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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 14절-22절,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 매일성경 강해 주석과 해설

매일성경 본문인 마태복음 8장 14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질고와 연약함과 질병을 짊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시며 인생의 고통을 짊어지심에 대한 큐티와 강해를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8장 14절-22절,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 매일성경 강해 주석과 해설



마태복음 8장 14절-22절,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14절, 강해 주석과 해설


베드로의 집에

이 당시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다(4:18-20). 그리고 요 1:44에 의하면 베드로의 고향은 빌립과 마찬가지로 벱세다였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가 벱세다에서 출생하여 결혼과 동시에 가버나움으로 이거하면서 어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가버나움과 벳세다는 서로 인접해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설사 고향이 가버나움이었다고 하더라도 베세다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8:20) 베드로의 집에 자주 들러 거기서 거처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장모가

이 말은 베드로가 결혼하였음을 분명히 나타내 주는 말이다. 훗날 그의 아내는 바울과 베드로의 전도 여행에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고전 9:5). 그리고 그의 장모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의 딸과 사위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마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도 함께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베드로의 결혼은 성직자들의 독신을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다소 희석(稀釋)시키는 사건이기도 하다.


열병으로 누운 것을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은 오늘날의 병명으로 말하자면 아마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의사인 누가는 그녀의 병을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그녀를 위하여 예수께 구했던 것으로 보아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눅 4:38, 39).


보시고

그 집에 들어서는 즉시 목격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주의에 사람들이 예수께 치유를 간청하기 전에 환자의 안타까운 사정을 목도(目睹) 하셨던 것이다.



15절, 강해 주석과 해설


그의 손을 만지시니

현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열은 어떤 질병에 대한 증상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그 당시는 열 그자체를 일종의 병으로 여겼던 것같다(요 4:52, 행 28:8). 이런 이유로 해서 유대인의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생활 방식을 구정하고 있는 랍비들의 율법인 할라카(halacha)는 열병이 있는 자들과의 접촉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3절에서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에 대신 것과 같이 여기서도 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접촉이 금지된 환자를 만짐으로써 환자가 깨끗해진 것이다.


열병이 떠나가고

마태복음에서 이 사건은 세 번째로 등장하는 예수의 기적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순간적인 치유와 더불어 오랜동안의 건강까지 선사(膳賜)하셨던 것으로 보인다(Chrysostom).


예수께 수종들더라(카이 디에코네이 아우토)

여기서 ‘수종들더라’는 말의 동사 원형은 ‘디아코네오’(시중들다, 돌보다, 섬기다)로서 본눈에서는 과거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주지하다시피 과거 미완료형이란 것은 과거 어는 한 시점을 전후해서 사건이 계속됨을 가리키는 시제로서, 본문은 ‘섬기기 시작했다’(began to serve)는 의미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자가 자신을 구원한 주님께 기꺼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구원받은 자는 그를 섬기기 보다는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16절, 강해 주석과 해설


저물매

이 사건은 막 1:32-34과 눅 4:40, 41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건으로서 안식일에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신 다음에 일어났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려온 시점은 저물 때로서, 곧 해가지고 저녁이 된 때인데, 이는 해가 지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유대인의 시간 개념과 연관이 있다. 즉 사람들은 노동이 일체 금지된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을 예수께 데리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레 23:32에는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를 철두철미 안식하였던 것이다.


귀신들린 자를 많이

성경은 육체적 질병과 뚜렷한 구별을 두고 ‘귀신들린 자’를 취급하고 있다(4:24, 12:22, 17:18). 따라서 이는 정신적 질환의 일반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경은 정신 질환의 발병 원인을 사탄의 역사로 보는 경향이 짙다(Weiss). 여하튼 예수 당시 유대 지방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지적한 바 있듯이 그 당시 유대인들은 대단히 사악하였으며 도덕적 신앙적인 면에서 불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괴상한 마술에 심취하여 악령을 부르고 또 그들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이다(Dr. Lightfoot).


