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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2장 1절-34절, 회막을 향하여 - 매일성경 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 큐티의 본문인 민수기 2장 1절부터 34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행군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과 순종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매일성경 큐티와 새벽설교 준비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민수기 2장 1절-34절, 회막을 향하여 - 매일성경 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민수기 2장 1절-34절, 회막을 향하여



1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께서 …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민 1-21장은 대부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7장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선언이 빠진 11, 12, 14, 16, 20, 21장이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패역한 모습을 다루고 있어 이채롭다. 그러나 그 내용 중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라는 선언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장은 없다. 그처럼 본서는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사 이스라엘을 친히 지휘하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역설(力說)하고 있다.



2절, 주석과 해설


군기

성막을 중심으로 네 방향 곧 남동서북을 대표하는 각 지파의 진(陣) 깃발을 가리킨다. ‘군기’의 종류에 대해서는 1:52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것들은 각각 유다 깃발(18절), 르우벤 깃발(10절), 에브라임 깃발(18절), 단 깃발(25절)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군대는 이 네 깃발을 중심으로 4대(隊)를 이루어 행진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네 지파들은 모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들로서 장차 구원 받을 모든 피조물(4는 피조물의 숫자)을 암시하기도 한다(계 4:6-11).

한편 유대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네 군단(軍團) 깃발의 문장(紋章)과 색깔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1) 동쪽 유다 진영을 대표한 기는 웅크린 사자의 모습이 그려진 녹색기였다. 여기서 사자의 모습은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라고 한 야곱의 예언을 반영한 것이고(창 49:9), 녹색기는 판결 흉패의 12색깔 중 유다 지파를 상징하는 ‘녹주옥’을 반영한 것이다(출 28:17). (2) 남쪽 르우벤 진영의 기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홍색기였다. 이는 르우벤이 장자로서 가족의 머리였기 때문인 것 같다(창 49:3). (3) 서쪽 에브라임 진영의 기는 송아지 형상이 그려진 황색기였다. 이것은 요셉이 해몽한 바로의 꿈에 나타났던 소를 연상시킨다(창 41:1-4). (4) 북쪽 단 진영의 기는 독수리가 새겨진 백색과 홍색이 섞인 기였다. 이는 뱀으로 묘사된 단(창 49:17)이 이를 싫어하여 뱀의 천적인 독수리를 채택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그 깃발의 색깔은 판결 흉패의 ‘벽옥’ 색깔을 반영한 것이다(Keil & Delitzsch).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그들의 전승 근거는 다음 두 가지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1) 문장은 야곱의 임종시 예언(창 49:1-27)에 기초한 것이고, (2) 색깔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의 색깔(출 28:15-21)에 기초한 것이다. 한편 유대 랍비들은 이러한 네 군단의 문장(紋章, crest)은 후일 에스겔의 환상 속에서도 분명히 확증된다고 한다(겔 1:10). 그러므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네 지파의 깃발은 하나님을 옹위하고 있는 모든 피조계를 대표하는 4생물들의 모습과 일치한다(겔 1:4-14, 계 4:6-11). 또한 성막과 그 사면의 깃발들, 그리고 천국의 보좌와 보좌 주위의 4생물들의 관계를 유추해 보면, 실로 광야에 세워진 성막은 천국과 하나님 임재의 상징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광야의 진(陣) 배치는 오늘날 광야 같이 험악한 인생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소망을 주는 희망찬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늘 가나안을 향해 행군하는 신앙의 순례자들은 C. F. 버틀러의 찬송시처럼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노래하며 신앙의 행진을 계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윗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기에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일지라도 오히려 천국의 풍요와 안식을 체험할 수 있었다(시 23:1-6).


조상의 가문의 기호

여기서 ‘기호’(히, 오트)란 ‘신호’, ‘표’, ‘표시’, ‘깃발’ 등을 가리킨다. 이것은 네 방향을 대표하는 네 지파의 ‘군기’(데겔)와는 달리 단순히 12지파 각 종족을 상징하는 깃발일 것이다(Keil). 그리고 각각의 ‘기호’에 배경을 이루는 색깔은 아마도 대제사장이 달았던 흉패 위에 박힌 12개 보석의 색깔과 동일할 것으로 추측된다(출 28:17-21).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직역하면 ‘회막 주위로 마주 보라’는 뜻이다. 한편 KJV는’회막 주위에서 멀리 멀어져’(far off about the tabernacle)로, NIV와 공동번역은 ‘만남의 장막에서 조금 떨어져’(the Tent of Meeting some distance)라고 해석했는데 이는 수 3:4을 참조한 의역인 듯하다. 수 3:4에는 언약궤와 이스라엘 진과의 거리가 2000규빗(약 912m) 정도 떨어지도록 명령되고 있다. 그런데 RSV는 원문에 충실하게 ‘각 방면에서 회막을 마주하여’(facing the Tent of Meeting on every side)라고 번역하였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천막 입구는 회막을 향해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이스라엘은 항상 성막을 바라보며 그곳을 사모하고 특히 그곳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레 19:30, 단 6:10). 물론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임을 당하는’(1:51) 규례로 보아 회막과 주거지와의 거리는 어느정도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3절, 주석과 해설


