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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4장 19절-37절,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 - 주석과 해설 정리

다니엘 4장 19절부터 37절까지의 매일성경큐티 본문을 묵상하고 새벽설교 준비를 위하여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였습니다. 본문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교만한 느부갓네살이 한없이 낮아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4장 19절-37절,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



다니엘 4장 19절-37절,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



19절, 주석과 해설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하는지라

다니엘이 꿈의 내용을 듣고 놀라며 당황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왕이 꾼 꿈이 길몽(吉夢)이 아니라 흉몽(凶夢)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리 꿈의 해석이라 할지라도 왕에게 직접 불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왕의 기분이 극도로 나쁠 때는 어떤 처벌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 보다 중요한 이유는 왕을 위한 것이었다. 다니엘은 왕이 악을 행함으로 곤경에 빠지거나 형벌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전형적인 동양의 예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합당하다.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사람이, 왕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아무리 왕의 대적이라 할지라도, 잘못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처럼 비록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사는 것을 기뻐한다(겔 18:23, 33:11). 다니엘은 여기서 말하기 어려운 내용을 말하기 전에 정중하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말하는, 최선의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22절,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성경에서 나무는 자주 의인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시 1:3, 92:12). 에스겔은 이스라엘 나라와 앗수르 사람을 나무로 비유하였다(겔 17:22-24, 겔 31:2-3). 그러므로 느부갓네살 왕을 나무로 비유한 것은 이례적인 것이 아니다.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왕 앞에서 직접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도전적인 표현이다. 이런 비슷한 표현은 다음의 성경절에서도 나온다. 단 2:37, 38, 삼하 12:7.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은 상대방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행 7:51).

다니엘이 왕 앞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위와 같이 직접적이고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선고(宣告)의 근원(根源)이 다니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것은 4:24에서 확인된다.

  • 다니엘 4: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다니엘은 이제 왕의 손에 잡혀온 포로나 왕의 손에 죽고 사는 것이 달린 힘없는 신하로서가 아니라, 하늘의 기별을 전달해야하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목숨에 연연(戀戀)하지 않고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였다.



25절, 주석과 해설


일곱 때

다니엘서에서 13회 나타나는 “때”에 해당하는 아람어 ‘잇단’은 일반적인 “시간”(2:8,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시간을 천연하려 함이로다”), 특정한 시점(3:5, “너희는 …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요한계시록 12:6, 14과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몇 년의 기간 곧 예언상의 3년 반(7:25,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등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다니엘 4:16, 23, 25, 32에서 “일곱 때”는 왕의 삶에서 문자적인 7년을 의미한다.

1일-1년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이유 : 1일-1년 원칙이 다니엘 4장에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이 장이 7-12장처럼 묵시적인 장이 아니라 역사적인 장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다니엘은 그 예언이 느부갓네살에게 모두 성취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4:28). 더욱이,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4:30)라고 자랑한지 열두 달 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33절). 예언의 성취로, “느부갓네살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이런 자고하는 정신을 어떻게 여기시는지를 세상 앞에 보여 주는 본보기가 되었다”(리뷰 앤드 헤럴드, 1889년 6월 18일). 34절에서 우리는 느부갓네살이 그의 왕국으로 복귀된 “일곱 때”의 끝을 보는데, 그것은 그 예언이 그의 생전에 성취되었음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본 절의 “일곱 때”가 느부갓네살이 정신 이상을 보인 7년의 세월 이외의 다른 기간을 가리킨다는 어떤 암시도 본문에 없다. 다니엘 4장은 우리 모두에게 경고를 주는 이야기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하늘 이외의 다른 것에 의존한다면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 때에

짐승처럼 사는 비참한 삶을 산 후에야 느부갓네살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될 것이었다. 느부갓네살처럼 위대하고 총명한 왕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하거든 범인(凡人)들이야 오죽할 것인가! 아무리 위대한 일을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도 빌라도에게 그가 가진 힘(권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 19:11).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



26절, 주석과 해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복된 일인가!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고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아름답다(사 52:7).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줄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나라는 견고하게 설 것이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잘못되면 하나님께 책임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27절, 주석과 해설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 죄악을 사하소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줄을 깨닫고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위하여 사는 사람의 삶은 이런 모습이 될 것이다.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 그것은 하나님의 품성의 표출이다. 하나님의 품성과 관련된 공의와 사랑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단 1:9의 주석을 참조하라. 회개하라는 이러한 형태는 다른 말씀에서도 볼 수 있다(사 1:16-18). 즉 죄악의 사함은 신앙고백으로만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 신앙고백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느부갓네살은 많은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데 수많은 인명들–패배한 자들과 자신의 전사한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또한 위용(威容)을 자랑하는 건물들의 건설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건축 역사(役事)의 대부분은 여러 정복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노예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니엘은 여기서 생명을 경시하고 불의를 자행하는 일은 당장 중지해야 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제하고 모든 일을 공의롭게 처리하라고 왕에게 호소하고 있다. 다니엘의 권고는 그를 난처하게 하였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총독 벨릭스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비슷하게 설교했다(행 24:25, 26:27-29).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딤후 4:2).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걸고 통치자 앞에서라도 진리를 전해야 하지만, 그 결과로 통치자가 겸손하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대로 따라 사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혹시 장구하리이다

