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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8장 9절-17절, 부조리한 현실에서의 지혜 - 매일성경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전도서 8장 9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은, 의인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악인이 처벌을 받지 않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합니다. 이 현실 속에서 필요한 지혜는 무엇일까요? 본문의 묵상과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전도서 8장 9절-17절, 부조리한 현실에서의 지혜


전도서 8장 9절-17절, 부조리한 현실에서의 지혜



9절, 주석과 해설


개요

본 절의 문맥상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본 장 1절에서 시작되는 앞부분과 연결되는 구절로 본다(Delitzsch, G.A. Barton). (2) 뒷단락을 시작하는 새로운 첫 구절로 본다(Luther, Ginsburg, Hengstenberg). (3) 앞절과 뒷절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M.A. Eaton). 여기서 ‘이런 것들을 다 보고’란 앞절에 연관되는 듯이 보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뒷절과 연관되는 듯하다.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고대 동야에서 행해졌던 폭군 정치의 한 양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본다(G.A. Barton, Delitzsch, Lange). 또한 ‘주장하여’에 해당하는 ‘솰라트’은 8절의 ‘주장할’과 같은 어근이며 ‘군림하다’, ‘지배하다’)rule over, KJV, has exercised authority, NASB)의 뜻을 갖는다.



10절, 주석과 해설


내가 본즉 악인은 장사지낸 바 되어 … 헛되도다

본 절에서 ‘악인은 장사지낸 바 되어’란 고대 근동 특히 히브리인들 사회에서 사람이 죽어 옳게 장사되어지는 것을 큰 축복과 영예로 여기는 바(6:3, 렘 16:4,5, 22:19), 악인이 사회적으로 큰 명성과 영예를 얻고 존귀하게 취급받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하반절에 대해서는 그 의견들이 분분하다. (1) 혹자는 한글 개역 성경처럼 본 절 상반절은 악인에 대하여 하반절은 선인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Lange) 보는 반면, (2) 다른 사람은 본 절 전체가 악인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본다(D.R. Glenn, G.A. Barton, M.A. Eaton, T.H. Leale). 이들은 본 절에서 ‘잊어버린 바’의 ‘웨이쉬타케후’(were forgetton, KJV)를 ‘찬양되어진 바’의 ‘웨이쉬타베후’(were praised, RSV)로 개정 번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의 경우에는, 악인은 이 땡에서 악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사후(死後)에까지 오히려 존귀히 여김 받으나 선인은 그와 반대로 그의 선한 삶에도 불구하고 성읍 사람들에게서 잊어버린 바 되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다루고 있다 하겠다. 그리고 (2)의 경우에는 악인이 이 땅에서 멸시받지 않고 존귀히 여김 받으며 성읍 사람들에게 (그 악행이) 잊어버린 바 되는(또는 찬양되어진 바 되는) 것 역시 삶의 구조적 모순을 다루고 있다 하겠다. 여기서는 맛로라 본문(M.T.)을 존중하여 (1)의 견해를 지지한다. 한편 본 절에서 ‘거룩한 곳’이 어디를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도 그 주장이 약간씩 다르다. (1) 예루살렘 성(M.A. Eaton), (2) 성전(Delitzsch, G.A. Barton), (3) 악인들이 죽어 들어가는 묘지(Hengstenberg, Reins). 이중에서 (3)은 문맥상 근거가 비교적 희박하다.



11절, 주석과 해설


해설

원문에 의하면 본 절 서두에는 연결사 ‘아쉐르’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영역본들은 이유를 나타내는 말로 본다(Because, KJV, RSV, NASB). 즉 악인들은 인과 응보적(因果應報的) 보응이 현실 속에서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기승을 부리고 그 결과 더욱 악이 창궐해져 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인을 그 악행대로 곧 바로 심판, 처벌하지 않으신 데에는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근본적인 여러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시 50:16-21 참조).



12절, 주석과 해설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하고도 … 잘 될 것이요

원문에 의하면 본 절 서두에도 연결사 ‘아쉐르’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영역본들은 이를 양보를 나타내는 말로 본다(Although, NIV, NASB, Though, KJV, RSV). 그리고 ‘백번’이란 단순히 숫자상의 의미를 나타낸다기보다는 많은 수를 암시한다. 또한 ‘장수’는 일반적으로 고대 히브리인들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져 왔다(6:3 참조). 한편 하반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거룩성, 의, 위대하심 등을 깨닫고 연약한 인간이 감히 경거망동하지 아니하고 두려움과 경배심을 갖는 것을 뜻한다. 혹자는 이에 대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데서 일어나는 두려움과 거룩한 주의성’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M.A. Eaton). 보통 구약에서는 ‘여호와 경외’를 ‘지식’과 ‘지혜’의 근본으로(잠 1:7, 9:10), 본서에서는 인간의 본분으로(12:13), 시편 등에서는 ‘하나님의 친밀함’(25:14), ‘여호와의 사자’의 건지심(34:7), ‘하나님의 기뻐하심’(147:11) 등을 얻는 길로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13절, 주석과 해설


악인은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 아니함이니라

이는 12절과는 달리 보다 궁극적인 원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내용이다. 특히 본 절은 의인은 번성하고 장수하나 악인은 쇠퇴하며 그 생명이 길지 못하다고 하는 히브리인들의 정통적인 사상을 잘 반영해 준다(신 22:7, 28:, 1-35, 30:20, 욥 5:26, 15:32, 22:16, 시 39:6, 102:11, 사 65:20 참조).



15절, 주석과 해설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 함께 있을 것이니라

이는 2:24, 3:12,13, 5:18과 그 내용 면에서 유사하다. 즉 구조적 모순이 팽배한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게, 최선(最善)으로 살아가는 길은 하나님 안에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 은사대로 먹고 마시며 삶을 즐기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특히 본 절에서 ‘수고하는 중에’란 노동의 신성함을 엿보게 한다. 즉 노동은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에 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문화적 사명으로서 사람이 행햐야 할 본분이다(창 2:15 참조). 다만 인간이 범죄함으로 이 노동은 보다 힘들게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될 사역으로 변모되어졌다(창 3:17-19).



16절, 주석과 해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 자도 있도다

본 절 전반절은 7:23과 유사한 내용이다. 한편 ‘노고’의 히브리어 ‘이느얀’은 사람의 범죄 후 하나님께서 부여하시사 애쓰게 하신 것으로서 1:13의 ‘수고하게 하신 것’이란 말과 같다. 또한 하반절의 ‘밤낮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란 본서 저자 전도자와 같이 지혜를 추구하며 세상사를 탐구하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것을 뜻할 수도 있으나 많은 사람의 경우 이는 ‘노고’와 연관되어 이 세상에서 고된 일로 수고하고 애씀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G.A. Barton, T.H. Leale, M.A. Delitzsch).



17절, 주석과 해설


개요

본 절은 스스로 지혜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알고자 애쓰되 그 오묘하신 섭리와 역사를 능히 깨달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는 7:23,24과 유사한 내용으로서 인간의 무지함과 연약함을 나타냄과 아울러 하나님의 역사 섭리가 그만큼 위대하고 오묘하다는 뜻을 암시한다 하겠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적인 섭리와 역사 가운데 행하시는 일을 가리키며(3:1-8), 이와 같은 말은 3:11의 내용과 유사하다 하겠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타락한 인간의 연약한 지혜,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깨달아지거나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은사에 의해서만 알고 깨달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하겠다(마 11:25-27 참조). 한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에 관하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며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 33, 36)고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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