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본문인 민수기 6장 13절부터 27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나실인의 서원이 끝날 때의 규정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축복 기도를 통하여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민수기 6장 13절-27절, 복 주시는 하나님
13절, 주석과 해설
회막 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회막’은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서 서원 기간을 채운 자가 회막 문에 가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하나님께 구별된 자의 처음(10절)과 나중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므로 서원 기간을 채운 나실인이 회막 문에 선 것은 곧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시작과 과정과 결말이 하나님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고백하는 신앙 행위라 할 수 있다(롬 11:36).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헌신코자 결심하는 자는 무엇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의식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회막 문으로’라는 말은 ‘하나님 앞’이라는 의미 외에 ‘이스라엘 온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라는 의미도 지닌다. 즉 나실인이 서원 기간을 채운 후 회막 문에서 각종 의식을 행하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의무 기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알리기 위해서이다. 즉 이런 공개적 행사를 통해 지금까지 제한된 이웃과의 교제 관계를 청산하고, 서원 전의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렸다.
14절, 주석과 해설
헌물을 드리되
여기서 ‘헌물’(히, 코르반)이란 ‘가까이 가져오다’, ‘준비하다’, ‘제공하다’는 뜻의 ‘카라브’에서 유래한 말로써 곧 여호와께 나아가는 자가 드릴 ‘봉헌물’, ‘희생 예물’을 뜻한다(레 1:2).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나아오는 자에게 결코 ‘빈 손’으로 나오지 말 것을 명하신 바 있다(출 23:15). 이는 당신이 물질적으로 빈핍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을 만나러 오는 자로 하여금 그 은혜를 감사케 함으로써 당신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려는 목적으로 요구하신 것이다. 사실 예물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마 6:21). 한편 본문에서는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번제물
나실인이 정한 기간을 채움으로써 서원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헌신의 삶을 살아갈 것을 고백하는 표의 예물이다(레 1:1-17).
속죄제물
헌신 기간 동안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지은 죄와 자신의 부족한 삶 전체를 고백하며 속죄의 은총을 바라고 드리는 제사 제물이다(레 4:1-5:13). 사실 나실인의 생활이란 절대 무흠이 요구되는 것이었으나, 그 서원을 마치는 날 이처럼 죄를 속하는 제사가 요구된 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 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롬 3:10).
화목제물
헌신 기간 동안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계속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여 드리는 제사 예물이다(레 7:11-36).
15절, 주석과 해설
소제물
이 제물은 화목제물과 함께 드려졌는데, 서원 기간 동안 헌신과 봉사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물이었다(레 2:1-16). 그리고 이 소제물과 더불어 전제물이 드려졌다. 전제물이란 전제(奠祭)의 방식으로 드리는 예물로서 곧 포도주나 기름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전제물은 단독으로 드릴 수 없었고, 보통 번제, 화목제, 소제물 등과 더불어 드려졌다(레 23:13). 소제(meal offering)와 전제(drink offering)로 바쳐질 제물을 열거한 15절의 내용을 보다 쉽게 번역한 공동번역에는 “또 고운 밀가루를 기름에 반죽하여 누룩 없이 과자 모양으로 만든 것과 기름을 발라 누룩이 없이 만든 속 빈 과자 한 바구니를 곡식 예물과 제주(祭酒)와 함께 가져가 바친다”로 되어 있다. 이 모두는 여호와께 대한 감사의 표로써 드리는 일종의 감사 제물이다(레 7:12).
16절, 주석과 해설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번제보다 속죄제가 순서상 먼저 드려졌다(11절).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헌신과 감사 이전에 가장 먼저 요구되어지는 것이 바로 죄를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 있는 인간과 결코 교제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기에 앞서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17절, 주석과 해설
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엄밀히 구분하면 여기서 ‘소제’는 제사의 한 종류이고, ‘전제’는 제사 드리는 한 방법이다. 즉 전제는 제물을 ‘부어서’ 드리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예물로서는 주로 기름이나 포도주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제사 종류와 제사 방법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혼용하고 있다. 한편, 이 소제와 전제는 단독으로는 거의 드리지 않았고, 대부분 번제 또는 화목제와 더불어 드렸다.