동방 해 돋는 쪽

직역하면 ‘해 뜨는 방향인 동쪽’이다. 이는 성막의 앞 방향 곧 행진 방향이기도 하다(3:38). 또한 이곳은 성막 주위에 진 배치를 시작할 때 제일 처음 언급된 곳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고 아름다은 자리임을 암시한다. 이곳에 위치한 지파들은 유다의 기(旗)아래 모인 자들로서 행군할 때도 제1대로 진행하는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유다 지파를 향한 야곱 예언의 성취라 할 수있다(창 49:10). 이 예언은 다윗 때에 꽃을 피워(삼하 2:4-7, 5:1-3)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다. 실로 유다가 해 돋는 동편을 차지한 것은 의로운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말 4:2)께서 유다의 가계를 통해 나실 것을 예시한다(히 7:14). 과연 예수께서는 해처럼 찬란한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우리를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인도하셨다(요 8:12, 9:5, 10:3, 4). 한편 밧모 섬에서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바라본 그리스도의 얼굴이 해와 같았다는 사실은 위의 내용과 잘 부합된다(계 1:16).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라

즉 동쪽 방향을 대표하는 유다 진(陣) 기에 예속된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종속적인 의미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에게 내린 지휘권에 자발적으로 순종함을 가리킨다. 실로 이스라엘은 여호와 단 한 분의 왕으로 족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지파 백성들은 각자의 인격과 지위를 인정해야 했으며 서로가 유기체적인 관계를 지닌 자들로서 서로를 섬기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데 힘써야 했다. 이런 점에서 출애굽 여정 중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광야 교회’라 부를 수 있다(고전 12:4-31).


유다 자손의 지휘관은 … 나손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을 지도할 지휘관 한 명씩을 선출하셨다. 그런데 그 지도자들은 지난번 인구 조사 때 모세와 아론을 도와 실무를 담당했던 자들이었다. 즉 1:4-16 에 기록된 지파의 두령들이 2:3-31에서 지휘관으로 재임명 받은 것이다. 한편 개역개정 성경에서 지휘관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히브리어는 ‘알루프’, ‘나시’, ‘로쉬’, ‘사르’ 등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창세기에는 ‘알루프’만이 쓰였고, 민수기에는 대부분 ‘나시’가 쓰였다. 본서에 자주 쓰인 ‘나시’는 ‘들어 올리다’,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올리다’ 등의 뜻인 ‘나사’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지휘관’이란 말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우두머리(prince, chief)로 높여진 자를 가리킨다. 즉 각 지파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에 의해 들어 올려진 자’가 곧 지휘관이다. 이는 결국 지휘관의 권위가 하나남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나타낸다(롬 13:1).



9절, 주석과 해설


제일대로 행진할지니라

즉 ‘첫번째로 출발해야 한다’(RSV, they shall set out first)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첫번째’(히, 리숀)란 말은 ‘머리’(히, 로쉬)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머리, 곧 행진시 선봉에 서는 영예를 누리게 된 셈이다(창 49:10). 그러나 그것은 직분상의 머리가 아니라 전투적 사명에 있어서의 머리를 가리킨다. 실제로 유다 진 기에 속한 자들은 싸움에서 물러서기를 싫어했다. 그 단적인 예가 80세의 노년에 이르러서도 전투에 앞장 섰던 유다 지파 출신의 장군 갈렙의 용맹성에서도 잘 나타난다(민 13:6, 30, 수 14:13, 14, 15:14). 진정 하나님은 비겁한 자를 요구하시지 않는다. 오직 강하고 담대한 자라야 그의 부르심을 따라 죄악과 싸우는 전투에 앞장 설 수 있는 것이다. 용맹했던 유다 지파처럼 각자에게 부과된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충성스럽게 수행하기 위해 ‘제일대’에 편성되어 싸움터로 나가는 성도야말로 오늘날 하나님 나라 건설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10절, 주석과 해설


남쪽

남쪽은 행진하는 방향으로 보면 오른쪽에 해당한다. 통상 히브리인들은 오른쪽을 권능과 영광의 상징으로 보았다(출 15:6, 12, 시 118:15, 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본래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의 자손들을 특별히 배려하신 듯하다.



