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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5장 1절-16절, 벽에 쓰인 글씨 - 매일성경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다니엘 5장 1절부터 16절의 말씀은, 느부갓네살의 아들인 벨사살이 왕이 된 후 대규모의 호사스러운 잔치를 벌인 장면입니다. 게다가 성전의 기물을 사용하여 잔치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본문을 큐티하고 새벽설교 준비할 주석과 해설입니다.


다니엘 5장 1절-16절, 벽에 쓰인 글씨


 

다니엘 5장 1절-16절, 벽에 쓰인 글씨



1절, 주석과 해설


내용 개요

다니엘서 5장은 느부갓네살 사후 약 23년, 즉 B.C. 539년경의 바벨론 제국의 멸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앞의 4장의 사건을 느부갓네살이 죽은 기원전 562년의 사건으로 계산한다면 4장과 5장의 시대적 간격은 23 년이 되는 것이다. 고대의 자료들은 도시가 바사 군대에 의해 점령되던 밤에 바벨론 가운데 큰 연회가 있었다는 전통을 지지한다.

그 주제는 인간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 심판은 다니엘의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통하여 중재되고 있다. 5장은 성경 예언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2장에서 꿈을 통하여 제시된 예언의 첫 번째 성취가 바벨론의 멸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사야도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였다(사 47:5-11).


벨사살

벨사살이라는 이름의 아람어는 “벨이여 왕을 보호하소서”라는 의미의 악갓어에 근거해 있다.

벨사살이라는 이름은 1861년 전에는 성경 이외에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로 알려졌고, 벨사살의 존재는 허구(虛構)이며 다니엘서는 소설(小說)에 불과하다는 비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37 개 이상의 문서들이 벨사살의 역사성을 증언한다. 벨사살의 역사성을 증언하는 문서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나보니두스 연대기(Nabonidus Chronicle), 나보니두스에 대한 해설(Verse Account of Nabonidus), 나보니두스의 기도(Prayer of Nabonidus), 나보니두스의 꿈 실린더(Nabonidus Dream Cylinder). 이 문서들에는 벨사살이 나보니두스의 장자요, 세자라는 주장을 확증해준다.

나보니두스는 통치 마지막 10년 동안 아라비아의 테마(Tema)에서 보냈는데, 그 때 바벨론에서는 그의 아들 벨사살이 왕으로 통치하였다. 벨사살은 5장에서 7번 이상이나 “왕”으로 불렸다. 벨사살이 온전히 왕으로 임명되었는지, 단지 그의 아버지와 공동 섭정 왕이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나보니두스가 아라비아로 떠나기에 앞서 그에게 왕권을 위탁한 것은 분명하다. 바벨론 멸망 당시 벨사살은 거의 50대였다.


천 명

천 명이라는 말은 1절에서 두 번 나오는데, 이 말은 왕궁의 관원들이 많이 참석했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한 수단으로 개략적으로 약 “천 명”이라는 의미이다.


큰 잔치

이 잔치가 어떤 목적의 잔치였는지 본문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제안되고 있다.

  • 이 연회(宴會)는 벨사살의 바벨론 통치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 이 연회는 벨사살의 즉위식이었다.
  • 이 연회는 왕궁을 낙성하는 기념식이었다.
  • 나보니두스의 연대기에 의하면 고레스의 군대가 바벨론을 점령했을 때 신년 축제를 준수했는데, 그 신년 축제의 일부였다.
  • 유대인의 미드라쉬 해석에 의하면, 벨사살은 예레미야의 70 년 포로생활을 잘못 계산하여 그 시간이 이미 지나가 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예레미야의 말을 경멸하기 위하여 그는 그 밤에 성전 그릇을 더럽히기로 결심하였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잔치를 언급한다(사 21:5, 9, 렘 51:39-41). 렘 51:41에서 “세삭”은 바벨론을 가리킨다. 이 잔치에 대하여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도 바벨론이 함락되던 당시 “온 바벨론에 한 잔치가 있었는데 이 잔치가 있을 동안에 바벨론이 온통 마셨고 밤새도록 흥청거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고레스는 이런 환락의 잔치가 바벨론 성 안에서 베풀어져 밤새 흥청거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밤을 도와 공격했다고 기록하였다.

이 주연이 베풀어진 때는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밤이 되는데 이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요새인 시파르(Sippar)가 함락된 10월 11일 다음 날인데, 벨사살의 부친 나보니두스는 전투에서 패하여 바벨론 남쪽에 있는 보르시파(Borsippa)에 피신하고 있는 상태였었다.


