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본문인 마태복음 8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은, 산상수훈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찾아 다니시며 그들을 고쳐 주신 내용입니다. 어그러진 이들이 온전하게 되는 회복의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나타냄을 주석과 해설을 통하여 확인하였습니다.
마태복음 8장 1절-13절, 하나님 나라의 원형이 드러나다
1절, 강해 주석과 해설
산에서 내려 오시니
이말은 5:1의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란 어구와 대칭을 이루는 구절이다. 5:1 및 8:5과 연결 시켜 볼 때 예수께서는 유대 산악 지방에서 이제 12제자 임명 및 산악 지방에서의 다소 긴 제자 훈련 기간을 마치시고 다시 일반 백성들 속에서의 사역을 위하여 갈릴리 호수 근처의 낮은 지방으로 내려오셨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의 전도 여행을 잠시 멈추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심신(心身)을 쉬시는 동시에 집중적으로 제자를 훈련시키는 장면은 이 경우 외에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몇번 더 시행되었다(10:5-42, 13:11-32 등).
허다한 무리
이 말은 5:1의 ‘무리’나 7:28의 ‘무리’보다 숫자가 더 많은 무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5:1과 7:28의 ‘무리란 말, ‘오클로이’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어 그 의미가 한정되어 있는 반면, 본문의 ‘허다한 무리’란 말인 ‘오클로이 폴로이’에는 관사가 사용 되지 않아 그 숫자가 한정되지 않은 불특정 다수란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산상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 그의 소문이 각지로 퍼져나가서,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그의 교훈을 듣고자 그에게로 모여 들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절, 강해 주석과 해설
강해
이 구절은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새로운 어떤 사실을 도입하고자 할때 주로 사용되는 (카이 이두-and behold, 그리고 보라) 말로 시작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이 말은 여러가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1) 특별한 의미없이 영어의 ‘there is(was)’나 ‘here is(was)’ 등과 같은 도입사로 쓰인다.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카이 이두 포네 에크 톤 우라논,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있었다).12:10, ‘사람이 있는 지라’(카이 이두 안드로포스). (2) 어떤 예화나 비유를 소개하고자 할때 ‘가라사대’란 말 다음에 소개될 내용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쓰인다.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이두) 씨를 뿌리는 자가 ‘. 여기서도 가라사대 다음에 쓰인’이두’(’I대문자로 쓰이고 있음)는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되지 않고 있다. (3) 본문처럼 새로운 사건을 도입하면서 특별히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할 때 이 말이쓰인다. 4:11’(카이 이두) 천사들이 나아와서 ‘(카이 이두 앙겔로이 프로셀돈, 그리고 보라 천사들이 나아왔다’). (4) 특별한 주의를 요할때, ‘갑자기’나 ‘홀연히’란 의미로 이 말이 쓰인다. 17:5,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이두 네펠레 포테이네 에페스키아센 아누투스). 아무튼 본문의 ‘카이 이두’는 이제 이야기의 한 단락이 끝나고 새로운 이야기로 진입되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설교를 마치고 하산(下山)하신 후 새로운 사건과 조우(遭遇)함으로써 예수생애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는 점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 나병으로 표현된 병이 병리학(patholge)적으로 실제 나병(leprosy)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나병을 위시한 제반의 피부병을 일컫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레 13, 14장). 여하튼 유대인들은 제사장의 판정(判定)에 따라 나병이라 지목된 자를 몹시 꺼려했다. 왜냐하면 나병 자체가 혐오스러운 것이기도 했거니와 나병 환자와의 접촉 자체를 의식적으로 불결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나병은 죄의 악함과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discipline)을 상징하는 것으로(미 12:10, 12, 욥 18:13) 나병 환자는 종교적 위생적 관점에서 일반 대중과 철저히 분리되어 특정 장소에 격리되어 있어야 앴다(레 13:45, 46). 만약 이를 어긴 경우 그 나병 환자는 심한 제재 조치나 돌에 맞아 죽는 수모(受侮)를 감수 해야 했다. 따라서 이 사실을 고려할 때 본문의이 나병 환자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 그자체가 이미 파격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한편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온갖 죄악된 성품을 다 지니고 있는 인간은 모두가 다 영적인 나병 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습(convention)과 억압을 깨치고 예수께 나아온 사실에서 우리는 세속의 모든 욕망과 죄의 사슬을 깨치고 과감히 예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임을 배울 수 있어야 하겠다.
