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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하 23장 1절-17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23장 1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다윗은 마지막 노래를 부르며 지금껏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한 부하들을 언급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본문의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23장 1절-17절



사무엘 하 23장 1절-17절, 주석과 해설 정리



1절, 주석과 해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본 장의 노래는 22장의 다윗의 시(詩) 다음에 있지만, 이 두 시는 각기 다른 시기에 지어졌다. 즉, 22장의 시는 다윗이 주변의 이방 국가들을 정복한 직후 곧 그의 이스라엘 통치 초기에 지어진 반면(22:1), 본 장의 시는 모든 역경과 좌절을 맛본 후 다윗 통치 말년 곧 다윗이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지은 시이다(Thenius, Lange, Hertzberg, Payne). 곧 전(前) 장의 시가 노래의 활기찬 흐름으로 보아 다윗의 최전성기에 기록되었다면, 본 장은 그의 인생을 마감하던 때 곧 범죄 이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섭리와 그와 동시에 베풀어지는 그분의 사랑에 감격했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이 고백적 찬양은 단순히 다윗 개인의 신앙과 감사를 다룬 것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공의로운 메시아 왕국을 예언했다는 점에서 ‘선지자적 찬양’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본 시를 22장과 연결시켜 같은 종류의 감사시로 보는 카일(Keil)의 입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본 시는 22장의 감사시와는 성격상 다른 것으로서, 모세가 죽기 전에 축복의 시를 지었듯이(신 33장) 다윗이 임종하기 전에 그의 마지막 소원을 노래한 것이다(Hertzberg). 그러나 그 소원은 다윗의 개인적인 소원이라기 보다는 성령에 의해 감동된 ‘메시아적 소원’으로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베푸신 ‘다윗 언약’(7:8-16)에 기초한 소원이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이새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새의 아들’이란 호칭은 사울 왕이 다윗을 비꼬아 말할 때, 나발이 다윗을 비난할 때, 그리고 세바가 다윗을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각기 사용한 호칭이었다(20:1, 삼상 20:30, 25:10). 따라서 다윗에게 있어서 ‘이새의 아들’이란 호칭은 ‘이스라엘의 왕’이란 호칭과는 대비되는 호칭으로서, 결코 명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의 보잘 것 없음과 비천함을 드러내는 호칭이었다. 따라서 다윗은 이 거룩한 노래를 시작함에 있어서, 자신의 어떠한 자랑거리도 나타내지 아니함으로써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려고 이 호칭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함이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움’은 특별히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과 관련된 말이다. 즉, 이 말은 선지자가 그의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갖추었던 서론적 형식인 ‘여호와의 말이니라’에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이 시가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시적 형태로 전달한 것임을 알 수 있다(Keil, Pulpit Commentary).


높이 세워진 자 … 기름 부음 받은 자

다윗은 본래 양 치는 미천한 목동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선택되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아 크게 높아진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22:34, 44).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

실제 다윗은 양 치는 소년 시절부터 악기 잘 타는 자로 이스라엘에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사울 왕궁의 수금 연주자로도 활동했었다(삼상 16:16, 19, 23). 그러나 여기서 ‘노래’는 세속적인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의미한다(시 81:3, 98:5). 한편 다윗의 이러한 서언은 이전에 발람이 이스라엘과 열방의 미래에 대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 그 예언 초두에 도입한 서언과 유사하다(민 24:3, 4). 이로 볼 때 다윗 역시 선지자적 입장에서 자신의 노래를 미래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Keil, Fay).



2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여기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란 말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즉, 이 구절은 본 시를 읊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의 영에게 감동된 상황을 설명한다(Keil).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시가 사적 감정에 의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장받은 계시적 성격의 노래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 입술을 주장하는 주체가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가 아니라, 여호와의 영 곧 성령임을 고백한 말이다. 즉 지금 자신이 성령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음을 고백한 말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완전한 지배를 ‘성령 충만’이라 부른다(엡 5:18, 19). 그러므로 이것은 다윗의 노래가 신적(神的)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요 충분한 조건이다.