술을 마시니라

보통 성경 시대에 술은 포도로 만든 포도주(wine)나 곡식으로 만든 곡주(穀酒, beer)였다. 성경에는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잠 20:1, 사 5:11). 독주는 히브리어로 ‘쉐카르’인데, 곡주(beer)를 가리킨다. 롯은 술을 마시므로 딸들과 동침하는 끔찍한 잘못을 범한다(창 19:31-33). 아론의 두 아들은 제사장이었지만 술을 먹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결과로 죽임을 당한다(레 10:1-2, 9).

술은 사람을 망하게 하고 나라들을 망하게 한다. 과거의 많은 나라와 개인의 불행과 종말을 가져온 술과 여자가 바벨론의 마지막 밤을 장식한 것이다. 이미 동방을 거침없이 정복한 고레스도 속수무책이었던 난공불락의 바벨론 성이 술과 여자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벨사살은 그 저녁에 마신 술에서 깨어나기 전 그의 나라와 함께 자신의 최후를 맞는다. 비슷한 일이 216년 후에 같은 장소, 거의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30세가 되기 전에 근동의 세계를 제패한 정복 왕 알렉산더가 그의 생애의 절정에 바로 이 바벨론 성에서 자신의 무패의 전적을 찬양하며 승리를 만끽하면서 마구 마시며 흥청거리는 주연의 날들 후에 습지열에 걸려 쓰러지고 만 것이다.

워털루의 명장 웰링턴 장군이 나폴레옹의 군대와 대전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를 횡단하다가 도중에 포도주 단지(團地)가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선발대를 보내 이를 완전히 훼파한 후에 그의 군대를 통과하게 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웰링턴 장군과 마지막 결전을 앞둔 전날 밤, 나폴레옹의 네이 장군은 늦게까지 포도주를 기울이다가 다음날 무력하게 망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프랑스 범죄자의 80 %가 음주에 기인하여 범죄한 사람들이라는 점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지막 상징적 바벨론을 포도주에 취한 것으로 묘사한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의미심장하다(계 17:1). 술의 유해성을 성경은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잠 23:31-35). 지금 세상은 술이 없는 잔치가 없을 정도로 술에 취해 있다. 지식인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술을 즐기는 세상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술을 그리워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먹고 마시는 노아의 시대와 다름없지 않은가(마 24:37-39).



2절, 주석과 해설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아람어 원문은 “포도주의 명령으로 말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벨사살이 명령을 내릴 때 술에 취한 상태였음을 말하고 있다. 술에 취하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고,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마귀의 대리자 역할을 하기에 가장 좋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왕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을 술을 마시는데 사용함으로 고의적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한 경멸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다른 종교의 거룩한 물건들을 모독하는 것은 동방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벨사살이 이성을 잃지 않고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거의 믿을 수 없다. 유대인 전통은 벨사살이 성전 그릇들을 직접적으로 모독하였기 때문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기구들은 거룩하게 취급되어야 한다(사 52:11). 에스라서에 의하면 5,400 개의 그릇들이 바벨론에 보존되어 있었다(라 1:11).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

5장에서는 여섯 번이나 느부갓네살을 벨사살의 부친으로 언급한다. 역사적으로 벨사살의 혈통상의 아버지는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나보니두스였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나보니두스는 느부갓네살의 후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느부갓네살을 부친이라고 언급할 수 있는가?

성경에서 부친을 뜻하는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아브’이다. 그런데 이 말은 아버지를 뜻할 뿐만 아니라, 혈통적 조상이나 상징적(정신적 또는 영적)인 조상을 말할 때도 사용하였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아브)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아브)이 되었으며”(창 4:20-21)

벨사살은 혈통적으로 느부갓네살의 아들이 아니었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한 것이다.

로버트 딕 윌슨(Robert Dick Wilson)의 고증(考證)에 의하면, “아들”이란 말이 “손자”, “양자”를 비롯하여 적어도 12 가지 이상의 용법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라는 말도 “조상”(ancestor)을 비롯하여 “조부, 증조부, 고조부”와 그 이상도 가리키는 등 적어도 일곱 가지 용법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위의 성경절에서 ‘조상’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파테르’인데 “아버지”라는 뜻이다. 요 8:44에서는 “너희 아비 마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 ‘아비’는 헬라어로 ‘파테르’이다. 또한 마 9:27에 나오는 “다윗의 자손이여”에서 ‘자손’은 헬라어로 ‘휘오스’인데, 이 말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손자였다. 그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느부갓네살의 의붓아들이자 사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어머니는 느부갓네살의 딸이었다. 그러므로 화잇 선지지가 벨사살을 느부갓네살의 손자라고 언급한 것은 맞는 말이다.



