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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3장 1절-12절, 예수님의 재림과 의로운 삶 - 매일성경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요한 일서 3장 1절부터 12절의 말씀은, 거짓 교사들의 가짜 복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키고 의의 삶을 살았던 이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묵상과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요한 일서 3장 1절-12절, 예수님의 재림과 의로운 삶


요한 일서 3장 1절-12절, 예수님의 재림과 의로운 삶



1절, 주석과 해설


보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데테’은 감탄사의 역할을 하는 명령형으로 복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 복수 형태는 가시적인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어법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음을 암시한다(Smalley, Westcott).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어떠한’의 헬라어 ‘포타펜’은 신약 성경에서 대개 놀라움이나 경탄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마8:27, 막13:1, 벧후3:11), 본문에서는 ‘어떠한 정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의미한다(Brooke). 한편 ‘자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나’은 실제적인 부자 관계에서의 자녀됨을 강하게 함축하는 단어이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주로 ‘휘오스’(’아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법적인 부자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이다(Plummer, Wilder).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써 값없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우신 사랑인가를 선포하고 있다(Calvin). 요한은 ‘우리가 그러하도다’를 부가하여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은 문법적인 연결이 명백하지 않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혹자는 ‘디아 투토’가 뒷부분의 내용과 연결되어 ‘호티’(’왜냐하면’) 이하의 절을 설명하는 것으로 본다(Smalley, Stott). (2)혹자는 ‘디아 투토’가 앞부분의 내용과 연결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보고, ‘호티’ 다음에 따라오는 절은 부가적 기능만을 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어느 견해를 취해도 의미상 큰 변화는 없으나 문맥상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 절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를 모르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단순히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강조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aas). (2)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Stott). (3)혹자는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Briike). 본문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지만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1:3, 2:1,24). 요한은 세상이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사실 ‘세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에 속한 자요 어두움에 거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한 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알 수가 없다.



2절, 주석과 해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본문은 ‘지금 … 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긴장 관계(eschatological tension)에 놓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을 알아보든 못 알아보든 간에, 혹은 그리스도인의 현재 모습이 육체의 소욕(所慾)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분명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다(Calvin, Stott). 신자의 미래에 대해서는 구원의 영광이 약속되었다. 그러나 비록 현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특권과 하나님의 성품을 누리며 미래에 주어질 구원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장차 되어질 그리스도인의 미래 상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계시 되지 않았기에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신자는 장래에 자기 자신에게 일어날 구체적인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Stott).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안 파네로데’에는 주어가 없어서 이를 해석하는데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그’를 바로 앞 문장의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을 가리키는 비인격적 주어로 보면서 바로 뒷 문장에 나타난 ‘그’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Plummer, Bengel). (2)혹자는 ‘그’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Stott, Barker, Bru- ce, Smalley). (1)의 견해는 두 가지 점에서 부당하다. 첫째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1절) 본서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명백히 구분짓지 않고 있음을 간과하였으며 둘째로, 이어지는 본문의 논의가 하나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발전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Smalley). 그러므로 본문에 사용된 ‘그’는 후자의 견해와 같이 전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우리가 주와 같을 줄 아는 것이 주의 계신 그대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그날에 ‘우리가 새사람을 입고’(엡4:24) ‘주와 같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하게 되어서’(빌3:21) 주와 같이 됨을 의미한다(Stott).



3절, 주석과 해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소망’의 헬라어 ‘엘피다’은 바울 서신이나 베드로 서신에는 빈번하게 나타나지만(롬5:4, 8:24, 고후1:7, 벧전1:3) 요한 복음이나 요한 서신 중에서는 본문에서 단 한 번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이루리라는 확신에 찬 기대’라는 소망의 개념은 2절에서 명백히 설명되고 있다(Smalley). 따라서 ‘이 소망’은 2절에 나타난 장래의 일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리킨다(Barker).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한은 처음으로 예수의 특징을 ‘깨끗하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깨끗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그노스’은 ‘디카이오스’(’의로운’)와 거의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의 정결하심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힘써 따라야 할 본보기임을 시사한다(2:1,29, 3:7, Smalley). 한편 ‘깨끗하게 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하그니제이’은 ‘하그노스’(’깨끗하심’)와 같은 어원을 갖는 동사로 제의적 정결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출19:10,11, 민8:21, 요11:55, 행21:24). 그러나 본문에서는 시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성품으로서 도덕적인 깨끗함을 의미한다(Law, Stott, Smalley, Barker).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는 주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하여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마5:48).



