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13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은, 산상 수훈의 말씀 중에 빛과 소금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과 소금의 말씀을 통하여 제자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려 주셨습니다. 본문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20절,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13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 것이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 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14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 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 42 장, 49장, 54장, 60장, 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15절, 강해 주석과 해설
사람이 등불을 켜서 … 비취느니라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 다같이 나오는 기사이다. 눅 8:16에는 씨뿌리는 비유 다음에 오고, 막 4:21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눅 11:33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이 기사는 문자적으로 유사해서 그 중 어느 것도 독립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 누가의 구절(눅 8:16)은 서로간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중 특히 눅 11:33은 마태의 것을 닮았고, 막 4:21의 기사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련의 이러한 일치성은 본문의 확신성을 더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선택한다면 다른 구절에 비해 눅 11:33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모디오스)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을 수 있는 용기로 알려졌다. 혹자는 이 말의 용도에 대해 등을 마루에 두고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려고 곡식을 재는 용기로 그것을 덮어두면 얼마동안은 효과가 있다(Tholuck)고 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등경’은 복음서에 4회, 그 외에 8회 정도 등장하는데, 그 대부분은 촛대가 아니라 ‘등불 받침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옥 구조상 이 등경은 방 하나에 한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등경이 빛을 멀리 비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형식주의, 금욕주의, 전통주의의 제한성(制限性)에 연결된다(Lange). 그리고 등경은 성도와 교회의 개방적 특성과 연결된다(계 1:20). 실로 복음사역자 들은 마치 산 꼭대기에 선(사2:2) 자처럼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행실과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널리 전해야 한다.
16절, 강해 주석과 해설
이같이 너희 빛을 …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義)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한다. 혹시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理由)이다(고후 4:6, 벧젠 2:12). 또한 ‘증거한다’는 말에는 말 뿐 아니라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로 선행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Stier). 이같이 천국의 규범(3-12절)은 천국의 상속자들의 삶 속에서 작용하여 천국에 대한 증거를 만들어 낸다(13-16절).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을 따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17절, 강해 주석과 해설
율법이나 선지자
"율법이나 선지자"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구약을 가리키는 말인데 십계명이 여기에 포함되는가? 만일 포함된다면 십계명을 완전케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구약의 두 부분을 말한다(마 7:12, 11:13, 22:40, 눅 16:16, 요 1:45, 롬 3:21). 좀 더 정확하게 구분하면, 구약은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으로 되어 있다(눅 24:44). 그렇다면 예수께서 완성하러 오셨다는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말하는가? 물론 넓은 의미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문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예수께서는 선지자들에 의하여 확인된 율법, 그 율법 중에서도 특별히 도덕법을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5:19에서 율법과 선지자를 설명하면서 계명이라고 말하고 있고, 5:21-27에서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십계명의 여섯째 계명과 일곱째 계명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덕법, 즉 십계명을 폐하러 오시지 않고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흔히 교회에서 가르치듯이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끝나고 이제는 예수를 믿으면 십계명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여기서 완전하게 하는 것을 폐지로 설명하는 것은 문맥에 전혀 맞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완전하게 하다”는 말은 “폐지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성취하고 다 이룬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취하고 다 이루었다는 말은 이제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여기서 완성은 폐지의 반대 개념으로 쓰였다. 즉 계명은 폐지할 수 없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시고 이루셔야만 하였다.
그만큼 율법은 엄숙하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거나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18절, 강해 주석과 해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아멘 가르 레고 휘민)
‘믿을 수 있는’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틀림없이’, ‘진실로’라는 부사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마지막에서 그 문장이 진실이거나 또는 진실임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자주 보인다(기도에서 마지막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경우). 그리고 이 말로써 문장이 시작되기도 한다(렘 28:6, 계 7:12, 19:4, 22:20). 또는 ‘아멘’이 응답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신 27:15-26, 고전 14:16, 계 5:14). 어쨌든 예수께서 하신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씀은 당신의 절대적 권위에 입각해 어떤 한 진리를 단정적으로 선언하실 때 흔히 사용하셨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이는 ‘세상의 종말까지는’으로 번역될수 있는 말로서 예수의 재림을 지향한 표현이다. 진정 세상 종말까지는 율법과 선지자는 폐해질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단정적 선언인 것이다.
