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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5장 13절-21절, 영생을 확신하고 우상을 멀리하라 - 매일성경 큐티 주석과 해설

매일성경 큐티의 본문인 요한 일서 5장 13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영생과 기도 응답을 확신하며 믿음으로 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매일성경을 큐티하고 새벽설교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요한 일서 5장 13절-21절, 영생을 확신하고 우상을 멀리하라


요한 일서 5장 13절-21절, 영생을 확신하고 우상을 멀리하라



13절, 주석과 해설


이것을 쓴 것은

‘이것을’의 헬라어 ‘타우타’은 문자적으로 ‘이러한 것들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타우타’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1-1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malley, William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 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인 요20:31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타우타’가 다양한 주제를 가리키는 복수로서 1-12절까지 언급된 영생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만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랖사’은 서신체 부정 과거로 비록 요한이 현재 본서를 기록한다 할지라도 본서를 받아보는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과거의 행위이기 때문에 단순과거로 기록되어 있다.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히나’(’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서 본 절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임을 나타낸다. 본 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요20:31).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영접한 모든 이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혹자는 본 절이 요한 일서의 본론이고 14-21절은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한다(Bultmann). 본 절이 요한 일서의 전체적 결론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성을 가지나 결론적 언급이 꼭 이 편지의 맨 마지막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본 절은 요한이 자신의 편지를 끝맺기 위한 결론적 언급의 서두로 간주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Johnson).



14절, 주석과 해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여기서 ‘향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은 ‘생동적인 교제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를 암시하는 전치사이다. 이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생동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암시한다(Brooke).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아’은 본서에서 네번 사용되었다. 즉 주의 재림과 심판날에 믿는 자들이 갖는 담대함과(2:28, 4:17),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3:21,22). 본 절에서 믿는 자들이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은 기도 응답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구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메다’은 중간태로서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주어인 간구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기도자의 간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응답자이신 하나님의 계명 즉 그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요15:7, Marshall).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며 기도자의 생활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되게 하여 복종하겠다는 고백이다(Johnson). 그럴 때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15절, 주석과 해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본문은 14절의 반복이다. 14절의 간구와 응답은 구체적 현실성이 강조된 반면에 본 절의 경우는 일반적 원리성이 강조된다. ‘무엇이든지’라는 말씀에는 죄악된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간구는 당연히 제외되며 앞절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올바른 기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요11:42) 믿는 자들의 기도도 들어주신다.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구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테카멘’은 직설법 완료형으로서 기도자의 객관적 기도 사실과 그 결과를 강조한다.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진정한 간구는 이미 그 결과를 얻은 것이다. 기도의 가시적인 응답이 미래에 나타날지라도 그 기도는 이미 효력을 발생하였다(Plummer, Brooke, Dodd). 한편 본 절은 ‘안즉 … 아느니라’(오이다멘 … 오이다멘)로 되어 있어 지도자가 갖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초래하여 기도자의 확신이 더욱더 확실하게 됨을 시사한다(Stott).



16절, 주석과 해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본 절에 나타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이다. 혹자는 살인이나 간음 혹은 우상 숭배와 같은 특별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그러나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로 분류한 것을 찾아 볼 수 없기에 이 견해는 적합하지 않다(Stott). 혹자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배교나 적그리스도 혹은 거짓 교사들의 죄와 같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과 부합되지 않는 죄를 가리키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믿는 자들이 유혹에 넘어가 범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Smalley, Johnson, Alford, Clarke). 나름대로 의미있는 견해들이지만, 본 절의 사망에 이르는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2:31의 주석을 참고하라.



17절, 주석과 해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여기서 ‘불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디키아’은 ‘옳지 못한 행실’을 의미한다. 요한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의 문제를 언급하다가 갑자기 본문을 진술한 것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인간적으로 구분하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죄들의 경중을 마음대로 구분함으로써 ‘죄 자체의 심각성’이 축소되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인 듯하다.



18절, 주석과 해설


하나님게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앞절과 관련시켜서 믿는 자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Calvin). (2)혹자는 ‘범죄치 아니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하마르타네이’이 현재에도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현재시상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믿는 자는 계속 반복되는 범죄나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Stott).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우리가 아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멘’은 18-20절에 걸쳐 세 번 사용되고 있다. 이 ‘오이다멘’은 지식으리 활동 상황을 나타내는 ‘기노스코’(’알다’)와 달리 주로 지식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 절에서 영적 지식의 확실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본 절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호겐네데이스 에크 투 데우)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1)상반절의 ‘난자’(게겐네메노스)는 완료 분사형인 반면에 본문의 ‘나신 자’(겐네데이스)는 부정 과거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2) ‘나신 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만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개념은 신약성경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요17:12, 벧전1:5, 유1:24). 요한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악과 사탄의 영향력에서 보전하실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요17:12,15).



19절, 주석과 해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본 절은 하나님과 세상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여기서의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탄의 세력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비록 사탄의 세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여 사탄이 만지지도 못할 정도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신다.



20절, 주석과 해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키며(1:1,2) ‘참된 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Smalley, Stott, Brooke).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로서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으며(요14:6)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참된 자되신 하나님의 실재를 깨닫도록 인도하셨다.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본문은 본 절 상반절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시는 중보자가 되신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자들은 참된 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예수께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17:21).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은 문자적으로 ‘이 사람’을 의미한다. ‘후토스’가 가리키는 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tott, Smalley, Brooke). (2)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uther, Calvin, Marshall, Hass, Schnackenburg, Brow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녀서 어느 하나를 지지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토스’는 문맥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낫다(Johnson).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는 참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여 하나님을 부정한 것에 대한 요한의 결론적인 공격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영생’이라는 사실은 이미 본서 서두에 언급된 것으로(1:1,2, 요11:25, 14: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곧 영생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수신자들이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요한의 결론적 진술이다(Smalley).



21절, 주석과 해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저자의 권고는 요한 서신 전체의 논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우상 숭배란 용어 자체가 본서에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서 자체가 당시의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음을 볼 때 본 절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는 영지주의 사상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말은 영지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으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이러한 파격적인 결론을 통해서 수신자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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