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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2장 1절-11절, 사랑의 새 계명 - 매일성경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요한 일서 2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저자인 사도 요한은 제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제자의 삶이란,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범을 따라 사랑하는 삶입니다. 새벽 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요한 일서 2장 1절-11절, 사랑의 새 계명


요한 일서 2장 1절-11절, 사랑의 새 계명


 

1절, 주석과 해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은 신약성경에서 본 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은 상반절의 ‘하마르테테’(’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은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 15:26, 16:7) 본 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 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 롬 8:9, 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2절, 주석과 해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하마르티온’은 복수형이다. 이는 범죄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의로우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서 ‘화목제물’임을 제시한다. ‘화목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모스’은 제의적인 용어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혹자는 ‘속죄’(expiat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Dodd).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제사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속죄의 근원이 된다. (2) 혹자는 ‘달램’(propitiat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ill). 이 해석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의 대상이 되셔서 희생제사를 받으신다. 이 두가지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Barker, Smalley, Stott, Law).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희생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제사를 받으셨다(레 16:34).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믿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을 의럽다고 선언하신다(롬 3:21-26). 즉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셔서 속죄의 수단을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을 통하여 원수되었던 인간과 자신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홀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가 인류 전체에서 미친 것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요 3:16, 4:42).



3절, 주석과 해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요한은 본 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계명을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계명’(타스엔톨라스)은 구약성경에서 십계명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출 20:2-17)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 되었다(마 22:37-40, 롬 13:8-10, 갈 5:14). 이러한 계명에의 순종은 비록 하나님을 아는 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특징이며, 앎을 분별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Bultmann, Smalley).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도덕적인 행위를 동반하게 된다(Barker).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우리가 … 알 것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코멘’(’지식’)는 본서나 요한복은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비한 지식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구원을 얻은 자들은 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도덕 폐기론을 염두에 둔 듯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절대로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성취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한은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동사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이며 역동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일련의 사고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영적인 관계이다(Smalley). 그래서 요한은 ‘아는 줄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완료 시상인 ‘에그노카멘’으로 표현하여 과거에 알았던 경험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함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계멸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도덕법을 지키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Stott) 보다 세밀하게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4절, 주석과 해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본 절은 앞절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다. ‘저를 아노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영생을 소유하였음을 나타내는 주장이다(요 17:3).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형성한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요구인 계명에 순종하는 모습이 드러나야만 한다. ‘지키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론’은 3절의 ‘테로멘’(’지키면’)과 같이 현재 시상이다. 이는 항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저를 아노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이 없는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고 죄를 가볍게 여긴다면 그는 거짓말장이일 뿐만 아니라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1:6). 여기서 ‘진리’는 요한이 ‘구원의 복음’이나 ‘참된 것’을 나타낼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본문의 ‘진리’는 사변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이다. 즉 ‘하나님을 아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난 도덕을 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요한은 이 진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도덕폐기론을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다.



5절, 주석과 해설


해설

개역성경에는 ‘드’(’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 절이 앞절과 연결된 상반된 측면의 진술임을 시사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그의 말씀’(아우투 톤 로곤)에서 ‘그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 더욱이 요한은 본 절에서 앞절의 ‘계명’ 대신에 ‘말씀’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신 도덕적인 계명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신 모든 복음의 내용에 대한 순종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Barker). 한편 ‘지키는’의 헬라어 ‘테레’은 현재 시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속적인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데우’에서 나타난 속격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주격으로 해석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Houlden, Bultmann). (2) 혹자는 목적격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3) 혹자는 특성을 나타내는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일종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본 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견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한편 ‘온전케 되었나니’의 헬라어 ‘테텔레이오타이’은 완전과 성숙의 개념을 내포한다(Barker). 더욱이 ‘테텔레이오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이는 완전과 성숙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지속되어 성숙의 과정 속에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 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숙되어가며 완전하여져 간다.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순종함으로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숙되고 온전해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안에 내주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6절, 주석과 해설


저 안에 거하는 자는

‘저’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Stott) 문맥상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그러기에 ‘저 안에 거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안에 내주함을 시사한다. 이 내주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비한 지식을 획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즉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성취된다(5절).