다니엘은 단정적으로 왕의 평안함이 장구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혹시 장구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왕의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은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아시고 판단에 전혀 실수함이 없으신 하나님만이 그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있다. 아모스와 스바냐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암 5:15, 습 2:3)

느부갓네살 왕은 그동안 다니엘을 신뢰하여 왔다. 다니엘 2장과 3장의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왕은 다니엘의 권고에 대적하지 않고 그 호소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왕은 다니엘의 말을 경청하긴 했지만 실천하지는 않았고 그 결과 그가 꾼 꿈의 내용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많은 경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행동은 별개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다시 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다.



29절, 주석과 해설


열두 달이 지난 후에

1 년 동안 느부갓네살 왕에게 유예 기간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의 기간을 주신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 돌아와 그 앞에서 충성스러우면 구원이 주어지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버려질 수 밖에 없다.

노아 시대에는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120 년을, 니느웨의 백성들에게는 40 일의 유예 기간이 주어졌다(창 6:3, 욘 3:4). 느부갓네살에게는 1 년의 기간이 주어졌지만 그 기간 동안 겸비와 회개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교만하게 되었고 꿈에서 예언된 일이 현실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가 언급한 하나님께서 못하시는 것 3가지는 의미심장하다. (1) 하나님께서는 돌아가시지 못한다. (2)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구원하시지 못한다. (3)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을 벌하시지 못한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랍비가 설교할 때마다 다음과 같이 외쳤다.

“죽기 전에 회개하십시오. 죽기 직전이라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랬더니 어떤 교인이 랍비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우리가 죽는 날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언제 회개해야 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오늘, 지금 당장 회개하십시오.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죽게 되면 큰 일 납니다.”


왕궁 지붕에서

“왕궁 지붕에서”는 아람어로 ‘알 헤이칼’인데, “왕궁 위에서”라는 뜻이다.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집은 지붕이 평평했기 때문에 “집 위에서”라는 말은 “집의 지붕에서”라는 말과 의미가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른성경은 문자적으로 “왕궁 위”라고 번역하였고, 새번역성경은 “왕궁 옥상”이라고 번역하였다.

어떤 궁에서 느부갓네살이 도성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두껍고 강한 기초 벽이 발굴된 공중 정원의 지붕에서 보았거나 지금은 바빌(Babil)로 알려진 폐허의 언덕 즉 새 도성 지역의 북쪽 구역에 있는 새 여름 왕궁에서 보았을 수도 있다. 느부갓네살처럼 다윗도 왕궁 지붕에서 거닐다가 범죄하였다(삼하 11:2). 다윗도 느부갓네살처럼 자신을 높이는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 범죄하였다.

또한 많은 경우 열심히 일할 때가 아니라 한가롭게 여유를 가지고 살 때 죄를 짓기 쉽다. 느부갓네살과 다윗은 안일한 가운데서 범죄하였다.



30절,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큰 바벨론”이라는 말은 때때로 나라의 수도를 묘사한다. 주석가들과 역사가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바벨론 수도의 건설자라는 것에 동의한다.

고대 바벨론의 폐허 더미와 먼지 속에 보존되어 온 명각들 가운데 하나에서 거만한 왕은 “그 때에 나는 왕궁, 내 왕좌, 인류의 결속, 환희와 기쁨의 거처를 건설하였다”(E. Schrader, Keilinschriftliche Bibliothek, vol. 3, part 2, 39)고 선언한다. 다른 문장에서 그는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는 도성 바벨론에, 백성이 놀라워하는, 이 땅의 결속, 빛나는 궁전, 바벨론으로 인한 위엄의 거처인 궁전이 있었다”(상게서, 25)고 말한다.

느부갓네살 왕이 통치하는 동안 바벨론 도시는 그 규모가 세 배 정도 확장되어 가장 장엄한 도시가 되었다. 느부갓네살의 부친은 이 도시 안에 하나의 궁전을 세웠으나 느부갓네살은 3 개의 궁전을 세웠으며 그 모두가 이전의 궁전들보다 크고 화려했다. 왕은 향수병에 걸린 그의 아내 아미티스(Amytis)를 위하여, 그녀의 고향 메대의 시골을 연상하게 하는 유명한 공중 정원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왕의 궁전은 벽돌과 대부분 두로에서 가져온 백향목으로 건설되었다. 그는 도성 안에 53 개의 대 신전과 955 개의 신사(神祠)들과 384 개의 노상 제단을 건립하여 신들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그의 도성은 인간적으로 볼 때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놀라운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왕에게 능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어버렸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고린도 전서 4:6-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이 문장에는 “나”가 3 번 나온다. 자기를 높이는 정신이 극에 달한 것이다. 애굽의 바로가 그랬고, 천사장이었던 사탄이 그랬다(출 15:9, 사 14:13). 마지막 때에 멸망의 아들이 자신을 높일 것이다(살후 2:4). 결국 그런 사람들은 낮아지게 될 것이다(마 23:12).