4절, 주석과 해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본문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여 자신들은 죄가 없으며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요한은 죄를 짓는 사람은 모두가 예외없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영지주의의 거짓 가르침을 배격하고 있다.


죄는 불법이라

여기서 ‘불법’(아노미안)은 문자적으로 ‘율법을 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이 ‘율법’(노모스)이란 용어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불법’은 율법을 범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려는 인간의 본성적인 불법을 의미한다(Barker). 요한은 자기 자신들이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실상 하나님을 배반하는 무서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5절, 주석과 해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은 복수형이다. 이는 죄악된 모든 행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Smalley, Stott). 한편 ‘나타내신’의 헬라어 ‘에파네로데’은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것은 과거의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의 성육신이 역사적 사건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이러한 역사적인 실재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예수의 ‘죄를 없애는 사역’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으며(요1:29), 모든 죄를 친히 자기 몸에 짊어지심으로써 우리 죄를 없이 하셨다(사53:11,12, 히9:28, 벧전2:24, Stott).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가 없다’는 말씀은 3절의 ‘깨끗하심’과 2:29, 3:7의 ‘의로우심’과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의 무죄성은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신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후5:21, 히4:15, 벧전1:19). 한편 본문에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에스틴’(’-이다’)으로 현재형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 사역 기간 동안만 죄로부터 자유로우셨던 것이 아니라 영원히 무죄하심을 암시한다(Smalley).



6절, 주석과 해설


해설

본 절과 9절은 한 번 그리스도인이 되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퍽 두렵게 보이는 성경 구절이다. 또한 요일 1:8-10의 내용과 모순되어 보인다. 그리스도인들은 수없이 실수하고 거듭거듭 같은 죄에 걸려 넘어지는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자기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요한이 한 말에 뭔가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리든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해하지 못하든지, 적어도 이 구절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결론들은 모두 부적절하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주 안에 거하는 자의 인격에 주목하여 그리스도인은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한다(Wesley).
  2. 요한이 신자의 삶의 원리를 선포한 것으로 보고 ‘범죄치 아니함’을 신자의 이상적 특징으로 해석한다(Alford, Calvin).
  3.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하는 것으로 해석한다(Lange, Smith, Barker, Westcott, Stott).
  4.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원리상 이미 범죄하지 않는 자이지만 실제상 아직 범죄하는 자라고 본다. 즉 그리스도인이 현재 긴장과 역설의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Smalley, Schnackenburg). 루터(Luther)는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함으로 주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치 아니하는 동시에 범죄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Smalley).

위 네 가지 견해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성을 지닌다. 앞 절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죄와 상관없는 깨끗한 분이시기에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와 상관없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만약 죄를 범한다면 그는 회개함을 용서함을 받고 불법의 생활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가 지속적이며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죄를 좋아하며 죄 안에 거하길 즐겨한다면 그는 완전히 깨끗하신 그리스도를 알거나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알지도, 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요 5:37-38, 8:19, 14:7, 9, 요삼 1:11, Stott, Barker).



7절, 주석과 해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본문은 수신자 내에 있던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요한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니의 비밀스런 지식, 즉 영지(靈智)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영지를 깨달은 자는 육신에서 자유로워져 도덕적인 방종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신학과 윤리의 가르침은 요한 당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시켰다. 그래서 요한은 사도들이 전하여 준 복음 이외의 것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들을 멀리하며, 거절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본문은 2:29의 반복이다. 여기서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의로움의 동기와 근거를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가능함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은 의를 행함이 조건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로서 그의 의로움을 행위로 보여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Bruce).



