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큐티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21절부터 32절까지의 말씀은, 산상 수훈을 가르쳐 주신 주님의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은 살인과 간음, 이혼의 경우를 들어 더 나은 의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강해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32절, 더 나은 의
21절, 강해 주석과 해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헬라어 본문은 ‘옛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되어 있다’라는 드문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즉 거의 독점적으로 성경 인용의 서두로 사용된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율법을 받은 ‘시내 산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살인한 자가 재판(裁判)을 받는다는 것은 십계명 중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세 율법에는 자주 이야기되어 있다(창 9:6, 출 21:12, 레 24:17, 민 35:16). 따라서 예수 당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율법 속에 살인을 금지하고 살인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인은 아무 생명이나 해하는 것이 모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살인을 금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상의 명령이었을 수도 있다(창 9:6). 그리고 ‘심판’, 즉 ‘크리시스’란 마을마다 있었던 재판소(신 16:18, 대하 19:5, Jos, Antig. IV, 214, Wars II, 570-71)나 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설립된 23인 평의회에서 진행되는 사법 절차를 가리키는 것이다.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께서는 율법에 깊은 이해가 있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실 때는 흔히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12:3, 5, 19:5, 21:16,42)는 말로써 당신의 뜻을 전하시곤 하셨다. 본문의 이 ‘들음’에의 환기는 그 당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의 대부분이 종교적 특권에서 제외된 평범한 백성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 일반 평민들은 회당에서 율법 교사들이 들려주고 가르쳐 주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간접 전달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요 12:34).
22절, 강해 주석과 해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성취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1인칭 주어 ‘나’(에고)를 통해 역설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단순한 문자적, 의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서 그것의 궁극적, 본질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설명하시고 계신 것이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예수는 살인의 근원은 분노(忿怒)이며, 분노도 원리상으로는 살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이 실제로 지향하는 바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살인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더 나은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은 심판(크리시스, 21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법정에서도 내면적인 분노의 사건을 다루지는 않기 때문에”(Scott)그 심판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심판이 분명하다. 한편 여기서 형제(아델포스)란 남자 형제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에서는 이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명히 혈연상의 형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언제나 예수가 사용한 말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기자인 마태가 사용한 경우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치면서(6:9) 그러한 가르침의 한 부분으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형제간에는 분노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심판이 점점 엄중(嚴重)해진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수사법은 찾아볼 수 없다(Hendriksen).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죄에도 등급이 나누어져서 점점 심한 범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형제에게 노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와 형제를 ‘라가’라고 욕하는 자가 분명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한편 형제를 모욕하면 ‘(하나님의)법정’ (’쉬네드리온’은 ‘산헤드린’을 뜻할 수도 있고<개역 성경>, 법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에 서게될 뿐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Carson).
지옥불(게엔나 투 퓌로스)
문자적으로는 ‘불붙은 게엔나’라는 이 표현은 히브리어 ‘게힌놈’(힌놈의 골짜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이방신 몰록(Moloch)과 또한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몰록 제사 의식과 관련된 장소였다(왕하 23:10, 대하 28:3, 33:6, 렘 7:31, 겔 16:20, 23:37).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이 금지한 것이었다(레 18:21). 요시야 왕이 그러한 의식을 폐지할 때에 그는 이 골짜기를 오물과 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만들어서 더러운 곳이 되게 하였다(왕하 23:10). 후기 전승에 따르면 1세기에도 이 골짜기는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이었고 연기와 불이 꽉 찬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꼴짜기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행해지는 장소를 상징하게 되었다. 지옥과 음부(11:23, 16:18)는 각각 영원한 지옥과 심판 이전의 상태에 있는 죽은 자들의 거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이 가능한 구절은 거의 없다. 두 단어가 모두 의미가 같고 ‘지옥’을 뜻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Livingstone, Jeremias).
