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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4장 1절-10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매일성경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요한 일서 4장 1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 사랑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배운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매일성경큐티와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요한 일서 4장 1절-10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 일서 4장 1절-10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1절, 주석과 해설


사랑하는 자들아

이것은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저자 요한이 진술하고자 하는 주체로 수신자들의 관심을 전환시키기 위한 호칭이다. 요한은 본 절 외에도 이와 같은 표현을 본 장에서 두 번 더 사용하여 수신자들의 관심을 야기시키고 있다(7,11절, Brooke).


영을 다 믿지말고

‘믿지 말고’의 헬라어 ‘메 … 피스듀에테’은 ‘진실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말라’라는 의미이다. 이는 ‘시험하라’와 연결되어 모든 영을 대할 때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잘 분별하여 받아들여야 함을 시사한다.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영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타’은 복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나 악한 자의 영이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에 언급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가리킨다(Marshall). 한편 ‘시험하라’는 기준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을 가리킨다(Stott).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바울에 따르면 영들을 시험하여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특별한 은사이다(고전12:10).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하는 분별력을 가리킨다(Westcott). 요한은 당시 수신자들 사이에 스스로 영감을 받았다고 자장하던 이단자들을 염두에 두고 수신자들이 이들을 시험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함으로 무조건 따르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본문은 수신자들이 영들을 시험해야 할 이유이다. ‘거짓 선지자’는 신약성경에서 ‘진실한 선지자’를 대적하는 자나(눅6:26, 벧후2:1), 혹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도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마7:15, 24:11,24, 행13:6).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은 종말론적 현상이다(2:18, 막13:22, Barker). 거짓 선지자는 적그리스도와 깊은 연관을 맺으며 그리스도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자신들의 거짓된 가르침이나 교리로 미혹하는 자들로서(마24:11, 살후2:3, 계20:10)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유혹한다.



2절, 주석과 해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하나님의 영’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13절, 3:24, Stott). 이 견해에 따르면 본 절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증거하심을 의미한다. (2)혹자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JB, Smalley). 이들은 본 절이 앞절과 연관되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나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더 나은 듯하다. 한편 ‘알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기노스케테’에 대해서 혹자는 명령법으로 해석하나(Law), 본서 어디에서도 명령법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Westcott, Smalley, Brooke). 요한은 본문네서 수신자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신자들이 알고 경험했던 영적인 사실들을 잘 지키며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상기시키고 있다(13절, 3:16, 5:2).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본문은 영감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거짓 영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기준이다. 그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의 인정 여부이다. 요한 당시 수신자들 가운데에는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에 빠져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공동서신 개론의 “공동서신의 이단 사상” 참조). 요한은 본 절에서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를 공격하고 있다. 한편 ‘오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렐뤼도타’은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요이1:7에서 현재 시상으로 사용된 것과 대조를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이 영원한 사실이며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시사한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다(1:1,2, 3:1, 5:1, 요1:12-14, Westcott).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한다. 즉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이셨다(Marshall, Smalley).



3절, 주석과 해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비록 ‘육체로 오신’이 생략되어 있다 할지라도 본문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반대로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고 거짓 영에게 지배를 당하는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참된 성령의 도움으로 성육신을 시인하는 것과 거짓 영의 지배를 받아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절대로 중간 지대란 있을 수 없다(Law). 오직 양극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번역된 헬라어 ‘토 투 안티크리스투’은 헬라어 어순상 앞절의 ‘토 프뉴마 투 데우’(’하나님의 영’)와 대조를 이루어 ‘프뉴마’(’영’)가 생략되어 있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토 투 안티크리스투’가 거짓 영을 의미하나(Law) 문맥상 본문은 거짓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들, 즉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세상에 오심을 부인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은 사탄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이제 벌써’는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들이 종말에 출현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했고(2:18) ‘이제 벌써’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함을 밝힘으로 종말의 긴박성을 암시하고 있다(Smalley). 한편 ‘세상에’는 1-6절 사이에 무려 6번이나 나타나며 모두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세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며 통제하는 곳으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지칭한다.



4절, 주석과 해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요한은 본문에서 다시 ‘자녀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수신자들이 적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를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그들을 이기었음을 확신시키고 있다. ‘하나님께 속하였고’는 수신자들이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세상과 연합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기었나니’의 헬라어 ‘네니케카테’은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승리가 과거에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효과가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Houlden). 이 승리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리가 거짓임이 판명되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본서에서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승리는 지식적인 면에서 거짓된 교리에 대한 분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통해서 거짓된 교리를 정복하고 있음을 시사한다(Smalley).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된 교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수신자들이 세상을 이긴 이유이다. ‘너희 안에 계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엔 휘민’에서 ‘이’를 의미하는 ‘호’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3:20, Haas). (2)혹자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2:14, 3:24, 요14:20,23, Westcott). (3)혹자는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6절, 2:20,27, 요14:16,17, 16:13-15, Stott, Houlden). 이 세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택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신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가운데 역사하셔서 사탄의 영향력 하에서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에게 속하게 되며 그 결과로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있는 이’는 사탄이나 악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2:13,14, 3:12, 5:18,19) 그는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아니하고 세상에 속한 자들을 미혹하며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오직 세상에 속한 자들에 한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그 세력을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탄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이루셨으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그 승리에 동참하기 때문이다(6절, 요16:33, 롬8:31, Stott, Calvin).



5절, 주석과 해설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저희’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훈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킨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속한 고로’의 헬라어 ‘에크 투 코스무’에서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서 비롯되었으며 세상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임을 시사한다. 또한 ‘세상’을 지칭하는 ‘코스무’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복음과 반대되는 사상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주장하던 성육신을 부인하는 사상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2)그러한 사상에 미혹된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치되는 당시 사상에 탐닉했고 그것에 빠져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려 했다.