3절, 주석과 해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는 참된 선지자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취했던 서론적 형식과 일치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여기 소개되는 다윗의 노래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혀 준다. 한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지시고 그들을 바로의 압제하에서 구원하신 선민의 하나님이란 뜻으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다윗이 이 시에서 특별히 이 호칭을 사용한 것은 본 시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주인공이신 의로운 통치자 메시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반석

이 역시 하나님에 대한 비유적 호칭으로서(22:3, 47),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을 강조한다. 실로 하나님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 같이 영구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반석’(히, 추르)과 같은 속성을 지니신다(22:3 주석 참조). 그러므로 본 시는 다윗 언약(7:8-16)에 기초한 확신의 시로서, 한 번 약속하신 사실을 결코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불변성 또는 신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을 공의로 …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이는 이상적(理想的)인 신정 국가의 왕의 자세를 보여 주는 구절로서 일차적으로는 다윗 자신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아’를 가리킨다. 즉 신정 국가의 이상적인 왕은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정의롭고(렘 23:5, 33:15),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외심(시 7:8)을 갖춘 바로 그러한 신앙 인격자라야 했다. 다윗 왕은 바로 이러한 이상적인 신정 국가의 왕이었다. 그는 백성을 공의로 다스렸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따라서 다윗은 역대 유다 왕들을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그 기준(基準)이 되었다(왕하 14:3, 18:3, 22:2). 이런 점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여기에 묘사된 이상적인 신정 국가의 왕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 도덕적으로 흠이 없으신 분으로서, 모든 인류를 공의로 판단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한 참된 의미에서의 이상적인 왕이시다(시 2:1, 2, 겔 34:23, 24, 사 11:3-5).



4절,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여기서 언급된 비유어들의 주어는 혹자의 주장처럼(Payne, Wordsworth) 3절에 암시되어 있는 ‘메시아’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본 구절에는 명확한 주어의 형태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비유어들의 주어는 비인칭(非人稱) 형태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이 비유어들이 묘사하고 있는 대상은 메시아(신정 국가의 이상적인 왕)가 아니라 메시아가 강림하신 이후의 신세계(新世界)라고 볼 수 있다(Keil, Lange). 한글 개역개역 성경의 ‘그는’이란 말은 원문에는 없는 단어로서 번역자가 삽입한 것이다. 특히 이처럼 비유어들의 묘사의 대상이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의 의로운 통치로 말미암는 신세계라는 사실을 강하게 입증해 주는 단서는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메시아(그리스도) 자신 보다는 메시아 통치의 복스런 결과를 의미한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라는 말도 메시아의 시대에는 이와 같을 것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곧 메시아의 시대에는 고통과 죄악과 부패의 온갖 어두운 흑암의 밤은 물러가고, 기쁨과 번영과 행복의 찬란한 아침 햇살이 비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구름 없는 아침’은 온갖 근심과 염려의 구름이 완전히 걷힌 청명한 하늘처럼, 곧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기쁨과 번영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상징이다(사 44:3). 즉, 비는 초목의 생장을 촉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 후에 내리쬐는 광선은 더욱더 초목을 싱싱하게 자라나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새생명이 생명력 넘치게 자라나는 것을 상징한다. 이렇게 볼 때 ‘움이 돋는 새 풀’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이다(Keil).



5절, 주석과 해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이는 3, 4절에서 언급된 메시아, 곧 의로우신 통치자가 다윗의 집(후손)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다윗의 확신에 찬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결코 자기 개인에 관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다윗이 이 부분에서 자기의 개인적인 일을 언급했다면, 분명히 7:18에서 보여준 대로 겸손히 자기를 낮추었을 것이다(Fries). 아울러 본 구절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말하고 있으므로, 이 구절이 다윗 자신의 일을 말한 것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4절에 묘사된 신세계가 그의 후손을 통하여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기 ‘집’이란 용어는 ‘후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7:11).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여기서 언약은 7장에 기록된 ‘다윗 언약’(7:8-16)을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다윗이 ‘영원한 언약’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분명 다윗은 장차 자신의 가계를 통해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질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실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계심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을 세우실 뿐만 아니라,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의 모든 구원과 …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여기서 ‘나의 모든 구원’은 다윗과 다윗의 집에 약속하신 구원을, ‘나의 모든 소원’은 하나님의 언약 위에 기초하고 성령에 감동된 다윗의 거룩한 메시아 소원을 가리킨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과 그분의 신실성에 근거하여, 이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다.