라가(라카)
이 단어는 ‘텅빈(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레카’을 음역한 것으로서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미련한 놈(모레)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의 모욕이다. 헬라인에게는 ‘모레’가 ‘어리석다’는 의미를 갖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헬라어가 히브리어 ‘모레’을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말은 도덕적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 78:8<70인역 77:8>, 렘 5:23). 한편 혹자는(Bruce)는 이 양자의 차이에 대해 ‘라카’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뜻으로서 그 지적 수준이 아주 저급한 것을 꼬집는 말이며, ‘미련한 놈’은 ‘추악(醜惡)한 녀석’이라는 뜻으로서 그 인격과 마음이 매우 천박한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두 용어 모두 상대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안기는 욕임에 틀림없다
23절, 강해 주석과 해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 생각나거든
본문과 같은 내용의 일들은 실제 생활에서 끝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물론 이 내용의 배경은 유대인의 예배 의식에서 연유한 것(예물은 희생제물로 짐승을 사용하며, 제단은 성전안 마당에 위치함)이지만 그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에서(in presence) 엄숙하게 예배드리다가 양심에 거스리는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기의 그릇된 행위가 기억난다면(막 11:25)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체없이 화해의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 모든 것을 익히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신변을 아무런 편견없이 살피는 그 자신의 정직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형제 중 한 사람이 까닭없이 어떤 형제를 비난하며 까닭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화를 낼 가능성도 있다. 그 때는 죄책이 비난 당한 당사자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있을 것이다(Lenski). 어쨌든 하나님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사 1:10-17).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진력(盡力)해야 할것이다.
24절, 강해 주석과 해설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 예물을 드리라
‘먼저 화목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 디알라게디’은 제 2부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서 ‘화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은 적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단어로서 ‘솔선하여 화해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후에, 상호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디알라게디’보다 자주 사용되는 ‘카탈라쏘’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Lightfoot). 한편 상호간의 화해란 측면이 강조되는 이유는 ‘카타’이 아닌 ‘디아’(’둘’, ‘둘 사이’)가 접두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overtson). 실로 제의적인 것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 것(9:13, 12:7, 23:25, 26)은 마태의 기록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며 그 경향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된다(막 7:15, 16). 여하튼 본문의 ‘먼저’라는 말은 ‘화목하고’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 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더 중요하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랑과, 격의없는 화해와,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봉사 등일 것이다(25:40). 결국 구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배가 이웃들과의 관계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가 예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terms)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Schweizer).
25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너를 송사하는 자 …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본 비유에서 채무자는 전례(前例)에 따라 그의 형제에게 악을 행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채무자는 채무를 모두 변제할 때까지는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많은 채권자들은 이렇게 해결짓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눅 12:57-59) 이 상황을 응용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종말론적인 말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다. 그런 관계로 다음과 같은 말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만일 시비가 있어 법정에 갈 때에 법정 밖에서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더 이상의 화해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오직 지옥의 고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편 ‘길에 있을 때에’라는 말은 누가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도중의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은 마지막 기회’의 장(場)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급히 사화하는 것’뿐이다. 실로 인간은 어떤 일을 쉽사리 미루어버리는 게으른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 이상 더 이상 지체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형제에게 마음을 다한 ‘사화’ 곧 화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송사자’의 고소를 받은 ‘재판관’은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말 것이다.
재판관이 관예에게
여기서 ‘관예’(휘페레테스)란 배의 노를 젖는 사람을 가리키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종이나 회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중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눅 4:20조). 물론 본문에서는 재판관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일종의 형리(刑吏)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교훈은 이 관예의 손에까지 넘기우는 것을 원치 않고 어찌하든지 주어진 화해의 기회를 은혜롭게 선용하라는 데 집중된다. 한편 ‘옥’(퓔라케)은 상징적으로 지옥, 즉 ‘불붙는 게엔나’를 묘사한다(22절). 이에 대해 로마 가톨릭은 26절에 언급되고 있는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이란 문구에 집중하여 ‘퓔라케’를 연옥(purgatory)으로 말하며 이 상징된 장소에서 우리의 죄책의 빚을 갚아 버릴 길을 찾는다. 그러나 ‘퓔라케’는 연옥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심판적 공의와 완전한 상태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Lange).
26절, 강해 주석과 해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결문의 장엄한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결문은 종말적인 사건을 암시해 준다. 한편 18:34에 보면, 본 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이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비유 속에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 선고를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마지막 빚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눅 12:59에서도 이 명제는 상황이 더 계속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마태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암시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22:13, 24:51, 25:30, 46) 그는 확실히 여기에서도 심판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생각했다(Schweizer).
