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3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회막 주변에서 일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매일성경 큐티와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민수기 3장 1절-13절, 엄위하신 하나님 가까이
1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께서 … 이러하니라
어떤 특정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기 보다 각 장의 내용으로 들어갈 때에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히브리 문학적 표현의 한 기법이다(창 2:4). 한편 본 절의 내용를 직역하면 ‘그리고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실 때의 일로서 아론과 모세의 후손에 대한 말씀이니라’이다.
아론과 모세가 낳은 자
여기서 ‘낳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톨도트’는 ‘일족들’, ‘세대’(generations), ‘가문’, ‘족보’ 등으로 번역된다. 본 장 중 2-4절은 아론의 아들로서 제사장이 된 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17절 이하는 레위 지파의 족장 이름 및 인구 수를 가계별로 비교적 상세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모세의 자손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이름이 여기 언급된 것은 그가 아론과 더불어 레위 지파의 머리이며 영적인 아버지의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Keil). 한편 여기서 아론의 이름이 이례적으로 모세보다 먼저 언급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 이유는 아마 연령상으로는 그가 장자였을 뿐 아니라 본 장에 소개되는 제사장들의 아버지요, 초대 대제사장이었고, 또한 레위인들 전체를 통솔하는 종교 지도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론의 직계 자손들은 제사장이 된 반면 모세의 후손들은 제사장를 보필하는 일반 레위인들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Keil). 따라서 아론과 모세 중에서 분명 모세의 권위가 절대적이지만 (출 4:16, 32:22, 민 12:1-16), 회막 봉사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사명에 있어서는 분명 아론의 후손들이 모세의 후손들보다 고귀한 직분에 임명되었으므로, 여기서는 바로 그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아론을 모세보다 먼저 기록한 것이다. 한편 모세가 낳은 자들의 족보는 대상 23:14-17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평범한 레위인으로 조용히 봉사했던 것 같다. 이것은 아론의 두 아들이 제사를 잘못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사 죽임을 당하였고(레 10:1, 2), 위대한 종교 지도자 엘리나 사무엘의 아들들이 불량했다고 하는 평가(삼상 2:12, 8:1-3)에 비춰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는 모세의 자녀 교육이 철저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와 같은 기록상의 다양한 조절은 결코 이 책이 오류 투성이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당신의 초월적인 목적과 경륜에 부합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쓰여진 것임을 나타낸다.
2절, 주석과 해설
나답 … 아비후 … 엘르아살 … 이다말
이들은 아론이 그 아내 엘리세바를 통해 얻은 네 아들들이다(출 6:23). 따라서 이들은 제사장 성별식 때 아버지인 아론과 더불어 거룩한 제사장으로 위임 받았다(레 8:6-13). 그러나 이 네 아들 중 장자인 나답과 차자인 아비후는 제사를 잘못 드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레 10:1, 2). 따라서 셋째 아들인 엘르하살이 후일 아비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다(민 20:25-28). 한편 아론의 넷째 아들인 이다말은 후일 이다말 가문의 조상이 된 자이나(대상 24:4-6), 그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다. 다만 성막 건축시나 광야 행진시 제사장으로서 그 맡은 바 직분을 충실히 감당한 자로 서술되고 있을 뿐이다(출 38:21, 민 4:28, 33).
3절, 주석과 해설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고’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마솨흐’는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란 뜻이다. 그런데 ‘기름을 붓다’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란 뜻을 가진 ‘메시아’(마쉬아흐)라는 명칭의 어근이 되기도 한다(단 9:25-26). 한편 아론의 아들들은 관유(灌油)로 기름 부음을 받는 의식을 가짐으로써 거룩히 구별되어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출 29:4-9). 물론 원문에는 ‘구별되다’란 말이 언급 되지 않고 있으나, 의미상 그들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이다. 즉 ‘기름을 붓는 행위’는 그 대상에 대한 소유권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한 방법이다. 한편 제사장 성별식 때 사용되는 거룩한 기름, 곧 관유는 성령을 상징한다(출 30:22-33).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의 역사로 성결하게 구별되어 봉사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히 4:8)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아 사역하신 사실(행 10:10:38)을 상기시킨다. 아울러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들(벧전 2:9) 역시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행 2:7)으로 침례를 받고(고전 12:13), ‘복음의 제사장’(롬 15:16)으로서 복음사역에 종사해야 한다(사 61:1-4). 이것은 우리가 성령의 지시를 따라 순종하고 행동해야 함을 의미한다(겔 36:27, 요일 2:27).