그의 행하신는 대로 자기도 행할 지니라

본문은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자들의 삶 속에 윤리적인 행위가 동반되어야 함을 나탸낸다. 여기서 지시 대명사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이노스’은 상반절의 ‘저’와는 달리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Stott, Smalley, Barker). 왜냐하면 본서에서 ‘에케이노스’는 그리스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3:3, 5, 7, 16, 4:17). 한편 ‘행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파텐센’은 부정과거 시상으로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신 삶을 가리킨다. 요한은 본 절에서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함으로 하나님 안에 내주함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생활하신 것과 같이 생활해야 함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윤리적인 계명은 물론 복음에 대해 순종함이 그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드러나야 한다.



7절, 주석과 해설


사랑하는 자들아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로은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난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격하고자 한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요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 … 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2:14, 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 약 2:8, 벧전 2:17).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안토레’은 단수이다. ‘엔통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은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8절, 주석과 해설


다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린’을 본문과 같이 ‘다시’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again, KJV)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yet, NIV, RSV).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로 참된 것이라

본문의 ‘새 계명’은 앞절에서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으로 지칭한 것과 모순되는 듯 보인다. 여기서의 ‘계명’은 예전부터 수신자들이 전해들었다는 의미에서의 옛 계명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 계명’이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Stott, Smalley, Barker). (1)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셨다(4:9, 요 3:16). (2) 예수께서는 순종으로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행하셨다(요 12:27, 롬 10:4). (3)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 즉 영생을 부여하셔서 자신이 행했던 바와 같이 사랑의 계명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4:8-11, 5:11, 12). (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자각하고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계명은 한편으로 옛계명이지만 새 계명이 된다. 이러한 새 계명은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에게 성취되어 분명한 실체로 나타났다(Barker, Stott).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본문은 새 계명이 그리스도와 믿는 자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유이다. 본문에서 ‘어두움’과 ‘참빛’의 대조는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참빛, 즉 실재하는 빛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오셨다(1-5-7, 요 8:12). 한편 ‘비췸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네이’은 현재 시사이다. 이것은 빛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에 빛을 비추셨으며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구속의 빛을 비추심을 의미한다. 이 빛은 완전한 빛이 비추는 다가올 세대, 즉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Smalley).



9절, 주석과 해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 … 하는 자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 레곤’은 문자적으로 ‘말하는 자’를 의미한다. ‘호 레곤’은 ‘하나님을 아는 자’(6절, 요 15:4), 그리고 본 절의 ‘빛 가운데 있는 자’(요 12:46)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세 가지 주장이 하나의 주장,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빛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계는 윤리적인 계명에 대해서만 아니라 복음 전체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빛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않는다는 것은 모순된 주장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한편 본 절의 ‘형제’는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지칭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신자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은 본서를 쓰면서 기본적으로 수신자 공동체의 문제와 관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형제’를 일차적으로 수신자 공동체를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으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도 사용하여 모든 사람을 배제시키지 않고 있다(8절, Barker, Smalley).



10절, 주석과 해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두운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과는 반대로 진정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빛 가운데 거한다는 뜻은 아니다. 본 절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 ‘사랑하라’는 윤리적 계명에 순정하는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자기 속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우토’에서 대명사 ‘아우토’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빛 가운데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그 사람속에’를 의미한다(Barker, Haas). (2) 빛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빛 안에’를 의미한다(Schnackenburg, Smalley).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될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며, 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는 사람들로 걸림돌이 되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한편 ‘거리낌’의 헬라어 ‘스칸달론’은 신약성경에서 배교나 범죄토록 하는 유혹을 가리킨다(고전 1:23). 이러한 ‘스칸달론’의 대상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빛 가운데 거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자 자신이며(Brooke, Westcott, Barker)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이다(Stott). 본문은 두 종류의 대상을 모두 내포하는 듯하다. 빛 가운데 거하며 셩젤마 사랑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뿐더러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11절, 주석과 해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본 절은 9절에 언급된 진술의 부연 설명이다.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눈이 멀어서 스스로의 실체를 본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자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구분하는 분별력을 상실하여 어두움에 속해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빛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함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상실하였으며, 실상 하나님을 멀리 떠나 어두움 가운데 헤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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