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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8절-25절, 그 이름 예수 - 매일성경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1장 18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는 내용에 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약속하셨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본문의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25절, 그 이름 예수 - 매일성경 주석과 해설 정리



마태복음 1장 18절-25절, 그 이름 예수



18절, 주석과 해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1절과 같이 힘차고 단순 간결한 서술문이다. ‘나심’(birth)이란 1절의 세계(게네시스)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탄생’ 또는 ‘역사’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서술부인 ‘이러하니라’(후토스엔)에서 그 뜻이 분명해진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기원을 가진 사람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것이 마태가 기술하려는 그리스도의 기원의 양태(樣態)인 것이다.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정혼(약혼)한 상태는 법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혼에 대한 구속력을 지닌다. 이는 분명 오늘날의 약혼보다는 더 엄숙한 관계였고, 간음으로 인하지 않고는 결코 파혼할 수 없는 사실상의 기혼상태였다. 이런 이유에서 22:23, 24에는 정혼 상태에 있는 여자를 ‘아내’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본문의 요셉과 마리아도 정혼에 의해 남편과 아내로 일컬어지고 있다(19절). 또한 대략 1년 정도의 정혼 기간을 가지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남편이 사망하면 그 여자는 자동적으로 과부가 되었고, 만약 그 기간 중에 부정(不貞)을 저지르면 간음으로 간주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신 22:23, 24).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말은 단지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동거)을 말한다고 해도 지나친 설명은 아닐 것이다(25:1-13 참조). 따라서 이로써 이미 예수의 법적 혈통은 획득 되어졌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정혼 기간에 성관계를 갖지 않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비상한 것이었음을 넌즈시 강조하고 있다. 한편 마리아가 본 절에서 주어로 쓰임으로 그의 위치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동거하기 전에

마태가 이 말을 추가할 때 정혼식에서 실제 혼인식(신부를 데려오는 일)까지의 일정한 기간 사이(대략 1년 소요)로 독자를 이끄는 점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성적인 결합은 남편이 그의 아내와 함께 동거하기 위해 아내를 자기 집으로 데려 왔을 때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정한 혼인 예식을 끝내고 동거했을 때만이 성적 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징조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숨기고 있던 수치나 죄악이 비로소 발각되었다(알아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役事)로 잉태되었음이 ‘분명해졌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 잉태는 성령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서 누가복음에서는 이 잉태에 대한 기사를 훨씬 더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눅 1:26-56). 그런데 ‘성령을 통한 잉태’라는 말속에는 이교도들의 사상처럼 신과 인간이 한몸을 이룬 결과라는 뜻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않다. 그 대신 메시아를 대망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타나리라 기대되었던 지극히 높으신 자, 곧 여호와의 권능이 성령 안에서 기적적으로 마리아를 잉태시켰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시면서 인간의 어머니는 주셨지만 아버지를 주시지 않았다. 결국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간의 아들, 곧 완전한 신(神)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셨던(God-Man) 것이다(A. T. Robertson).실로 이와 같은 성육신(Incarnation)의 비밀은 ‘예수는 육신을 입으시고 나셨으나, 육신적 이유 때문에 탄생하신 것은 아니다’라는 데에 있다. 즉 그가 육신의 모양으로 나심으로 육신을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또한 제 3의 하나님이신 성령의 완벽하신 신적(神的) 준비를 통해 나심으로 인간들이 지닌 본원적 죄성(罪性)을 물려받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Plummer). 실로 예수의 처녀 탄생문제는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이미 실제적으로 선재(先在)하셨음을 믿는 자에게는 의심할 만한 크나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성육신은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의 근거요 출발점이 된다(요 1:14, 17:5, 고후 8:9, 빌 2:5-11, 골 1:15-19).