말씀으로

마태는 예수의 병고치는 이적을 기록할 때 이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3,8절).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곧 능력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여기서 귀신이란 말은 헬라어로 ‘타 프뉴마타’으로서 그 문자적인 의미는 ‘영혼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는 이 말이 마귀들을 뜻하는 ‘다이모니아’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모두 거기서 ‘귀신들’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신구약 중간사의 문헌들을 조사해 보면 이 ‘타 프뉴마타’란 것은 병을 가져다 주는 사자를 지칭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보통 악한 존재로 설명한다. 한편 예수께서 귀신의 세력을 축출하시고 그 질환자의 정신을 맑게 하신 것은, 곧 예수께서 영 육을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땅에 어두움의 세력을 완벽히 몰아내고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사 11:1-5, 35:5, 6).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누가는 본 사건을 어급하면서 “귓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눅 4:41)라고 그 때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마가복음은 이 구절을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막 1:34)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다’(all, NIV)란 표현이 마가복음에서는 ‘많은’(many, NIV)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상충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 고친 것이, 곧 많이 고친 것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을 통해 마태는 예수께서 고칠수 없는 질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라는 자신감 넘치는 신앙을 은연 중에 고백하고 있다.



17절, 강해 주석과 해설


병을 짊어지셨도다

모든 병은 사탄에게서 오며 반드시 나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들은 본 절을 그 이론의 근거로 삼고 있다. 예수께서 모든 병을 다 짊어지셨으니 우리가 짊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에는 인간의 영과 육 전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병에 대한 치료도 마땅히 십자가의 은총 속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짊어지신 구주께서는 우리 병도 짊어지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병의 치료는 자동적으로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옳기도 하다. 그러나 구원에는 반드시 병의 치료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경우, 고침을 받지 못하거나 병으로 죽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용서받지 못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절망과 자포자기에 빠질 수 있다. 이 죄악 세상에는 의인에게도 고난이 많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귀중히 여기는 죽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시 116:15).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도 병과 고통 속에서 살아갔다(왕하 13:14, 딤전 5:23).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로 우리 모든 병을 짊어지시고 우리는 짊어질 필요가 없다면, 디모데의 잦은 발병(딤전 5:23)은 뭐라고 설명해야하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병을 짊어지셨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씀은 사 53:4의 인용으로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는 빠져 있다. 그런데 마태는 그 당시 흔히 통용되고 또 다른 성경 기자들이 인용할 때 자주 사용하던 70인역(LXX)이나 아람어로 된 구약 성경을 직접 인용하여 이를 번역했던 것으로 보인다(Stendahl). 다시 말해서 4번째 ‘종의 노래’인 사 52:13-53:12에 대한 70인역이나 탈굼역은 사 53:4의 이 부분을 영적인 의미로 번역하여 종으로서의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반면 마태가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히브리어 본문은 이를 영적인 의미로 보다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의미로 더욱 강조 번역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적인 연약함과 육체적인 질병을 대신 ‘담당하고’ 또 ‘짊어지셨다’고 묘사하고 있다. 즉 개역개정판 성경 사 53:4와 본 절을 비교해보면 ‘질고’는 ‘연약한 것’으로, 또 ‘슬픔’은 ‘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질고’와 ‘슬픔’은 분명히 추상적이고 영적인 의미인 것이다(사 53:4 주석 참조). 그러나 영적 육적인 고통과 슬픔의 원인은 죄에 있다는 점에서, 속죄의 교리를 담고 있는 사 53:4의 영적인 번역은 본질적으로 히브리 본문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담당하시고’(에라벤)란 위치상의 ‘이동’이나 무엇을 ‘취하다’(take up)라는 뜻이며, ‘짊어지셨다’(에바스타센)는 ‘참다’, ‘들어 올리다’, ‘고통을 참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질병이나 고통이 예수께 그대로 옮겨졌다는 의미이기보다 예수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의 질병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이는 장차 감당하실 십자가 형벌의 빛나는 열매들인 것이다.