33절, 응하므로


많은 주석자들은 느부갓네살의 병이 일종의 정신병이었으며, 자신을 짐승으로 생각하고 짐승이 사는 모양을 흉내내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느부갓네살의 질병을 현대 의학적으로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어 왔다. 어떤 이는 그 병이 “리칸쓰로피(Lycanthropy)”라는 정신병이라고 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을 야생 짐승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실제로 이 병에 걸린 근세기의 왕은 대영제국의 조지 3세와 바바리아(독일 남부의 한 주)의 오토(Otto)이다.

유사한 정신병으로 자신을 새(鳥)라고 생각하는 “아비안쓰로피(Avianthropy)도 있고, 자신을 소(牛)라고 생각하는 보안쓰로피(Boanthropy)도 있다. 느부갓네살을 직접 진찰하지 못한 상태에서 병명을 정확히 규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 병은 느부갓네살에게만 있었던 특별한 병이었을 수도 있다. 이곳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경험에 관해 빛을 비춰주는 몇 개의 역사적인 단편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그레이슨(A. K. Grayson)이 1975년에 출판한 바벨론 당시의 설형 문자 단편이다. 그 단편의 본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느부갓네살의 이상한 행동들은 조정의 대신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 아멜-마르둑에게 주의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왕은 인생의 가치를 상실하고, 엉뚱한 지시를 내리고, 대신들의 조언을 거절하며, 자녀들에게는 사랑을 보이지 않았고, 가족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 국가의 수반으로서 국가 종교와 그 주신의 신전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왕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진 대신들이 아들인 아멜-마르둑에게 상황을 알리면서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직무를 수행하라는 권고를 하게 되었다. 왕의 정신이상 기간 동안 그의 아들이 섭정한 것으로 보인다.

왕의 이성이나 지능이나 능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취하여 가시자 그는 짐승과 같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어떻게 느부갓네살의 왕위가 유지되었을까? 모반을 꿈꾸는 자들에게는 미친 왕을 암살하고 보좌를 차지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시간이 이 때가 아닌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타당한 이유는 정신 질환에 대한 고대인들의 생각과 관계가 있다. 미신적인 고대인들은 이러한 정신병을 악신의 활동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죽이거나 재산 또는 지위를 박탈할 경우 그 악신에 의해 보복을 당하거나 자신이 그 악신에 사로잡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격리는 시켰지만 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은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경험한 것과 같이 그렇게 극적이지도 않고 그처럼 심하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지금도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은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지 않고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짐승과 벌레로부터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그와 같이 사는 것은 슬픈 일이다(롬 1:21-32).



34절, 주석과 해설


그 기한이 차매

느부갓네살의 정신이상이 지속되는 기간으로 예언된 “일곱 때”, 곧 7 년의 끝이다. 재림교회의 유명한 학자인 틸리(Edwin R. Thiele)는 느부갓네살이 B.C. 562년 10월에 죽었는데 이는 그가 회복된 후 즉시에 해당하는 연대로 보았다. 다른 학자는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주요한 군사적 활동을 하지 않은 기간(582∼575 B.C. )을 그 7 년의 기간으로 본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이 표현에는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도우심을 구했다는 것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시 25:15, 121:1-2, 사 40:26, 51:5). 참 하나님을 인지하자 그 때 왕에게 이성이 돌아왔다는 말에 주목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왕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그는 짐승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변화되었다. 이 변화는 모든 죄인이 개심할 때에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다(골 3:1-3).


감사하며

한때 거만했던 왕이 그 끔찍한 경험을 한 후에 첫 번째로 한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영생하는 존재로 찬양하며 경배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분께 감사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대상 29:13, 시 108:3, 골 3:16-17).



35절, 주석과 해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이 말은 이사야의 말씀과 유사하다(사 40:17). 이 고백은 한때 거만했던 군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회개한 개심자의 증언 즉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기를 배운 자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놀랍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우주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사 40:25-31).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가 살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은 그분을 앙망하며 사는 것이다.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하늘”과 “땅”이 함께 나오면 우주 전체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에 반기(反旗)를 들 존재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실수함이 없으신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이다(사 14:26-27).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고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아름답다(사 52:7).



37절, 주석과 해설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비슷한 말을 반복하여 뜻을 강조하고 있으며, 절충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교만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할 자격이 없는 사람을 마땅히 있을 곳으로 낮추신다(잠 16:18, 15:33). 느부갓네살 왕은 4장의 사건 이후에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장 이후에 느부갓네살 왕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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