19절, 주석과 해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요셉은 정혼식에 의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했다. 여기서 ‘의로운’(디카이오스)이란 ‘곧은’, ‘공정한’이란 뜻으로서 청렴 결백하여 불의에 굴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실로 그는 공의롭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여자가 부정했을 경우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신 22:20-24)을 한번쯤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정혼한 마리아와 파혼하려 마음먹은 데서 발견된다. 여하튼 그는 마리아를 혹독하게 다루어 자신이 참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도 있었겠으나(McNeile) 그는 율법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고 대신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롬 13:8-10)의 미덕으로 문제 해결을 지으려 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가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신 그리스도(5:17, 롬 10:4)의 법적 부친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법과 사랑을 겸비한 ‘의로운 사람’이란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 끊고자 하여

이 구절에 대한 중요한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요셉은 마리아의 기적적인 처녀 잉태를 알았으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파기하고자 했다(Gundry,McHugh). 이 견해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의 임신 비밀을 말했다는 가정(假定)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결혼 계획을 취소하지 말라고 계시한 주(主)의 사자의 말 속에서(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잉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Lenski). (3)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정한다고 생각되는 마리아와 양심상 결혼할 수 없었다(Calvin, M. Henry). 위에서 두 번째, 세 번째 견해를 조화롭게 취합(聚合)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문의 ‘아니하고’(메델론)가 적극적인 마음의 성향을 뜻하는 말로서 요셉이 마리아를 모세 율법이 정하는 징벌에 처하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 … 하고자 하여’(에불레데)란 아직 행동화하지 않은 미미한 마음의 결단을 의미하는 말로서 정혼한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하지 않기로 서서히 결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 두 단어를 통해 볼 때 그 당시 요셉은 법적으로 허락되는 한도(限度)내에서 은밀하게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마리아에게 큰 피해가 돌아가지 않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두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손에 이혼 증서를 ‘가만히’ 줌으로써 이 일을 조용히 묻어버리려 하였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의로움과 율법을 무난하게 조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20절, 주석과 해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여기서 ‘생각하다’는 원어 ‘엔뒤메덴토스’은 수동태 제 1과거형 분사로서 생각이 그의 속에 들어오고 있었을 바로 그 상황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situation)적 상태를 중요시 여긴 낙스(Knox)는 본 구절을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치기가 무섭게’라고 표현함으로써 요셉의 심각한 내적 갈등의 일면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로 요셉은 이러한 곤란하면서도 슬픈 사실에 직면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자 극심한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요셉은 자기 조상 다윗에게 말씀하신 바, 메시아 탄생에 대한 약속(삼하 7:12-16)이 바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성취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주의 사자가 현몽(現夢)하여

개역 성경에 빠진 ‘보라’를 뜻하는 감탄사 이두은 어떤 경악할 만한 사건이나 행동을 예시(indication)하는 도입부로 사용되기도 하고(Schalatter), 또는 독자(讀者)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Hendriksen).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의 출현이라는 이 놀라운 사건을 소개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단어는 본서에 61회 마가복음에 8회, 누가복음에 56회, 요한복음에 4회 사용된 바 있다. 특히 사 7:14의 동정녀 탄생 예언에도 동일한 용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구약예서 흔히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메신저를 가리킬 때 이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창 16:7-14, 22:11-18, 출 3:2-4:17). 그런데 이 ‘사자’는 때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顯現)이기도 했으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다. 여기서 본문에 언급된 ‘주의 사자’는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고지(announcement)해 준 천사 가브리엘(눅 1:26)로 짐작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같은 사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기보다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하늘의 계시가 재개된 사실에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시는 그 계획을 당신의 메신저의 대화를 통해 요셉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 다(Bonard). 한편 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간혹 사용되었다(창 20:6, 삿 7:13, 삼상 28:6). 마치 야곱의 아들 요셉이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창 37:5, 9, 19) 것처럼 여기 야곱의 아들(16절) 요셉도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가는 마리아가 꿈이 아닌 실제에 의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눅 1:26, 27).