6절, 사악한 자는 … 가시나무 같으니


의로운 왕이 도래할 경우에 있게 될 축복의 측면을 이미 언급한 다윗은(4절), 여기서 또 다른 측면인 심판의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즉, 메시아의 강림과 통치는 경건한 자에게는 축복이 되지만, 불경건한 자에게는 심판이 된다. 한편 ‘사악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벨리야알’은 ‘무익한 자, 쓸모없는 자, 무가치한 자’라는 뜻으로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경건한 자 및 하나님의 통치에 백해무익한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에 비유되었는데, 이는 곧 불경건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한 것이다. 즉, 가시나무는 발견되는 즉시로 농부가 밭에서 뿌리채 뽑아 불태우는 쓸모 없는 것으로서(Kimchi), 이는 불경건한 자가 창졸간(倉卒間)에 받을 철저한 심판을 묘사한다(사 27:4, 겔 28:24).



7절, 주석과 해설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가시나무는 맨손으로 잡을 수 없으므로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즉, 이 구절은 밭에서 백해무익한 가시나무를 불태우기 위해 철제(鐵製) 도구를 사용하여 한 자리에 거두어 모으는 장면을 묘사한 말로서, 하나님의 피치 못할 심판으로 말미암아 멸절당할 불경건한 무리들의 비참한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불살리리로다

여기서 ‘불’은 하나님의 진노와 그로 인한 심판의 상징이다(마 3:10, 13:30, 눅 19:27). 결국 사악한 자의 철저한 멸망이라는 냉혹한 심판 선언으로 마무리 짓고 있는 다윗의 이 노래는 (1) 메시아께서 통치하시고 건설하실 그 나라에서는 불의한 사탄의 세력이 완전 소멸될 것과(사 27:4), (2) 메시아의 의로운 통치에 대적하고, 그 나라를 해(害)롭게 할 무가치한 자에게 임할 심판의 필연성을 깨우치고 있다(마 25:30).



8절, 주석과 해설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용사들은 다윗 왕국에서 크게 활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데 큰 공을 세운 600명의 용사들 중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본 구절과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대상 11:10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 보면 이 용사들을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다윗을 힘껏 도와 …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본 구절에는 모두 37인의 용사들이 소개된 반면, 대상 11:10-47에는 16명의 용사들이 추가로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몇 명의 용사들의 사망으로 인한 누락과 새로운 명단의 추가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Pulpit Commentary).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 …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

같은 내용의 기록인 대상 11:11에는 ‘다그몬 사람’이 ‘학몬 사람’으로, ‘요셉밧세벱’이 ‘야소브암’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다그몬’은 ‘학몬’에 대한 오기(誤記)이며, 그리고 ‘요셉밧세벳’은 이름이라기 보다는 ‘밧세벳에 거주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의 본 이름은 ‘야소브암’이며, ‘아디노’는 그의 별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는 시글락에서 다윗과 합류하였으며(대상 12:6), 2만 4천 명으로 구성된 정월 첫반(다윗은 상비군을 12개의 군대로 나누고, 달마다 한 번씩 근무하도록 하는 체번제(替番制)를 실시하였다)의 반장이었다(대상 27:2).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여기서 ‘군지휘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솰리쉬’는 ‘셋’이란 의미의 ‘솰로쉬’에서 파생된 용어로서, 지휘관 중의 지휘관, 곧 가장 뛰어난 세 장군을 의미한다(F. R. Fay). 이들은 왕이 전쟁에 참전할 때 병거에서 왕과 함께 있었으며, 왕 주변에서 특수 부대(호위병)를 지휘하였다(왕하 9:25, 10:25). 그러나 이들은 요압이나 아마사가 차지했던 전체 이스라엘 군대의 군장, 곧 ‘사르’와는 거리가 있는 직책이었다.



