 ‘교만한 눈’이란 말로 표현되었다. 한편, 다윗은 이 시에서 자신을 ‘곤고한 백성’의 범주에 포함시켜 곤고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자신의 과거 경험을 통해 확신있게 진술하고 있다.
29절, 주석과 해설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모든 구원과 존귀와 형통이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주는 나의 등불’이라는 한 단어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등불’은 (1)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서 밤중에 길을 인도하는 필수적인 도구로 이해할 수 있다(시 119:105). 이렇게 볼 때, ‘등불’은 다윗을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사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Hengstenberg). (2) 등불은 집 안에 켜있는 등불을 의미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이것은 그 집 안에서 누군가가 그 등불에 의존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이 때에 이 ‘등불’은 다윗을 형통(亨通)케 한 힘과 생명력의 근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Pulpit Commentary, Lange). (3) 또한 이 ‘등불’은 영광과 존귀 그리고 행복과 번영의 원천을 상징한다(욥 18:5, 6, 21:17, 29:3, 시 132:17, 사 42:3, 43:17). 이런 의미에서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불렀고(21:17), 또한 다윗은 여호와를 가리켜 ‘나의 등불’이라고 고백했다(시 27:1).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여기서 ‘어둠’은 등불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16절의 ‘물 밑’, ‘땅의 기초’ 등과 같이 재난과 곤고와 고통을 상징한다(욥 29:3). 그리고 ‘밝히시리이다’(히, 야기아흐)는 미완료형으로 미래성과 계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즉 다윗은 과거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미래에도 등불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적으로 자신과 함께 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F. R. Fay).
30절, 주석과 해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안에서’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그의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Hengstenberg).
적진으로 달리며
적진은 다윗 군이 맞서 싸우는 적의 부대를 가리키는데, 원문에는 대격(對格, accusative)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이 적군을 향해 달리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Keil, Lange). 한편, 고대 역사에서 빨리 달리는 것은 힘 못지 않게 용사의 중요한 요건으로 간주되었다(2:18). 다윗은 이같은 요건을 ‘하나님 안에서’ 갖추게 되었다고 본 구절에서 증거하고 있다.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성벽은 적의 요새지의 최후 방어선이다. 따라서 이것을 뛰어 넘었다고 하는 말은 다윗의 통쾌한 승리를 의미한다.
31절, 주석과 해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필연성을 강조한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 그 기준이 되는 말씀의 특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1) ‘완전하고’(히, 타밈, 24절) (2) 진실하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려 할 때 그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순종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다윗은 말하고 있다. 여기서 ‘진실하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랖’은 ‘보석을 정련(精鍊)하다’는 뜻으로 완전무결(完全無缺)하다는 뜻이다(시 12:6, 7). 즉, 이 말은 정련된 보석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한 보증이 되며, 결코 속임이 있을 수 없음을 나타내 준다.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여기서 ‘피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사’는 ‘도피하다’는 뜻 외에도 ‘신뢰하다, 맡기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시 2:12, 잠 30:5, 사 57:13, 나 1:7). 따라서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란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고 진실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맡기고 신뢰하는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게 확실한 보호자가 되심을 다윗은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방패’는 적의 화살을 막아내는 수비용 무기로서 하나님의 보호의 상징이다(시 33:20, 신 33:29).
32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여기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이다. 이 하나님의 호칭은 특별히 하나님의 전능함과 위대함을 강조한다(창 14:20, 28:3, 시 50:1, 89:6, 95:3).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전능함과 위대함을 강조함으로써, 그를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있게 고백하고 있다.
