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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장 13절-23절, 나사렛 예수 - 매일성경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2장 13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에는, 헤롯이 베들레헴 주변의 두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이며 그 사이에 요셉의 가족은 애굽으로 피난 간 장면입니다. 헤롯이 죽은 후, 나사렛으로 돌아오고  '나사렛 예수'로 불려짐을 주석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장 13절-23절, 나사렛 예수



마태복음 2장 13절-23절, 나사렛 예수



13절, 주석과 해설


저희가 떠난 후에

본 절의 ‘떠나다’는 동사는 12절의 ‘돌아가다’는 동사와 같은 의미로서 본 절 이하의 사건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주의 사자를 통한 애굽 피난 지시가 박사들이 떠난 얼마 후에 내려졌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어쩌면 박사들에게 지시가 임했던 시기에 같이 내려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박사들이 떠난 그 날 밤에 있었을 수도 있는 만큼 매우 근접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주의 사자가 … 현몽하여

요셉은 제 2차로 주의 사자의 계시(revolution)를 접하고 있다(1:20). 그런데 이번 계시의 요지는 당신의 아들인 메시아를 보호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나타내는 데 있었다.


헤롯이 … 죽이려 하니

메시아에 대한 헤롯의 살해 음모가 이방인의 경배와 예물 바로 뒤에 다가왔다. 실로 이것은 예수의 생애 가운데 계속되는 배척과 수모(受侮)의 전조(前兆)가 되는 셈이다.


일어나 … 애굽으로 피히여

여기서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겔데이스’은 조금도 여유를 두지 말고 곧바로 행하라는 촉급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실로 유대인의 왕이요, 구원자로 오신 예수께서 유대 땅의 환영을 받지 못하시고(요 1:11), 마치 도망자의 모습으로 이방 땅에 급히 피하실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애굽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서 헤롯의 통치권밖에 있는 지역이며, 그 당시 약 100만명 정도의 유대인 집단이 군집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고한다(Philo, A.D. 40). 애굽 특히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헬라화된 거주민들을 위해 헬라어로 된 구약인 70인역(LXX)이 만들어진 것은 직어도 애굽에서의 유대인 지위가 상당히 인정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例)이다. 한편 유대인의 애굽 피난 역사는 오래 전부터 행해진 것이었다. 그곳은 일찍이 흉년으로 인해 아브라함(창 12:10)과 야곱(창 46:6)이 내려간 바 있으며, 솔로몬 사후(死後)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피난하였고(왕상 11:40), 포로 시대에는 예레미야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이 그곳으로 갔으며(렘 26:21-23, 43:7) 특히 신구약 중간기 때는 시리아의 학정에 의해 그곳으로 많은 유대인이 내려가는 등 애굽은 유대인이 피난하기에 적지(適地)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식구들은 쉽게 애굽에 이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팔레스타인 계열의 외경 중 하나인 ‘예수 유년기의 복음’(Gospel of the Infancy)은 당시 애굽으로 내려간 예수의 각종 이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내가 … 거기 있으라

아기 예수를 안은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애굽으로 간 것처럼 돌아와 때도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려야만 했다. 즉 그들은 헤롯이 죽을 때까지만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19, 20절) 애굽에서 인내하며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이 지시는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피난 길 뿐만 아니라 피난 기간과 그 이후까지도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14절, 주석과 해설