절하고
‘무릎을 꿇는다’는 뜻을 지닌 이 말은 본서에 여러 번 언급된 용어로서(2:2, 8, 11:, 4:9, 10, 9:18, 14:33) 상대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의 외적 표현으로간주되었다. 특히 본문에서는 행동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행동의 이면(background)에 담겨진 나병 환자의 적극적 겸손이 강조되었다. 결국 이런 모습은 그가 예수의 절대적 치유성을 확신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주여
당시 유대인들은 현자(賢者)나 율법학자를 높여 부를 때 주로 랍비(rabbi)란 말을 사용하였다. 반면 본문에 사용된 ‘주여’(K퀴리에)란 말은 종이 주인에게 또는 독립된 집단 내에서 하급자가 상급자를 부를 때 사용한 존칭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이 나병 환자가 랍비라는 칭호가 아니라 ‘주여’란 칭호를 사용한 것은 예수를 학자나 설교가로서가 아니라 능력과 위엄을 갖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자신의 주인으로 믿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는 그 뒤에 계속되는 나병 환자의 요청이 선한 가르침을 달라는 것임을 살펴보면 더 명확히 드러난다.
원하시면
이 말은 예수에게는 자신의 병을 고칠 능력은 분명히 있는데 다만 고쳐줄 의사(意思)가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일 뿐이라는 나병 환자의 강한 믿음을 반영하고있다. 실제로, 한 인격적 주체가 어떤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일을 성취하려는 강한 의지와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동시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나병 환자는 예수의 객관적 능력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능력을 자신에게 베푸셔서 자기를 고쳐주겠느냐고 그는 물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3절의 ‘내가 원하노니’란 어구에서 발견한다. 즉 예수께서는 그에게 은혜 베푸실 의지가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고백과 동시에 요청이다. 왜냐하면 나병은 그 치료가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며(왕하 5:7, 14), 오직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만이 고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인 것이다(10:8, 11:5).
3절, 강해 주석과 해설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구약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와 접촉한 자는 나병 환자가 상징하는 죄성(罪性)에 오염된 것으로 간주되어 의식법상 똑같이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다(레 11:40, 13:46). 율법대로라면 예수는 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심으로써 부정한 자가 된 것이라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의 완성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이다. 즉, 그는 율법에 갇혀있지 않고 율법을 지배하신다. 더욱이 구약의 제사장들이 나병 환자의 치유 여부를 판별할 때 그에게 접촉해도 부정하지 않았듯이(레13:2-8) 예수께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셔도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지 않게 된 것은 그분이 곧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심을 증명해 주는한 증거라 할 수 있다. 한편 예수는 부정한 자에게 ‘대심으로’ 부정해진 것이 아니라역(逆)으로 부정한 자가 주님의 ‘대심으로’ 정(淨)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손을 내밀어’란 본문의 표현을 능력 행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는데(J.D. Kingsbury) 이는 잘못 이해한 해석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손을 펴신다’는 말이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긴 하지만 여기서 예수께서 손을 내미신 것은 실제 병자를 만지기 위함인 것으로서 상징적 표현이 아니며 또한 구약의 경우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는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 역시 아닌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부연코저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말씀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성경 말씀에 기록된 사건을 사실 그대로 이해해야지 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의 메시지를 방해받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노니
2절의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나병 환자의 믿음에 찬 간구에 대한 신적 권위 해석의 답변이다. 이는 결굴 당신이 원하시면, 즉 병을 고쳐주시겠다고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권세와 능력의 말씀이다.