누가 반석이냐
‘반석’에 해당하는 ‘추르’는 아주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의미하며, 이는 웅대하고 움직이지 않는 힘의 상징이다(3절). 따라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불변성 또는 견고성을 상징하는 말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신뢰하기에 아무 부족함이 없는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33절, 주석과 해설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여기서 ‘나의 견고한 요새’란 문자적으로 볼 때 ‘나의 강한 거처(居處)’란 뜻이다. 즉 ‘요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온’은 ‘거처’ 또는 ‘처소’를 가리킨다(신 26:15, 삼상 2:29, 대하 30:27, 습 3:7). 이렇게 볼 때 다윗의 고백은, 자신의 거처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떠한 요새보다도 강하고 견고하다는 그의 확신을 나타낸 것이다. 사실 다윗의 이러한 확신 있는 고백은 과거 자신의 생의 체험으로부터 거듭 확인된 진솔한 간증이었다.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이 구절은 시 18:32절의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와 같은 의미의 말씀으로서(Smith, Lange),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신뢰하는 자를 선한 길 또는 의로운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즉, 여기서 ‘안전한’은 24절의 ‘완전하여’와 같은 히브리어 ‘타밈’으로서 순결하고 고결한 영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34절, 주석과 해설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여기서 ‘암사슴 발’은 원문상으로는 ‘암사슴’인데, 이는 ‘암사슴의 발’을 압축한 형태로서, 히브리어의 용법상 종종 사용되는 어법이다(Gesenius). 아무튼 여기서 ‘암사슴의 발’은 민첩성(敏捷性)의 상징이다(Hengstenberg). 그런데 이 민첩성은 패주할 때의 민첩성이 아니라 적을 추격할 때의 민첩성을 의미한다(2:18, 대상 12:8, Fay, Keil). 따라서 이 말은 용사가 빠른 발로 패주하는 적을 물리치듯이,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의 대적자들을 속히 물리칠 수 있었음을 나타낸다.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여기서 ‘높은 곳’이란 대적의 요새나 고지(高地)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다윗의 ‘형통’(亨通) 또는 ‘존귀’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Hengstenberg, Keil). 즉, 이 구절은 하나님을 신뢰한 결과로 다윗이 그 땅에서 존귀해지고 칭송받는 형통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신 32:13).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존귀와 형통의 조건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35절, 주석과 해설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여기서 ‘가르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마드’는 ‘단련시키다, 익숙케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미 4:3, 렘 31:18, 대상 25:7).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전쟁에 익숙하도록 단련시키셨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놋 활’은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활을 의미한다. 당시 애굽인들은 대부분의 무기를 놋으로 만들었다(Hengstenberg). 그런데 이 놋 활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금속 무기로서, 이것을 당길 수 었었다는 것은 그에게 영웅적인 큰 힘이 있음을 증거함과 동시에 전쟁에서의 대승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이방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그 힘과 기술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36절, 주석과 해설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활과 창이 공격용 무기라면 방패는 수비용 무기이다. 전쟁에서는 공격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비도 중요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수비할 때에도 다윗의 힘이 되어 주셨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 방패는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의 상징이다(시 33:20, 신 33:29).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여기서 ‘온유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1) 응답(창 23:14, 욥 1:7), (2) 수고, 노고(전 1:13, 3:10, 시 119:107, 사 53:7), (3) 낮은 마음, 관대함(잠 15:33, 습 2:3, 잠 18:36)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1)의 경우를 채택하면, 다윗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다윗이 크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며, (2)의 경우를 채택하면, 하나님의 수고로, (3)의 경우를 채택하면 하나님의 관대하신 은혜로 다윗이 크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는 어느 경우를 채택하든 내용상의 큰 문제는 없으나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3)번의 경우를 지지한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 경우에도 막연히 하나님의 관대하신 은혜만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문맥적으로 다윗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일일히 응답하시는 구체적인 관대하심을 뜻한다(Keil).
37절, 주석과 해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20절의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와 동일한 의미로서, 곧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모든 방해물들을 다 제거해 주셨다는 의미이다(Keil). 따라서 다윗은 실족치 않고 승리의 삶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쟁의 문맥인 본 구절에서 이 말은 특히 다윗이 적군을 추적하여 승리를 확보하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Lange).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나의 발목이 흔들리지 않았나이다’이다. 이는 곧 다윗이 적군을 향하여 달려갈 때에 전혀 힘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실족지 않고 이방의 대군을 능히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의 걸음을 넓게 해주셨기 때문이다(잠 4:12).