다윗의 자손 요셉

주의 사자가 말한 ‘다윗의 자손 요셉’이란, 앞에 나온 족보(族譜)를 연상케 하며. 요셉으로 하여금 다윗의 혈통이 감당해야 할 이 놀라운 역할, 즉 메시아 탄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있다. 이 말은 예수의 족보(2-17절)와 성령 잉태(18-25절)를 완벽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네 아내 …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무서워하다’는 뜻을 지닌 ‘포베데스’은 2인칭 단수 제 1과거형 수동태로서 단순히 ‘두려워했다’는 뜻외에 ‘그가 주저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두려워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관여하셨을 때, 그는 이미 마리아를 데려오고자 하는 마음을 내심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달리 ‘마리아 데려 오기를 결코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라’고 표현할 수도있다. 즉 이 말은 천사가 요셉에게 이미 시작한 혼인(정혼)을 완성(신부를 집으로 데려오기)시킬 것을 지시한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죄책이나 비난을 개의(介意)치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잉태는 음행(淫行)으로 인한 ‘불결한 잉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잉태’였기 때문이다(18절). 물론 이 말을 요셉이 완전히 이해할리 만무했겠지만 평범한 유대 신앙인이었던 요셉에게 ‘성령’에의 언급은 그로 하여금 예수의 출생 비밀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 및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다.



21절, 주석과 해설


아들을 낳으리니

이는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를 향한 수태고지와 거의 흡사한 메시지이다(눅 1:31). 한편 여기서 ‘낳으리니’(텨세타이 데)란 말 속에 불변사 ‘데’가 사용되어 ‘그리고 지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20절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이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적 기원을 재삼(again and again) 일컫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요셉은 두려움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자신을 동참케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날 아들이 다름아닌 “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士)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사 9:6)이신 메시아,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命名權)은 아버지에게 있었다(창 4:25). 본 명령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親父權)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養父)로 임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은 히브리어 ‘여호수아’ 내지는 짧은 형태의 ‘예수아’(느 7:7)라는 이름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서 그가 오신 목적,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다.구약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 중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典刑)으로 제시된 사람은 (1) 모세의 후계자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수1-12장)와 (2) 예수의 조상 스룹바벨(스2:2, 느7:7)과 (3) 동시대 인물로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자’이며, 그 이름이 ‘순’(筍)이라 하는 여호수아(슥 6:11-13)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이 이들의 이름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사가 시 130:8을 인용한 뒤의 구절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적 의미롤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예수’란 이름은 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아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예수가 유대인이 대망(待望)하던 바로 그 메시아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백성

이 말은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침례 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제자로 삼았으며(3:9, 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기 백성’의 범주에 포함 된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아의 백성’을 의미한다.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여기서 ‘죄’(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는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결국 이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오신 근본 목적과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여 메시아적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질을 깨닫게 한다(Ridderbos).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아관올 가지고 있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할’(20:28)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로마의 속박 가운데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죄로부터’(from)-바로 그들의 죄로부터-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구약에서 ‘구원’(소조)이라는 말은 육체의 위험(8:25), 질병(9:21,22) 또는 죽음(24:22)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으나, 이 구절에서의 ‘구원’은 보다 본질적인 구원, 즉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사실 성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 죄악은, 비록 항상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재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신약에서 주로 소개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시키게 될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22절, 주석과 해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 이루려 하심이니

‘이 모든 일’이란 직접적으로는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에 관련된 모든 사건들을 가리키나,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성취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된 것은’(게고넨)이란 능동태 직설법 현재 완료형 동사를 취하고 있는 용어로서 어떤 사실이 예언된 바대로 지속적 성취를 통하여 이미 되어졌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이다. 사실 구약의 수많은 예표론적(豫表論的) 사건과 선지자들의 예언적 메시지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오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해 오셨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예시하신 바를 따라 그 모든 예언을 현실화, 구체화하셨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에게는 예언적 메시지와 성취적 사건이 결코 모순됨이 없이 진실한 한 짝을 이른다. 한편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맥네일(McNeil)은 ‘예수의 삶 속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적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피력(披瀝)한 바 있다.

이 두 구절(마 1:22-23)의 화자(speaker)에 대한 견해는 (1) 천사와 (2) 마태의 설명(Bruce)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무방하나 이러한 표현이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2:15, 17, 23, 4:14, 8:17, 12:17, 13:35, 21:4, 26:56, 27:9 등)는 사실과 성경 어느 곳에도 천사가 성경을 인용하는 표현이 없다는 점 등이 (2)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 즉, 마태는 구약의 메시아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구약을 자주 인용할 뿐 아니라 메시아의 전형(典刑)을 발견할 수 있는 구약의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인용한다(2:15 참조).