9절, 주석과 해설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

‘아호아’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다(대상 8:4). 그리고 ‘엘르아살’은 2만 4천 명으로 구성된 이월반(二月班)의 반장이었다(대상 27:4). 그는 야소브암, 삼마와 더불어 다윗의 군지휘관(히, 솰리쉬)로 활약하였다<23:8>.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같은 병행 구절인 대상 11:13에는 ‘바스담밈’에서 접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바스담밈’은 삼상 17:1에 따르면, ‘에베스담밈’이다(Keil). 이 지명은 ‘피의 경계선’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무수한 전투를 벌인 곳이었으며, 국경 지역인 엘라 골짜기에 위치해 있었다(R. Payne Smith).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혹자는 이 구절이 블레셋을 대항하기 위해 진군해 나아가는 이스라엘 군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Lange, Smith). 그러나 여기서 ‘물러간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라’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다’란 뜻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지(高地) 위로 올라간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Thenius, Böttcher).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의 대단한 진용(陳容)에 놀라 높은 고지 위로 도망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0절 하반절에 기록된 ‘백성들은 돌아와서’란 말을 통해서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의 ‘솰리쉬’(3인의 용사) 중 하나인 엘르아살은 혼자서 적과 싸움을 하였던 것이다(Keil).


싸움을 돋우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라프’는 ‘조롱하다, 능욕하다’는 뜻으로, 세 용사가 블레셋 군의 비위를 건드려 싸움을 유도해 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삿 8:15, 삼상 17:10, 26, 36, 45).



10절, 주석과 해설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이는 어찌나 칼을 손에 꽉쥐고 많은 적군들을 쳐부셨는지 손에 쥐가 날 정도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의미이다(Keil, Lange).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원어상으로는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란 뜻이다. 즉 본서 저자는 이날의 승리가 엘르아살을 힘있게 붙드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11절, 주석과 해설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

다윗의 3인의 용사 중 하나인 ‘삼마’ 33절에서 30인 중 하나로 다시 소개되고 있다.


사기가 올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하야’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말이 ‘레히’라는 지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Josephus). 특히 이 말이 반드시 지명(地名)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는 원문상 뒤이어 지시 부사인 ‘솸’(거기)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Thenius, Ewald). 한편, ‘레히’는 삼손이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살해한 유서깊은 곳이다(삿 15:9, 14, 17, 19).


녹두나무

병행 구절인 대상 11:13에는 ‘보리’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블레셋인들은 이스라엘의 농작물을 망쳐놓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듯하다(Pulpit Commentary).


백성들은 … 도망하되

여기서 ‘도망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누스’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달아난다는 의미이다(10:14, 왕상 20:30).



12절, 막아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칠레하’를 직역하면, ‘그것을 붙잡았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아 밭으로 들어온 블레셋 사람을 삼마가 ‘붙잡아’ 살해했음을 보여 준다(Keil).



13절, 주석과 해설


13-23절

여기에는 둘째 3인의 헌신적인 무용담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능력면에서는 첫째 3인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베들레헴 우물물을 길어온 그들의 충성의 정도는 첫째 3인 못지 않았다. 또한 그들의 헌신적 노력은 단순히 왕에 대한 충성을 초월한 것이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통치를 위임 받은 하나님의 종 다윗에 대한 헌신과 충성의 표시로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대상 12:18, 23).


삼십 두목 중 세 사람

이 세 사람은 앞 절에 언급된 3인이 아니라 아비새와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한 사람이다(18, 22절). 이들은 둘째 3인으로서 이들의 충성은 첫째 3인(야소브암, 엘르아살, 삼마, 8-12절)에 못지 않았으나 능력면에서 첫째 3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23절).