즉 예수의 치유 능력은 단순히 어떤 병적 현상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과 해방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담당하고 짊어지는 것은 우리의 질병이 그대로 예수께로 전가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예수께서 질병과 연약함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지만 단순히 병을 환자 대신 젊어지는 방법으로 고쳐주신 일은 없었다. 그분은 환자들의 믿음을 보시고(막2:5). 먼저 죄 사함을 받아 죄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셨으며(막2:5), 그리고 “가서 다시는 지를 범치 말라”(요 5:14)고 당부하셨다. 예수 자신도 모든 것을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맡기셨다. 죽음을 앞에 두신 순간에도 그분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다.

그분은 한번도 하나님을 강제하지 않으셨으며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변경시키려고 시도하신 일도 없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당연한 권리처럼 하나님께 치료를 요구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린 순종과 회개 그리고 겸비의 태도가 병 낫기를 갈구하는 사람들과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과 병을 짊어지셨다는 것은, 우리의 질병이 모두 그에게 전가되어 우리 병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반드시 물러가야 한다는 피상적인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연약과 병의 근원이 되는 우리의 죄를 지셨다는 구속적인 의미로 이해해야한다. 즉 구속의 은혜 속에는 죄의 용서와 함께 넓은 의미의 육신의 치료도 포함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십자가가 모든 병을 치료해 주는 것처럼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본처럼 겸손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18절, 강해 주석과 해설


무리가 에워쌈을 보시고

마가는 여기에 ‘그 날 저물 때에’란 말을 명기해 놓고 있다(막 4:35). 아마 이때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신 지(14, 15절)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의 병고치는 이적을 보고는 떼를 지어 그에게로 모여들었던 것 같다. 물론 그중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무리 중에 자기도 끼워달라고 간구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에워싼 군중들을 피하여 건너편으로 떠나고자 하셨는데 이는 아마 수면을 취할 시간을 가지기도 해야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예수는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무리를 떠나 제자 훈련의 시간을 가지고자 하셨던 것 같다.


저 편으로

예수는 지금 디베랴 바다, 즉 갈릴리 바다의 북서부에 위치한 가버나움에 계신다. 그렇다면 저편이라고 하는 곳은 아마 디베랴 바다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절, 강해 주석과 해설


한 서기관이 나아와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흔히 예수의 적대자들로 등장한다. 그러나 본문의 이 서기관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해 예수를 뒤따르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마 이 사람은 어떤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였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기관이라는 직책이 백성의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호칭한 데서도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에는 서기관들을 긍정적인 양상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이 더러 있다(13:52, 23:8-10, 34). 여하튼 본문에 언급된 ‘서기관’은 끝내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은 것을 알 수 있다(21절).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R. Walker) 서기관이라는 신분상의 장애 요인 때문에 ‘나를 좇으라’는 말도 듣지 못했고 제자로도 부름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받아 들여질 수 없다. (1) 일상의 생활을 포기한 전적 헌신자만이 제자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예수를 믿고 따른 자도 제자인 것이다. (2) 21절에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또 하나’(Another man, one his disciples)가 아니라 본 절의 서기관과 연결하여 ‘제자 중에 또 하나’(Another of his disciples)라고 기록되었다. 이에 대한 헬라어 원문의 해석은 21절 주석을 참조하라. (3) 예수께로 아무 주저없이 나아왔을 뿐 아니라 예수를 ‘선생님’ 이라 부르고, 또 어디든 따르겠다는 헌신의 의지를 보인 서기관의 태도는 제자로 부름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4) 예수께서 두 번째 사람에게만 ‘너는 나를 좇으라’(21절) 한 것은 그 사람이 서기관보다 제자로 더 적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삶이 즉시 예수를 좇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결단을 촉구한 말씀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그 서기관은 분명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았음에 틀림없다.