깨끗함을 받으라
이는 육체적 치유와 더불어 의식적 정결까지를 포함한(나병 판별을 맡은 제사장으로서) 완벽한 치유를 뜻한다(Westcott).
즉시 깨끗하여진지라
치유(healing) 선언과 동시에 일어난 결과이다. 이는 예수의 말씀이 지닌 권위와 능력의 초월성을 입증해준다. 실로 예수는 손(죄인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상징)과 말씀(어떠한 장애도 극복 치유시키는 능력)으로 한 생명을 새롭게 탄생 시키신 것이다.
4절, 강해 주석과 해설
삼가 이르지 말고
공관복음서에서 수차 거듭되는 예수의 함구령(12:16, 16:20, 17:9, 막 3:12, 눅 8:56) 중의 하나로서 마태복음에서는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같은 명령을 내리신 이유에 대해 (1) 이적에 따른 허황된 소문이나 백성들의 그릇된 신앙관을 방지하시기 위해, (2) 치유받은 자의 교만을 예방키 위해, (3) 유대인,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견제와 시기를 받고 이로 인해 복음 전파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Plummer) 등이 있다. 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허다한 무리가 목격하는 가운데(1절) 이적을 베푸셨기 때문에 당신의 소문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을 의향(意向)은 없으셨다. 단지 예수께서는 그 치유받은 자가 율법의 예를 따라 제사장에게 나아가기 전에 미리 이적(miracle)의 소문이 전파됨으로써 나타날 제사장의 편견어린 판결을 의식하셨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반대하는 제사장들이 편견없는 순수한 의식으로 그 치유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그 치료받은 자가 함구령을 무시함으로써 그후로 복음 전파에 많은 장애를 맞이하게 된다(막 1:45).
모세의 명한 예물
바로 앞의 구절에서 예수는 율법의 소극적 조항을 적극적으로 극복하셨지만 그것은 율법을 부정하고 파괴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즉 여기서 보듯이 레 13:4-17의 나병 규례에 따를 것을 당부하심으로써 예수는 율법을 이기고 극복하시지만 율법을 파괴하려는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고 완성하는 방법을 택하시고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5:17). 한편 나병 환자의 정결 절차는 (1) 신적 권위자인 제사장의 판결을 받고 (레 13:16, 17), (2) 정결의 선언이 주어지면 산새 두 마리와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헌상하고(레 14:4), (3) 8일 후 흠없는 어린 숫양 둘과 암양 하나를 바쳐야 했다(레 14:8). 물론 이런 의식법상의 규례는 예수의 운명시에, 구약의 모든 의식 규례를 집약적(集約的)으로 상징하고 있는 성전 휘장(揮帳)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성도는 구약 의식의 그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게 되었으나 그 내용은 존중 해야 하는 것이다(히 10:14-18).
저희에게 증거하라
나병 환자가 율법 의식에 따라 완치(完治)된 사실을 확증함으로써 율법을 통해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인증하게 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율법은 예수께서 원하기만 하면 어떤 질병도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도구의 역할, 곧 예수의 권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5절, 강해 주석과 해설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4:13에 이어 예수 선교의 중추지였던 가버나움이 두 번째 언급되고 있다. 이는 결국 4:13에 언급된 1차 갈릴리 사역이 5-7장에 언급된 산상수훈으로 중단되고 제 2차 갈릴리 사역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당시 가버나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서 로마의 군단급(1군단은 700명의 기병을 포함한 3000-6000명의 보병으로 구성)은 아니지만 팔레스타인의 분부왕 헤롯 안디바의 보조 부대가 주둔(stationing)했던 곳이었다. 팔레스타인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는 타국에서 징집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비유대계열, 여기서는 사마리아 정도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Pulpit Commentary), 레바논 또는 시리아와 같은 이방 지역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쨔든 그들은 이방인들임에 틀림없다.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가버나움이 헤롯의 관활지에 있던 것으로 보아 이 백부장은 이방 출신으로서 아마 헤롯의 용병(傭兵)이었던 것 같다(Bruce). 여기서 백부장은 수하에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중급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건을 좀더 자세히 언급하면서(눅 7:2-10) 이 사람이 유대인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6절, 강해 주석과 해설
주여
예수를 향한 백부장의 돈독한 믿음과 존경심을 나타내는 말이다(7:21 참조).
