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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4장 11절-21절, 마땅한 사랑 - 매일성경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요한 일서 4장 11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사랑을 실천하고 살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매일성경큐티와 새벽설교 준비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요한 일서 4장 11절-21절, 마땅한 사랑


요한 일서 4장 11절-21절, 마땅한 사랑



11절, 주석과 해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이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은 9,10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현시된 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한편 ‘하셨은즉’의 헬라어 ‘에이’은 사실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이유나 근거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이 이후에 언급되는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께서 주신 계명으로(요13:34,35, 15:12,17)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요한의 이 권면은 당시 사랑의 계명을 평가절하하는 이단적 교리가 수신자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Smalley). 한편 ‘마땅하도다’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로멘’은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시사한다. 물론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 사항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실천 행위이다.



12절, 주석과 해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본 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유대적인 사상으로(출33:20,23, 신4:12)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본문에 대해 혹자는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그러나 그렇게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본문은 수신자들 사이에서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기 때문이다(Schnackenburg, Barker). 영지주의자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아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한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대하면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사랑의 계명을 연결시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영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그리스도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라는 예수의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14절, 1:1-3, 요1:18, 12:45, 14:9, 17:24).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요한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보았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격하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비록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행함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 품 속에 독생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사랑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자신들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거하시고’의 헬라어 ‘메네이’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간의 지속적인 친근한 관계를 나타낸다(요15:1-10). 하나님의 내주와 깊은 관계를 나타내는 ‘메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내주와 지속적인 관계로 인해서 이루어 진다(Stott). 즉 하나님의 내주와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랑의 행위의 근거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 안에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아우투’에 대한 이해는 그 안에 나타난 속격과 관련하여 세 가지가 가능하다. (1)혹자는 주격적 속격으로 이해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Brooke, Wengst). (2)혹자는 목적격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odd, Lewis). (3)혹자는 속성을 나타내는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Schnackenburg, Law). 이러한 세 가지 해석은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는 것으로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온전히 이루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테텔레이오메네’은 완료 시상으로 지속적인 성취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랑의 성취에 대한 요한의 주장은 2:5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요한은 2:5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하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임을 암시한다(Smalley).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을 통해서, 즉 인간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Barker, Westcott, Stott).



13절, 주석과 해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는 ‘호티’(’왜냐하면’)로 시작하는 절로서 본문 하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의 근거가 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1-3절, 고전12:3).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한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여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즉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할 수 있도록 내적인 증거를 제시한다(3:24). 한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내는 ‘거하고’(메노멘)와 ‘아느니라’(기노스코멘)는 현재 시상이다. 이 현재 시상은 믿는 자가 경험한 내주의 확신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요한이 ‘기노스코멘’을 사용한 것은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성령을 공유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며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이며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교제함으로써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한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이러한 교제, 즉 상호간의 내주(內住)는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을 가리킨다(3:24, 요3:5,6, 갈5:6).



14절, 주석과 해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아들의 칭호인 ‘구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테라’은 예수께서 승귀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2:22,23) 사람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셨음을 시사한다. 이 역시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하다. 그들은 구원을 신비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죄보다는 무지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육체로 오신 예수께서 구주이시며 그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를 사함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언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고 있다(2,10절, 1:7, 2:2, 5:6, Schnackenburg). 한편 ‘보내신’의 헬라어 ‘아페스탈켄’은 9절과 같이 완료 시상이다. 이는 과거에 아들을 보내신 성육신 사건과 그의 구속 사역의 효력이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Stott).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을 직접 지켜 본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ooke, Schnackenburg, Wengst). (2)혹자는 기본적으로 사도들을 의미하며 그들에 의해 설립된 교회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Westcott). (3)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애를 지켜 본 목격자들과 연합한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malley, Dodd). 이와 같이 ‘우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할지라도 포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보았고’(테데아메다)는 완료 시상이며 ‘증거하노니’(마르튀루멘)는 현재 시상이다. 비록 둘 사이에 시상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과거에 보고 응답한 믿음과 현재에 그 믿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연속적이며 지속적인 효과를 시사한다. 성령을 수여받은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12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되신 예수를 알게되며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 깊이를 더해 갈 뿐만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요15:26).



15절, 주석과 해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누구든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가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신들만이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단 하나의 전제 조건,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기만 하면 누구나 예외없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한다. 한편 ‘시인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게세’은 부정 과거이다. 영역 성경에서는 이 과거 시상을 표현하기 어려워 두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1)미래 시상으로 번역한다(shall confess, KJV). (2)현재 시상으로 번역한다(acknowledges, NIV, NEB, confess, RSV). 그러나 본문의 ‘호몰로게세’는 미래 시상이나 현재 시상이라기 보다는 비록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을지라도 공적으로 고백하는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봄이 훨씬 더 타당하다(Stott, Smalley).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의 내주를 가능하게 하는 믿음과 순종의 고백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13절).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본문은 13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처럼 상호간의 내주도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식하고 확신하게 된다(3:1,2).