요셉이 일어나서 … 애굽으로 떠나가

여기서 ‘일어나서’에 해당하는 ‘에게르데이스’은 수동태 제 1과거 시상으로서 주저함없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행동을 취한 것임을 나타낸다. 마치 1:24처럼 요셉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순종이 부각되어 있다. 실로 요셉은 그 밤에 출발하여 애굽의 변경까지 약 120 km나되는 먼 여행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완전한 믿음이다(히 11:1, 6). ‘아기와 그의 모친’이란 구절은 본 장에서 계속 나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이 추호(秋毫)도 실수가 없음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15절, 주석과 해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헤롯은 추하고 심각한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비참히 죽어 갔다고 전한다(Josephus). 이러한 헤롯의 죽음(B.C.4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지시를 고대하던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와 함께 ‘나사렛’(23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외에도 초금욕주의자들인 에센파의 쿰란 종파 사람들은 B.C. 31년에 파괴되었던 그들의 본부에 돌아와 재건할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에서 체류(stay)하는 동안에 그곳에 살고 있던 동족들의 도옴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유대인 탈무드(Talmud)에 따르면 애굽에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유대 회당이 있었고 그곳을 통해 유대인들의 접촉이 많았으며, 더불어 직업을 구하는 일이나 각종 생활 정보도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같은 부류의 직업인들끼리는 쉽게 동화(同和)될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목수 출신의 요셉은 애굽 생활 중에 쉽게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구약에 능통한 유대인들을 향해 글을 쓰고 있던 마태의 독특한 문장 표현이다(1:22). 즉 마태는 구약의 예언과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때에 완성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졔시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적 메시지(호 11:1)예수의 생애와 접목(grafting)시키고 있는 것이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마태는 예수의 애굽 피난 사실을 11:1의 말씀과 일치시키고 있다. 사실 11:1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본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사건을 언급한 말이다. 그러나 마태는 성령의 영감(靈感)으로 그 사건을 예수께 적용시켰다. 즉 마태는 이스라엘(하나님의 자녀)의 역사가 예수(하나님의 독생자)의 생애 속에서 재현(reappearance)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처럼 구속사 전개의 정점인 예수의 개인적 생애에 신.구약을 포함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역사가 다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한 것은 예수의 사역이 단순한 민족적 해방에 그친 모세의 사역을 넘어서 전 인류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예수는 신약에서 이스라엘의 원형(原形)으로 종종 나타난다. 몇가지를 예시해 보면 (1)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시험(신 8:2, 3)-예수의 40일 금식 기도(4:2), (2) 이스라엘은 열매 맺지 못한 포도나무(사 5장)-예수는 참 포도나무(요 15장), (3)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장자(출 4:22)-예수는 하나님의 맏아들(롬 8:29, 히 1:6),(4) 이스라엘은 다윗의 골육(삼하 5:1)-예수는 다윗의 자손(1:1) 등이다. 또한 신약에서는 어디에서나 구약의 역사와 율법을 예언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看做)하고 있다. 즉 ‘예언의 성취’라는 말은 그것이 구약과 연결되어 구약의 예표의 실체(원형)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호 11:1은 단순히 출애굽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있고,그 사랑은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질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진행되는 동안에 펼쳐진 계시, 즉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그려진 그림과 같은 전형적(典型的)인 계시의 일부분을 제공했고, 마태는 그 계시의 ‘완전한 의미’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 대망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차지하는 위치는 민족적, 혈통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데서 결정된다.



16절, 주석과 해설


이에 헤롯이 … 속은 줄을 알고. 여기서 ‘속다’는 뜻의 ‘에네파이크’은 단순히 속다는 뜻 이상의 의미로서 ‘희롱(조롱)하다’는 강렬한 뉘앙스(nuance)를 담고 있다(Calvin). 따라서 박사들이 자기에게로 오지 않고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헤롯은 박사들의 태도를 기만(欺瞞) 이상인 자신을 희롱한 사실로 여겼을 것이다. 박사들이 자신의 교활한 음모를 꿰뚫어 보고 몰래 달아남으로 자기를 앉아서 ‘바보처럼’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이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헤롯을(1절) 못견디게 했을 것이다.


심히 노하여

여기서 ‘노하다’는 뜻의 헬라어 ‘뒤모오’은 거친 숨올 몰아쉬면서 분노하다는 뜻으로서 그당시 혜롯의 활화산같이 꿇어 오르는 극렬한 분노를 예감케 해준다.


사람을 보내어 … 그 모든지경 안에 있는

헤롯의 칼날같은 명령이 실행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사이는 약 8 km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베들레헴은 조그마한 소도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지경에’는 베들레헴 뿐 아니라 베들레헴 근교의 한적한 오두막까지를 포함한다(Meyer).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성경은 헤롯이 죽인 아이들을 갓난아이라 하지 않고 두 살 아래라고 한다. 그것은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인가? 당시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서 두 살 아래 어린이는 몇 명이나 되었을까? 자기 왕위의 안전을 위해 죄 없는 어린이들을 죽일 만큼 헤롯 왕은 잔인했는가?

(1) 헤롯이 잔인하게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다 죽인 사건을 왜 다른 복음서는 기록하지 않았을까?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동방박사 이야기를 아예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어린이 살해 사건도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성경기자들은 그 당시 파피루스 두루마리의 길이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의 주제나 관심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은 그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과감히 생략했다.

(2)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헤롯 왕은 충분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위의 안전과 인기를 위해서는 사랑하던 아내와 두 아들을 죽일 만큼 병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각 지방의 귀족들을 경기장에 감금해 놓고 그가 죽는 순간에 그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여 전국적인 애도가 일어나도록 하라고 명령할 만큼 정상인이 아니었다. 그런 병적인 사람이 자기와 헤롯 왕조를 치명적으로 위협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데, 더구나 그 정확한 시간과 장소까지 알고 있는데 가만히 있었겠는가!