6절, 주석과 해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요한은 4절까지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수신자들만을 지칭하였으나 본 절에서는 인칭 대명사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에 대해 혹자는 사도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Brooke)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Haas, Schnackenburg). 왜냐하면 이미 수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4절).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그의 영향력 하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 ‘우리의 말을 듣고’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를 대조시키고 있다.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콘’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친 거짓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지식을 가리킨다. 더욱이 본 절의 ‘아는’은 현재 시상으로 그 지식이 지속적이며 성장하는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우리의 말’은 사도들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 즉 처음부터 있었던 말씀을 가리킨다(2:7, 24, 3:11, 요이1:5,9).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부인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진리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요14:17, 15:26, 16:13, Marshall, Stott). (2)혹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Dodd, Haas).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며 의미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 진술해 온 것으로 보아 후자가 보다 적합한 듯하다. 한편 ‘미혹의 영’은 ‘진리의 영’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이것 역시 사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사탄의 지배 하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청종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7절, 주석과 해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자들아’는 본서에서 6번 나타난다(1,11절, 2:7, 3:2,21). 이 호칭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도로서 수신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서로 사랑해야 함을 요구하기 이전에 자신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한편 ‘사랑하자’의 헬라어 ‘아가포멘’은 현재 시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하나님의 요구임을 시사한다. 이 명령은 예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3:11, 요13:14-17,35).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본문은 다음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와 연결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근거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는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사랑이시며 모든 사랑의 근원으로서 그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셨다(Westcott, Marshall, Barker).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 …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은 사랑하라는 명령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혹자는 수신자 공동체 일원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나(Bultmann) 보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Schnackenburg, Smalley). 한편 이러한 사랑은 단순히 사랑하는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행위를 내포한다(3:18).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녀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낸다(Law). 곧 행위를 동반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내는 기준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으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8절, 주석과 해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메 아가폰’에는 앞절의 ‘사랑하는 자마다’(파스 호 아가폰)에 삽입되어 있는 ‘파스’가 생략되어 있다. 본 절에서 ‘파스’가 생략된 것은 본 절의 사랑이 개인적인 권면을 가리키는 앞 절과는 달리 일반적인 의미임을 암시한다(Smalley). 한편 ‘알지’의 헬라어 ‘에그노’은 부정 과거로 현재 시상을 사용한 앞절의 ‘기노스케이’(’알고’)와 대조를 이룬다. ‘기노스케이’가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본 절의 ‘에그노’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을 전혀 알거나 경험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Marshall). 사랑하는 자가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자는 반드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앞절과의 대조를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본문은 7절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보다 더 발전된 표현이다. 요한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랑의 근원이심을 밝힌데 이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선언한다. 즉 이것은 사랑이 하나님의 모든 행위들 중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사랑임을 시사한다. 요한은 본서에서 사랑을 언급할 때 행위와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한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나 사실상 그들의 삶에서는 사랑의 행위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사랑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9절, 주석과 해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우리에게’로 번역된 헬라어 ‘엔 헤민’에 대한 해석은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 사이에’(among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Stott). (2)혹자는 ‘우리 안에’(in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Westcott). (3)혹자는 ‘우리에게’(to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4)혹자는 ‘우리를 위하여’(for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Barker). 한편 ‘나타난 바 되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네로데’은 ‘파네로오’(’나타내다’)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요한은 ‘파네로오’를 예수의 사역(1:2, 3:5,8),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심(요21:1,14), 그리고 예수의 강림(2:28)에 사용하고 있다. 본 절에서 사용된 부정 과거 ‘네파네로데’는 명확한 역사적 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다음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건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성육신을 가리킨다(Law, Smalley). 요한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을 현시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독생자’의 헬라어 ‘모노게네’은 히브리어 ‘야히드’을 번역한 것이다. ‘야히드’는 70인역에서 두 가지로 번역된다. (1) ‘사랑하는’(beloved)을 의미한다. (2) ‘유일한’(uni- que)을 의미한다. 본 절에서의 ‘모노게네’도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일한 아들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편 ‘보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스탈켄’은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사건이 지속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 사랑을 증거하신다.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본문은 ‘히나’(’위하여’)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나타낸다. ‘살리려 하심이라’는 인간이 전에 ‘죽은 상태’임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시고 이루심으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하셨다(3:14).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10절, 주석과 해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여기 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 에스틴’은 앞서 기술된 내용, 즉 9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3:16). 한편 ‘우리가 … 사랑한 것’(에가페카멘)는 부정 과거 시상으로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는 시상의 변화가 있다. ‘에가페카멘’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결코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에가페센’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적인 특별한 사건에 의해서 나타났음을 시사하는데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9절). 요한은 이러한 시상의 변화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사랑이 지속적이지 않아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Law, Smalley). 반면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인간에게 계시되어 사랑의 궁극적인 기원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다(Hou- lden).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본문은 앞 절의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와 병행을 이룬다. 9절에서의 ‘보내심’(아페스탈켄)은 완료 시상인 반면에 본 절의 ‘보내셨음이니라’(아페스테일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부정 과거 시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구현된 특별한 속죄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화목제’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몬’은 본래 ‘달래는 것’(propitiation)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의미는 단순히 성난자를 달래는 차원이 아니라 속죄(expiation)를 전제로 한다(Dodd, Westcott).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속죄함이 없이는 죄로 인해 형성된 하나님과의 소원한 관계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본 절의 ‘힐라스몬’은 ‘속죄’(expiation)의 의미와 ‘화목’(Propitiation)의 의미 둘 다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를 위한 화목제로 보내심으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9절, Barker, St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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