16절, 주석과 해설


주석

본 절이 속한 단락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 절이 11-15절에 속한 것이 아니라 본 절부터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Marshall, Schnackenburg). (2)혹자는 앞절과 연결되어 11-16절까지 한 단락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Law, Stott, Bark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문맥상 13,15절에서 언급된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진술이 본 절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진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번역된 헬라어 ‘텐 아가펜 헨 에케이 호 데오스 엔 헤민’은 문자적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사랑을’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 속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Law, Marshall, Westcott, Smalley). 한편 ‘알고 믿었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 카이페피스튜카멘’은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사도들은 물론 모든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미 과거에 경험하여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알고 믿고 있음을 시사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확신할 수 있다. 요한은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황홀경이나 특별한 지식에 의해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본 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한 것에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의지하는 믿음에 달려있음을 선포하고 있다(9,10,14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본문은 8절의 반복이다. 요한은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임을 주장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는 자에게 사랑은 절대적인 속성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본문은 13,15절에서 전술된 바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보다 발전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며(13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때 성취된다(15절).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나타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의 삶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Smalley, Dodd).



17절, 주석과 해설


이로써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본문 다음에 언급되는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2)혹자는 16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Marshall).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본문은 앞절과 이어지는 단락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사랑’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2)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tott). (3)혹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aas). (4)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Houlden). 이러한 네 가지 견해 중 포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2:5에서 온전히 성취된 사랑과 연결되어 ‘순종’으로 묘사되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담대함이 믿음과 결과로 나타난다(요3:18, 5:24). 이러한 사실은 사랑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지속적인 내주를 이루며, 그 내주로 말미암아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됨을 시사한다. 즉,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이룬다(Smalley, Westcott).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는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그가 어떠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1)예수의 영원한 순수성, 사랑, 의로우심,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의미한다(Brooke, Westcott, Haas). (2)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유혹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교제를 나누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할 것을 암시한다(Barker, Smalley, Stott).



18절, 주석과 해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한다(행9:31, 롬3:18, 고후5:11, 7:1, 엡5:21). 그러나 본 절에서의 ‘포보스’는 앞절의 담대함의 반대 개념으로 노예가 갖는 두려움을 가리킨다(요19:38, 20:19, 롬8:15). 이러한 ‘포보스’는 사랑과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면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전혀 두려움이 없이 담대해질 수 있다. 비록 죄는 두려움을 유발시킬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사랑을 소유한 자들에게 사랑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본문은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다. ‘형벌’에 대해서 혹자는 마지막 날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정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며(Schnackenburg), 혹자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방해하는 고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Bultmann).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Haas, Marshall). 즉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사랑 안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게 되며 그 결과 마지막 날에 죄로 인한 정죄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갖는 담대함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개역성경에는 반의 접속사인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데’는 본문이 17절 상반절의 내용, 즉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하나님의 사랑’을 역으로 진술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로 인하여 사랑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Westcott, Law). 그러기에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었다. 이와 반대로 만약 누구든지 담대함이 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그 사랑의 실체를 온전히 성취하지 못한 자이다.



19절, 주석과 해설


주석

요한은 10절을 반복하여 진술함으로 가장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사랑의 원리에서 출발하여 20,21절에서 형제 사랑의 문제로 요약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은 문자적으로 ‘우리가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목적어가 없다. 목적어의 부재로 인해 ‘사랑’의 대상인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Stott, Houlden). 이들은 앞절의 진술과 연결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2)혹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이들은 20,21절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된 것과 연결시켜 해석한다. (3)혹자는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전후 문맥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어느 하나를 제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본문은 이유를 나타내는 ‘호티’(’왜냐하면’)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근거를 나타낸다. ‘사랑하셨음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가페센’은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시상은 전순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을 통해 계시된 것을 가리킨다(9,10절, Law, Smalley).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의 삶은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20절, 주석과 해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누구든지’의 헬라어 ‘에안 티스’은 본서에서 거짓 이단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 방법이다(1:6,8,10, 2:4,9). 본문 역시 수신자 공동체 내에 팽배해 있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공동체 내에서 신비한 지식을 통해 구원을 받고 다른 일원보다 우월하다는 환상에 빠져 타인을 돌보지 않았다. 요한은 그러한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반드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게 됨을 강조한다. 여기서 ‘형제’는 수신자 공동체 일원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 교회 밖의 일반적인 사람들 전체를 가리킨다(7,11,19절). 즉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만을 향한 것이며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거짓말하는 자니’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Barker, Smalley). (1)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진리를 말하지 않는 자며, 그 진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자이다. (2)거짓말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임을 드러낸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자들이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문이 상반절에서 언급된 ‘거짓말하는 자’의 근거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거짓말쟁이인 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 안에서 표현된다(12절). 즉 그리스도인은 타인에 대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타인을 사랑하게 된다.



21절, 주석과 해설


주석

본 절의 헬라어 본문은 ‘카이’(’그리고’)로 시작하여 본 절이 20절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한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Stott). 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반영한 것으로(막12:29-31) 요한은 이 계명에 대해 본서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으로 진술하고 있다(3:23, 요이1:5,6). 한편 ‘주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 아우투’은 문자적으로 ‘그로부터’라는 의미이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illiams, Stott, Westcott). (2)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며 상호보완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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