내 하인이(팡스)
아들 또는 하인에 해당하는 ‘파이스’란 헬라어는 신약성경 중에 약 24회 등장한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계급이나 신분상 수하에 있는 자, 또는 피지배인을 가리키고 있는데 여기서도 하인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 백부장은 자신의 부모, 혈육이나 상전(上典)이 아닌 일단 무시해도 좋은 자를 위해 굳이 와서 간구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 하인은 당시 사회 구조상 천민이었으나 백부장과는 특별한 우정이나 애정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쨔든 자신의 수하 친병(親兵)을 위하여 체면과 만사를 제쳐두고 이처럼 간청하고 있는 이 백부장의 인간성(humanyty)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어쩌면 그가 이처럼 자상한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는 로마인이면서도 유대인인 예수에 대하여 선입관을 갖지 않고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중풍병이란 말은 신체의 전체나 일부 또는 얼굴이나 기타 부위에 일어나는 마비 증상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매우 다양하고 또 현대에 이르러서도 완전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대표적 원인으로는 역시 뇌졸증을 들 수 있다. 뇌졸증이란 뇌의 작은 동맥들이 파열되어 뇌 속에서 출혈이 일어나는 경우, 또는 뇌 속에서 혼탁한 핏덩어리가 뭉쳐져서 혈액의 순환이 막히는 경우, 발작이 일어나고 혼수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발작과 혼수상태가 발생되는 경우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며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후에라도 반신불수등에 빠지게 된다. 물론 뇌졸증 이외의 원인으로 생긴 마비 증세도 중풍병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쨌든 이 중풍병은 나병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병보다 훠씬 광범위하게 일어난 병으로서 이 또한 그 당시에는 기적이 아니면 고치지 못하는 병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7절, 강해 주석과 해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에고 엘돈 데라퓨소 아우톤)
‘고쳐 주리라’의 원어 ‘데라퓨소’는 개역 성경대로 미래 서술문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가 가서 고쳐주랴 ?’라는 뜻의 의문문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헬라어에서는 동사가 주어의 인칭과 수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흔히 인칭 대명사 주어가 생략되며 또 이것이 생략되더라도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지만 본문에는 주어인 1인칭 단수 대명사 ‘에고’이 특별히 쓰이고 있다. 즉 본문에서는 주어인 ‘내가’란 말이 강조된 것이다. 어쨔든 예수의 치유 기적 장면을 보면 주로 병자들이 예수께 찾아오거나 예수의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 하여 치유되었지 예수께서 직접 병자를 찾아가시겠다고 제안한 것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예수는 여기서 굳이 가시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여기 백부장은 헤롯 용병으로서 그의 혈통적 배경은 로마인이 아닌 다른 이방인일 수 있다. 심지어는 유대인 출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단 로마 식민 체제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로마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 당시 피지배자인 유대인은 점령자인 로마인을 착취자 내지 종교적 이방인으로서 경멸하였고 또 로마인은 유대인을 편협하고 위험한 피지배자로 멸시하였다. 예수는 이런 벽을, 즉 상대적인 편견과 증오의 벽을 절대적인 사랑과 정의로써 허물어 버리려고 한 것이다. 동시에 예수는 자신의 구원 사역이 유대인을 넘어 세계 만민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설사 예수가 병자에게 가시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예수는 이상의 방법을 동원해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보이셨던 것이다.
