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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2장 12절-29절, 세상과 적그리스도 - 매일성경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2장 12절부터 29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적 그리스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본문의 큐티와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요한 일서 2장 12절-29절, 세상과 적그리스도


요한 일서 2장 12절-29절, 세상과 적그리스도



12절, 주석과 해설


자녀들아 …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본문은 1, 2절과 1:9을 반영한다. ‘죄사함’은 구약성경에서 새 언약에 속한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렘 31:34, 겔 36:22-25).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행하신 예수의 이름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마 1, 21, 행 4, 12, 10:43, 딛 2:14). 여기서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의 인격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나타낸다(Smalley).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은 죄사함이 그리스도께서 하목 제물이 되심으로(1, 2절) 그의 이름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Stott). 한편 ‘사함을 얻음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온타이’은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처음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죄사함을 경험하였음을 시사한다.



13절, 주석과 해설


아비들아 …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태초부터 계신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uce, Dodd). 이 들에 의하면 본문은 시대에 상관 없이 전혀 변함이 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2) 혹자는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3)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arker, Westcott, Brooke). 이들에 의하면 본문은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의 ‘아이들을’ 향한 말씀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당시에 팽배해 있던 이단 교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당시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선재하신 말씀, 즉 로고스가 나사렛 예수 안에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거짓 교리가 흔하던 수신자 공동체에서 ‘태초부터 계신 이’로서의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이단 교리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앎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테’은 현재 완료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개종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이단자들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선재하신 말씀이셨음을 알았고 그 앎이 현재까지 지속되어 신앙이 성숙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청년들아 …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악한 자’의 헬라어 ‘톤 포네론’은 남성 명사이다. 이는 사탄을 가리키는 것으로 악을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 사탄은 빛과는 상관이 없으며 어둠의 세계를 조종하고 통제한다(14절, 3:12, 5:18, 19, 요 17, 15, 엡 6:16, 살후 3:3).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사실상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사탄의 조종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기었음이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네니케카테’도 현재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성취한 승리가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종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서 승리하였으며(눅 10:18, 골 2:15, 계20:2), 그 승리를 근거로 현재도 지속적으로 사탄과의 영적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악을 향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을 산다(Stott, Smalley).



14절, 주석과 해설


아이들아 …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12절에서는 ‘테크니아’(’자녀들아’)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본 절에서는 ‘파이디아’(’아이들아’)로 부르고 있다. ‘테크니아’와 ‘파이디아’는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별하면 ‘테크니아’는 부모와 유아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아이가 약하여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더 강조하는 반면에 ‘파이디아’는 아이의 미숙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과 지도가 필요함을 나타낸다(Westcott, Stott). 한편 ‘아버지를 알았음이요’에는 13절의 아비들을 향한 말씀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완료 시상이 사용되어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12절) 개종할 때부터 지도자 아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 배워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Barker).


청년들아 …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본문은 13절과 병행된다. ‘강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퀴로이’은 육체의 강함보다는 영적인 강건함을 의미한다(엡 6:10, 계 18:8). 청년들아 영적으로 강건해서 악한 자, 곧 마귀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실체로서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영적으로 강건케 하여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악한 자에 대한 승리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Smalley).



15절, 주석과 해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본 절에서 17절까지는 ‘세상’이란 단어가 6번 등장한다. 여기서 나타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 통제를 받는 체제를 가리킨다(4:3-5, 5:19, 요 16:11, Barker, Stott). 이러한 세상은 본질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다(요 15:18, 19, 17:25). 한편 본문의 ‘사랑’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호’나 ‘매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Bultmann). 그러나 사실상 사랑과 매력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기호나 매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이기에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것의 방향과 동기가 문제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욕구나 매력, 사랑은 빛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타인에 대해 올바르고 창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사랑은 옳지 못하고 이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니게 된다(Smalley).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본문은 요한이 수신자 공동체에서 세사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파트로스’에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목적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도록 만든다. (2) 혹자는 주격으로 보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을 사랑할 경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다. 두 가지 견해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16절, 주석과 해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예이다. 이 세 가지 예중에서 첫 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듯하다(Smalley). (1) 육신의 정욕. ‘육신’의 헬라어 ‘사르코스’은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Barker, Stott). (2) 안목의 정욕. 이것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Marshall, Bultmann). (3) 이생의 자랑(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 여기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주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성에 대해 과대 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한다. 2. 목적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생의 자랑’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은 과대 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Marshall, Law).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 … 로 좇아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은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요한은 ‘에크’를 사용하여 상반절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예,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 곧 사탄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17절, 주석과 해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또다른 이유이다. 세상은 한시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세상과 세상을 사랑한 모든 사람은 공동의 운명으로 파멸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죄를 미워하며 오직 사랑의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하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때문이다(3, 14, 5:11, 12, 고후 4:18).