38절,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37절에서 다윗이 증거한 내용, 곧 다윗은 자신의 힘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즉, 다윗은 적을 끝까지 추격하여 완전히 섬멸할 수 있었을 정도로 충분한 힘을 위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39절, 주석과 해설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이는 적을 거침없이 무찔러 격파한 결과, 마치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가는 적의 완전한 파멸의 상태를 묘사한다(시 45:5, 47:3). 사실 다윗은 그의 생전에 군사 행동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다윗에게 철저히 격파된 대적들이 이제 더 이상 다윗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묘사한다.
40절, 전쟁하게 하려고 … 띠 띠우사
처음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죽인 이래(삼상 17:50) 다윗은 그의 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聖戰)을 위해 특별히 예비된 여호와의 용사였다. 그 숱한 군사 행동에서 다윗이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수많은 대적들을 연속 격파하고 굴복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여호와의 능력으로 띠 띠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41절, 내 원수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내 원수들의 목덜미를 내게 주셨다’이다. 여기서 ‘목덜미를 주셨다’라는 말은 ‘도망하게 하셨다’는 뜻으로, 곧 주께서 다윗의 원수들을 도망치게 하사 그들의 목숨을 다윗의 손에 넘기셨다는 의미의 말이다(대하 29:6, 렘 2:27). 여기서 다윗은 원수들이 겁을 먹고 도망했던 것은 자신의 힘 때문이 아니라, 전쟁의 신이신 여호와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42절,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당시 여호와의 명성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 세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삼상 5:7, 6:5). 따라서 다윗의 대적들도 극한 상황에서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였으나, 그들은 엘리야 앞의 바알 선지자들처럼 응답을 받지 못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었다(잠 1:28-30).
43절, 땅의 티끌 같이 … 거리의 진흙 같이
여기서 바람에 날리는 땅의 티끌이나 뭇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거리의 진흙은 허무하고 비참한 존재를 상징한다(창 3:19, 욥 7:21, 16:15, 20:11, 30:9, 사 41:15). 따라서 이 말은 사방에 도움을 호소하고, 하늘에 부르짖어도 도울 자 없는 대적들을 다윗이 철저히 진멸시키는 행위, 곧 다윗의 대적들의 허무하고 비참한 최후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사 10:6, 29:5, 41:2, 슥 10:5).
44절, 주석과 해설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여기서 ‘내 백성의 다툼’이란 구체적으로 다윗이 통일 국가의 왕이 되기 이전까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의 대치 상황을 의미한다(Smith). 즉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된 이후 7년 동안 북쪽 이스라엘과 대치하였으며, 그 동안에 양 진영의 전쟁과 아브넬의 피살 등 중요한 고비를 넘겼다(2:12-29, 3:37). 한편, 혹자는 이 구절을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구원으로 이해하였다(Lange). 즉, 이스라엘과 이방 족속들과의 전투에서 승리케 하셨다는 의미로 본 구절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건지신 그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아니라, 다윗(’나를’)으로 나타나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이스라엘을 통일한 후 다윗 왕이 이방 국가들을 정복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즉 통일 왕국의 왕위에 오른 다윗은 그 때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던 주변 국가들을 모조리 정복하고, 그 나라들과 종주권(宗主權) 계약을 맺었다. 그 결과 정복된 나라들과 항복을 선언한 나라들은 다윗 왕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다윗 왕은 가나안 일대의 실권자로 떠올랐다(8:6, 10, 12, 14, 10:19). 한편 여기서 ‘섬기리이다’는 미완료형으로서, 현재 이방족속들이 다윗 왕을 섬기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Hupfeld, Lange). 결국 세계 열방들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다윗 왕 앞에 굴복한다는 사상은 장차 다윗의 혈통을 따라 이 땅에 오실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 그리스도 앞에 세계 모든 열방이 굴복케 되리라는 메시아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사 55:4, 5, 빌 2:9-11).