3절, 주석과 해설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2절과 3절에서 반복하여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을 포함하여 모든 유대인들의 고향인 예루살렘, 그리고 그곳에 있는 성전은 그들에게 사무치듯 그리운 곳이었고, 감히 범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곳에 있는 모든 기구들 또한 그러하였다. 그런데 왕이 그곳에서 가져온 그릇들을 사용하여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슬픈 현실인가! 이 모든 것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 때문이었다. 죄는 죄인의 삶을 고통스럽고 슬프게 한다.


그릇

성전의 그릇 또는 기물들은 세 번 예루살렘에서 옮겨졌다. (1) 그것들 중의 일부는 느부갓네살이 605년 예루살렘에서 포로를 잡아갈 때 옮겨졌고(단 1:1, 2), (2) 귀금속으로 된 남은 그릇 또는 기물들의 대부분은 여호야긴 왕이 597년 포로로 잡혀갈 때 옮겨졌으며(왕하 24:12, 13), (3) 대부분이 청동이었던 금속 물건들의 남은 것들은 586년 성전 멸망 시에 옮겨졌다(왕하 25:13-17).


왕후들과 후궁들

“왕후”와 “후궁”으로 번역된 두 아람어 단어는 동의어로 둘 다 “후궁들”을 의미한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높은 계층을 나타냈을 수도 있다. 한 계층의 후궁들은 신분이 높은 가정이나 귀족의 가정에서 택한 여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다른 계층은 돈을 주고 샀거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여인들로 구성되었을 수 있다.




4절, 주석과 해설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

여기에 나열된 우상의 재료들의 수는 모두 여섯이다. 이것은 바벨론의 수인 6과 일치한다. 또한 이것은 진흙 대신에 나무가 언급되긴 하지만 2장에 나오는 신상의 재료들을 암시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돌 나라를 건설하실 때까지 세상은 이런 헛된 신들을 섬기며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5절, 주석과 해설


그 때에

“그 순간에”라는 의미의 말이다. 그들이 여러 재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는 순간에 손가락이 나타난다. 멸망은 자주 순식간에 일어난다. 사 47:11에는 바벨론의 갑작스런 멸망을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는 유사한 말로 묘사한다. “홀연히”라는 말은 “뜻밖에 갑자기”라는 의미의 말이다. 하나님을 끝까지 거역하는 나라와 개인은 뜻밖에 갑자기 멸망하게 될 것이다.


손가락

5절에서 처음에 나오는 “손가락”은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에츠바’이다. 본문에는 “사람의 손가락”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의미상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자주, 하늘을 창조하거나, 애굽에 재앙을 보내거나, 돌판 위에 계명을 기록하거나, 마귀를 쫓아내는 일 등에서 그분의 초월적인 권능을 나타낸다(시 8:3, 출 8:19, 신 9:10, 눅 11:20). 눅 11:20에서 ‘손’은 헬라어로 ‘닥튈로스’인데, “손가락”을 의미한다.

본 절에서 두 번째 나오는 “손가락”은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야드’인데, 이것은 “손”을 의미한다. 단 1:2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 왕과 하나님의 전 그릇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겼다고 한다. 성경에서 “손”을 나타내는 아람어와 히브리어 ‘야드’는 자주 개인의 권세와 권위, 소유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 말은 매우 상징적으로 쓰이는데 자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나타낸다(사 41:19-20, 욥 12:8-9).

벨사살이 조롱한 동일한 하나님 즉 여호와 하나님의 손가락이 벽에 기록하였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수세기 전, 이 동일한 거룩한 손가락이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계명을 돌에 기록하였다. 요 8:6에는 예수께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 예수께서 땅에 쓰신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와 운명을 보고 놀라 도망갔다. 벨사살도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6절, 주석과 해설


얼굴빛이 변하고

9절에도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문자적으로 이곳에는 “빛이 변하고”로 나오고, 9절에는 “얼굴빛이 변하고”로 나온다. 벨사살의 신체적인 반응을 묘사하며, 그가 느낀 두려움과 공포를 나타내고 있다.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신체적인 힘을 잃어버린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두려움이나 놀람으로 허리가 풀어지거나 고통으로 가득찼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사 21:3, 사 13:8, 나 2:10, 겔 21:6-7). 이 세상에는 이렇게 놀랍고 두려운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앞으로 더욱 심하게 될 것이다.



7절, 주석과 해설


자주색 옷

자주색 옷은 매우 비쌌다. 종종 그것은 수입되었고, 왕족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높은 지위에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 입었다. 때때로 왕권을 상징하기도 하였다(더 8:15).