위임 받은
직역하면 ‘그들의 손이 채워진’이다. 그러므로 ‘위임식’이란 곧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손에 예물을 채워주는 의식을 가리킨다(레 7:37). 그리고 본 절에서 이 말은 ‘기름을 발리우고’라는 말과 연결된다. 여기서 기름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령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제사장들 또한 성령으로 채움을 받은 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미가 선지자는 자신이 오직 여호와의 영으로 채움을 얻고 선지자의 직무를 감당할 것이라고 고백했다(미 3:8). 여기서 ‘채움’은 ‘충만’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오직 성령 충만한 자라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혹자는 ‘그들의 손이 채워졌으므로 다른 일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실로 성령으로 충만하고 사명감으로 불타는 하나님의 일꾼은 세상적인 일로 인해 마음이 나뉠 수 없다(마 6:24).
4절, 주석과 해설
다른 불
‘이상한 불’(KJV, strange fire), ‘신성치 않은 불’(RSV, unholy fire), ‘공인되지 않은 불’(NIV, unauthorized fire) 등을 의미한다(레 10:1). 성막 봉사 시 하나님께서는 오직 번제단 위에서 피운 불로 분향단에 점화할 것을 요구하셨다(레 16:12, 13).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그에 불순종 했으며 자의(自意)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다가 하나님의 분노를 사 결국 여호와의 불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처럼 망령된 일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고를 교훈 삼아 하나님께 봉사하는 자들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실(삼상 15:22)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 앞에서
직역하면 ‘여호와 면전에서’란 뜻이다.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의 경거망동은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완전히 무시한 행위나 다름 없었다. 결국 여호와 앞에 방자했던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심판을 받고 말았다. 한편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제사장 된(벧전 2:9)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Coram Deo)서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고양(高揚)하든지 아니면 훼손하든지 둘 중 하나의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운명과도 직결된다. 그런 점에서 침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눅 1:6) 의인으로 인정받았던 것은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자식이 없었으며
나답과 아비후에게 자식이 없었던 것은 자연적인 불임의 결과이기 보다 하나님의 저주에 따른 결과였다. 사실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로 간주했던 히브리인의 사고 개념상(시 127:3), 나답과 아비후에게 임한 징계와 그들의 무자식이 단순히 우연일 수 없다.
아론 앞에서
이 말은 ‘아론이 생존시에’(RSV, in the lifetime of Aaron)로 번역함이 좋을 듯하다(Pulpit Commentary).그것은 그들이 아론과 함께 성직을 위임 받았고(출 28:1), 아론 평생에 그를 보좌하며 봉사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아론 사후에도 제사장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20:22-29, 27:18-23). 그러나 그들의 사명도 아론처럼 유한한 것이었다. 결국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엘르아살도 자신의 죽음과 함께 대제사장직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돌아보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영원성을 설파(說破)했다(히 7:23, 24). 이처럼 아론과 그 자손들의 제사장직은 일시적이고 당대에 한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영원하여 만세에 효력을 미치는 것이다(히 10:11-14).
6절, 주석과 해설
나아가
직역하면 ‘가까이 불러내어’(bring near)이다. 곧 일반 레위인들은 제사장들 가까이에서 그들을 도와 제사 사역에 협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앞에 서서
이 말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그 앞에 겸손히 대기하고 있는 종의 위치를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 표현이다(Keil, Pulpit Commentary, 창 41:46, 대하 29:11, 단 1:5). 그러나 이는 레위 지파가 제사장들의 개인적인 종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협력할 조력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신분상의 구별은 확연하니, 곧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에서 태어난 자들 모두를 가리키지만, 제사장들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오직 아론의 직계 후손들만이 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제사장과 레위인들 간에는 사회 종교적 위상의 차이가 있었다. 즉 제사장은 재판관이나 집전자의 위치에 있었으나(신 17:9, 19:17), 레위인은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었다(신 12:19, 14:27).
시종하게 하라
‘봉사하게 하라’(KJV, RSV, minister)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레위인들은 이 명령에 따라 성막 안 출입이나 번제단 위에서의 제사 집례 등을 제외한 일, 곧 백성들이 제물을 잡아 드리도록 하는 일에 조력하는 것과 또한 성막을 걷고 운반하는 일에 제사장을 도와 봉사해야 했다(4장, 10:17-21).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즉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을 섬겼으나 레위인들은 제사장에게 속한 자로서 하나님을 섬겼다. 이 같은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차이를 예시하는 듯하다. 곧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지만(벧전 2:9, 계 1:6, 5:10)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골 1:14).