18절, 주석과 해설
머리털을 밀고
서원한 기간이 종료된 나실인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5절)와 각종 헌신에 대한 의무가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표시로써 머리털을 밀었다. 물론 그가 머리털을 밀었다고 해서 이제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치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생활 전체를 드리는 나실인의 까다로운 규제에서 벗어나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감을 가리키는 것이다.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감사와 교제로 상징되는 화목제물 불에 그동안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신이 특별히 구별되었음을 표시하는 긴 머리를 태우는 것은 서원 기간 동안의 구별된 삶 전체와 그 삶을 가능케 했던 사실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동시에 그 동안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께 가납되었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후부터 하나님과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원도 담겨 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람의 삶 전체는 항상 ‘하나님께 영광’과 ‘하나님과 화목’이라는 대명제 아래에 있다(고전 10:31).
19절, 주석과 해설
삶은 숫양의 어깨 …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
나실인의 서원을 마무리 하는 최종적인 제사로서 제사장은 화목제 예물(흠 없는 숫양 한 마리, 14절) 중 숫양의 삶은 어깨 부위와 소제 예물(무교병 한 광주리와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 15절) 중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레 2:4 주석 참조)를 취해 ‘요제’(搖祭, a wave offering)로 드려야 했다. 그리고 요제로 드린 이 예물들은 이미 화목제로 드린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레 7:34 주석 참조)와 함께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졌다. 이처럼 나실인의 서원 종료 예물을 제사장이 취한 것은 그 나실인의 삶이 앞으로도 계속 제사장의 구별된 삶으로 이어져 그 속에서 하나님과 친교와 화목의 상태를 유지하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축복이었다(Keil & Delitzsch).
20절, 주석과 해설
여호와 앞에 요제로
‘요제’는 화목제 희생제물의 가슴 및 곡식단과 첫이삭의 떡(본문에서는 무교병과 무교전병, 레 7:12) 등을 앞 뒤로 흔들어 드리는 제사 방법이다.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 ‘가슴과 넓적다리’는 이미 화목제물 중 제사장의 것으로 구별된 것이다(레 7:30-34). 한편 요제로 드려질 제물(19절)은 먼저 그것을 드리는 나실인의 손 위에 올려지며, 다음으로 제사장이 제물을 든 나실인의 손을 받쳐들고 흔들므로써 제사가 진행된다. 이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고 상징한다. (1) 나실인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받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2) 제물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다시 거두어 들이는 이 행동은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을 다시 제사장이 하나님께부터 받는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3) 나실인이 바친 풍성한 예물이 하나님의 대변자인 제사장들에게 돌려져 그들의 음식이 되게 한 것은 나실인이 하나님과 거룩하고도 풍성한 교제를 나누게 되었음을 상징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봉사를 마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이처럼 구약 시대에 나실인이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교제를 나누는 이러한 간접적인 헌상(獻上)과 교제는, 이제 신약 시대에 영적 나실인 된 우리 성도들에게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직접적인 봉헌과 교제를 이룰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은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는 날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이다(계 21:1-4).
그 후에는 … 마실 수 있느니라
나실인이 나실인으로서의 기간 동안에는 엄격히 금지된 포도주를 마시는 이 의식은 하나님께서 나실인의 서원 종료 제사를 열납하셨음과 그의 헌신 기간이 완전히 종료되었음을 확증하는 표시이다.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때 나실인이 마셨던 포도주는 희생제물과 더불어 드려졌던 전제물(15절)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Keil, Winterbotham).
21절, 주석과 해설
이외에도 힘이 미치는대로
즉 나실인의 법(13-20절)에 지정된 것 외에 나실인이 마음의 감동을 받은 대로 하나님께 특별 예물을 드려도 좋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은 의무제가 아닌 ‘자원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힘이 미치는 대로’란 곧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1) 인간의 형편과 처지를 깊이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성품을 반영한 것이며, (2) 감사하는 마음과 자원하는 심령에 의해 드려진 예물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출 36:3). 하나님은 예물보다 그것을 드리는 인간의 마음을 더욱 감찰하신다(삼상 15:22). (3) 당신께 드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억제시키거나 금지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교훈한다. 한편 이 조항으로 인해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자가 ‘나실인의 법’을 수행할 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동료들이 자원제의 제물을 대신 내어주는 관례가 생겨났다고 한다(Josephus, 행 21:24).
서원한대로 … 따라 할 것이니라
이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약속한 것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서원’이 지니는 필수 이행성을 강조한 표현으로써, 비록 서원한 것이 서원자에게 해로울지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서원의 대전제 조건이다(시 15:4).