8절, 강해 주석과 해설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예수는 침례 요한에게 침례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이때 요한은 자신이 예수께 침례 베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어떤 이들은 백부장의 이 같은 겸손한 행위를 예수는 유대인이고 자신은 이방인이라는 민족 차별적 통념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나 만약 이러한 이유에서였다면 이 백부장은 예수께 이런 요청 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치가 않다. 또한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감당치 못하다’란 어구의 원어인 ‘우크 하키노스’은 영적, 도덕적 충족성이 몹시도 결여됨을 고백한 말로서(3:11) 어떤 권위있는 대상에 대하여 인간이 스스로의 무가치함을 느낄때 사용된다. 이는 분명 자신의 죄악됨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성을 인지(recognition)했음을 반영하는 진술로서 백부장의 겸손한 심정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겸손한 영혼에게 주의 다함 없는 은혜가 필시 수여될 것이다(시 147:6).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 백부장은 분명 예수의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그의 요구는 그가 예수를 전능한 절대자로 믿었음을 증명해 준다. 사실 예수께서 병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말씀으로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는 기록은 요 4:46-53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경우였기에 백부장의 믿음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한편 만약 그가 예수를 어떤 비상(非常)한 의사로 생각했다면 특효약이나 손을 만지는 등의 치료 요법을 요청했을 것이고 또 능력있는 종교 지도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기도나 안수등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씀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은 때문이며 이것은 그가 예수께 대해 신적 메시아임을 고백한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9절, 강해 주석과 해설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안드로포스 휘포 여수시안)
이것은 권세(여수시안) 아래에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여기서 권세란 것은 로마 황제의 권한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국가에 속한자란 모두 국가 권세의 정점(頂點)인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국가 질서 체계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군인으로서 황제로부터 권한의 일부를 위임받아 자기 수하에 백명의 부하를 이끌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이같은 명령체계와 그 개념은 너무도 명확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국가 체계라는 인위적 차원에서의 상급자와 그 하급자 사이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질병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자연 세계에 적용시킨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는 결국 백부장이 예수를 인본주의적 통치자인 황제 이상의 존재, 즉 자연과 우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신본주의적 통치자로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세계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 본 백부장의 신앙의 지혜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 하겠다.
10절, 강해 주석과 해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기이히 여기다’란 말의 헬라어는 ‘다우마조’으로서 본문에는 단순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 ‘감탄하다’ 등르로 번역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모든 사건을 지배하시는 결코 놀라지 않으실 신(神)이신 동시에, 한편으로는 놀라는 감정적 성정을 지니신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Calvin). 즉 예수가 지닌 신적인 전지성(全知性) 마저도 그분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제어하지 않았던 것이다(Homer A. Kent, Jr.). 한편 본문에는 백부장의 탁월한 믿음에 대해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셨던 반면 막 6:6에는 예수께서 고향에 가셔서 권능을 행하고 병자도 고치셨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신 기록이 있다. 물론 예수께는 신앙과 불신앙 모두가 무관심이 아닌 일종의 경건한 경이의 대상이 되고있는 것이다(Bengel). 예수께서는 당신과 접촉한 모든 이에게 특별한 관심(부정적이든, 긍적적이든)을 가지고 계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어구는 다음에 대단히 주요한 내용을 말씀하시고자 할 때 흔히 사용되던 말이다(5:18).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메시아로 계시하고 있는 구약적 배경을 거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어떤 유대인들보다 예수의 인격과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여태까지 만나 본 유대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말씀만으로도 병이 낫겠다고 고백한 사람은 없었다. 한편 마태는 이 백부장의 위대한 신앙을 누가 보다도 더욱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 전파의 대상이 유대인들에게서 옮겨질 것임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1절, 강해 주석과 해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표현 뒤에 나오는 말씀의 엄숙성과 중요성을 일깨우는 문장이다(10절). 예수는 지금 거듭해서 유대인의 신앙관에 일대 변혁을 이루게 될 이방인 선교에의 비전(vision)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평행구인 눅 13:29에는 좀 더 포괄적으로 ‘남동서북으로부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유대 지경 내(內) 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는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바 있는데(사 45, 6, 49:12), 본문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본문의 백부장이 이방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게 되었음을 예언자의 말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이는 전 세계 만민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신앙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뜻한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호와의 언약을 확약(definite promise)받은 당사자들로서 선민 이스라엘의 신앙의 뿌리들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세 이름들은 이스라엘의 선민 의식과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을 강조할 때에 자주 언급된다. 이어서 ‘앉다’란 말은 ‘기대어 눕는다’는 뜻으로서 식사 기간 중 거의 눕다시피 식탁에 기대어 앉는 유대인들의 식사 예법에서 비롯된 말이다. 여기서는 특별히 잔치상에 둘러 기대는 상태를 지적한 것이다. 한편 이 잔치는 메시아 왕국의 완성을 상징하는 ‘메시아 잔치’라고 명명되는데, 이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다(사 25:6-9, 65:13, 14 등). 그리고 메시아 잔치, 곧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에 앉을 수 있는 자들은 이방인인 이 백부장의 예(例)에서도 암시되었듯이, 백부장이 소유했던 그런 믿음을 소유한 자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은 천국에 들어갈 자들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인 보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세상 각처에 살고 있는 이 믿음의 소유자들은 나라가 임할 때 먼 곳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한편 ‘식탁에 앉다’란 말은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질 향연(饗宴)과 그로 인한 큰 기쁨을 상징할 때 흔히 사용된 관용적 표현이다(마 26:29, 눅 14:15 -24).