7절, 주석과 해설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
이는 레위인들의 이중적 사역을 말하고 있다. 즉 전자는 아론과 그 아들들, 곧 제사장들의 제사 사역과 관련된 제반 업무를 보조하는 것과 성막 보호와 이동에 대한 임무를, 후자는 일반 백성들을 위한 제사와 또한 그에 따르는 제반 종사 직무를 가리킨다(1:53). 이는 오늘날 영적 레위인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이 지녀야 할 올바른 자세를 암시하여 주는데, 곧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 및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담당해야할 사명을 맡은 자들이다(마 22:37-40). 한편 여기서 직무(히, 미쉐메레트)란 말은 ‘지키다’(히, 솨마르)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러므로 즉 직무란 명심하여 지켜져야 할 사항을 가리킨다. 그런데 ‘지킨다’는 말은 ‘(명령을) 온전히 순종한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므로(창 26:5, 출 20:6), ‘직무=순종하는 것’이라는 등식도 성립된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우리의 순종 없이는 이행될 수 없다. 또한 ‘지킨다’는 말은 ‘인내있게 책임을 완수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끝까지(인내하며)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계 2:26)라는 말씀으로 충성과 분발을 요청하셨다. 그러므로 순종과 인내, 그것은 진정 일꾼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직무를 ‘사명감’이라고 하는 마차에 싣고 목적지까지 달리도록 만드는 쌍두마(雙頭馬)이다.
회막에서
레위인의 봉사 구역은 한정되어 있다. 즉 그들은 ‘회막’에서만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그분께 구별되어 오직 그분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다(1:49-53). 물론 레위인들의 하나님 소유 사상은 출애굽 장자 성별 사건(출 12:29, 레 2:12)에 근거한다.
시무하되
‘시무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전적으로 매여) ‘일하다’, ‘봉사하다’란 의미이다. 이것은 노예가 상전에게, 혹은 아내가 남편에게 매이는 것과 같은 단단한 결속을 뜻한다. 그러므로 레위인들은 오직 하나님께 매인 자들로서 하나님의 일에만 전적으로 매달려야 하였다.
8절, 주석과 해설
회막의 … 기구를 맡아 지키며
레위인들의 임무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즉 그들은 회막 안에 있는 모든 기구를 관리하고 보존하며, 외인들이 회막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항상 감시하여야 했다(10절). 그런데 이 임무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보존하는 동시에 백성들의 안녕을 유지하는(1:53) 이중적 성격을 지닌 일로써 매우 중대한 임무였다.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직역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로서’이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회중의 직무(제사)를 자신들의 직무로 여기고 그 일을 위해 봉사했다. 즉 그들은 전체 이스라엘의 예배를 위해 종으로서 봉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영적 레위인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들 역시 이처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고후 4:5) 사랑으로 종 노릇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갈 5:13).
9절, 주석과 해설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이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제사장들에게 레위인을 다스리며 관할할 권한을 제공하라는 명령이다. 이는 단순히 아론과 그 아들들의 신분과 지위를 격상시키기 위한 조치라기 보다 성막 봉사를 더욱 원활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사실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모든 명령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온전히 맡겨진
‘주어진’(be given)이 반복된 말로서 ‘확실히 주어진’이란 의미이다. 이는 레위인들이 제사장의 조력자로 분명히 부름 받은 사실을 나타낸다(6절). 그러나 이들은 또한 레위인들에게 주어져 성소의 잡다하고 비천한 일을 맡았던 ‘느디님’, 곧 외국 출신 노예들과는 확실히 구분된다(수 9:27, 대상 9:2).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제사 사역을 보다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제사장들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즉 레위인들은 하나님께는 매였으나 사람에겐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요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10절, 주석과 해설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
여기서 ‘외인’(히, 주르)은 단순히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제사장으로 세움 받지 못한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 절은 1:51의 의미보다 더욱 확대되어 비록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제사장으로 위임받지 못한 모든 자들도 포함된다(Gispen). 따라서 이들이 제사장의 고유 권한인 성소 출입이나 번제단 희생제사 등을 침범할 경우 죽임을 면치 못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가 비록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 1차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밖에 있는 자들은 모두 그 의미상 ‘외인’이었다. 한편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보존키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인류의 대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같은 모든 담을 허물으셔서 인간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근거로 아무 장애 없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히 7:25, 요일 4:10).