22절, 주석과 해설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는 축도는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자 선지자인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 축도는 오직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구약 시대의 모세와 아론의 역할을 홀로 온전히 감당하는 거룩한 자가 나타났으니, 그는 곧 우리의 영원한 왕이자 선지지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영적 이스라엘 백성 된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 선언을 받아 누릴 수 있다.
23절, 주석과 해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축복을 전달할 자로 당신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인 제사장을 선택하시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아래 언급된(24-26절) 축복을 선언할 권한은 오직 아론과 그 아들들, 곧 제사장들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그 축복은 제사장 스스로의 권위에 기초하지 않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제사장은 축복의 내용을 선언할 때마다 ‘여호와는’이란 말을 전제한 후 각종 축언을 베풀어야 했다. 따라서 제사장들의 축복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임하신 그 특별한 권위에 전적 의존하고, 나아가 그 권위로 말미암아 그 축복의 내용이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후일 유대 랍비들은 다음과 같은 경고를 백성들에게 들려 주고 있다고 한다. 즉 ‘당신은 행여 이 초라한 제사장이 나에게 무슨 축복을 베풀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에게 복을 주시는 자는 그 제사장이 아니라, 그 제사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축복하여
‘축복하다’(히, 바라크)라는 말은 ‘하나님을 송축하다’, ‘무릎을 꿇다’, ‘은혜로 복 주다’, ‘풍성하게 하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로 신적인 복의 선포와 그 선포가 지니는 긍정적이고 풍성한 영향력을 묘사한다. 물론 신(神)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채 개인이나 공동체에 ‘축복’이 선포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인간을 복(福)되게 하는 근원이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그 모두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 아래 놓인다. 한편 이 말의 용례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善)을 베푸심으로써 그들에게 제공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와 풍성함을 가리킬 때(신 7:12-16)와 (2)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 자가 타인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고자 할 때 기원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창 14:19). 본문에서는 위의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다.
24절, 주석과 해설
24-26절
성경에 나오는 축도 중 가장 짜임새 있고 아름다운 내용으로 채워진 축복 선언이다. 이 메시지는 여기 담긴 축복을 전하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심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며, 한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자에게는 보호와 은혜와 평강의 축복이 계속적으로 제공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랑게(Lange)는 첫 번째 축복이 이스라엘 개개인들을 향한 일반적인 축복이며(24절), 두 번째는 그들에게 죄를 도말하시고 구속의 은혜를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며(25절), 세 번째는 그들에게 평강을 주시어 당신의 이름이 높이 빛날 수 있도록 간구하는 내용(26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루터(Luther)는 첫 번째 축복은 영적인 삶과 행복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는 영적인 삶과 영혼에 관한 것, 세 번째는 영육간의 모든 축복을 포함하는 것으로 사탄의 권세에 대한 최후 승리를 간구하는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고 하였다. 즉 그의 말씀의 빛이 우리를 비추어 모든 역경과 두려움, 절망과 죄의 유혹 등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넘치게 해주시기를 비는 축복의 기도문이라는 것이다(Keil & Delitzsch). 또한 델리치(Delitzsch)는 이 세 가지 축복을 다른 차원에서 보았다. 즉 그 각각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시켜 첫째가 성부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 둘째가 성자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 셋째가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것으로 나누었다. 매튜헨리도 본 축도문에 세 번 나오는 ‘여호와’란 명칭이 삼위 하나님 각각의 위(位)를 나타낸다고 봄으로써 델리취의 견해와 뜻을 같이 했다.
여호와는
본 축도문(24-26절)에 이 말이 세 번 언급된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은 바로 ‘여호와’라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축도문의 시적(詩的) 운율상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구속사적으로 볼 때 본 축도문에 ‘여호와’란 명칭이 세 번 언급된 것은 (비록 그것이 당시대의 모세와 아론 및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가리워져 있었을지라도) 분명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음에 틀림없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그런 점에서 혹자들은 본 축도문에 나오는 ‘여호와’란 신 명칭의 악센트가 각기 달랐다고 한다(Mattthew Henry’s Commentary).