호리라도(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이것은 라틴어의 ‘콰드란스’(quadrans), 즉 사분의 일 앗사리온(1앗사리온은 하루 품 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의 1/16정도에 불과)이나, 두 렙돈(막 12:42)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돈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빚을 다 갚기까지 형벌을 면키 심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결코 … 하지 못하리라’는 뜻의 ‘우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더욱 강조되고 있다(Robertson).
27절, 강해 주석과 해설
간음(姦淫)치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계명(출 20:14, 신 5:18)은 유대교 문헌에서는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간음이란 남의 아내(약혼자도 해당)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는 그 행위를 모든 부녀자에게로 확대시키고 있다(28절).
28절, 강해 주석과 해설
여자를 보고 …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는 제 7계명을 다른 차원, 즉 음욕조차도 용납되지 않는 완전한 순결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제 10계명에서 이미 이러한 점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한편 ‘여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귀네’은 ‘아내’보다는 ‘여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예수는 유대 법에서 크게 문제시 하지 않는 범위까지 확대하는 철저한 도덕률을 원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율법을 무효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의도에 맞추어서 변경하는 것이다’(Davies).
음욕을 품는(에피뒤메사이)
이 단어는 과거 부정사로 사용되었으며 원형이 ‘에피뒤메오’로서 ‘갈망하다’, ‘욕망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로 ‘원하다’는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롬 1:24에서는 분명히 성적인 욕망과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본 구절, 즉 ‘여자를 보고 음욕(carnal desire)을 품는’의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텐’이라는 표현은 목적의 의미로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려고’라는 뜻이 되거나, 결과적인 의미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게 되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즉 ‘아우테스’(소유격)보다 ‘아우텐’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우텐’이라는 목적격은 부정사에 대한 지시의 목적격(즉 의미상의 주어)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음욕을 갖게끔 하려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Carson). 따라서 카슨(Carson)은 이 구절에 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는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하려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의도가 성취되며 그는 ‘그 여자’와 간음을 하고, 여자도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인하여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문제의 핵심(核心)이 여전히 음욕과 마음속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마음에(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심장을 의미한 다거나 또는 인간이 지닌 지.정.의 가운데 감정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은 ‘떨리다’, ‘두근거리다’라는 어원을 갖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외적인 행위 이전에 눈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간음에 그 중요성을 두신다(Robertson).
29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네 오른눈 … 빼어 내버리라
죄를 범하게끔 하는 신체의 부분들을 경계하라는 본구절 때문에 오리겐(Origen)과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만족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에 철저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음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우리 신체 중 우리를 범죄하게 하는 것, 특히 성적인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비난을 받았던 부분이다(민 15:39, 잠 21:4, 겔 6:9, 18, 12, 20:8). 그리고 ‘오른눈’은 가장 좋은 눈을 말한다. 한편 ‘실족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은 ‘나로 인하여 걸림돌이 되다’, ‘나로 인하여 범죄하게 하다’(18:6-9, 눅 17:2, 롬 14:21) 또는 ‘타인의 길을 방해하다’, ‘믿지 못하게 하다’(11:6, 15:12),’오해하게 하다’(17:27, 요 6:61) 등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 ‘스칸달론’은 덫을 작동시키는 ‘미끼가 달린 막대기’, 즉 멸망으로 인도하는 유혹물(enticement)또는 ‘죄짓게 하는 유혹’(temptation to sin)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실과 본문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너로 실족케 하거든’이란 오른눈이 ‘너의 전존재를 죄짓는 유혹으로 이끌거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오른눈은 유혹의 도구와 동기(動機)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음욕에 대한 것을 다루는 곳에 왜 ‘오른손’이 나오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를 들기 위한 것이거나 음욕도 도둑질의 일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자(Lachs)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이 말이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기 위한 완곡 어법이라고 한다. 즉 히브리어로 ‘야드’(’손’)가 사 57:8에서는 이러한 용법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이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어쨌든 죄를 짓는 부분을 잘라내거나 빼어 버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문자적인 것보다 상징성이 강한 교훈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은 죄의 문제를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는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다. 그러나 눈으로 인하여 더러운 것만 보게 된다면 상상력은 오염되게 될 것이다. 성적인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죄가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상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 천국의 의(義)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빌 4:8). 모든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다 똑같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28절). 그렇지 못하면 아예 멀리하고 바라보지도 말라(Scott). 실로 이같이 죄악의 시초에서든 그 과정상에 있든 일단 자신의 죄악이 자각되는 순간 어떠한 여유나 합리화도 용납치 않고 단호한 결단으로써 죄악의 본질을 근절(根絶)하고 멀리하는 것만이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지혜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는 것은 죄의 대가인 지옥 뿐이다. 이런 사실은 너무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는 여러 곳에서 이것을 되풀이 하고있다(18:8, 9).