12절, 주석과 해설
레위인을 택하여
선택에 관한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본래 레위는 야곱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 백성 중 처음 난 자 즉 장자를 대신하게 하는 자로 선택받았다. 따라서 비록 레위인은 처음 난 자는 아니었으나, 처음 난 자를 대신하도록 선택되었기 때문에 종교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장자라 할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 12지파 중 특별히 레위인이 장자 대신으로 택함 받은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1) 금송아지 숭배 사건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심판시, 레위 족속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여 그 뜻을 수행하였다(출 32:26-29). (2) 임종을 앞두고 12 아들들에게 내린 야곱의 예언시, 레위 지파는 그 운명상 이스라엘 각 처소에 분산되도록 결정지워졌다(창 49:7).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맏이를 대신하게
이에 대해서 13절에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처음 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 선언은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죽이시고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던 유월절 사건에 그 기초를 둔다(출 13:1-16). 하나님께서는 ‘장자 멸절’이란 죽음의 형벌 가운데서도 오직 이스라엘의 장자만은 보존하셨기 때문에 그 장자에 대한 당신의 소유권 주장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장자들을 직접 취하는 대신 레위 족속을 대신 취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금송아지 숭배 사건으로 말미암은 심판시에 오직 당신께 전적으로 헌신한(출 32:26-29) 레위인을 주권적으로 선택하여 그들을 이스라엘의 장자 대신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다. 한편 여기서 ‘대신하게’란 말은 ‘타인의 역할을 대신 담당할 자’란 뜻으로, 이 말은 성경 전반에 흐르고 있는 대속(代贖) 개념과 동일한 맥락을 지닌다. 그러므로 구속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이 레위인의 역할을 계시하시면서 모든 구원 받은 자의 첫 열매, 곧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셨던 것이다(막 10:45, 롬 5:10).
내 것이라
‘내 것이 되리라’(KJV, RSV, shall be mine)로 해석되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을 하든 레위인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이 강력히 천명되었다. 또 이는 레위인의 철저한 헌신을 요구한 말씀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한편, 오늘날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향해서도 ‘너는 내 것이라’고 주장하신다(사 43:1). 우리는 본래 죄 아래 팔린 처지였다(롬 7:14).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 피로 우리를 사셨으므로(행 20:28), 우리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계신다. 바울은 이를 두고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했다(고전 6:19, 20).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ㅟ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롬 14:7, 8).
13절, 주석과 해설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
여기서 ‘처음 태어난 자’란 ‘모든 초태생’(all the firstborn), 구체적으로 ‘모든 장자’를 가리킨다. 히브리인들은 장자들을 존중히 여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자들을 통해 가문의 영예와 전통을 이어 주신다는 사고 방식에서 기인한다. 현실적으로도 장자들은 다른 형제의 배나 되는 유산을 상속 받는 혜택을 누렸다(신 21:15-17). 그런데 이 장자들은 다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유월절 구속의 사건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장자의 소유권자가 되신 것이었다(출 13:2).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 중 모든 장자는 하나님께 바쳐져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그들 대신 택하여 당신을 섬기도록 했다. 이것은 보다 효율적인 성막 봉사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다. 아울러 각 가정에서 총애를 받는 장자들이 가족들과 떨어지는 아픔을 해소하기 위한 특별 배려이기도 했다. 한편 성경은 교회를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이라고 표현했는데(히 12:23),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대상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후사(後嗣)이기 때문일 것이다(롬 8:17, 갈 3:29, 4:7).
나는 여호와니라
원문대로 번역하면 ‘나, 여호와’이다. 카일(Keil)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히, 리 이흐유)와 연결시켜 ‘그들은 나 여호와의 것이 되리라’로 해석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1인칭 주격 대명사(히, 아니)가 ‘나는( … 이다)’의 뜻도 지닌다는 사실에 유의하여 ‘나는 여호와라’고 독립적으로 해석하였다. 한편 히브리어는 동사 자체 속에 주격 어미를 수반하므로 주격 인칭 대명사를 이중으로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엄숙한 감정 표시나 약속 표시를 나타낼 때에는 특별히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 표명을 위해 쓰여졌다(41, 45절). 즉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변동시킬 수 없음을 강조하는 선언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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