23절, 주석과 해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역(LXX)에 따른 인용이다. 이 예언은 북(北) 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여호와를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 23절과 사 7:14을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에 대한 수많은 견해들 중 타당성있게 생각되어지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젊은 여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서 자기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이름지었다(Unnik, Hill, Taylor). (2) 이사야의 예언 당시 처녀였던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 그의 원수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한다(Broadus, La Sor). (3)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다(Alexander, Hengstenberg, Young). (4) 임마누엘은 유다에 남아 있던 의(義)로운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을 암시하는 것이고, 임마누엘을 낳은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Rice). 이상 네 가지 견해보다 가장 합당한 것은 (5) 사 7:1-9:7은 한 단위이며, 7:14은 그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는 해석이다(Motyer).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8:10),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이다(9:7).


처녀

사 7:14에서 이미 예언된 본 구절은 ‘처녀 논쟁’(알마 논쟁)로 유명하다. 그 까닭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녀’를 ‘알마’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성(性)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virgin)라는 고유한 어휘 ‘베툴라’과는 의미상 차이가 나는 결혼의 유무(有無)와 관계없이 ‘젊은 여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70인역(LXX)이 히브리어 ‘알마’를 단순히 ‘젊은 여자’를 뜻하는 ‘네아스’으로 번역하지 않고 처녀를 뜻하는 ‘파르데노스’으로 번역하였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물론 처녀성(處女性)을 잃고난 디나를 창 34:4에서 단 한번 ‘파르테노스’로 번역하기는 했으나 ‘파르테노스’는 확정적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처녀(virgin)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알마’로 표기된 사 7:14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는 ‘처녀’로 단정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를 뜻하지만, 구약 성경에 기술된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 24:43, 출 2:8, 시 68:25, 잠 30:19, 아 1:3, 6:8) 관용적으로 ‘처녀’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2)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메시아의 예언과 결부하여 사용된 용어는 ‘처녀’를 지칭하는 것이지 처녀성의 지속적 유지에 대해 논의한 단어가 아니다. (3) ‘알마’와 동일 어근인 남성 명사 ‘에렘’은 결혼전의 풋나기 소년을 일컫는 말이다(삼상 17:56, 20:22). (4) 고대 비문에 새겨진 ‘알마’와 동근어(同根語) 고대 우가릿(Ugarit)어 ‘glmnt’가 오직 결혼전 여자에게만 사용되었다. 결국 ‘감추다’, ‘숨기다’는뜻의 ‘알람’(껍#랗)에서 유래한 ‘알마’는 처녀성의 계속적 유지에 관심을 둔 용어인 ‘베툴라’ 와는 달리 남자와는 격리되어 순결히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임을 확증지을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의 문맥의 전후 관계를 살펴 볼 때에 ‘처녀’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눅 1:34)라고 한 것처럼 ‘동정녀’를 의미한다.


임마누엘

이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격(位格)과 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 용어이다(사 7:14). 한편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이 결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아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 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20) 영원한 하나님 그자체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24절, 주석과 해설


요셉이 … 일어나서 … 분부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가 주어졌던 현몽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의 즉각적인 순종이 돋보인다. 이는 헬라어 원문에는 행동의 주체인 요셉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그의 행위, 곧 ‘일어나서’(에게르데이스)에 그 강조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요셉의 순종은 마리아가 행했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하는 수동적인 순종에 비하여, ‘분부대로 행하여 … 데려 왔으나 … 동참치 아니하더니’(24절)는 능동적인 순종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만유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모로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겠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인도해 들임으로써 이제 정혼 기간을 마감하고 공식적인 부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실제로 요셉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



25절, 주석과 해설


아들을 … 예수라 하니라

마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다. 여기서 본문의 ‘동침치 아니하더니’는 헬라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즉 ‘알지 못하더니’라는 히브리 문학적 완곡어법으로 ‘알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야다’은 남녀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눅 1:34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와 같은 의미의 말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실이 가톨릭의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옹호하지는 못한다. ‘아들을 낳기까지’라는 구절은 당연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 탄생 후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맺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는 육신적으로 마리아의 맏아들(눅 2:7)로서 훗날 혈육으로서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얻게 된다. 한편 계시된 예수의 이름은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circumcision)를 받으실 때에 공식적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로써 예수의 신분은 법적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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