18절, 주석과 해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의 땅을 소유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며, 열국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온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입증될 날을 기대하였다(사 2:2, 3, 겔 38:14-23).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박해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아를 대망하였다. 이러한 메시아 대망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파루시아 때의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마지막 때’(에스카테 호라)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엄은 의미의 말세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하거나 혹은 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말세에 나타나는 포괄적인 징후나 성격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Brooke, Dodd). (2) 혹자는 좁은 의미로 이해하여 마지막 날들 중의 마지막 때, 곧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요한복음에서 ‘시간’이 구속을 성취시키는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요 2:4, 4:21, 7:30, 8:20, 12:23)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내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Barker).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적그리스도’로 번역된 헬라어 ‘안티크리스토스’은 관사가 없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본문의 ‘적그리스도’는 어떤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기 보다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대적하거나 반대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에 나타난 ‘안티크리스토 폴로이’(’많은 적그리스도’)가 복수인 사실로도 입증된다. 그래서 혹자는 본문의 ‘안티크리스토스’에서 접두어 ‘안티’을 ‘적’이 아니라 ‘거짓’의 의미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거짓말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aw, Stott, Dodd). 요한이 이러한 ‘적그리스도’가 당시에 많이 나와 있음을 언급한 것은 당시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완전한 인간이심을 부정함으로 그리스도를 부정하였다(요이 1:7, Smalley).



19절, 주석과 해설


저희가 우리에게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본문은 앞절에 언급된 ‘적그리스도’가 다른 종교를 가진 자가 아니라 수신자 공동체 일원으로 있다가 거짓 교리에 빠진 자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나갔으나’는 수신자 공동체에서 강제로 출교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신자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스스로 나간 것을 보고 요한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진술하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형식적으로는 수신자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었지만 사실상은 전혀 공동체에 일원이라 할 수 없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은 스스로 그 공동체의 일원이 아님을 증명하는 행위였다(Barker).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리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개역성경 본문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문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자들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앞의 진술에 대한 근거임을 시사한다.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참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수신자 공동체의 교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공동체를 떠났다. 그들의 이탈은 자신들이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임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티 우크 에이신 판테스 여스 헤몬’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서이 가능하다. (1) ‘에이신’의 주어를 ‘적그리스도’로 볼 때 본문은 ‘적그리스도 모두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다’(that they all are not of us, RSV)의 뜻이다. 이 경우에 ‘모두’를 의미하는 ‘판테스’은 강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2) ‘에이신’의 주어를 ‘수신자 공동체’로 볼 때 본문은 ‘공동체 회원들 모두가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that not all in our company truly belong to it, NEB)라는 의미가 된다. 이 경우에 본문은 수신자 공동체 내에 사이비 일원들이 있음을 나타내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이제까지의 문맥과는 달리 주어가 바뀌기 때문이다(Smalley).



20절, 주석과 해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성경에서 ‘거룩하신 자’라는 칭호는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된다. (1) ‘하나님’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시 78, 41, 사 1:4, 합 3:3). (2)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데도 사용되었다(요 14:18, 15:26, 16:7, 행 2:27, 3:14). ‘하나님’과 ‘그리스도’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한편 ‘기름 부음을 받고’는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닫고 기름 부음을 받는 성유식(聖油式)을 행한 것을 반영한다(Dodd, Schnackenburg). 요한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 의식을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기름 부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눅 4:18, 요 14:17, 15:26, 16:13, 행 4:27, 10:38, 고후 1:21, 22, Barker, Stott, Smalley).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은 영지주의자들처럼 단순히 성유식을 행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셔서 자신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러기에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달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안에 내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임이 분명하며 진정한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은 그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아느니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테 판테스’은 ‘너희 모두가 안다’(you all know, RSV)나 ‘너희 모두가 진리를 안다’(all of you know the truth, NIV)를 의미한다. 두 가지 중 후자에서 ‘진리를’이 삽입된 것은 다음절과의 연관성을 나타낸 해석이다. 요한은 본문은 통해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극소수만이 하나님과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주장을 수신자 공동체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진술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교리를 공격하고 있다(Smalley). 또한 극소수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요한은 ‘너희 모두’라고 진술하여 수신자 공동체 중 일부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알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영지주의자들의 거짓을 드러내고 있다.