선생님이여(디다스카레)

이는 교사 또는 가르치는 자(teacher)라는 뜻으로 서기관이 예수의 가르침에 압도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인 동시에 예수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는 그가 예수의 제자되기를 원한다는 표현이다. 특히 ‘좇으리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오’은 ‘따르다’, ‘닮다’는 뜻으로 예수를 따르는 일이, 곧 그분의 삶을 좇아가고 인격과 모습 닮기를 노력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즉 그는 절대 순복(obedience)의 자세로 예수를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언급하는 예수의 대답을 보면 예수의 제자가 되어 주를 따르는 일에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그가 인식치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고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를 따르려면 온갖 박해와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야 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20절, 강해 주석과 해설


여우도 굴이 있고 거처가 있으되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두고 예수께서 제자되길 원하는 서기관의 요청을 거절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됨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제자가 될 경우 자기 부정, 희생, 봉사, 고난 등이 뒤따름을 깨우쳐 주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굴’은 몸을 숨길만한 장소(굴)를, ‘거처’는 둥지가 아닌 단지 새가 밤을 지새울 수 있는 나뭇가지 등의 임시 처소를 의미한다(McNeile). 결국 이 말은 아주 빈약한 거주지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심지어 하찮은 짐승들 조차도 비록 엉성하나마 보금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주인이고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세계에 와서 안식처 없는 나그네,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내쫓김을 당한 방랑자가 되었다는 이 역설적인 사실을 극명하게 나타내주고 있는 구절이다.


오직 인자는

‘다윗의 아들’이란 칭호가 유대적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의 신성을 밝힌 칭호라면, ‘인자’란 칭호는 구약 선지자들에 따르면 종말에 이르러 (단 7:13, 14)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실 자로 인식되었고, 바로 이 용어를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셨다. 자칭(自稱)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모두 세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행 7:56, 계 1:13, 14:14). 이 인자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 대칭을 이루어, 사람과의 특수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칭호인 것이다(눅 22:69, 70). 특히 본문에 언급된 ‘인자’는 단순히 거처할 곳조차 없는 바로 ‘나’라는 말로도 대치시킬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인자’는 예수께서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조 하고 앞으로 당신의 당하실 고난을 묵시적(?示的)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여하튼 본문에서의 인자란 칭호를 살펴볼 때 예수께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이상과 같이 거처도 없는 가난한 삶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는 초월적 사랑을 지니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인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눅 5:24 주석을 참조하라.


머리 둘 곳이 없다

이는 머리 놓을 곳, 즉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곳에서 휴식을 취할 만한 소유나 집 조차 없을 만큼 가난하고 피곤하다는 뜻이다. 실로 이러한 절대적 가난을 통해 예수께서는 온 인류에게 충만한 안식과 풍요한 부(富)를 제공해 주신 것이다(고후 8:9).



21절, 강해 주석과 해설


제자 중에 또 하나가(헤테로스 데 톤 마데톤)

이 어구는 19절에 어급된 서기관 역시 예수의 제자에 속한 자였음을 암시해 준다. 즉 ‘또 하나’란 말의 원어 ‘헤테로스’(another)는 신약성경에서 ‘알로스’(다른 하나의, 같은 부류 내의 또 하나의)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데, 이는 분명, 앞절의 서기관 외에 또 하나의 제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제자’란 자신의 전(全) 삶을 예수께 헌신하고 다른 모든 생활을 모두 다 내팽개치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예수께 신앙을 고백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의미하는 것(요 6:66)으로 볼 수 있다(19절). 왜냐하면 제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부친을 먼저 장사(葬事)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이런 요청이 거절당하기 이전에 이미 제자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 질문을 던진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 곧 서기관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다름 한 사람 곧 제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람만이 예수의 제자였다고 단정지을 수 없으므로 둘 다 예수의 제자에 속했던 자들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주여 나로 먼저

이 두 번째 사람은 예수께로 소명받은 제자가 추구해야 할 우선 순위를 혼동하고 있었다. 그는 두 가지 욕망, 곧 예수를 따르고 싶은 열정과 자시의 의무를 등한히 하고 싶지 않은 소망 가운데서 망설이고 있었다. 실로 앞절의 서기관은 열정적이고 지나치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반면 이 삶은 매우 소심한 신앙 태도를 보였다. 진정 그는 제자의 길이 차선(次善)의 신앙으로써가 아닌 최선의 신앙으로써 상황을 초월하여 예수를 좇는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내 부친을 장사하게