14절, 주석과 해설


르우엘

1:14에 언급된 ‘드우엘’의 오기인 듯하다(Keil, Pulpit Commentary). 아마 ‘레슈’와 ‘달렛’의 문자적 유사성으로 말미암은 사본 필사가들의 착각으로 잘못 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은 ‘드우엘’로 교정하여 표기했다.



16절, 주석과 해설


제이대로

실제 행군에 있어서 유다 지파를 뒤따랐던 제2행렬은 성막 물품들을 운반하는 레위 지파의 게르손, 므라리 자손들이었다(10:17-70). 그렇다면 르우벤 지파는 정확히 말해 제3행렬에서 행진했다. 한편 레온 우드(L. Wood) 같은 학자는 이들이 성막 물품을 호위하며 행진했을 것으로 본다.



17절, 주석과 해설


회막이 레위인의 진영과 함께

이는 고핫 자손들이 성막 안의 성물(聖物)을 메고 행진하는 것을 가리킨다(10:21). 이와 같이 성막의 성물은 성막과 분리되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제일 중앙에 위치했다. 즉 이스라엘의 네 편대 중 두 편대(유다, 르우벤 진 기에 속한 자)는 회막 앞에, 나머지 두 편대(에브라임, 단 진 기에 속한 자)는 그 뒤를 따랐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거주할 때 뿐 아니라, 행군 시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을 중심하여 생활할 것을 묵시적으로 명하셨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로서, 진정 하나님께서는 장소를 불문하고 당신을 중심한 신앙생활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중앙에

즉 ‘가운데’란 뜻이다. 이말은 이스라엘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위치를 묘사할 때 종종 사용되었다(왕상 6:13, 겔 37:28, 43:7, 슥 2:5, 8:3). 한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종교적 의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면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도우신다는 뜻이다. (2) 정치적 의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12지파의 단결을 이루는 구심점이요 통치의 중심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해 계실 때, 곧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가운데 있을 때, 이스라엘은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이가봇’, 곧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을 때, 그들은 대적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했다(삼상 4:1-22).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성도들의 삶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하나님을 그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자들은 그의능력을 체험하며 승리의 삶을 살게 된다(시 118:6, 7). 반면에 죄가 주장하는 삶을 사는 자들은 슬프고 무기력한 나날 속에서 신음할 수 밖에 없다(시 31:10, 32:3, 4). 그리고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당신의 장막을 치셨다는 점에서 구원사(救援史)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를 발견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광야 시대에 성막 위에 머무르는 구름기둥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본체의 영광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확실히 계시하시게 되었다. 요 1:14에 기록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의 표현 중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헬, 에스케노센 엔 헤민)를 직역하면 ‘그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가 된다. 이는 성막을 통해 모형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자신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은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마 1:23)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계시 중의 계시’이다. 그리고 이 계시는 마침내 우리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 우리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며 동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아래 영원토록 머물게 될 때 그 완연한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계 7:15-17, 21:3, 4).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비록 상대할 적이 없고 지루한 광야 행군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실히 요구된 것은 ‘질서’였다. 하나님은 바로 이 질서 의식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께 대한 경외와 순종을 가르치기 원하셨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를 배격하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 :33).


자기 위치에서

직역하면 ‘그의 손에서’란 뜻이다. 이말은 ‘ … 다음으로’라는 의미도 지닌다(느 3:2). 여기서는 두 번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곧 성막 주위에 진을 친 그대로 진행하라는 뜻이 아니고, 진을 쳤던 자리에서 차례대로(앞선 지파 다음으로) 출발하여 진행하라는 뜻이다(10:13-28).


앞으로 행진할지니라

본 장의 ‘진행할지니라’(9, 16, 17, 24, 31절)는 말은 모두 여기서처럼 ‘앞으로 전진하라’는 뜻을 지닌다. 일례로 전진하지 않는 자전거는 곧 쓰러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전진하지 않는 신앙 역시 똑같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킨다”고 경고한다(잠 1 :32).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하나님의 군대로서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또한 승리의 시온 성에 들어가기 위해 순례자로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때로 우리의 앞길에 안개가 자욱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인도에 모든 것은 맡기는 자세로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한다(히 11:8).



18절, 주석과 해설


서쪽에는

원뜻은 ‘바다 쪽에는’이다. 여기서 바다는 팔레스타인 서쪽에 위치한 지중해를 가리킨다. 그런데 비평적인 학자들은 이러한 표현이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자에 의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본서의 모세 저작설을 부인한다. 그러나 비록 모세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기거했던 가나안 땅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가나안 서쪽의 지중해를 ‘서쪽’이라고 지칭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중해 동쪽 출신의 조상들이 사용했던 관용어를 그대로 썼을 수도 있다(Lange).