21절, 주석과 해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본 절은 세 개의 ‘인함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티’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번 사용된 ‘호티’ 중에서 처음 두 번에 대해 혹자는 선언이나 진술을 나타내는 서술격(that,’ … 것’)이라고 주장한다(Blutmann, Haas, Schnackenburg). 그러나 세 번 중 처음 두 번의 ‘호티’는 원인격(because, ‘때문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왜냐하면 요한은 본 절에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을 더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이 모두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아 진리를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본서를 기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세 번째 ‘호티’에 대한 해석의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원인격으로 보아 본문이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썼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2) 혹자는 서술격으로 이해하되 ‘쓴 것’과 연결시킨다(Schnackenbu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나는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희에게 썼다’를 의미한다. (3) 혹자는 서술격으로 이해하되 ‘너희가 … 앎을’과 연결시킨다(Dodd, Smalley).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거짓이 진리에게서 날 수 없다는 것을 너희가 안다’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앞에 나타난 두 번의 ‘호티’를 원인격으로 기술함으로 수신자 공동체가 기름 부음을 받아 온전히 진리를 식별할 수 있음을 밝히고, 마지막’호티’를 서술격으로 사용함으로 ‘거짓이 진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22절, 주석과 해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앞절에서 진리가 ‘거짓’에서 나올 수 없음을 선언한 요한은 본 절에서 ‘거짓’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거짓말하는 자’란 예수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땅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4:2, 3, 요이 1:7). 이들은 예수께서 참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것이며, 아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요 12:44, 45).



23절, 주석과 해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본 절은 앞절의 결과에 대해 부연 설명한 것이다. ‘없으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데 … 에케이’과 ‘있느니라’의 헬라어 ‘에케이’에서 ‘에케이’는 문자적으로 ‘가지다’란 뜻이다. 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영적인 경험을 시사한다. 또한 본 장에서 ‘에케이’는 ‘거하다’의 헬라어 ‘메노’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여(24, 27, 28절) 확신의 동기를 제공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를 소유하지도 못하고, 그와 교제를 나누지 못할 뿐 아니라 상호간의 내주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셨으며(요 1:18, 14:9)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 관계를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1, 2절, 요 14:6).



24절, 주석과 해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리라

‘처음부터’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수신자들이 처음 복음을 듣고 개종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2) 혹자는 사도들이 초대 교회에 처음 복음을 선포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들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은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과거에 선포된 복음을 들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과거에 사도들이 선표했던 복음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리라고 명령한다.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안 엔 휘민 메이네 호 아프 아르케스 에쿠사테’이다. 본문의 헬라어 어순과 본 절 상반절의 헬라어 어순을 살펴보면 두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너희 안에’에 해당하는 ‘엔 휘민’이 상반절에서는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앞에 기술되어 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20절) 수신자 개인의 삶에 거하고 있는 복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상반절에서는 ‘에쿠사테’(’들은’)가 ‘아프 아르케스’(’처음부터’)보다 앞에 기술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아프 아르케스’가 ‘에쿠사테’ 보다 앞에 진술되어 있다. 이는 본문과 상반절에 교차 대구법을 사용하여 복음이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22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기술되어 ‘아버지’가 ‘아들’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문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기술되어 있다. 이는 요한의 강조점이 아들에 있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임을 시인할 때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고 상호간의 내주가 성취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거하리라’의 헬라어 ‘메네이테’은 상반절에서 현재 시상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미래 시상이다. 이것은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를 통한 현재의 영적 경험이 미래의 온전한 구원을 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Smalley).