금 사슬

금 목걸이를 의미할 수 있다. 바로는 요셉에게 동일한 선물을 주었다(창 41:42).


셋째 통치자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1)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나보니두스와 벨사살 다음 위치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2)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왕궁 내에서 3인의 통치자 중 한 명이 된다는 말이다.

자주색 옷이 왕권을 나타내기도 하므로 공동 섭정을 말한 것일 수도 있다. 벨사살은 여기서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주겠다고 말한다. 부와 명예가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현 세상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런 것은 아무 효력이 없다.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시 24:3-4).



8절, 주석과 해설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다니엘서에서 박사들이 중요한 순간에 왕을 돕지 못한 세 번째 경우이다. 이미 2장과 4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이번에 박사들은 벽에 쓰인 글자조차도 읽을 수 없었다. 글자를 읽지 못한 분명한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글자는 분명히 아람어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글이 워낙 간결하고 신비스러웠으므로 각각의 의미를 안다 해도 그 안에 숨겨진 기별이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왕 자신이 그 글을 읽을 수 없었는지, 글자 자체가 눈부시게 빛이 나서 분간할 수 없었는지, 혹은 글자가 특이하여 오직 하나님의 깨닫게 해 주심으로만 해독할 수 있었는지 본문만으로는 알 수 없다.



10절, 주석과 해설


왕비

아람어로 ‘말카’이다. 문자적으로 ‘왕의 부인’이나 ‘여왕’을 뜻하지만, ‘왕의 어머니’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여자가 과거를 잘 알고 있다는 것과 왕궁에서의 그녀의 권위로 볼 때, 왕비가 아니라 왕의 어머니(태후)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사전 요청 없이 왕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녀는 왕비 이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고대 동방 관습에 의하면 왕의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호출을 받지 않고 왕의 면전에 감히 들어갈 수 없었다. 왕의 부인이라 해도 그렇게 할 때는 생명이 위태로웠다(참조 에 4:11, 16). 왕들이 그들의 모친에게 쓴 바벨론 설형문자 편지들은 현저하게 정중한 어조를 보여 주고 있으며, 그 아들들이 왕의 모친에게 부여한 높은 지위를 드러낸다.

이 말은 번역판에 따라 ‘태후’ 또는 ‘왕비’로 다르게 번역하였다.

바른성경은 “태후”로, 새번역성경은 “왕의 어머니”로, 공동번역은 “왕비”로, 새미국표준성경(NASB)과 새국제역(NIV 2011)은 “queen”(왕비)로 번역하였다. 고대의 전통은 그녀의 이름은 니토크리스(Nitocris)로, 느부갓네살의 부인이며 벨사살의 어머니나 조모였다고 주장한다. 화잇 선지자는 그녀를 태후(太后)라고 기록하였다.



12절, 주석과 해설


의문을 풀 수 있었나이다

매듭을 푸는 것을 나타낸다. 6절에 매듭을 풀지 못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두려움으로 풀렸다는 것과 기교적으로 연결시켜 말한 것이다. 벨사살은 매듭은 풀지 못하고 넓적다리 마디가 풀렸지만, 다니엘은 매듭을 풀 수 있어서 넓적다리 마디는 풀릴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고 기절할 것이다(눅 21:26).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잠 1:33).



13절, 주석과 해설


나의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벨사살 왕은 여기서 다니엘의 신원(身元)을 유다에서 포로로 잡혀 온 자손 중의 한 명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태후는 다니엘을 그렇게 소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후는 다니엘을 박사들의 어른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언급을 통하여 벨사살은 다니엘이 속한 민족과 다니엘을 비하(卑下)하고 있다. 또한 위대했던 느부갓네살을 ‘부왕(父王)’으로 언급하며 그의 교만의 정신이 충만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단 8장에 의하면 다니엘은 벨사살 왕의 때에 왕궁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므로 벨사살은 이미 다니엘을 알고 있었는데도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의도적으로 다니엘을 무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단 8:1, 27). 단 8:27에서 언급한 “왕의 일”은 “왕의 업무”를 가리킨다. 그래서 바른성경은 “다니엘이 기진하여 여러 날 앓다가 일어나 왕의 업무를 수행하였”(단 8:27, 바른성경)다고 번역하였고, 새국제역(NIV)는 “king’s business”(왕의 업무)라고 번역하였다. 또는 벨사살의 시대에는 다니엘이 중요 직책을 맡고 있지 않아 왕이 직접적으로 다니엘을 만날 기회가 없어서 그를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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