복을 주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건국자이시자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계약자로서 그들에게 ‘복’(히, 베라카), 곧 현세적이고 내세적인 모든 복을 주시기 원하셨다. 그러므로 이 ‘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과 지혜로 볼 수 있으며(시 16편), 또한 물질적인 번영과 많은 자녀 및 건강과 장수 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창 24:1, 시 127:3). 이처럼 하나님은 선택하시고 부르신 당신의 백성의 필요를 따라 아낌없이 풍성한 영육간의 복을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진정 복의 근원이시다.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기서 ‘지키다’(히, 솨마르)는 말은 원래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의미가 발전하여 ‘세심하고도 철저한 보호와 보존’, ‘주의 깊이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짐’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보호(시 37:28)뿐 아니라 가난과 재앙과 각종 질병 및 전쟁으로부터의 보존(시 33:19, 76:3)까지를 의미한다. 사실 향후 죽음의 땅 광야를 행진해야 하며 사나운 이방 세력과 부딪쳐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실제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목적으로 광야 같은 세상을 행진해 가야 하는 우리에게도 간절히 요청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없이는 이 세상에서 한시라도 안전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다.
25절, 주석과 해설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이란 표현은 그분의 ‘성품’과 전인격을 상징하는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rmophism)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가리우거나 감춘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절망과 죽음을 의미한다(레 17:10, 신 31:17-18, 욥 13:24, 욜 2:6). 반면에 그분의 ‘얼굴’이 한 개인 또는 어떤 공동체를 향하여 돌려진다는 것은 바로 생명과 구원과 희열이 그 위에 찬란히 비췬다는 것을 의미한다(Keil, Baumgarten, Pulpit Commentary, 시 27:1, 44:3, 잠 16:15).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 방향은 곧 인간 생존의 열쇠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간직한 채 지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당신의 그 사랑과 은혜와 보호와 평강의 얼굴을 항상 돌리시겠다고 축복하고 계신다. 한편 본문의 ‘비추다’(히, 오르)는 ‘영광스러운’(glorious)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는 말로써, 곧 당신의 영광스러운 광채가 연약하고 보잘것 없는 인간에게로 향하였음을 의미한다. 실로 캄캄한 곳에서는 미미한 촛불 하나가 매우 값진 역할을 감당하는데, 하물며 의와 영광의 태양이신 하나님께서 어둡고 지친 우리 영혼에 찬란한 빛을 비추시는데 어찌 벅찬 감격과 생의 희열이 솟아나지 않겠는가!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당신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다. 여기서 ‘은혜’(히, 하난)란 본래 ‘구부리다’, ‘아랫 사람에게 몸을 굽히다’는 의미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은혜를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량 없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이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 ‘은혜’로 말미암아 살았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엡 2:4-5).
26절, 주석과 해설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여기서 ‘향하여 든다’(히, 나사)는 말은 ‘받아 들이다’, ‘열망하다’, ‘공급하다’는 뜻을 지닌 말로써 곧 ‘열정적으로 바라보다’, ‘계속해서 주시하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베푸심’을 가리킨다. 이것은 25절의 ‘비추사’란 말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묘사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귀중한 대상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주의깊게 계속 주시함을 뜻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된 자는 하나님의 그러한 돌보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그 어떤 위협과 도전도 능히 극복할 수 있으며 아울러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롬 8:31-39).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평강’(히, 샬롬)은 ‘안전’, ‘행복’, ‘건강’, ‘번창’, ‘평안’, ‘우정’ 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불화)이 없는 상태’, 곧 적막한 평화를 의미하지 않고, 기쁨과 생(生)의 환희가 샘 솟듯 솟아 오르는 역동적인 평화를 가리킨다(사 55:12).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평강’은 모든 기쁨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곧 하나님의 축복의 최고 절정을 이루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선포한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평화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죄와 불의를 멸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억제할 수 없는 참 평강을 맛보게 하셨다(사 52:7, 53:5, 행 10:36, 골 1:20).
27절, 주석과 해설
내 이름으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대변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을 명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전 의지와 인격을 내걸고 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내 이름’이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 주셨을 뿐 아니라(출 3:14). 축복 선언(24-26절) 중에도 거듭 언급하셨던 ‘여호와’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렇게 절대 거룩한 당신의 이름을 전제하여 제사장들로 하여금 축복을 선언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전 인격과 명예를 걸고 그 축복 내용을 그 백성에게 반드시 이루실 것을 표명하셨다. 또한 이것은 오직 당신의 이름에 의해서 그 축복이 선포될 때만이 그 속에 담겨진 내용이 유효하게 작용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정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빠진 축복은 공허한 주문(呪文)에 불과하다.
내가 … 복을 주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유일한 복의 주체자가 되심을 분명히 선언한다. 즉 비록 제사장에 의해 축복이 선포되지만, 진정한 선포자요 수여자(授與者)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 축복은 가장 완전하며 또한 모든 이들에게 진정으로 유익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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