아둘람 굴

이곳은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은신한 곳이며, 이곳에서 다윗은 그의 가족 및 다른 동료들과 결합하였다(삼상 22:1, 2). 그 위치는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 곧 가드 남동쪽 약 16 km 지점이다. 최근에 성서 고고학자의 탐사로 이곳의 산 중턱에서 약 400명 정도가 거주할만한 큰 동굴 하나가 발견되었다.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이 구절은 여기에 언급된 블레셋 전투가 5:17-25절에 기록된 전투와 같은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Keil). 왜냐하면 양쪽 구절 모두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골짜기이며,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 지역이었다(5:18). 또한 이 전투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직후, 통일된 다윗 왕국의 세력을 우려한 블레셋 족속이 선제 침공함으로써 발발되었다(5:17).



14절, 주석과 해설


다윗은 산성에 있고

‘산성’(히, 메추다)은 아둘람 근처에 있던 산성(山城)을 말한다. 당시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천혜(天惠)의 요새지인 예루살렘에 있지 못하였고, 그 대신 아둘람 근처의 산성에서 피신하고 있었던 듯하다(5:17).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요새’(히, 맛차브)는 군부대를 의미하는 말이다(13:23, 14:1). 한편 블레셋 사람들은 아마도 길보아 전투(삼상 31:1-7) 때에 베들레헴을 차지한 듯하다.



15절, 주석과 해설


다윗이 소원하여 …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여기서 ‘소원하다’(히, 아와)란 말은 ‘간절히 바라다, 열렬히 추구하다, 애태우다’란 뜻으로, 곧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을 위해 마음이 애타는 상태를 일컫는다. 당시 다윗은 블레셋과의 치열한 전투 와중에 고향 근처에 이르게 되었고, 그는 고향에 대한 향수로 인해 육체와 정신의 피곤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다윗은 고향의 우물 물에 대한 갈증을 애타는 마음으로 호소하게 되었고, 이를 귀담아 들은 둘째 3인의 충정어린 행동이 결행되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

성서 고고학자 리터(Ritter)에 따르면, 깊은 우물로부터 솟아나오는 이 물은 시원하고 깨끗한 냉수였다. 그러나 당시 다윗이 진 치고 있던 아둘람 근처의 물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깨끗하고 시원한 이 물을 갈망했다(The Interpreter’s Bible, Lange).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우물은 베들레헴 동북쪽으로 약 15분 걸리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으며, ‘다윗의 우물’이란 이름으로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Keil). 한편, 다윗은 베들레헴 태생으로(16:2, 18), 어려서부터 이 우물 물을 마시고 자랐다.



16절, 주석과 해설


돌파하고 지나가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카’는 ‘가르다, 쪼개다’는 뜻으로(시 78:13, 사 48:21, 욥 26:8), 이는 세 용사가 베들레헴에 있던 블레셋의 부대를 정면으로 꿰뚫고 나아갔음을 보여준다(Keil). 여기서 우리는 세 용사의 비범한 용맹과 아울러 목숨을 건 충정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이 …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이는 다윗이 이 물을 여호와께 전제물로 드린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다윗은 이 물이 용사들의 피와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다윗은 부하들의 피와도 같은 이 물을 자신이 마시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전제물로 바쳐드린 것이다(Smith).



17절, 주석과 해설


이는 … 피가 아니니이까

다윗은 부하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그 물을 하나님께 전제(奠祭)로 부어 드렸다(16절). 즉 그는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그들의 생명의 대가인 물을 ‘피’로 간주하여 율법에 따라(레 17:11, 신 12:23-27)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헌납하였다. 이 같은 행동은 (1) 인간의 생명은 결코 헛되이 허비되어서는 안되며(막 3:4), (2) 모든 희생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고(계 12:11, 시 36:9), (3) 어떠한 생명이라도 인간의 사악한 욕구 충족에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등의 교훈을 제시해 준다. 하나님은 이웃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히 여길줄 아는 자의 생명과 인격을 또한 보존하신다(잠 14:25a, 시 56:13a).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그 이유는 ‘피를 먹지 말라’(레 17:10)는 율법의 조항을 다윗이 기억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다윗은 세 용사가 떠온 물은 그들의 생명을 걸고 떠온 것이므로 그것을 그들의 피로 간주했던 것이다(K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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