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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3장 13절-24절,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 - 매일성경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답게 사랑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신 것과 같이,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매일성경큐티와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요한 일서 3장 13절-24절,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


요한 일서 3장 13절-24절,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



13절, 주석과 해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전후 문맥상 세상과 하나님의 자녀와의 관계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Law).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대립은 아벨-가인, 이삭-이스마엘, 야곱-에서를 통하여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요한은 ‘미워하거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세이’을 현재 시상으로 사용함으로 암시하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롭다는 사실만으로 미워하므로(12절) 양자간의 대립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세상의 증오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이김에 기초하여 넉넉히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요16:33, 요일4:4, 5:4, Bruce).



14절, 주석과 해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본문에서 요한은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간 자의 증거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다. 사랑은 율법의 대강령이요(마22:34-40),율법의 완성이요(롬13:10),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최고 표현이다(요13:35, 고전13:13). 그러므로 비록 세상이 영생의 근거는 아닐지라도 형제 사랑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Calvin, Bruce).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사랑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폰’에는 목적어가 없다. 이 사실로 인해서 본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형제’를 목적어로 보아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다(Stott). 다른 하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Plummer, Smalley).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제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6절, 2:2). 한편 ‘거하느니라’의 헬라어 ‘메네이’은 현재형으로 사랑치 아니하는 자의 영적 죽음의 상태가 지속됨을 암시한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랑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과거 상태처럼 지속적으로 죽음과 진노하에 있는 상태이기에(엡2:2) 사망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사망에 거하고 있는 상태이다.



15절, 주석과 해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자니

요한은 ‘사랑하지 않음’의 개념에서 ‘미워함’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진술하고 있다. 본문은 분명히 12절을 반영한 것으로 세 가지 즉 ‘사랑하지 않음’과 ‘미워함’ 그리고 ‘살인’이 동일한 것임을 시사한다. 즉 사랑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는 자요,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다(Plummer). 그러나 여기서 요한이 살인자의 회개와 사죄 가능성을 부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도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의 사죄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이다(눅23:34, Smalley, Stott). 단지 요한은 본문에서 미움이 잠재적 살인이라는 사실, 즉 살인이 미움과 시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과 살인하는 자의 현재는 영생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우크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엔 아우토 메누산’운 문자적으로 ‘그 속에 거하는 영생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가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이’은 현재형으로서 ‘영생을 가질 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을 뜻한다(Haas). 이것은 살인하는 자의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차 있어서 영생을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움에서 비롯된 살인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영생이 서로 상극임을 시사한다.



16절, 주석과 해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알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은 완료형이다. 이 단어는 이 서신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현재형으로 쓰였으나(2:5,18,20, 5:15) 본문에서는 특히 완료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우리가 알게 된 것이 특별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15절에서 미워하는 자의 표본으로서 가인을 내세운 뒤 본 절에서 사랑하는 자의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은 상반절에서 자기 희생적 사랑의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제시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본받아 자기 희생적 사랑을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한다(2:6). 이는 예수께서 친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상토하는 것으로(요15:12,13)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사랑이 자기 부정임을 시사한다.



17절, 주석과 해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재물’의 헬라어 ‘비온’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삶의 수단으로서의 재물’을 의미한다(막12:44). 또한 ‘보고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로레’은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보는 상태’를 가리킨다(Smalley). 본 절에서 요한은 생활에서 충분히 실행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랑의 예로 최소한의 생활조차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은 생활이 어려운 형제를 보고도 그의 궁핍함을 고와주지 않면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한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4:10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해석한다(Plummer) (2)혹자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해석한다(Bro- oke, Bengel, Alford). (3)혹자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같은 사랑으로 해석한다(Law, Marshall). 본 절의 중심 사상이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18절, 주석과 해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혀’는 같은 의미로서 실천이 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행함과 진실함’은 실천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Smalley). 즉 ‘행함’은 사랑의 역동적 측면을 나타내고, ‘진실함’은 사랑의 질적 측면을 나타낸다. 요한은 본 절에서 사랑의 실천을 선언(약2:15-17)함으로써 이제까지 논해온 것, 즉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의와 사랑이 있어야 함을 요약하고 있다.