(3) 당시 살해된 유아의 수효에 대해 대단히 많았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학자도(Alford) 있고, 심지어 14,000명 정도로 추산하는 전승도 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이었고, 당시 주민이 1-2천 명 정도였으므로 그 인근 지경까지 합한다 해도 두 살 아래의 아이는 단지 20-30명 안팎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Farrar, Carr).

(4) 그렇다면 왜 갓 태어난 아기가 아니고 두 살 아래인가? 여기서 두 살부터는 별이 나타난 때(7절)에 근거하였을 것인 데, 여러 견해가 있다. (ㄱ) 왕으로 태어난 아이가 제외되지 않고 확실히 제거하고자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둔 것이다. (ㄴ) 박사들이 예루살렘까지 근 2년 동안 걸려 도착했다. (ㄷ) 박사들의 귀국 후 2년 후에 살해했다. 그리고 두 살 아래란 말이 갓 태어난 신생아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에도 회의적(懷疑的)인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15개월 내지 20개월까지로(A.T. Robertson) 보기도 하며 좀 더 넓게 6개월에서 20개월 사이까지로 보기도 하지만(D.A. Carson) 분명하게 알 수 없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헤롯은 별이 나타난 때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물어서(마2:7) 알았고, 박사들이 예루살렘까지 여행한 기간이 적어도 40일 이상이 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주도면밀히 계산하고, 만일의 경우까지 생각하여 안전하게 두 살 아래로 범위를 정한 것 같다.



17절, 주석과 해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마태복음에 예레미야라는 이름이 세 번 나오며(16:14, 27:9), 그 밖에는 신약성경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18절, 주석과 해설


라마에서 슬퍼하며 … 라헬이 … 애곡하는

예레미야가 이 예언(렘 31:15)을 선포한 시기(여호야김 통치 초기)를 고려해 볼 때(렘 30:1-33:26) 주전 586년에 멸망한 유다와 베냐민의 포로 장면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라헬은 야곱의 아내이자, 요셉과 베냐민의 모친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유대인의 전형적인 어머니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라마(Ramah)는 베냐민 지파 성읍이며(수 18:25)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 가까우며 벧엘로 가는 도중에 위치하는 곳이다. 바로 이 부근에 라헬의 무덤이 있는 셀사(Zelzah)가 있었다(삼상 10:2). 이러한 정황들을 익히 알고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수를 바라보며 라헬이 그녀의 무덤 속에서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 포로가 된 자손들, 즉 ‘그 자식’들이 끌려가는 모습(렘 40:1, 2)을 바라보면서 통곡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이 구절은 옛날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 라마에서 에브라다(베들레헴)로 가는 도중에 자식이 없어 슬퍼했었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産苦)로 인해 죽은 사실(창 35:19,20)을 포로됨에 비유하여 예레미야가 시적(詩的)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다시 이것을 마태가 베들레헴 유아 학살 사건에다 관련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마태가 여기에서 바벨론 포로 장면을 연결시키고 있는지 이해할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사건들의 초점은 베들레헴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어미들(라헬)이 흘리는 ‘눈물’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바벨론 유수 때에는 다윗의 혈통에서 이어지던 왕권이 물러나고 이방의 속박으로 인하여 흘리던 탄식의 ‘눈물’이, 또다른 이방인(헤롯은 에돔인이었음)의 학정으로 살해된 베들레헴(다윗 성이라고 불리우는, 삼상 16:1) 아이들이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곧 그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후손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림으로 오랜 포로 생활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언약해 주신 새 언약(26:28, 렘 31:31-34)이 온 이스라엘에 선포될 것이기 때문이다.



19절, 주석과 해설


헤롯이 죽은 후에

헤롯은 그의 통치 38년, 즉 로마 기원 750년(B.C.4년)에 70세의 나이로 병들어 죽었다. 한편 그의 최후를 기술한 요세푸스(Josephus)의 ‘고대사’에 따르면 그는 내장이 썩고 벌레가 나며 악취와 경련이 끊이질 않아 백약이 무효하여 죽으니 그 모습은 잔인한 생각을 가진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의 죽음이었다 한다.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 현몽하여