31절, 강해 주석과 해설
또 일렀으되
이 도입 공식문은 본 장에 나오는 다른 표현들보다 짧으며, 특히 접속사 ‘데’(또)로 앞 부분과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31, 32절은 원래 대구절의 형식을 갖고는 있지만 앞에 나오는 짤막한 가르침이 내용을 더 진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이 구절은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에 관계된 이혼 법령인 신 24:1에서 확립된 조치를 요약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28절의 예수의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것, 즉 여인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정확히 가지고 있었다. 사실 모세 당시의 이혼 증서는 순전히 매사에 피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인의 지위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 보장책(安全保障策)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혼법은 차츰 남자의 손 안에서 편리한 도구가 되어갔는데, 남자들에게 일시적인 결혼을 허용하게 했고 때에 따라서는 단 하루만의 결혼도 허용함으로써 성적(性的)인 방종이 실제적으로 허용되는 악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여성은 다시 물건, 즉 남자가 버리거나 또는 취할 수 있는 남자의 소유물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류에 대한 보완으로써 바리새인 그룹 가운데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School of Shammai)는 오직 이혼 조건이 부정(不貞)과 율법적인 위반에 국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상당히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힐렐 학파(the Hillel school)는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가 있을 때에는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19:3). 물론 각 파는 여자들의 인권(人權)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같은 법조문을 만들어 내었으나 결국에는 단순히 자기네들이 내세운 법조문의 고수와 당위성 수립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힐렐보다 샴마이 학파의 견해에 더 가까운 교훈을 주셨지만 실제로는 샴마이 학파보다 더 신중하게 여자들의 인격과 권위를 옹호하셨음을 알 수 있다.
32절, 강해 주석과 해설
음행한 연고 없이 … 간음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이 도덕적으로 볼 때 간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할 뿐 아니라(27-30절) 무고(誣告)한 이혼은 간음의 가능성을 낳는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이혼한 여자의 대부분이 재혼하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특별히 초대 교회 당시의 팔레스타인 에서는 결혼이 여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쉽게 납득이 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이혼당한 여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간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편본문의 ‘음행한 연고 없이’란 다른 말로 ‘부정한 일을 저지른 확실한 사실이 없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막 10:2-12, 눅 16:18) 따르면 본 조건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혹자는(McNail, De Wette, Bruce 등) 이 부분을 초대 교회 당시의 복잡한 교회내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후기 편집자의 첨가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비평적 입장이고 이 주장이 19:8, 9의 교훈과 그 맥(脈)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분명 예수의 직접적인 교훈이라 확신할 수 있다. 한편 본 조건문을 역으로 이해하게 되면 ‘음행’(포르네이아)을 한 자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결혼을 파기할 수 있다는 묵시적 교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기독교 윤리(基督敎 倫理)의 한 단계 더 높은 요구를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Meyer),즉 예수께서는 당시 인습적으로 이혼의 권한을 거의 전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편들이 보호받아 마땅한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는 큰 사랑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이다(Augustine). 즉 예수께서는 당시 샴마이 학파의 가르침보다 더 초월적이고 고급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셨던 것이다.
버리면(아폴뤼온)
‘가게하다’, ‘이혼하다’의 현재 분사로 한 번 이혼한 후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 평생 버려두는, 그리하여 그 이혼당한 여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재혼(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간음죄에 해당)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유기(遺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간음하게 함이요(모이큐데나이)
이는 좀더 육체적이고 적극적인 죄악의 면모를 나타내는 ‘포르네이아’ 보다 약한 뜻으로 어떤 법규정을 위반 했다는 일반적인 범법 행위로서의 간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로 보건대 이혼당하여 다시 재혼함으로써 간음하는 여인의 허물보다 고의적으로 아내를 버린 남편의 죄과(罪過)가 더욱 크고 심대(甚大)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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