25절, 주석과 해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2)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oulde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한편 ‘약속’은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나 성경 전체에서는 자주 나타난다. 성경은 구약의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메시아이신 예수 안에서 완성되며(행 13:23, 롬 15:8, 고후 1:20-22) 새 언약이 옛 언약을 대치할 것이라고 말한다(갈 3, 16, 엡 2:12, 히 10:23, 11:13, 39, 40). 또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구속받은 자들이 약속된 성령에 의한 새 시대, 즉 메시아 시대의 종말론적 축복을 공유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눅 24:49, 행 1:4, 5, 2:33). 목회 서신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이 영생임을 진술하고 있다(딤전 4:8, 딤후 1:1, 딛1:2).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이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 안에서 복음을 굳게 견지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순종을 수반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는 아들을 알지 못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인 영생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26절, 주석과 해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미혹케 하는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플라논톤’은 현재 분사이다. 이는 앞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적그리스도들의 특성이 거짓말로 미혹하는 마귀의 특성을 닮고 있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요한은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 적그리스도의 미혹행위가 지속적인 것으로서 현재에 볼 수 있는 실제적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썼노라’의 헬라어 ‘에그랖사’은 서간체 부정 과거이다. 이 ‘에그랖사’는 본서의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의 시점, 즉 수신자 공동체가 본서를 받아보면서 요한의 기록 시점을 생각하는 당시 표현 방식이다.



27절, 주석과 해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24절에서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수신자 공동체에게 권면한 것과 같이 본 절에서도 요한은 이단적인 교리를 전파하여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안에 안전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수신자들이 거룩한 자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을 강조하고 있다. ‘기름 부은’은 성령을 가리킨다(20절 주석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진리이시다(5:7). 여기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는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교사직에 대한 언급(행 4:18, 5:28, 42, 고전 12:29, 엡 4:11, 딤후 2:24)과 상치되는듯 보인다. 그러나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직분을 받은 교사들은 진리이신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의 내용은 진리에 의해서 시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4:1, 5, 요이 1:9, 10, Schnackenburg). 즉 그 가르침의 내용은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각 개인에게 가르쳐져야만 한다. 그런 반면에 당시에 이단적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요한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강력하게 권고하여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Brooke, Houlden). 한편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는 요한복음에 언급된 보혜사 성령의 성격과 병행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셔서(요14:17, 15:26)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요16:13)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요14:26). 이런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유식과 대조를 이룬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유식은 지적인 것이며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영적 지식을 소유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그 안에 거하게 한다.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데스 에스틴 카이 우크 에스틴 프슈도스’은 문자적으로 ‘그것은 참되고 거짓이 아니다’란 뜻이다. 여기서 ‘에스틴’(’이다’)의 주어인 그것은 기름 부음에서 비롯된 가르침보다는 기름 부음 자체를 가리킨다(Smalley). 기름 부음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그는 물론 그의 가르침 전체가 참되며 거짓이 없다. 한편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의 주어는 ‘기름 부음’으로 보기 보다는 ‘예수’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더욱이 ‘가르치신’의 헬라어 ‘에디닿센’은 부정 과거 시상이어서 예수께서 지상 사역 때에 행하신 가르침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Smalley). 성령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신다(요14:26).



28절, 주석과 해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본문은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신의 권면을 요약한 것이다. ‘그 안에 거하라’는 본 장에서 자주 언급된 권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영원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내주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되며 ‘사랑하라’는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계명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동반한 그리스도인의 내주는 그리스도인들로 약속된 영생을 소유하게 한다.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하려 함이라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종말론적이다. 즉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심판과 연결시키고 있다. ‘나타내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네로데’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께서 역사 위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파네로데’와 ‘강림’의 헬라어 ‘파루시아’을 연결시켜서 그리스도게서 눈에 보이게 광채를 입고 재림하실 것을 시사하고 있다(Barker). 한편 ‘담대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신약성경에서 31번이나 나타나며 그 중에서 13번이 요한이 쓴 책들에서 나타난다. ‘파르레시안’은 헬라 세계에서 ‘자기의 의견을 공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민의 권리’를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나(행4:29, 고후7:4)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딤전3:13, 히10: 19) 담대함을 의미한다. 본 절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29절, 주석과 해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은 본 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거듭나고 영생을 소유한 자들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할 표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의’이다. 여기서 ‘그’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나(Smalley)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Law, Barker, Stott). 왜냐하면 다음 절인 3:1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언급되어 있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만 한다. 그래서 요한은 본 장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것이며 어두움에 있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3-6절).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서 보여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순종의 생활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아버지에게서 난 자라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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