24절, 주석과 해설


그들은 제삼대로 행진할지니라

진 기(陣旗) 상으로는 이들이 르우벤 진 기를 뒤따랐지만, 실제적으로 행군할 때에는 성막의 성물(聖物)을 운반하는 고핫 자손의 뒤를 따랐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마 고핫 자손의 성물을 호위하는 임무도 띠었으리라 추정된다(16절).



25절, 주석과 해설


단 군대의 진영의 군기

제4대의 진 기를 잡은 지파는 단 지파였다. 그 이유는 일찍이 야곱의 예언(창 49:17)에서도 암시된 것처럼 이들은 그 전투적 속성으로 인해 용맹한 군대로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속성은 극히 타락하여 후일 단 지파 지역은 우상 숭배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들은 광야 행진 시의 영예로운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후 약화일로를 걷다가 마침내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계 7:5-8).



31절, 주석과 해설


후대로 행진할지니라

도합 157,600명으로 구성된 이 진영은 선봉에 선 유다 진영 다음으로 군인 수가 많았을 뿐 아니라, 기질상 용감하고 전투적이었기 때문에(창 49:16-21) 이스라엘 진영의 제일 후미 방어 임무를 맡았다.



34절, 주석과 해설


명령하신대로 다 준행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했음을 보여 준다(1:54). 이러한 순종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삼상 15:22). 그러나 초기의 이같은 아름다운 순종은 이후에 거듭 자행되는 반역 및 불순종과 확연히 대조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사실은 신앙은 결코 한순간의 일이 아니라 일평생 계속되어야 할 성도의 과제임을 알 수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였다(고전 10:12).


진 치기도 … 행진하기도

이 단순한 행동 속에 이스라엘 백성의 나머지 38년 간의 광야 생활이 함축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설정해 주신 행동의 규범을 따라 기나긴 광야 여정을 진행해 갈 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 거하는 동안 주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필연성을 제공한다(시 119:105). 한편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전체 진 규모 면적은 12평방 마일(약 19,308 평방미터) 정도였다고 한다(Palestinian Targums).

다음은 정주할 때의 진 배치를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남동서북 방향으로 3지파씩 설명한 것이다. 먼저 성막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유다(74,600명), 잇사갈(54,400명), 스불론(57,400명)의 3지파, 서쪽에는 에브라임(40,500명), 므낫세(32,200명), 베냐민(35,400명)의 3지파, 남쪽에는 갓(45,650명), 시므온(59,300명), 르우벤(46,500명)의 3지파, 북쪽에는 납달리(53,400명), 아셀(41,500명), 단(62,700명)의 3지파씩 위치하였다.

다음은 진행할 때의 진 배치로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법궤을 선두로 하여 3지파씩 설명한 것이다. 맨 앞쪽 선두에는 법궤가 위치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유다 지파와 잇사갈 지파와 스불론 지파가, 그 다음으로는 성막부품을 운반하는 레위 지파의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위치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르우벤 지파와 시므온 지파와 갓 지파가 위치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성막기구를 운반하는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이 위치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위치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단 지파와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가 위치하였다.

위와 같이 정주할 때의 진영 모습과 행진할 때의 진영 모습이 다른 이유는 광야의 좁은 길을 무리없이 지나가기 위해서였다. 한편 학자들 중에는 정주 시에도 만일 넓은 장소가 없을 경우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이상적인 진영 배치를 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Pulpit Commentary).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성막이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만큼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큰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스라엘의 행군 시에 언약궤가 3일 길을 앞서 간 것은 특이하다(10:33). 이때, 평소 성막 위에 덮여있던 구름(출 40:34-38)은 언약궤 위에 머물렀다(10:34).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친히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뜻한다. 언약궤의 덮개, 즉 속죄소에 조각된 그룹 위에 뒤덮인 구름의 진행 방향이 곧 이스라엘의 진로로 결정되었다. 시 80:1은 바로 이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하는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었다(신 10:4). 그러므로 언약궤가 이스라엘을 앞서 간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살아야할 것을 교훈해 준다. 개혁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하나님의 말씀이 멈추는 곳에서 멈춘다’고 하는 말씀 추종의 삶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 여정에서 우리 발걸음을 비추는 등(燈)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시 119:105)이 우리를 안내하는 대로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는 삶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시 119:32). 그리할 때 그 길의 결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말씀(법궤)의 인도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무섭고 두려운 광야에서 헤매고, 허우적거리다가 마침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죽음의 광야를 벗어나 생명의 길로 향하게 만드는 생의 나침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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