일점 일획(一點 一劃)(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일점’이란 히브리어 문자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오드’을 가리키며 헬라어로는 ‘이오타’정도의 가장 작은 문자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획’, 즉 ‘케라이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일획에 대하여 슈바츠(G. Schwaz)는 히브리어 문자 ‘와우’라고 하고, 휠슨(Filson)과 렌스키(Lenski), 알렌(Allen), 잔(Zahn)은 비슷한 히브리어 문자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작은 획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타스커(Tasker)와 슈니빈트(Schniewind)와 슈바이처(Schweizer)처럼 순수히 장식적인 획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락스(Lachs)는 가장 작은 글자의 가장 작은 부분을 가리키기 위하여 ‘일점’과 연결지어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간에 예수는 여기에서 구약성경이 ‘붓 한번 살짝 움직인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조차도 모두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이 구약성경에 대한 최상의 견해이다.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새 세상에서까지도 율법의 권위와 그 효력성은 계속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24:35, 막 13:31).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 구절의 의문점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문자적 측면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셨고(12:8), 이혼(divorce)에 관한 모세의 규범을 거부하셨으며(5:31, 32), 특히 음식에 관한 규정을 무효화시키셨었다(15:11). 그렇다면 땅이 지속되는 한 율법의 한 획도, 나아가 경건한 필사자(筆寫者)가 덧붙인 수식어 중 어느 하나까지도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태는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마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율법의 어느 것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엄격한 문자적 보존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율법이 의도하는 것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며, 또한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진정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그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19절, 강해 주석과 해설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 지극히 작다 일컬음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 사이를 대조(對照)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구절은 천국 안에도 등급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11:11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곳에서는 ‘극히 작은 자’를 가리키는 말이 본 절에 사용된 단어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18:1-4). 한편 본 구절에서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자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그릇된 판단에 의해 율법을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나누어 놓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일침을 가하는 표현이다(Meyer, Westein).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위와 같이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리는 자가 천국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인정되거나 중요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천국에서 특권을 누리는데 등급(grade)이 있다거나 천국에서도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관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20:20-28, 눅 12:47, 48). 이런 구분은 그 사람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신실히 지켰는가에 따라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열심히 타인의 올바른 삶을 위해 계명을 가르쳤는가 하는 점도 기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계명’이란 모든 율법과 선지자로 지칭되는 구약성경의 계명을 가리킨다. 이같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가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계명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실천되어야 한다(율법을 구분하는데 대하여는 22:36, 23:23 주석 참조).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은 이미 17, 18절에서 규정 되었다. 율법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미리 지시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길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계시를 성취한 것이므로 천국에서 등급이 정해지는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따르고 실천(實踐)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구약이 미리 지시해 주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Carson).
20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낫지 못하면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관대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온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48절). 따라서 본문의 요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에게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음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보다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마태는 근본적으로 유일한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축소시켰다) 그들이 새로운 의 즉, 훨씬 더 포괄적인 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바리새인과 서기관(2:4, 3:7 주석 참조)은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엄격한 종교 집단의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Hill).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하고 수많은 규정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율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실추되어 성경에서 요구한 성결이라는 철저한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는 바라새인들의 의가 부인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義)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보다 한 단계, 즉 결정적인 단계를 더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에 철저히 순종했는데, 그들은 모든 세금 이외에도 정확하게 수입의 10%를 헌금했으며, 하나님의 안식일과 율법의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가장 잔인한 순교(martyrdom)를 당했으며, 또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삶이 진정 인간적인 삶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로는 진정 어떤 식으로도 비웃음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는 그들보다 더 풍성하고 우수한 의(義)가 기대되었다. 즉 제자들은 형식적 삶과 선행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우월한 하나님께 대한 내면적인 열정과 사랑과 경건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義)의 결과로서 오직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참으로 인간적 욕망을 탈피한 하나님 중심적인 의(義)가 요청되었다. 실로 그들은 사 61:3이 말하고 있는 ‘의의 나무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에서 세력이되며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 들어오게 될것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말은 천국이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며 또한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사랑)을 지키는 자, 율법을 지적으로 잘 아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자가 들어갈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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