19절, 주석과 해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이로써’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다음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Nauck, Brooke). (2)혹자는 앞에 언급된 내용과 뒤에 언급될 내용 둘 다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3)혹자는 앞에서 언급된 10-18절까지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malley, Stott).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문맥상 가장 타당하다. 한편 ‘굳세게 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소멘’에 대하여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 ‘확신케하다’, 이 의미로 해석하려면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데 목적어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로 앞 문장인 ‘우리가 진리에 속함’을 목적어로 보는 견해와(Plummer) 2. 20절 초두의 ‘호티’(’왜냐하면’)가 이끄는 절을 목적어로 보는 견해이다(Bruce). 그러나 양자 모두 무리한 문법적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2) ‘설득시키다’. 이것은 의미상 본문에 부적절하다. (3) ‘안심시키다’. 이 의미로 해석할 경우 ‘우리 마음의 두려움과 염려’라는 목적어가 생략된 것으로 본다(Westcott). 비록 만족스러운 해석은 되지 못하나 그래도 세 가지 의미중 마지막 의미가 타당성을 지닌다(Stott, Smalley). 본 절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진리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20절과 연결하여 주 앞에서 두려움없이 담대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20절, 주석과 해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본 절에서 두 번 사용된 ‘호티’(왜냐하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첫 번째 ‘호티’를 명사절을 이끄는 접속사(that)로 보고, 두 번째 ‘호티’는 불필요한 반복으로 간주하여 생략한다. 이 해석은 20절 전체를 19절의 ‘페이소멘’(’확신케 하다’)이란 동사의 목적어로 본다(Bruce). (2)혹자는 첫 번째 ‘호티’를 ‘왜냐하면’으로 해석한다. 이 경우 19절의 동사 ‘페이소멘’(’안심시키다’)의 목적어는 생략된 것으로 본다(AV). (3)혹자는 첫 번째 ‘호티’을 ‘호’과 ‘티’으로 분리시켜서 관계대명사 중성 명사로 보고, ‘에안’(’ … 이면’)과 합쳐서 ‘ … 할 때마다’라는 의미로 본다. 이때 두 번째 ‘호티’는 종속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의 뜻이 된다(Stott, Smalley).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본서에서 서로 대조되는 구문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1:9,10, 2:10,11, 3:8,9) 본 절 역시 21절과 대립되는 구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본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Alford, Wohlenbe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우리 자신도 우리 마음을 보시면 책망할 것이 너무 많을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2)혹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Brooke, Luther).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두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 마음을 책망할 때마다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문맥상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21절, 주석과 해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문장의 형식상 전절과 본 절은 조건문으로서 대조를 이루지만 내용상은 본 절이 전절의 결과에 해당한다. 본문은 설사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서 책망할 것이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Bruce).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위에서 담대함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항상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히10:19).



22절, 주석과 해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구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멘’과 ‘받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람바노멘’은 모두 현재 시상이다. 이는 계속되는 기도와 계속되는 응답의 경험을 암시한다(Stott).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상은 신약 여러 곳에 나타난다(마7:7,8, 18:19, 요11:41,42, 15:7). 그러나 이 응답에 대한 약속에는 선행 조건이 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요15:7, Smalley).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리스도인들이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말한 공적이 아니라 신자의 마땅한 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 기도 응답의 조건이 되는 것처럼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됨을 드러내는 외면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Law, Stott). 예수께서도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아셨다(요8:28,29, 11:42).



23절, 주석과 해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전절에서는 ‘계명들’(엔톨라스)이라고 하여 복수 형태를 취하는데 본 절에서는 ‘계명’(엔톨레)이라고 하여 단수 형태를 취한다. 이는 본 절의 두 가지 내용인 ‘믿음’과 ‘사랑’이 사실은 불가분리적인 하나의 계명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여기서 ‘믿고’의 헬라어 ‘피스튜소멘’과 ‘사랑할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은 시상이 서로 다르다. 즉 ‘피스튜소멘’은 부정과거형으로서 ‘단번에 이루신 예수의 역사적 속죄 사역’(히9:28)을 믿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아가포멘’은 현재형으로서 ‘형제 사랑이 변함없이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믿음은 사랑의 근거요 사랑은 믿음의 증거이다.



24절, 주석과 해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헬라어 본문에는 두 번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아우토스’(’그’)라는 인칭대명사로 나타난다. 이 ‘아우토스’는 19-23절까지 계속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지칭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Plummer, Stott, Smalley). 그러나 사도 요한의 기독론(Christology) 자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구분을 뚜렷하게 짓지 않고 오히려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며, 요15:1-7의 말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 안에 예수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요17:21) 내용상으로는 ‘주’가 하나님이든지 예수이든지 같은 의미이다. 앞 절에서 언급된 두 가지 계명, 즉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도 역시 그 안에 거하신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본문에서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로 성령이 제시된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주 안에, 주가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신다는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保證)이다. 23,24절의 연결이 18,19절의 연결처럼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안다’고 하지 않고 성령을 등장시킨 점은 의미가 있다. 아마도 저자는 주 안에 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사랑’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선물’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러한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각종 은사를 주셔서(갈5:22,23)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의롭게 행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Stott). 그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심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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