이는 요셉에게 나타난 세 번째 현몽(現夢)인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관심과 역사가 아기 예수의 생명에 집중되어 있음이 엿보인다. 한편 마태는 요셉이 3차 현몽 당시에도 여전히 애굽에 머물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으나, 애굽 체류 기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예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외경 ‘예수 유년기의 복음’(Gospel of the Infancy)에는 약 3년간 애굽에서 머물렀다고 전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이때 예수께서 고용 일꾼으로 일하셨고, 각종 이적을 베푸셨다고 전한다(Origen). 여하튼 예수의 가족이 애굽에 머무른 기간이 그리 오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20절, 주석과 해설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요셉에게 복귀 명령을 내리시고 계신다. 여기서 이스라엘 ‘땅’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오직 20, 21절에서만 나오는 것으로서 6절의 ‘유대 땅’과 동일한 의미이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여기서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란 단순히 혜롯을 지칭하는 막연한 묘사이다. 그런데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호이제툰테스)이라는 복수 형태에 대하여 여러 견해들이 있다. (1) 출 4:19을 인용한 것이다(Hill). (2) 헤롯이 죽기 5일 전에 죽었던 그의 아들 안티파터(Antipater)가 이 학살에 가담하였다(Meyer, Clarke). (3) ‘그들’이라는 복수대명사는 막연한 지칭일 수도 있고, 3인칭의 범주에 속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Turner). 그 중에서 마태가 바로 앞 구절에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한 호 11:1을 인용하면서부터 이미 그의 머리 속에, 생애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모세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출 4:19 을 인용하였을 것이다.



21절, 주석과 해설


요셉이 일어나 … 들어오니라

여기서도 요셉의 절대 순종이 돋보인다. 아마 이때는 어둠을 틈타 행동해야 할 아무런 장애 요소가 없었기에 해가 있는 낮에 본국(本國)으로의 입국을 결행했을 것이다. 실로 ‘밤에’ 떠났던(14절) 그들이 낮에 돌아오게 된 것이야말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절대 의지를 일견(一見)나타내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22절, 주석과 해설


아켈라오

신약에는 헤롯이란 말이 45번이나 나오는데 대부분 구분하지 않고 “헤롯”이라고 언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모두 같은 사람은 아니다. 신약 성경 시대의 헤롯 왕들은 다음과 같다.

1. 헤롯 대왕(B.C. 37-B.C. 4): 예수님 탄생시의 왕. 마 2:1의 주석을 참고하라.

2. 헤롯 아켈라오(B.C. 4-A.D. 6): 헤롯 대왕의 아내 말다게의 아들. 유대의 영주로 임명되었으나 실정으로 추방되고 총독이 파견됨. 본 절의 아켈라오이다.

3. 헤롯 안디바(B.C. 4-A.D. 39): 헤롯 대왕의 아내 말다게의 아들.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침례 요한을 죽였고 십자가 전에 예수님을 심문함. 마 14:1의 주석을 참고하라.

4. 헤롯 빌립(B.C. 4-A.D. 34): 헤롯 대왕의 아내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갈릴리 동북쪽 골란 지방의 분봉왕으로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함. 눅 3:1의 주석을 참고하라.

5. 헤롯 아그립바 1세(A.D. 37-34): 헤롯 대왕의 아내 마리암네 사이에 난 아리스토불로스의 아들. 할머니와 아버지가 할아버지 헤롯 대왕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은 왕자이며 왕이 된 후에 야고보를 죽임. 행 12:1의 주석을 참고하라.

6. 헤롯 아그립바 2세(A.D. 50-70): 헤롯 대왕의 증손자로 아그립바 1세의 아들. 사도행전 26장에서 바울이 만난 왕으로서 나이가 어려서 실권을 갖지 못함. 행 25:13의 주석을 참고하라.

위의 헤롯 중에서 본 절의 아켈라오는 2번의 헤롯 아켈라오(Herod Archelaus, B.C. 4-A.D. 6)이다. 그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헤롯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왕이었다. 헤롯 대왕은 유언장에서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다. 사마리아 여인 말다게(Malthace)의 아들 아켈라오에게는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를, 둘째 아들 안디바(Antipas)에게는 갈릴리 지방을,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빌립에게는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주어 다스리게 했다.

(2) 아켈라오는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을 닮아 향략과 사치를 사랑했으며 잔인한 면이 있었다. 즉위한 첫 해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군대를 투입하여 3,000명을 무차별 살육하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런 아켈라오를 두려워했으며 그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갈릴리지방 나사렛으로 피하여 돌아갔다. 폭도들을 지지했다는 구실로 대제사장을 파면한 일, 아내와 이혼하고 불의하게 재혼한 일 그리고 그의 잔혹성이 유대인들의 눈에 거슬려 그는 인기가 없었다. 마침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연합하여 로마 황제에게 호소하여 아켈라오를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다(A.D. 6).