8절, 주석과 해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본문은 7절 하반절과 정반대되는 내용으로서 대조를 이룬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반면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다. 요한은 이러한 대조법을 사용하여서 수신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누구에게 속하느냐’란 질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동시에 영지주의자들이 방종을 통해 범죄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였는가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요한은 본문에서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으며, 단지 죄의 기원이 마귀에게 있다는 사실만을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하는 자로서 진리가 그 안에 전혀 없기에(요8:44) 속이는 자이며 사람들로 범죄하게 한다. 이러한 죄의 기원에 대해 바울이 아담에게까지 소급시킨 것과 달리(롬5:12-19), 요한은 그보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Westcott).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마귀의 일’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들을 미혹시켜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창3:1-6). 이러한 마귀의 일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그르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죄인을 어둠에서 구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5절, 히9:28, 벧전2:24). 요컨대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죄를 없애고 동시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인 것이다(Plummer).



9절, 주석과 해설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 ‘하나님의 씨’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2. 신적인 생명의 원리이다(Smith, Marshall).
  3. 집합적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 전체를 가리킨다(Wohlenberg, Stott).
  4. 그리스도를 가리킨다(Oecumenius, Theophylactus).
  5. 말씀 또는 복음이다(Augustine, Dodd).
  6. 성령이다(Calvin).

위의 견해 중 마지막 두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Smalley).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말씀이 심겨져 있음(시 119:11, 렘 31:33)과 성령께서 내주하심(롬 8:11, 고전 3:16)은 동시적이고 불가분리적이다. ‘하나님의 씨’ 즉 말씀과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거할 때 그 그리스도인은 범죄하지 않게 된다.



10절, 주석과 해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시며 모든 인간들을 낳으신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가 아니다. 마귀의 자녀들도 있다(요8:44).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섞여서 살고 있다(마13:24-30). 자녀들이 부모를 닮아 가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닮고,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를 닮는다(Stott, Bruce).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저자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마귀의 자녀인가를 판별하는 시금석으로 ‘의와 사랑’을 제시한다. 의와 사랑이 없는 자는 자기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드러낸다.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든 아니면 타인과의 관계에서든간에 ‘온전함’을 의미하며 ‘사랑’은 타인에 대한 의로움을 뜻한다(Westcott, Plummer). 이러한 ‘의와 사랑’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닮아야 할 하나님의 본성이다.



11절, 주석과 해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할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은 현재형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Smalley).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처음부터’는 문맥상 요한의 수신자들이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를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은 틀림없이 복음의 본질이 사랑이며(요3:16, 15:12, 눅10:27, 고후13:13) 사랑이 태초의 창조 원리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요17:24, 요일4:16)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한편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리아’은 1:5와 동일한 단어이다. 1:5에서의 ‘소식’은 교리적 내용을 담고 있어 하나님이 빛이심을 드러내는 반면 본 절에서의 ‘소식’은 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Stott). 그 윤리적인 내용은 ‘복음의 본질인 동시에 근원적인 요구인 사랑의 실천을 권면하는 것’이다.



12절, 주석과 해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저자는 8절과 10절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마귀의 자녀의 모델로 가인을 제시한다. 요한이 가인을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가인은 동생 아벨의 의로움을 시기하여 죽임으로 자기 자신이 마귀에게 속하였음을 스스로 입증하였다(Burce). 둘재로, 요한 당시의 한 이단 종파인 에비온주의자들은 채식주의자들이었다. 요한은 그들에게 고기를 드린 아벨은 열납되고 농산물을 드린 가인은 거부되는 사건을 제시함으로써, 율법적인 채식주의보다는 사랑의 계명에의 순종이 우선임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Smalley).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창4장에 기록된 사건에서는 가인의 살인 동기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가인에 대한 언급(히11:4, 유1:11)을 통하여 추론해보면, 가인은 믿음과 순종과 형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요한은 다른 어느 성경보다도 분명한 살인의 동기를 제시한다. 그 동기는 동생 아벨의 의로움에 대한 시기이다.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물질적 축복이나 안녕보다는 의로움 자체를 더욱 시기하고 증오한다(Stott). 이런 의미에서 가인은 자신의 살인 행위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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