12절, 강해 주석과 해설
나라의 본 자손들은
이는 ‘그 나라의 자손들’이란 뜻으로서 그 나라를 상속하게 된 자, 즉 나라에 대한 합법적인 상속권을 가진 자를 뜻한다. 여기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유대 민족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3:9, 10), 당연히 천국에 속한 자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단순한 혈통적 순수성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없겠기에 결국 나라의 본 자손들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임을 분명히 언급하셨다.
바깥 어두운데
이는 멸망의 장소, 곧 미래에 ‘메시아의 잔치’가 배설되는 곳의 외부를 상징한다. 한편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베드로 사도는 불의한 자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다(밸후 2:17). 즉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항상 밝은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곳은 어두운 곳으로서 어두움의 권세인 사람이 지배하는 곳 내지 영영한 절망이 있는 지옥을 가리키고 있다(22:13). 결국 ‘바깥 어두운데’란 존재론적인 절대 소외와 영적인 절망 및 종말론적인 죽음과 형벌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실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빛을 내는 곳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요, 진리의 말씀이 없고 하나님의 빛이 없는 곳은 사탄이 지배하는 어두움과 죽음의 세계임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는 지옥의 장면을 더욱 생생하고 무섭게 묘사한 표현으로서(Turner), ‘운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이를 간다’는 것은 심해(深海)의 절망을 의미한다(McNeil). 이와 같은 고통과 절망은 그들을 위해 찾아온 메시아를 거절한 것에 대한 대가로서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또 제거할 수 없는 영원한 눈물과 고통인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신 11, 12절의 두 구절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구약의 사상들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은 장차 온 땅의 남동서북으로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구성된다(시 107:3, 사 43:5, 6, 49:12). (2)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사 45:6, 59:19, 말 1:11). (3) 남동서북에 있는 많은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 것이다(사 2:2, 3, 60:3-4, 미 4:1, 2, 슥 8:20 -23).
13절, 강해 주석과 해설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나병 환자를 고치실 때 주님은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지만 이번에는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란 말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다. 이 표현은 마태가 자주 사용한 말씀으로 주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9:22, 29, 15:28). 그런데 ‘믿은대로’란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른 뜻이 파생(derivation)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1) 예수는 백부장의 믿음에 비례해서 기적을 행하셨다. (2)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시지만 그 은혜는 인간편의 믿음의 양(量)에 따라 주어진다. (3) 본문의 기적은 백부장의 믿음 때문이었다. (4) 기적이 행사되면서 백부장이 믿고 있는 바병고침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2)와 (4)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그 시로
눅 7:6을 보면 예수와 백부장의 집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의 친구들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의 하인의 병이 나았던 것으로 보아 ‘그 시’란 말은 바로 그 순간, 즉 예수의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란 말씀이 떨어진 즉시 나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나병 환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며 실행이고 창조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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