당시 예수는 전도의 걸음을 재촉하고 계셨다. 그런데 이 제자는 전도보다 먼저 자신의 부친을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 연로한 아버지를 섬기다 그가 죽으면 전도의 길을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이라는 학설과 (2) 실제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잠시 가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뜻으로 보는 두 가지 학설이 대립되나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그 어떤 경우라도 전도 사업에 우선하는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즉 이 제자는 무엇이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인가를 혼동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율법의 의하면 부모에 대한 효성(孝誠)의 척도는 제 5계명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자기된 자는 반드시 자기 부모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이었다(출 20:12, 신 27:16). 물론 나이든 부모를 노후에 봉양하는 것 역시 장례에 관계된 의무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이같은 개인적 효도보다 더 우선되는 인생의 최고 급선무(急先務)는 그리스도 복음의 선교 사역이다.



22절, 강해 주석과 해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이 말씀은 제자 중 하나가 예수를 따르기 전에 먼저 부친을 장사하게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한 답으로 주어졌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부친의 장례도 치르지 말라는 말인가? 기독교는 이렇게 비윤리적인 종교인가?

그러나 기독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가지도 있으며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핑계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한 사람을 책망하신 일도 있다(마 15:1-6)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에서 실제로 죽은 자들은 죽은 자를 장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처음에 나오는 죽은 자들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죽었다는 말을 (1) 어떤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말로서 (2) 그 사물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롬 7:4), 죄에 대하여 죽었다(롬 6:11)란 말은 세상이나 율법, 죄 등이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뜻이 되며 그런 것들에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즉 ‘내일에 무관심한 자, 곧 영적으로 죽은 자들 그리고 죄안에 죽어 있어 우리와 관계없는 자들’로 하여금(엡 2:1) 죽은 자들을 돌보게 하라는 것이다. 즉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육적인 죽음을 맞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죽은 자의 장례를 맡기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아들이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겠다는 것을 막으신 것은 어떳게 이해해야 하는가? 장례는 중요한 것이고 더구나 장례에서 아들의 역할은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은,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삶에서 무엇이 우선순위인지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부친의 장례는 불신자인 친척들도 얼마든지 치룰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인 기회는 한번 지나가 버리면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예수께서 이미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셨고(마 8:18), 배는 곧 항구를 떠날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만일 예수를 따를 생각이라면 즉시 합류해야지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배가 떠나버리면 다시 찾아 합류하기란 힘들기 때문에 장례까지도 불신자인 친척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의 설명은, 예수의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신적인 명령이어서 이 세상의 어떤 돌발 상황으로도 무효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르심을 가볍게 생각하는 그 제자에게 이 사실을 깊이 인식시켜 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영적인 관계는 이 세상 어떤 관계보다도 뛰어난 것이어서 가족 관계라 할지라도 영적 관계가 우선이라는 것을 이 사람에게 가르쳐 주시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말고 나를 따르라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한 가지 가능하고 합리적인 생각은 아버지의 장사를 꼭 현재 닥친 장례식으로만 보지 않고 미래의 죽음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아버지는 중병에 걸려 있었거나 노쇠하여 죽을 날이 가까웠을 수 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죽으면 아예 다 정리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일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제자의 우유부단함을 간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마 10:37)다고 말씀하셨다. 죽은 자를 돌보는 것은 좋은 일이나 예수를 따르는 것은 이보다 더 좋고 더 영원한 일이다(Chrysostom).

이 대화를 다시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여 저에게는 연로하신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이 돌아가시어 장사를 치를 다음에야 자유롭게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다. 그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의의 결단은 시급하고 때가 있는 법이다. 그것은 때로는 가족까지도 떠나야 하는 것이다. 믿지 않는 너희 가족들이 아버지를 돌볼 수 있으니 그들에게 아버지를 맡기고, 너는 지금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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