45절, 그들이 내 소문을 귀로 듣고 곧 내게 순복하리로다
이는 다윗이 이방 나라를 쳐들어가 직접 굴복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윗의 명성만을 전해 듣고 미리 항복한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즉, 다윗 왕이 아람 동맹군인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파하였을 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하맛 왕 도이는 자기의 아들 요람을 다윗 왕에게 파견하여 화친을 도모하였다(8:10). 그밖에 하닷에셀을 도와 동맹군에 가담했던 아람 소국들도 다윗 왕의 승리의 소식을 전해 듣고 앞을 다투어 다윗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등 화친을 제의하고 나섰다(10:19). 이와 같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풍성한 승리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다윗은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리고 있다.
46절, 주석과 해설
이방인들이 쇠약하여
여기서 ‘쇠약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벨’은 (1) ‘힘을 잃다’(출 18:18)는 뜻 이외에도 (2) ‘어리석다, 바보짓을 하다’(잠 30:32, 17:7, 21, 렘 17:11)란 뜻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이방인들이 다윗 왕 앞에서 기력을 잃었다는 사실과 함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똑똑한 그들이 다윗 왕 앞에서 우둔하고 미련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이방인들의 힘과 지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 앞에서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말았다.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여기서 ‘떨며’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가르’는 ‘띠를 매다, 두르다’란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본 구절의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떨다, 두려워하다’라는 뜻의 히브리 동사 ‘하라그’의 착오로 볼 수 밖에 없다(Keil, Lange). 이에 대한 증거로서 우리는 같은 내용을 읊고 있는 시편 18:45에서 ‘하라그’가 사용된 사실을 들 수 있다. 한편 ‘견고한 곳’은 이방인들의 요새지를 말한다. 이 구절은 다윗 왕에게 포위된 이방인들이 그들의 요새지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다윗 왕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47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이 구절로부터 마지막 절(51절)까지는 이 시의 종결 부분으로,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승리의 영광을 모두 살아계셔서 자신에게 힘과 용기와 도움을 주셨던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그 중 일부분인 이 구절은 하나님의 속성인 자존성(自存性)을 찬양한다. 즉,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진리를 생생히 깨닫고, 여기서 ‘여호와는 살아계시도다!’라고 확신있게 찬송하고 있다(딤전 6:16). 이처럼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자는 그 마지막에 ‘하나님은 살아계시도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한편, 혹자들은 이 말을 일종의 기원 형식으로 보고, 곧 ‘여호와는 길이 사시옵소서’란 뜻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만세수’(16:16, 삼상 10:24, 왕상 1:25, 39, 왕하 11:12)는 유한성(有限性)을 지닌 인간에게나 필요한 것일 뿐, 영원토록 스스로 살아계시는(출 3:14)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 말이 죽은 우상들과 비교해서 사용된 말이라고 볼 수도 없다. 다만 여기서 다윗은 역사의 현장에서, 특히 생과 사(死)가 교차되는 전쟁터에서 친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섭리의 역사를 장중한 감탄조로 ‘여호와는 살아 계시도다!’라고 찬양했다(F. R. Fay).
나의 반석 …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
여기서 ‘반석’(히, 추르)는 3절, 32절의 반석과 같은 단어이다. 3절 주석을 참조하라.
48절, 주석과 해설
48-49절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진리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들이다. 그 증거란 바로 하나님께서 미천한 다윗을 들어 온 민족들의 머리로 삼으신 것과 다윗을 대적으로부터 보호하신 사실이다. 그러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서 거듭되는 다섯 개의 동사(보복하시고, 복종하게 하시며, 이끌어 내시며, 높이시고, 건지시는도다)로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높이시고 그들이 위급할 때 강림하셔서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다윗은 여기서 노래하고 있다.
민족들
여기서 민족들은 복수형이므로,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모든 이방 족속들을 의미한다.