(3) 유대인들은 이제 헤롯 왕가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기들이 원하는 왕을 세우기를 원하였지만 로마는 아켈라오를 추방하고 그 자리에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을 두어 유대 지방을 다스렸다. 따라서 예수 당시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은 로마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으며,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에는 제5대 총독인 본디오 빌리도(Pontius Pilate, A.D. 26-36)가 다스리고 있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는 총독을 철수시키고 총독이 다르시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도 헤롯 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 Ⅰ세에게 주었다. 그래서 한동안(A.D. 44년까지) 아그립바Ⅰ세는 할아버지 헤롯 대왕을 이어 전 이스라엘 지역을 통일하여 다스렸다. 아그립바가 죽자 로마는 다시 총독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만난 로마의 총독들은 제11대 총독 벨릭스(Felix, A.D. 52-60)와 제12대 총독 베스도(Festus, A.D. 60-62)였다.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유대 사가(史家)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아켈라오는 시이저로부터 분봉왕으로 임명받기전부터 잔혹한 살상을 저질렀다 한다. 그 한 예로 그의 부친 헤롯이 죽기 전 자신이 성전에 세워 놓았던 금 독수리상을 훼손시켰던 유다와 맛디아라는 열렬한 애국자 둘을 살해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켈라오가 아직 즉위하기 전 유월절이 다가왔을 때 여러 사람들이 이 두 순교자들을 위하여 애도(哀悼)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자기 부하들로 하여금 성전을 에워싸도록 하고서 3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요셉이 들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아마도 그 때 마태의 생각에는 요셉이 헤롯의 음모가 아니었다면 애굽으로 도피하기 직전에 머물렀던 베들레헴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했으며, 애굽에서 돌아올 때에도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어린 메시아가 성장하기에 알맞은 곳은 예루살렘 성도(聖徒) 주변이지 ‘이방의 갈릴리’(4:15, 사 9:1)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는 이곳 나사렛이 원래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눅 1:26, 2:4, 39) 그들의 나사렛 정착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여하튼 이 현몽(現夢)은 그가 받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현몽으로 이때 받은 ‘지시’(크레마티조)는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의미이다.



23절, 주석과 해설


나사렛

히브리어 ‘네체르’에서 유래한 말인데 ‘싹, 어린 순’이라는 뜻이다. 갈릴리의 한 성읍으로 예루살렘 북쪽 약 90 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비옥하지 못한 모래 땅, 주위의 산들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빈약한 성읍이었다. 이곳은 구약성경에도 외경(外經)에도 요세푸스(Josephus)의 고대사에도 나오지 않고 여기에 새로이 등장하는 이름이다. 실로 나사렛은 경멸받던(요 1:46) 성읍의 하나였으나 주후 4세기 이후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선지자로 하신 말씀 … 이루려함이러라

본 절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구절은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오랜 세월을 두고 다음과 같은 여러 논쟁을 야기시켜왔다. 즉 (1) 구약 이외에 구전되어 오던 구절이거나 분실된 부분이다(Chrysostom, Zigabenus, Theophylact). (2) 나사렛의 뜻이 ‘싹’이므로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사 11:1)을 가리킨다(Jerome, De Wette, Vincent). (3) 나사렛의 어근은 나사르으로서 ‘구별’을 뜻하므로 ‘나실인’(민 6:2, 8)에 관련된다(Tertullian, Erasmus, Wetstein). 위와 같은 견해들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보다 타당한 해석은 다음 경우이다. (4) ‘선지자’(프로페톤)란 용어가 복수 형태인 것은 한 특정한 선지자가 ‘메시아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리라’라고 예언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시 22:6-8, 13, 69:8, 20, 21, 사 11:1, 49:7, 53:2, 3, 8, 단 9:6, Michaelis, Paulus, Rosenmüller, Kuinoel, ol-Shausen). 실제로 나사렛은 멸시당하던 곳이었으며(요 7:41, 52), 심지어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조차 경멸당하던 곳이었다(요 1:46). 예수는 ‘나사렛 예수’라는 놀림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이단’(행 24:5)으로 취급되었을 때의 이 ‘나사렛’이란 단어는 비방과 모욕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 다윗의 왕통에서 나온 줄기였고 조룽과 경멸을 받으며 비천한 환경에서 자란 왕이신 메시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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