49절, 나를 원수들에게서 … 건지시는도다
다윗은 48절에서 모든 이방민족 가운데 자신을 높이 드사 으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했다면, 49절에서는 모든 대적의 위협과 핍박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다윗은 대적의 핍박을 연상할 때 사울의 끈질긴 추격과 박해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본 구절은 다윗이 사울의 핍박에서 간신히 벗어나는 상황과 일치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요, 또한 본 시의 표제어에서 ‘모든 대적’에 이어 ‘사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1절). 그러나 여기서 원수와 대적하는 자와 강포한 자가 모두 복수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은 ‘사울’을 비롯한 ‘모든 대적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Lange, Pulpit Commentary).
50절, 주석과 해설
이러므로
이는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찬양과 감사가 결코 근거없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앞에서 다윗이 생생하게 증거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마음의 보답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성도의 찬양과 감사는 맹목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마땅한 응답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다윗이 그의 찬양의 무대를 밝히고 있다. 그 무대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의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방 민족들 가운데도 생생히 알려졌기 때문이다. 즉, 다윗에게 정복된 이방 민족들은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이방 민족들에게도 하나님의 행사가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제 찬양이 이스라엘의 전유물일 수 없었고 온 민족 가운데 선포되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은 온 민족, 세계 열방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이런 맥락에서 후일 사도 바울은 구원의 보편성(민족과 혈통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본 구절을 인용하였다(롬 15:9).
감사하며 … 찬양하리이다
다윗은 이미 자신의 찬양의 근거가 ‘생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밝혔다(47절). 사실 그분의 살아계심은 생명력 넘치는 그분의 속성을 반영한 것으로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존재들에게 새 힘과 삶의 의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딤전 6:16). 그러므로 ‘생존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하는 자에게는 결코 낙심이나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마 28:5, 6, 행 17:31). 즉 그분의 살아계심은 곧 성도의 안전과 생명과 기쁨을 의미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존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입에서는 영원토록 감사와 찬양이 끊어질 수 없다(롬 11:13-24, 계 1:4, 8, 18).
51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께서 … 큰 구원을 주시며
여기서 ‘큰 구원을 주시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믹딜 예슈오트’를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큰 구원들’이다. 즉, 이 말은 여호와께서 다윗 왕에게 ‘큰 구원들’이 되셨다는 말이다. 여기서 ‘구원’의 복수 형태는 (1) 여호와께서 다윗 왕에게 베푸신 여러 번의 구원의 역사와 (2)그 구원의 풍성함을 의미한다(Smith, Lange). 한편, ‘믹딜’을 ‘망대, 탑’ 등으로 해석하자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여러 고대 역본들을 고려해 볼 때 옳지 않다.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여기서 ‘인자’(히,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당신과 맺으신 언약에 근거하여 각종 호의와 친절과 선과 자비 등을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은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이러한 ‘은혜’가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 곧 신정(神政) 국가의 왕으로서 ‘기름 부음 받은 자’(히, 마쉬아흐) 다윗에게 1차적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언약의 본질이자 핵(核)인 ‘메시아’(Messiah)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고 완성된 모든 인자의 전조(前兆)였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다윗의 찬양의 지향점은 오실 메시아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롬 1:3, 15:12). 이것은 (1) 모든 구원과 인자의 완성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며(행 4:12, 15:11), (2) 우리의 찬양의 대상 역시 구원자 예수와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이어야 함을 시사해 준다(고후 1:3).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다윗 왕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다윗 당대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밝히 알았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자식을 세워 다윗의 나라를 견코케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다윗 언약’(7:12-16)을 약속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후손’(히, 제라, ’씨’란 뜻)은 (1)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을 가리키나 (2) 궁극적으로는 다윗 언약의 모든 것을 최종 이루시게 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결국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이와 같은 구원과 감사의 찬송을 힘차게 노래할 수 있었다(Keil). 특히 이 찬송의 노래 중 ‘영원토록’이란 말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들인 우리들에게도 지금 구원의 역사를 베풀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실로 당신의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분이시다(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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